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컴 철학

근대의 문턱에서

 

토마스 아퀴나스가 죽은 후 15세기까지는 토미즘에 대한 반동의 시기다. 이 시기의 대표적인 학자가 둔스 스코투스와 윌리엄 오브 오캄이다. 여기서는 스코투스는 넘어가고 오컴에 대해서 간략하게 소개하도록 하겠다.

 

우리는 오컴을 말할 때, 그저 이름만 부르는 게 아니라 오컴의 면도날이라는 수사를 붙인다. 이 말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가? 면도날은 가벼우면서도 날카롭다. 힘들이지 않고 깨끗하게 깍아내린다. 그렇다면 오컴은 무엇을 어떻게 그렇게 간단히 처치하는가? 이 말은 다음과 같은 그의 말에서 비롯된다.

 

설명을 함에 있어서는 최소한 필연적인 것 이상의 것을 아무도 가정해서는 안된다
즉, 확실하지 않은 것, 분명하지 않은 것을 근거로 삼아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이 말에 부정할 이가 있겠는가?

그의 면돗날의 원리는 <근거로 들 수 있는 것은 검증할 수 있는 가설들이어야하며, 보다 단순하며 보다 덜 까다로운 것을 선택해야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에 대한 명제는 어떠한가? 그것은 단지 믿어질 수는 있지만, 증명된 명제는 아니다. 하나님의 문제는 신앙인들에게 설득력이 있을 뿐이다. 세계가 비록 우연적인 것이고 우연적인 세계가 필연적인 세계에 의존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어떻게 하나님인지 알 것인가? 또 설사 그 존재가 하나님이라고 하더라도 하나님이 기독교 신앙에서 말하는 속성들을 가지고 있는지 어떤지를 알 수가 없다. 하나님의 의지는 이성에 의해서 알 수 없는 것이다.

 

도덕적 원리들에 대해서도 오캄은 주의주의적이다. 하나님의 율법에 도둑질과 간음을 금하는 내용이 있는데, 그것이 합리적이어서 그렇게 정해진 것이 아니라, 단지 하나님의 의지에 의해서 그렇게 정해진 것이다. 만일에 하나님의 의지가 그것을 좋은 것으로 정한다면 도둑질과 간음은 좋은 것이 될 수도 있다는 말이다. 즉 옳고 그름은 하나님의 무제한한 의지를 따라 생긴 것이다. 그러므로 신학은 이성에 의해서 증거되거나 보완되는 것이 아니라, 단지 계시에 의해 가능한 학문이다. 신학적 진리는 이성에 의해서는 확립할 수 없고, 이성에 의한 하나님의 논증은 전혀 만족할 수 없는 것들이다.

 

오컴은 극단적인 유명론을 옹호하였다.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오로지 개별자일 뿐이다고 말한다. 그는 보편자가 하나님의 정신속에 있지도 않으며, 사물 들 속에 있지도 않다고 한다. 보편자들은 오로지 사물들이 있은 뒤에 관념으로서 정신 속에 있을 따름이다.

그것은 사물들의 기호이며, 그것도 정확한 것은 아니며, 불확실한 기호일 뿐이다. 정확하고 전적으로 명석한 관념은 단일적인 대상의 기호이다. 관념이 보편적이 될수록 지시하는 대상은 더욱 많아진다. 예를 들어 우리가 책상이라고 말해보자. 도대체 어떤 책상을 말하는가? 강의실의 책상? 공부방의 책상? 회의석상에서의 책상? 또 꽃이라고 말해보자. 우리는 결국 꽃이나 책상이라는 개념이 무언가를 정확히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다른 것이 될 수 없는 한계선을 정하는 것일 뿐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이렇게 되면 우리는 오캄이 구별한 두 종류의 명제를 확인하게 된다.
1)구체적인 사물들에 대한 명제와(자연과학)
2)보편적 관념들간의 관계에 관한 명제이다.(논리학)

이 명제들로부터 자연과학과 논리학은 구별된다. 오컴은 구체적인 사물들을 직접 관찰함으로써 알 수 있다고 말하는데, 오컴은 직접 관찰을 직관적 인식이라고 표현한다. 자연과학은 이러한 명제들로 되어 있다. 예를 들자면 소크라테스는 백인종이고 그 사람은 동물이다라고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보편적 관념들에 관한 명제는 직접적으로 관찰된 사물을 문제삼는 것이 아니며, 또 진리에 관심이 있는 것도 아니다. 흑색은 백색이 아니요, 대머리는 머리터럭이 없는 것이다:라고 하는 명제가 이런 종류의 명제들이다. 이것은 흑색과 백색, 대머리와 머리터럭이라고 하는 관념들간의 필연적 관계를 검토한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사물들과는 아무 상관없이 검토함으로써 이런 명제들이 어떤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논리학은 진리를 문제삼는 것이 아니라 타당성을 문제 삼는 것이다.

 

오컴은 자연 과학과 논리학 사이를 구별함으로써 예상치 못한 결과를 초래하였다. 스콜라철학자들은 자신들은 논리학의 여러 가지 문제에 열중한 반면, 자연과학은 그 방면의 전문가들과 세속인들에게 맡겼다. 논리학이 구체적인 사물들에 무관심하였기 때문에 그들의 이론들은 쓸데없는 변론으로 퇴보하였고, 근대철학자들이 비판하였던 무익한 논리 유희로 타락하는 듯했다. 다시 말해 말기의 스콜라철학자들의 이러한 선택은 스콜라철학의 풍부한 내용을 묻히게 하였다. 스콜라철학은 하나님의 세계에 관심을 가졌고, 진리 탐구의 도구로서 인간의 이성을 완전한 것으로 보았다는 것, 그러나 그 도구를 통해 모든 것을 대해서 알 수는 없다는 것을 확인하게 되었을 때 중세철학은 몰락하게 되는 것이다.

중세까지를 우리는 철학적 주제에서 살펴볼 때 <형이상학>이라 한다.

그렇다면 형이상학이란 무엇인가?
형이상학은 세계의 본성과 세계 속에서의 인간의 위치에 관한 근본적인 물음을 연구하는 철학분야다. 형이상학에 대한 이 정의는 또한 철학 자체의 정의이기도 하다. 또한 형이상학은 존재와 실존에 대한 정의이다.

형이상학이라는 용어가 사용된 것은 다음의 유래를 가진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을 모으는 과정에서 자연학이란 제목이 붙은 논문 다음에 아리스토텔레스가 제일철학 또는 신학이라고 부르던 주제를 다룬 강의록을 삽입하고 , 그 제목은 ta meta physiks라고 명명한데서 metaphysics라는 명칭이 유래한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제일철학은 존재를 탐구하고, 특수과학은 존재의 특정한 부분을 취급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동물학은 동물들을 취급하고,  정치학은 정치를 다룬다. 즉 제일철학은 존재의 어떤 특수한 다양성에 대해서도 근본적인 관련을 맺지 않고 존재일반을 다루는 것이다.

 

존재의 종류
1)변하는 것: 일시적인 것, 그래서 자연철학의 주제.
2)변하지 않는 것: 신학, 플라톤의 이데아(생성과 소멸을 겪는 감각 경험의 세계는 그림자)

그러나 현대의 형이상학은 변화, 과정, 전이가 일차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사물의 영속적이고 고정적인 면은 파생적이고 이차적이며 덜 근본적인 것으로 간주된다. 현대과학은 기본적인 물리적 실재가 영구적인 물질의 정적인 조각들이 아니라, 전기적인 동요상태, 즉 동적인 과정이라는 것을 발견했다. 이 발견은 궁극적인 단위가 실체라기보다는 사건이라는 과정철학자들의 확신을 강화시켜주었다. 그래서 이들은 사물이 아니라 사건이 참으로 실재한다고 주장한다.

 

<본질과 실존>
사람이란 무엇인가? 와 사람은 실존한다는 것은 같은 문제인가? 이것이 다르다면, 본질과 실존은 구별된다.

본질이란 한 사물이 무엇인가? 다시 말해 한 사물의 본성이나 정의 또는 기술을 뜻한다.
실존은 한 사물이 존재하는가?에 관한 문제이다. 실존은 현실적인 것이다. 본질은 우리가 그것을 자세히 기술할 수 있다 하더라도 현실적인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미란다가 누구인가?라고 물었을 때 그녀는 외딴 마술의 섬에서 아버지 푸로스페로와 함께 살다가 바닷물에 밀려 그 섬에 오게 된 젊은이를 만난 푸로스페로의 딸이라고 말함으로써 대답될 수 있다. 미란다는 기술될 수 있으므로 본질이지만, 현실성이 없으므로 실존은 아니다. 그러나 강의를 듣는 여러분은 실존이면서 본질이다. 서울은 본질과 실존을 겸한다. 그것은 서울이 가능적이면서도 동시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어떤 사물이 존재하지 않게 되었을 때 우리는 그 사물이 실존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의 본질이나 특성에 대해서는 이야기할 수 있다. 아틀란티스라는 대륙을 생각해보자. 한때 실존했을지는 모르나, 지금은 단지 본질일 뿐이다. 전통적 형이상학에서는 본질과 실존의 구별이 신의 존재에 대한 소위 존재론적 논증과 관련된 문제를 일으켰다. 예를 들자면 안셀무스와 가우닐로와의 논쟁이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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