남한의 민주주의와 경제성장 그 비약과 단계 김대중

민주주의, 비약과 단계

근대 민주주의와 비민주주의는 분명히 구분되는 기준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구분은  참정권(suffrage)의 비율이 아닙니다.

근대민주주의의 기준은 두 가지인데 하나는 선거에 의해서 국가권력이 바뀌는 것이 보장되어있나 그렇지 않나 라는 점과, 다른 기준은 다수결로도 절대로 범할 수 없는 개인의 권리가 있다는 원칙입니다. 선거에 의한 권력, 그리고 그 권력도 범접할 수 없는 개인의 기본권이라는 두 가지 원칙이 보장되어야 민주주의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국가권력이 본질적으로 그 구성원들에게서 나온다는 원칙과 또 그렇다고 해도 다수의 의견으로도 범할 수 없는 소수의 신성한 권리가 보장된다는 두 가지 원칙은 서로 다르지만 민주주의의 핵심적인 두 원칙이지요.

18 세기 말 미국에서 인류 최초로 근대민주주의의 이 두가지 원칙을 담는 성문 헌법이 제정되는데, 이 사건은 매우 중요한 사건입니다.

물론 원칙이 수립되었다고 해도 흑인노예나 여성이 민주주의의 구성원에 포함되는 것은 오랜 세월이 걸렸습니다.

근 200 년이나 걸린 셈이지요. 100% suffrage 가 보장된 현대에도 빈민계층은 사실상 거의 투표를 하지 않으니까 실제적으로는 민주주의절차에서 제외되어있다고 보는 사람도 있지요.

그런면에서 보면 민주주의는 한 번의 비약과 단계적인 확산을 통해 완성되어가는 것이라고 봐야할 것입니다.

지금 미국이나 남한 등의 민주주의 선진국에서의 핵심적인 토론은 이제, suffrage 같은 절차적 문제만이 아니라, 소위 개인의 권리를 어떻게 봐야하는가 하는 문제라고 할 수 있겠지요.

간단하게 얘기하면 국가로부터 부당한 간섭을 당하지 않을 자유 (Negative Freedom) 와 인간답게 살 권리 (Positive Freedom) 를 어디까지 규정하고 보장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지요. 제가 예전에 쓴 글에 나오는 청계천 노점상의 권리를 어느정도까지 인정하고 보장해야 하는가 라는 질문에 답을 해야하는 단계가 된 것이지요.

그런데 비민주사회에서 민주사회로 가는 일은 대단한 점프가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비민주사회에서 권력을 누리던 집단이 쉽게 그 권력을 포기하지 않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민주사회는 끊임없이 비민주적 욕망에 의해 위협을 받습니다.

남한에서도 그런 일이 벌어졌지요. 남한은 1948년 부터 1961 년까지 상당히 모범적인 민주사회를 만들어 가는 중이었습니다. 미군정이 거의 강제로 만들어 놓은 민주적 성문 헌법에 따라 사회의 질서가 움직이고 있었고, 사상표현집회결사의 자유도 상당한 정도로 보장되어있었고, 선거에 의한 권력의 교체도 얼마든지 가능했었지요.

이승만이 부정선거로 이 절차를 무시하려하자 전국민이 들고 일어나서 이승만을 하야시킨 것도 보면 남한 인민의 민주의식의 성숙성을 또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박정희는 인민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쿠데타를 통해 민주정부를 몰아내고, 헌법을 바꾸고, 종신독재의 길을 열었지요.

이 사건은 단순히 민주주의의 단계론으로 용서될 수 있는 사건이 아니지요.

왜냐하면 민주주의와 비민주주의는 앞에서 말한 두 가지 분명한 기준이 있기 때문입니다. 박정희는 더구나 선거에 의한 권력교체라는 과정만을 무시한 것이 아니라 그 이후에 사상표현의 자유라는 또 하나의 기본적인 권리를 압살합니다. 후자는 전자를 더구나 불가능하게 만드는 일이지요.

다시한번 정리하면 민주주의의 두 가지 원칙은 17 세기 말의 영국, 18 세기 말의 미국이라는 경제적으로 매우 열악한 상황에서도 얼마든지 관철될 수 있고, 사실 관철되어야만 하는 양보할 수 없는 원칙입니다.

영미를 제외한 모든 나라들은 이 원칙을 무시하고 산업화의 길을 걸었는데, 역사를 되돌이켜 보면 그 결과는 그리 좋지 못합니다. 프랑스혁명정신을 짓밟은 나폴레옹 1세과 3세의 18세기 프랑스, 구독일, 구일본, 그리고 최근에는 구소련의 경험을 보면 알 수 있지요.

남한의 경우도 박정희 이전의 1960년대와, 박정희 이후의 1980 년대 이후, 즉 절차적 민주주의가 보장된 기간이 다른 민주적 원칙에서만이 아니라, 경제성장의 내용으로 봐도 훨씬 건전합니다. 이것은 최용식선생 등 재야경제학자들이나, 고려대의 이종화 교수등 제도권의 경제학자들이 모두 동의하는 사실이고, 박정희 경제성장론은 전혀 근거가 없는 허구요 신화에 불과합니다.

제 의견을 정리하면, 민주주의는 물론 단계적으로 발전하는 것이지만, 비민주주의와 민주주의를 구분하는 분명한 기준 역시 존재하고, 경제발전을 이유로 이 분명한 기준을 무너뜨리는 것은 쉽게 용서할 수 없습니다. 역사적으로 봐도 영-미-남한의 경우를 보면 민주주의하에서의 경제발전이 수준도 높고 내용도 좋습니다.  

인도의 저발전과 민주주의에 대하여

인도의 저발전은 경제정책 자체만으로도 설명할 수 있겠지요.

이차대전 이후에 서유럽 일본 남한 대만 싱가폴 등이 사실 미국의 정책에 의해서 강제적으로 열린경제를 지향하지 않을수 없었기 때문에 고속성장이 가능했었다면, 인도나 브라질의 경우는 미국의 입김이 약해서 수입대체산업추진으로 닫힌 경제를 추구했기 때문에 저발전상태로 남은 것입니다.

인도의 사례 - 민주주의는 보장되었는데 경제발전이 더딘 역사 - 는 그 이외에도 민주주의에 대한 사고에서 상당히 좋은 교훈을 또한 우리에게 준다고 생각합니다.

이 사례를 오히려 민주주의가 경제발전의 수준에 비해 너무 많이 보장되었기 때문이라고 파악하는 이관요-박정희 식의 파악은 매우 잘못되었다고 봅니다. 그렇지 않고, 오히려 민주주의에 대한 잘못된 이해, 즉 참정권이 보장되면 끝이다라는 사고방식의 폐해였다고 봅니다.

민주주의는 개인의 기회의 평등을 또한 기본정신으로 합니다. 인도는 카스트제도 때문에 이것이 보장되어있지 않았기 때문에 참정권과 더불어서 카스트제도를 파괴하는 개혁을 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민주개혁이지요. 즉 민주국가가 서고, 카스트제도를 국가의 힘으로 파괴해서 신분적으로 평등한 사회를 만들고, 국가의 에너지를 기본교육등 민주주의의 기본 조건을 충족시키는 데에 더욱 많이 사용했어야 합니다.

다시말해 인도의 경제개발실패 사례는 민주주의의 다른 조건, 즉 신분제철폐와 교육강화라는 측면을 무시했기 때문에 참정권의 보장에도 불구하고 불완전한 민주주의, 절름발이 경제개발이 추진되었던 것입니다.

물론 경제정책 자체가 시대착오적이었기 때문에 저발전이 되었다는 것이 일차적 해석이지만, 그런 수구적 경제정책이 상당히 오래동안 계속될 수 있었던 것은 또한 민주주의 저발전 - 카스트제도의 존속과 문맹의 지속 - 때문이라고 볼 수도 있는 것입니다

남한의 경제구도

남한의 경제구도는 박정희고 뭐고 별로 중요한 인물이 아닙니다.

일본, 남한, 대만, 그리고 동남아의 경제구도는 이미 1947 년경 미국 국무성, CIA 자료들을 보면 이미 워싱턴에서 다 짜여져 있었습니다.

(브루스 커밍스의 <the origins of the korean war>, 2 권에도 이미 보면 자세히 기록이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일본을 대공산권에 대항하는 자본주의 경제의 핵심기지로 하고, 남한, 대만, 그리고 동남아를 일본 경제와 연계시키며 그 경제에 미국 시장에 대한 접근권을 보장하는 구상입니다. 2003 년 현재 일본, 남한, 대만, 동남아 경제권은 정확히 그 이상의 실현태에 불과합니다.

이승만이든 장면이든 박정희든 별로 이 기본구도를 어길 수도 없었고, 어기려고 해보지도 않은 것입니다. 사실 박정희는 이 구상에 개기려고 해보지요. 결국 수입대체산업을 추진합니다. 소위 자주국방논리와 방위산업추진이 그 산물이지요. 결국 이 사건(핵무장도모)으로, 미국의 눈 밖에 나고, 암살까지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박정희 암살뒤에 전두환정권부터는 이 자주국방노선을 포기하고, 소위 개방화, 안정화라는 미시장경제에의 편입을 더욱 가속화하는 것이고, 이것이 바로 김재익노선이고 우리 경제체질을 완전히 개선한 좋은 정책이었습니다. (최용식, 이종화교수 등의 인식도 저랑 같습니다.)

박정희와 남한 경제개발은 아무런 상관이 없고, 박정희의 공헌이 있다면 전체적으로 네거티브, 그리고 경제왜곡입니다. 참고로 아시아의 네 마리 용중, 남한경제발전이 최하위입니다. 그 이유가 박정희의 네거티브 공헌때문입니다. 반면에 박정희와는 무관하게 교육수준은 네 마리 용중 최고지요.

필리핀은 기본적으로 토지개혁에 성공하지 못해서 소농들이 자식들을 교육시킬 수 없었고, 마르코스가 박정희보다 오래 살아남아서 경제개발에서 뒤떨어진 것입니다. 또 한가지는 한반도는 일제의 내선일체 정책으로 인해 상당한 수준의 경제인프라 - 철도, 국도, 교육 - 등이 갖추어져 있었습니다. 필리핀을 지배한 스페인이나 미국과는 달리 일제는 한반도를 확실하게 일본경제에 포함시키려고 했었습니다. 그래서 이것도 출발점이 매우 다릅니다. 아무튼 필리핀은 기본적으로 아시아 네마리 용과 출발점 (initial condition) 이 다릅니다.

그래도 제 생각으로는 박정희가 망치는 속도가 상당히 빨랐기 때문에 남한도 박정희가 마르코스처럼 더 오래 살았다면 필리핀 처럼 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뉴욕대 교수 양신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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