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권을 훔친 박정희 김대중

'40대 기수들'의 도전

1970년 1월 26일 신민당 전당대회에서 유진산이 유진오의 뒤를 이어 새 당수로 뽑혔다. 그러나 그것이 곧 1971년 대선후보의 보장을 의미하는 건 아니었다.  김영삼 김대중 이철승으로 대표되는 이른바 '40대 기수들'의 도전이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다. 1970년에 김영삼은 42세, 김대중은 44세, 이철승은 47세였다.

당시 53세였던 박정희는 이른바 '40대 기수들'의 도전에 대해 '어린애들과의 싸움'이라며 폄하하면서, 타협적인 유진산이 신민당 대통령 후보가 되기를 원했다. 그래서 박 정권은 유진산에게 돈을 대주면서 정치 공작에 임했다. 1) 당시 중앙정보부장이었던 김계원은 후일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당시에는 중앙정보부의 가장 큰 일은 야당공작이었다. 그래서 골칫거리였던 김영삼 의원(원내총무)이 대통령 후보로 못 나서게 야당(신민당) 지도자 유진산 씨에게 정치자금을 여러 번에 걸쳐 몇천만 원씩 준적이 있었다. 그 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대통령께서도 공화당 김진만 의원을 통해 유씨에게 자금을 주고 있었다. 나를 완전히 믿지 않은 것 같았다." 2)

박정희는 1970년 9월 29일의 신민당 대통령후보 지명대회를 한 달 앞둔 8월 유진산을 이미지 쇄신 차원에서 해외 순방시키고, 유진산이 해외에서 돌아오자 박정희-유진산 회담을 만들어 주는 등 열심히 '지원사격'을 해 주었다. 대통령 후보 문제로 중앙정보부장이 유진산의 집을 여러 차례 드나드는 것이 목격되었으며, 김영삼 김대중 이철승 3인은 이 점을 물고 늘어졌다. 3)

유진산은 박정희처럼  '40대 기수들'을 '정치적 미성년자' 4) , '구상유취' 5)라는 표현을 쓰면서 경멸감을 내비쳤지만, 40대 기수들의 바람은 결코 스쳐 지나가는 바람이 아니었다. '40대 기수들'의 유진산 비판은 큰 호응을 얻어 유진산은 전당대회를 일주일 앞둔 9월 21일 후보 경쟁에 나서는 걸 포기하고 말았다. 박정희는 불같이 화를 내면서 중앙정보부의 무능을 질타하면서 "내가 김영삼 같은 애송이와 어떻게 싸우라는 말이냐"라고 호통을 쳤다. 6)

김영삼의 자만, 김대중의 승리

박정희의 말처럼, 40대 기수들 가운데 대통령 후보 선출 가능성이 가장 높은 사람은 김영삼이었다. 처음부터 김영삼이 제일 유리했던 데다 유진산이 지명대회를 하루 앞둔 9월 28일 김영삼을 지지한다고 발표했다. 김영삼의 당선은 기정 사실화되었다. 개표 결과를 발표하기도 전에 오전 11시경 <경향신문>은 속보를 내어 '김영삼 압승'이라는 전당대화 결과를 보도하기도 했다. 7)

김영삼은 그런 분위기를 만끽하면서 미리 축하 파티까지 준비하는 등 뚜껑을 열기도 전에 승리감에 도취되어 있었던 반면, 김대중은 전당대화 전날이 28일 밤새도록 대의원숙소를 돌아다니면서 선거운동을 했고 투표 직전까지 최선을 다했다.

9월 29일 1차 투표에서는 총투표 885표 가운데 김영삼 421표, 김대중 382표, 백지 78표, 기타 4표로 무효표가 82표가 나왔다. 누구도 과반수를 넘지 못해 다시 치러진 2차 투표에서 김대중은 이철승과 연합해 김영삼보다 48표 많은 458표를 얻어(무효 16표) 신민당 대통령 후보로 뽑히는 이변을 연출하였다. 8)

박정희를 교주로 하는 박정희교 신도의 등장

김대중의 대통령 후보 선출은 박정희에게 더욱 불쾌한 것이었다. 이 사태에 대한 책임은 중앙정보부장 김계원에게 돌아갔다. 김계원은 그 해 12월까지 일하다가 이후락에게 부장 자리를 내주었다. 김계원은 1년여 기간 중앙정보부자리를 이끌었는데, 박정희는 김계원의 '사납지 못한 일처리'에 늘 불만이었다. 정치 공작도 서툴러 박정희에게 '야당 사람들한테도 남산골 샌님 소리나 듣는다'라고 질책을 받기고 했다. 9)

반면 이후락은 후일의 역사가 말해 주듯이 '공작의 명수'인데다 박정희에 대한 충성을 위해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인물이었다. 이후락은 1년 전 대통령 비서실장을 물러나는 자리에서 눈물을 훔치며 비서팀에게 "박 대통령을 교주로 하는 박정희교를 신앙하는 기분으로 일해야 한다"라고 역설한 바 있었다. 10)

박정희를 교주로 모시는 박정희교의 신도로서 중앙정보부를 맡은 이후락에게 떨어진 최대 과제는 대통령 선거를 박정희의 승리로 이끄는 것이었다. 실제로 이후락의 활약은 승리를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이어서, 후일 다음과 같은 평가가 나오게 되었다.

"71년 대통령 선거는 분명 김대중과 중앙정보부의 대결이었다. 겉으로는 집권 공화당과 야당 신민당의 정권 경쟁이었지만 기실 줄곧 DJ와 중정의 싸움으로 전개됐다." 11)

김대중과 박정희의 유세 경쟁

'10년 세도 썩은 정치, 못살겠다 갈아 보자' , '논도 갈고 받도 갈고 대통령도 갈아 보자' .

이와 같은 선거 구호를 외치고 다닌 신민당 대통령 후보 김대중의 선거 유세는 큰 바람을 불러 일으켰다. 10만을 넘는 인파가 물려드는 건 보통이었고 서울 장충단 공원 유세는 1백만 명이나 되는 인파가 몰려들었다. 그래서 이런 일까지 생겨났다.

"이후락 정보부의 또 다른 주요 임무는 김대중 연설 청중 숫자에 관한 보도통제였다. 차장보 등은 직접 <동아일보>를 드나들며 연일 김대중의 유창한 웅변에 쏠리는 인파가 보도에 부각되지 않도록 노력했다. 그 바람에 4.27 선거를 열흘 앞두고 기자들의 불만은 폭발, '정보요원의 신문사 출입금지' . '정보부의 언론간섭 중지'를 결의하는 사태가 빚어지기도 했다." 12)

김대중의 바람에 대한 박 정권의 공개적인 대응은 색깔론이었다. 외무장관 최규하와 공화당 대변인은 '김대중 호보의 언론 체육인 남북교류, 4대국 안전보장, 예비군제 폐지 공약을 북한이 지지 표명했다고 발표했는가 하면, 국방장관 정래혁은 "예비군 폐지는 김일성 남침을 촉진 유도하는 이적 행위다"라는 성명을 발표했다. 13) 박정희도 질세라 열심히 전국 유세에 나서 그의 전국 유세는 130회를 기록했다.

이와 함께 박정희의 선심 공세도 쏟아졌다. 주한 미 대사관이 3월 30일자로 미 국무부에 보낸 보고서에 따르면, 30일 이전 한 주간에 발표된 조치들은 다음과 같다.(본인추가-이것이야말로 포퓰리즘의 표본이라고 봄)

"서울시는 시내 무허가 건물 3분의 1을 양성화한다는 조치를 발표함. 건설부는 부산 지역의 대대적인 개발계획을 공표함. 교육부는 정부 및 민간단체가 출연하는 장학기금을 조성하여 내년 가을 519명의 대학생에게 장학금을 지급하고, 75년까지는 장학금 수혜자의 수를 2535명으로 늘린다는 계획을 발표함. 농협은 3월 1일자로 소급하여 농가 부채 미상환분에 대한 연체료를 삭감해 주겠다고 발표함. 5월 5일(어린이날)까지 서울에 20개의 어린이 공원을 신설할 계획을 공표함." 14)

박정희 대선자금은 국가예산의 10%

4.27 대선은 언론이 자유롭지 못한 가운데 치러진데다 박 정권은 대규모의 부정선거를 자행하여 결국 정권을 재장악하는 데 성공하였다. 박정희는 6백34만2천8백28표(53.2%)를 얻었고, 김대중은 5백39만5천9백표(45.3%)를 얻었다. 선거가 끝나고 박정희는 94만여 표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 것에 대해 "하마터면 정권을 도둑맞을 뻔했다"고 말했지만, 정작 정권을 도둑맞은 건 김대중이었다. 

1971년 국가예산은 5천 2백 42억원이었는데, 이 선거에서 박정희는 국가예산의 10%가 넘는 600-700억을 썼다.(600억원은 김종필, 700억은 강창성의 증언) 15) 입석버스 요금이 15원, 연탄 1장 20원, 커피 50원, 정부미 80kg이 7천 원 하던 시절이었으니 16) 지금 기준을 따지면 조단위를 넘는 엄청난 돈이었다.

박 정권은 대선 자금을 위해 한국에 진출에 있는 미국계 기업들에게서 약 8백 50만 달러를 거두어 들였다. 여기엔 거대 석유기업인 칼덱스사가 제공한 4백만 달러와 걸프사가 제공한 3백만 달러가 포함되어 있었다. 17) 이들은 박정희에게 정치헌금을 내고 한국의 석유 산업을 사실상 집어삼켜 버렸다.

박정희의 대선 자금 창구는 공화당 재정위원장 김성곤이었는데, 걸프사의 사장 보브 도시는 70년대 후반에 열린 미 의회 청문회에서 자신이 대선 자금을 뜯긴 것에 대해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문제(정치헌금)를 해결하기 위해 서울에 갔다. 김성곤씨가 집으로 초대했다. 내가 평생 만나 본 인물 가운데서 아마도 가장 다루기 힏든 인물이었을 것이다. 그 날처럼 모욕을 당한 것도 처음이었다. 그는 거칠고 깐깐한 자금 모음책이었다. 그는 1000만 달러를 요구했으나 결국 300만 달러로 낙착됐다. 그 돈은 걸프 본사의 자금에서 지출된 것이지만 일단 바하마에 있는 바하마탐사(주) 회사로 돌려져 그 회사 장부에 기록했다가 한국으로 건네졌다." 18)

걸프사는 1975년 5월 16일에 열린 미 의회 프레이저 청문회에서도 "우리가 전 세계의 외국 정부에 제공한 5백만 달러에 달하는 정치자금중 80%가 한국의 공화당 정권에 지부로디었다"라고 증언했다. 19)

중앙정보부의 투표 결과 조작

앞서 지적한 바와 같이(http://tesada.egloos.com/3100767), 당시 언론은 이미 박 정권에 장악되어 있어 사실 보도를 제대로 할 수 없었다. 심층취재로 박 정권의 부정부패를 폭로한 거의 유일한 기사는 울산의 개표 부정을 다룬 대구'매일신보" 5월 1일자와 6일자 기사였다. 울산 주재기사 한종오는 자신이 개표장에서 본 것과 전혀 다른 결과가 나온 데에 의심을 품고 취재를 한 결과 울산시장이 중앙정보부의 조작을 받고 투표결과를 조작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심증을 굳힌 한종오 기자는 울산시장 집무실로 달려갔다. 비서에게 '대검에서 시장을 잡으로 수사관들이 내려오고 있다'는 거짓말을 하고 시장면담 요청을 해놓았다고 한다. 그런데 문 밖에서 기다리는 그의 귀에 시장실에서 먼가 찟는 소리가 들리고 이어 시장이 집무실의 다른 문을 통해 밖으로 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한 기자는 시장 집무실 휴지통에서 찢어진 메모지 여섯 조각을 주워 집으로 돌아와 일일이 맞추기 시작했다. 거기엔 개표 조작에 중앙정보부가 개입되었고, 박정희의 표를 82.1%로 하라는 뜻의 메모가 씌어 있었다." 20)

당시 신민당의 울산 지구당 위원장 최형우도 울산 울주 지역의 개표 결과를 보고 경악했다.

"각 투표함마다 김대중 후보 지지표가 10표를 넘지 않았다. 내가 살고 있던 우정동의 경우 집안 식구들의 것만 합쳐도 12표였고  친척들과 친구들의 것만 합쳐도 100표를 훨씬 넘었다. 그런데도 김대중 후보 지지표가 집안 식구들 숫자에도 못 미치는 7표 밖에 나오지 않는 것이었다. 개표 부정이 얼마나 심했으면 이 지경에 이를 수 있다는 말인가. 분노 이전에 수치심으로 온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21)

조선일보가 준 '이번이 마지막' 아이디어

박정흐는 4.27 대선에서 유권자들에게 '이번이 마지막 출마'라는 것을 강조하면서  '마지막'에 약한 우리 국민의 심성을 파고들어 제법 재미를 보았다. 김대중이 4월 17일 전주 유세부터 "박 정권이 종신 총통제를 획책하고 있다"라고 폭로했기 때문에 박정희는 그에 대항할 필요가 있었으리라.

그런데 그 아이디어가 조선일보에서 나왔다는게 흥미롭다. 박정희는 이미 군정 초기부터 당시 조선일보 사장 방일영의 집에 찾아가사적인 교류를 가질 만큼 조선일보와는 가까웠는데, 22) 박정희와 조선일보의 상부상조 관계는 70년대 내내 지속된다. 조선일보 회장 방우영이 자신의 자서전 "조선일보와 45년"에서 밝힌 말을 들어보자.

박 대통령의 부산 유세를 앞두고 이후락 실장이 본사를 찾아와 환담중에 '결정적 묘안이 없느냐'고 물었다. 이때 최석재 주필이 '3선만 하고는 더 이상 하지 않겠다고 국민 앞에 공약을 하라'고 말해 주었다. 그래서 박 대통령은 부산 유세에서 처음으로 '이번만 하고는 다시느 여러분께 표를 달라고 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23)(본인추가- 한입가지고 두말하는것은 박정희 특기, 60년대 쿠데타과정에서도 똑같은 일이 있었다.)

박정희가 단지 말만 한 건 아니었다. 한 편의 신파극을 연출했다. 그는 4월 24일 부산 유세에 이어 25일 서울 유세에서는 눈물가지 흘리며 "더 이상 여러분께 표를 달라고 하지 않겠다"라고 호소했다. 아닌게 아니라 그 말은 사실이었다. 김대중의 폭로 그대로 박정희는 이후 민주주의 자체를 부정하는 유신으로 국민의 투표권을 아에 박탈해 버렸으니 말이다.

신민당 당원의 습격을 받은 유진산

대통령 선거에 참관인으로 참여했던 대학생들은 선거부정을 들고 나와 5월 25일로 예정된 제8대 국회의원 선거를 거부할 것을 주장하였다. 5월 17일에는 27명의 서울대생과 고려대생들이 신민당 중앙당사에서 총선거부 결의문을 전달하고 농성을 벌이다가 그 중 7명이 구속되는 사건까지 발생했다. 전국에서 학생 데모가 벌어졌고, 전북대학에서는 지역감정을 유발하는데 앞장 섰던 국회의장 이효상을 비난하는 규탄대회가 벌어지기도 했다.

그런 와중에서 신민당 당수 유진산은 이상한 태도를 보여 이른바 '진산 파동'이 발생하게 되었다. 원래 충남 금산을 지역구로 하고 있던 유진산은 서울 영등포 갑구로 지역구를 옮겼는데, 이때에도 공화당 길재호와 묵계설 시비가 인적이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유진산이 영등포 갑구 마저 포기하고 전국구 후보 1번으로 옮긴 것이다.

당의 공식기구와 일절 협의하지 않고 유진산 혼자 그렇게 결정한데다, 영등포 갑구에는 공화당 후보로 박정희의 처조카 사위이자 청와대에서 외자 담당 수석비서관을 지낸 장덕진이 나올 예정이었다. 그리고 신민당 공천은 유진산 대신 29세의 젊은 청년 박정훈에게 돌아가 의혹을 증폭시킨 것이다. 이게 바로 '진산 파동'이 일어나게 된 배경이었다.

금품 수수설이 떠돌면서 흥분한 당원 50여 명이 유진산의 집을 습격하고 당사에 들어가 유진산의 사진을 불태우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유진산은 잠적했다가 5월 10일 당수직은 사퇴하였으나 전국구 후보는 고수하였다.

민주화 단체인 민주수호국민협의회는 5월 13일 진신 파동은 여야간에 오랫동안 누적된 비열한 암거래가 빙산의 일각으로 노출된 사례로서 야당의 존립 이유가 이처럼 부인되는 정치 풍토는 지양되어야 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박정훈은 선거 막바지에 가서 사퇴하였는데. 이떄에도 거래설이 떠도는 등 잡음이 끊이질 않았다. 24)

신민당의 '실질적 대승'

신민당의 내분으로 몸살을 앓았던 반면, 박정희는 공화당 내의 친위체제를 구축하기 위해 공천에 깊숙이 개입하였다. 박정희는 5.25총선의 공천 과정에서 지역구 공천자 88명 중 절반에 해당되는 41명을 군부 출신으로 공천하였고. 그 외에도 경호실 출신 8명, 대구 사범대학 출신 4명, 중앙정보부 출신 4명을 공천하여 친위 세력이 전체 공천자의 3분의 2를 점하였다. 25)

5.25 총선의 153개 지역구에서 공화당 86명, 신민당 65명, 국민당 1명, 민중당 1명이 당선되었다. 공화당은 52.45표%를 득표해 전국구 의석 27석, 신민당은 47.55%를 얻어 전국구 의석 24석을 얻어 전국구 의석을 합친 의석 수는 공화당 113석, 신민당 89석이 되었다.(본인추가-공화당과 중정의 엄청난 부정선거에도 불구하고 이런 결과가 나왔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공화당 현역의원 26명이 무더기로 낙선한데다 공화당은 서울의 17개 지역에서 단 1석만을 건졌고, 제7대 국회 때보다 야당의 의석이 2배로 늘어나 5.25 총선 결과는 "당시의 형편으로 미루어선 야당의 실질적인 대승"으로 간주되었다. 26) 이 선거 결과를 1년 5개월 후에 나타난 유신체제와 연계시켜 다음과 같이 해석하는 시각도 있다. 정치학자 김세종의 주장이다

"1971년 총선에서 국회의원 3분의 2의석 확보에 실패한 박정희는 헌법개정이라는 법 절차를 밟아 장기집권을 모색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게 되었다. 따라서 그는 이번에는 비상계엄의 선포 아래 새로운 헌법을 채택하는 식의 비상한 방법을 동원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고 이것이 바로 유신체제 도입의 권력정치적 배경이라고 할 수 있다." 27)

언론의 김대중 보도 통제

총선 후 박정희는 대선시 경쟁자였던 김대중이 신민당 내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게끔 김대중에 대한 탄압을 강화했다. 7월 20일 신민당 당수를 뽑는 김대중에 대한 탄압을 강화했다. 7월 20일 신민당 당수를 뽑는 전당대회를 전후로 중앙정보부는 김대중을 '잊혀진 인물'로 만들기 위해 언론을 철저히 통제했다. 이와 관련 김옥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중앙정보부는 신문사 및 TV방송국에 압력을 넣어 김대중 의원에 관한 것은 일체 보도가 되지 못하도록 엄청난 통제를 가하고 있었다. 신문사에 보도지침을 내려 '김대중에 관한 기사는 싫든 좋든 무조껀 쓰지 마라. 김대중이라는 이름 쓰지 마라. 이름만 봐도 국민드이 생각한다'고 협박을 가했다. 텔레비젼에 대한 통제는 어느 정도였냐 하면, 어느 날 김 의원이 아시아영화제에 초대받아 참석했다가 주최측의 배려로 한국 배우 옆에 앉은 적이 있었다. 그때 텔레비젼 카메라가 배우들 얼굴 비치느라고 김 의원이 잠깐 TV에 두 번 정도 얼굴이 나온 적이 있었는데 중앙정보부는 그걸 트집 잡아 '왜 얼굴이 두 번씩이나 나왔느냐?'고 방송국을 발칵 뒤집어 놓을 정도였다." 28)


출처

1) 김충식 <정치공작사령부 남산의 부장들 1>(동아일보사 1992, 181~182쪽)

2) 이호갑  <단독공개 김계원 육군교도소 접견록 : "김종필 세력을 벌초하라">(신동아 1996년 5월 270쪽에서 재인용)

3) 김충식 <정치공작사령부 남산의 부장들 1>(동아일보사 1992, 244~246쪽)

4) 김충식 <정치공작사령부 남산의 부장들 1>(동아일보사 1992, 243쪽)

5) 이영훈 <파벌로 보는 한국야당사 : 정치 파벌에 대한 심층적 분석>(에디터 2000, 105쪽)

6) 김충식 <정치공작사령부 남산의 부장들 1>(동아일보사 1992, 248쪽)

7) 김옥두 <고난의 한길에도 희망은 있다>(인동 1999, 63쪽)

8) 김충식 <정치공작사령부 남산의 부장들 1>(동아일보사 1992, 249쪽)

9) 김충식 <정치공작사령부 남산의 부장들 1>(동아일보사 1992,179~180쪽

10) 김충식 <정치공작사령부 남산의 부장들 1>(동아일보사 1992, 286쪽)

11) 김충식 <정치공작사령부 남산의 부장들 1>(동아일보사 1992, 297쪽)

12) 김충식 <정치공작사령부 남산의 부장들 1>(동아일보사 1992, 301쪽)

13) 김옥두 <고난의 한길에도 희망은 있다>(인동 1999, 76~77쪽)

14) 정리 장인철 <미 국무부 기밀해제 문서 71년 한국 대선 : 박 대통령, 정일권에 선거 손떼라>(한국일보 1997년 11월 4일, 14면

15) 김충식 <정치공작사령부 남산의 부장들 1>(동아일보사 1992, 296쪽)

16) 김충식 <정치공작사령부 남산의 부장들 1>(동아일보사 1992, 296쪽)

17) 박세길 <다시 쓰는 한국현대사 2 : 휴전에서 10.26까지>(돌베게 1989, 171쪽)

18) 김충식 <정치공작사령부 남산의 부장들 1>(동아일보사 1992, 183~184쪽에서 재인용)

19) 문명자 <내가 본 박정희와 김대중>(월간 말 1999. 212쪽)

20) 허용범 <한국언론 100대 특종>(나남 2000, 153쪽)

21) 최형우 <더 넓은 가슴으로 내일을>(깊은사랑 1993, 62쪽)

22) 이상우 <박 정권 18년 : 그 권력의 내막>(동아일보사 1986, 170쪽)

23) 방우영 <조선일보와 45년>(조선일보사 1998, 211쪽)

24) 김경재 <혁명과 우상 : 김형욱 회고록 3>(전예원 1991, 86~88쪽)

25) 한용원 <한국의 군부정치>(대왕사 1993, 313쪽)

26) 김충식 <정치공작사령부 남산의 부장들 1>(동아일보사 1992, 331쪽)

27) 김세중 <군부권위주의의 생성과 전개 : 제3.4공화국의 정치 과정에 대한 권력정치적 접근>"한홍수 편 한국정치동태론'(오름 1996, 283~284쪽)

28) 김옥두 <고난의 한길에도 희망은 있다>(인동 1999, 10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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