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지 근대화론에 대한 비판적 성찰 (2) 역사

2. ‘조선 특수성’론과 조선 식민지배의 실제 (전 상숙)

 

식민지시기 조선 산업화, 공업화의 구조적 특질을 총독정치의 주요정책과 일본정치와의 정치적 역학관계 속에서 정책사, 정치사적 관점에서 고찰함으로써 이른바 ‘조선특수성’, ‘특수사정’론의 연원과 조선총독 지배권의 ‘상대적 자율성’의 정치적 의미를 규명하고 그 실상을 현상적 공업화의 실상과 정신적 동원의 양 측면에서 고찰해 그 특질을 논하고자 한다. 

 

‘조선 특수성’ ‘특수사정’론의 연원과 의미

 

1930년대 조선총독부는 일본의 전시 경제통제가 강화되는 가운데서도 ‘조선 특수성’, ‘특수사정론’을 강조해 조선 독자의 ‘통제’ ‘산업개발 정책’을 추진했다.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조선을 식민지화한 ‘분명한’ 목적에 의거하여 규정된 천황에 직예한 조선총독의 ‘특별한’ 지위 때문이었다.(1) 또한 정세변화로 일본정부의 대륙정책이 만몽 개발정책으로 바뀌었어도 추밀원은 “조선과 대만은 제국의 판도에 속한 경로 면에서 또 민중의 감정 면에서 분명히 그 궤적이 같지 않다. 따라서 양 총독이 지위에 자연히 차별을 두게 된 것은 통치상 빠질 수 없는 요체이다”라 하여 재래 번벌세력에 의해 러일전쟁 이래 확립한 육군벌 선만 일체화 대륙정책의 핵심으로 조선에서의 이해를 확보해 이를 기반으로 조선과 만주의 일체화를 강화해 대륙으로 나아가는 것이었다.(2) 

‘조선 특수사정’, ‘조선 특수성’은 1919년 당시는 조선 중심의 선만 일체화 대륙정책을 추진하기 위한 조선 총독의 전제적 권한을 의미하는 것이었으며 1929년 그것은 일본에 비해서 현저히 낙후된 조선산업의 특수사정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거기에 조선 총독정치의 자율성을 의미하는 조선총독의 조선지배의 전권 주장이 관철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1942년 일본정부가 ‘내외지 행정 일원화’를 추진할 때에도 종래 식민지 행정기구의 통합에 반대하던 조선총독부는 주요 이유로 강조한 것이 “총독의 통치책임 완수상 조선에서 총독의 종합행정은 바꾸기 어렵다”는 것으로 “총독정치제를 존치하는 이상” “부분적인 권한 이양과 같은 것은” “고려할 수 없는 사항”이라는 것이었다. 즉, 조선식민지를 안정화시키기 위해서 총독의 절대권력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3) 

무관총독이 ‘조선의 특수사정’, ‘특수성’을 강조해 일본정부의 통제에 대해서 정치적 견제력을 가지며 일본의 정치변동에도 불구하고 조선 총독정치의 상대적 자율성을 견지한 것은 일제의 조선 지배정책과 관련해 두 가지 의미를 갖는다. 하나는 조선이 러시아를 견제하며 북으로 향하는 육군 대륙정책의 보루라고 하는 조선병합의 기본목적에 견지된 것으로 조선이 육군군부의 지배영역이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조선 총독정치는 민정보다 군사가 우선하는 강력한 통치치제를 구축한 것이었다. 다른 하나는 조선총독의 정치적 자율성을 협상력으로 한 독자적 조선개발 정책을 추진함으로써 군사우위의 조선 통제체제는 위로부터의 산업화 정책을 성공적으로 완수하기 위해 일층 강화될 수밖에 없었다. 총독 자신뿐만 아니라 식민지 조선의 실질적 역량증대를 결과로서 드러내 입증해 일본의 대외정책에서 인정받아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총독부에 의한 인적, 물적 동원을 위한 강제가 일본정부에 앞서 실행되지 않을 수 없었다.

  

‘조선 특수성’론과 조선 공업화의 실상 : 조선 총독부의 독점 본위 ‘관치통제’

 

 일본해 중심론에 입각한 일선만 블록론에서 조선은 정공업지대 일본과 농업, 원료 공급지로서의 만주사이의 핵심적 연결고리인 조공업지대로 설정되었다. 조공업지대로서의 조선의 의미는 정치적 야심을 갖고 있던 우카키 총독이 일본 중앙정계로부터 물러나 있는 상황에서 더욱 긴요한 정치적 의미를 가졌기에 농촌진흥운동(농촌의 계급적 모순과 계급투쟁을 완화하고 사회주의의 침투를 차단해 안정적 토대를 확립하기위한)과 함께 실시된 우카키의 조선 산업개발, 공업화는 조선지배의 안정성을 도모하면서 동시에 일제의 자본주의적 팽창요구에 적합한 방식으로 기획, 시행되었다. 

조선의 공업화는 조선총독부의 ‘관치’아래 일본 독점자본을 중심으로 “일본 산업자본의 중요성에서 수레의 두 바퀴와 같이” 중요한 “국민생활의 필수품”으로 일본의 국제수지 개선에 이바지하고 유사시 “중요한 군수용품”으로도 활용될 수 있는 면화, 양모, 등 섬유공업과 근대적 산업개발의 동력을 제공하는 전기산업 및 그에 기초한 전기화학공업과 같은 군수공업 사업을 중심으로 실행되었다.(4) 이러한 우카키 총독기 조선 공업화정책은 ‘조선 특수사정’, ‘조선 특수성’을 강조해 중요산업통제법의 적용을 회피하여 일본 자본가들에게 대 조선 투자를 통해 자본을 확대할 기회를 제공(5)했을 뿐만 아니라 공장법의 적용을 받지 않는 조선에서 저렴한 노동력을 자의적으로 착취해 이윤의 극대화를 도모할 수 있게(6) 솔선해서 일본자본의 독점과 독점강화를 위한 조건을 조성하고 이를 보장한 것이었다. 

‘자본가 우대정책’의 핵심은 저금리 정책과 저가의 전력공급정책이라 할 수 있는데 먼저 조선은행의 대출표준금리를 보면 1931년 말과 1932년 초를 정점으로 1930년대 동안 급속히 저락하였다. 이것은 광범위한 저축자(조선인)의 희생 위에서 일본 독점자본 중심의 기업 일반에 양질의 자금(저금리 자금)이 제공되고 공채가 발행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7) 또한 조선총독부는 1931년 ‘발전계획 및 송전망 계획’을 세워 전력소비량의 80% 이상을 공업용으로 전환할 계획을 수립해 일본자본의 유치를 촉진하고자 했다.(8)  

주지하듯이 자본, 기술, 원료와 함께 동력은 공업발전의 기초조건이다. 우카키는 전력을 동력 및 원료로 개발해 중화학공업을 일으키고자 했으므로 저렴한 전기동력의 확보를 조선 공업화의 첫 번째 관건으로 매우 중시해(9) 단기간에 부전강 댐을 건설한 일질(日窒)에게 미쓰비시가 갖고 있던 장진강 수리권을 확보할 수 있도록 했다. 당초 조선총독부가 맡을 계획이었던 송전부분도 재정관계상 실시되지 못하고 일질계 조선송전회사가 설립되어 담당하여 전원의 개발뿐만 아니라 송전부문에서도 일본 독점자본이 장악하게 되었고 전기를 토대로 하는 전기화학공업을 중심으로 조선에서 성장한 일질은 최대 전력 생산자이자 최대 소비자가 되었다.(10) 이러한 현상은 1941년 태평양 전쟁으로 전쟁이 장기화, 확대되는 가운데 이른바 ‘고도 국방국가 체제’를 구축하기 위한 전략물질의 확보라는 차원에서 전개되어 더욱 강력한 경제통제와 동원을 동반했다. 

공업화 과정에서 조선에 많은 회사와 공장이 출현했지만 일질, 동척, 미쓰비시, 닛테츠, 미쓰이, 카네보, 식산은행 등이 조선 전체 일본인 기업자산의 2/3를 차지하고 나머지 14개 자본계통까지 합하면 77.7%를 차지해 일본 대자본 계열이 조선산업을 장악하고 있었다. 이러한 소수 일본자본에 의한 조선 공업화는 노동 강도가 높은 자본집약적 생산기술을 활용하여 독과점적 시장구조를 형성하는 한편으로 생산과정에 있어서 일부 원료조달 부문을 제외하고는 특히 조선인 자본과 연관관계가 없는 자기완결적 생산 소비구조를 가지고 있어 이들 업종의 생산액의 비약적 증대가 조선 공업생산액의 급증과 공업구조가 고도화된 것 같은 현상을 보여주지만 이들 일본인 대공업과 조선공업 사이에는 직접적인 연관관계가 없었다.(11) 각종 거시적 총계자료에 나타나는 조선 광공업의 발달은 소수 일본인 거대자본계통의 성장사와 다름없었다. 

 

‘국민정신’ 동원 지배이데올로기와 ‘조선 특수성’

 

 우카키가 조선에 부임하기에 앞서 구상한 조선지배의 기본방향은 천황을 알현한 자리에서 강조한 두 가지였다. “조선인에게 적당한 빵을 주는 것”과 “내지인과 조선인을 융합시키는 것”이었다.(12) 전자는 농공병진정책으로 후자는 ‘내선융화’슬로건으로 민중의 ‘비협력’이라는 벽을 깨지 않고는 절대 조선지배를 안정시킬 수 없다는 위기감에서 형성된 것이다.(13) 조선의 갱생을 통해서 모국의 약점을 보정하고 모국의 위난을 구제해 모국의 진운에 공헌하려는(14) 분명한 목적에 입각한 것이다. 그러므로 지배정책의 성과를 효율적으로 극대화하기 위해서 그것이 조선인의 희생이나 자원의 수탈 위에서 추진되는 것이 아니라는 인상을 주기 위한 정신적, 이데올로기적 조작과 통제가 수반되지 않을 수 없었다.(15) 그것이 곧 ‘내선융화’, 조선인과 일본인의 “사상의 융합”은 조선인이 조선인으로서의 민족의식을 탈각시키고 “일본인이 되는 것”이었다. 

조선총독부의 ‘국민정신’ 동원 이데올로기 정책은 조선 공업화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미나미 총독기 중일전쟁을 계기로 일층 확대 강화되어 ‘내선일체’를 제창했다. 그것은 우카키의 내선융화론과 궤를 같이하는 것으로 물자 총동원을 위한 병참기지 정책의 이데올로기이자 조선을 전시 총동원 체제의 총후로 동원하기 위한 국민정신 총동원의 황민화 이데올로기였다.(16) 총독부는 조선인은 아직 국민적 교화단결이 불충분한 ‘특수사정’이 있어 그러한 실정에 맞는 운동체계를 수립해 지도 육성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 1940년 9월11일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연맹 조직을 행정면과 합체하는 전국적 통일체체로 정비했다.(17) 이것은 본국의 신체제운동에 호응하나 조선 “독자의 입장”에서 조선연맹을 국민총력운동으로 “전진적으로 개조‘해 조선의 신체제를 구축한 것이었다.(18) 

본국에서 1942년 4월 ’익찬체제‘가 수립되기에 앞서 조선총독이 솔선해서 본국보다 강력하고 일원적인 행정체계를 구축한 조선의 신체제는 일본과는 달리 정치운동을 포함하지 않는 “어디까지나 행정과 일체의 관계에 있는 정신적 실천단체”였다.(19) 총독부는 조선인의 인적, 물적자원 동원에 대한 권리나 정치적 발언권은 인정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20) 이와 같이 총독부가 강조한 ‘내선일체’는 일본인과 같은 ‘국민’으로서의 권리를 요구하는 조선인에 대하여 ‘조선 특수사정’을 논하며 내선일체의 목적인 황국신민화의 증거, 곧 조선인의 일본 ‘국민’으로서의 책임과 충실한 의무수행을 전제로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내선일체’를 표방하며 강조한 실질적인 조선인의 ‘일본국민화’시책은 실시되지 않았다. 1938년 4월 지원병제도, 1939년 조선민사령의 일부를 개정해 1940년 2월부터 시행한 창씨제도, 그리고 ‘국어’(일본어)보급시책 등을 실시했지만 그 것은 모두 전쟁의 장기화에 따른 일제의 필요에 의한 것이었을 뿐이었다. 일본인과 동일한 ‘일본국민’으로서의 권리는 제도적으로 보장하는 기초인 참정권은 결국 조선인에게는 주어지지 않았다.

 

 

참   고  :   식민지 근대화론에 대한 비판적 성찰.

발행처  :   (주) 나남.

 

(같은 제목의 책 내용 일부를 요약하여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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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신상준, 1973, “한일병합에 따른 조선종독부의 설치와 조선총독의 지위 및 권한에 관한 행정사적 연구” <청주여자사범대학 논문집> ; 이승렬,1994, “역대 조선총독과 일본군벌” <역사비평> 24호; 전상숙,2006, 앞의 논문 참조.


(2)北岡伸一, 1978, <추밀원회의의사록>pp,262~73.


(3)“제79회제국의회설명자료”, <조선총독부제국의회설명자료>, 제7권, 부이출판,1994,pp35~36.


(4)餅田澤一郞, 1937년, <宇垣一成日記>, 2 1937,pp,373~85, 408~13.


(5)일본에서는 1931년 4월부터 중요산업통제법이 발효되어 실질적 경제통제가 시행되고 있었다.


(6)일본에서는 노동자 보호시설로 1916년 9월부터 공장법과 부로역부조 규칙을 실시해 유년자의 사역을 제한하고 업무상 부상 및 질병, 사망에 대해서 본인 또는 유족에게 일정한 부조금을 지급하도록 했다. 그밖에 1927년 1월에는 건강보험법을 실시하고 1932년 1월에는 노동자재해부조법을 실시해 노동자를 보호하기 위한 조치가 시행되었지만 조선에서는 당시까지 이들 법령이 실시되지 않고 있었다.(조선총독부, 1935, <시정25년사>, p951).


(7)허수열, 1983, “일제하 한국에 있어서 식민지적 공업의 성격에 관한 일연구”, 서울대 경제학과 박사학위논문, p34, '표 5‘, pp119~21, '표 32’ 참조.


(8)河合和男, 1985, 제국지방행정학회조선본부, pp,35~39.


(9)宇垣一成, 1934,10, “조선의 장래”, <조선>, 제233호, p,22


(10)동양경제신보사, 1943, <조선산업의 결전재편성>, p,37, 172.


(11)허수열, 2005, <개발 없는 개발: 일제하 조선경제 개발의 현상과 본질>, 은행나무, pp184~86.


(12)<宇垣一成日記>, 2, 1931,7,2.


(13)宮田節子, <역사학연구> 제297호, p,26.


(14)<宇垣一成日記>, 2, 1936, 6,23.


(15)<宇垣一成日記>, 2, 1934, 2, 20.


(16)조선총독부, 1938, <조선총독부 시국대책조사회 자문답신서>,pp205~206.


(17)국민총력조선연맹 편, 1945, <일제하 전시체제기 정책사료총서>, 제49권,p,495.


(18)국민총력조선연맹 편, 1945, 앞의 책, p,497.


(19)국민총력조선연맹 편, 1945, 앞의 책, pp, 473~74.


(20)전상숙, 2005, “일제 파시즘기 사상통제정책과 전향” <한국정칙회보> 39집, 3호,pp,63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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