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의 호남차별에 대해서 [부제-호남에 세워진 공장의 소유자조차도 영남사람] 지역주의

이상우는 60년대 박정희의 호남차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박 정권 10년간 정부는 대일청구권 자금을 포함하여 도합 26억 달러의 외국차관을 들여와, 이 자금으로 영남 지방에다 울산공업단지를 비롯한 대소 산업지대를 형성했으나 호남 지역에는 단 하나의 공업단지도 건설하지 않았다. 이 동안에 호남지대에 세워진 공장은 여수의 호남정유와 호남화력발전소, 그리고 광주의 아세아자동차 공장 등 3개뿐이었다. 이 3개 공장마저도 소유주는 영남 사람이었다. 언필칭 농업지대라고 하여 산업공장보다 농업투자를 우선해야 한다고 설명했으면서도 전북 지역에는 비료공장 하나, 농기구공장 하나 제대로 건설하지 않았다." 1) 

"공업은 영남, 농업은 호남"이라는 구도 때문이었을까? 그것도 아니었다. 박정희 정권은 농업 생산의 기본이 되는 수리 시설마저도 영남에 더 투자했다.  68년 현재 시설사업이 완성된 수리조합아 영남에는 72개, 호남에는 23개였다. 67년 한발이 매우 심각했고, 특히 호남지방의 한발이 가장 심했는데, 양수기 배정은 영남 6 호남 1의 비율로 이루어 졌다." 2)

그렇다면 철도는 어떠했던가?

박정희는 1967년 6대 대통령 선거 때 호남 푸대접을 들고 나온 호남인들의 불만을 무마하기 위해 호남선 복선화를 공약했다. 그러나 이것은 착공만 했을 뿐 실제 공사는 조금도 진척이 없었다.(본인추가--경부고속도로는 3년만에 뚝딱 했으면서) 1978년 3월 30일 겨우 대전~이리(익산)간 복선이 개통되었을 뿐이고, 이 문제는 90년대까지도 국회에서 논란이 되었다. 3)

[관련자료 펌]

1인당 GRDP 1985년 통계 단위는 만원 자료는 국가통계포탈

수도권 245(104.25)
영남    235(100.00)
호남    166(70.63)
충청    198(84.25)
강원    206(87.65)

1인당 GRDP 1993년 통계 단위 만원 자료는 국가통계포탈

수도권 757(111.17)
영남    680(100.00)
호남    585(86.02)
충청    663(97.50)
강원    607(89.26)

2002년 16개 시·도별 지역내총생산 및 지출(행정데이타베이스논문참고)

수도권 1247.7 (100.61)
호남    1098.3 ( 88.56)
영남    1240.2 (100.00)
충청    1283.0 (103.46)
강원    959.4 ( 77.36)

대구가 1인당 grdp에서 꼴찌라는 것조차도 통계상의 맹점일 뿐이구요.(해당 논문에서도 부산, 대구, 광주, 대전 등 대도시에 거주하는 주민이 경남, 경북, 전남, 충남 등 인근지역에 있는 사업체에 출․퇴근 할 경우 지역내총생산이 사업체 소재 지역으로 파악되어 대도시의 1인당 지역내총생산은 낮게 나타나게 된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1인당 GRDP 2008년 통계 단위는 만원 자료는 국가통계포탈

수도권  2071(93.54)
영남    2214(100.00)
호남    2081(93.99)
충청    2261(102.12)
강원    1795(81.07)

그 결과 인구이동은 어떠한 변화가 있었을까?

"5.16 전해인 60년 말, 영남이 인구는 8백19만4천 명이었는데 10.26 다음 해인 80년에는 1천1백42만9천 명이 되었다. 그 동안에 3백 23만 5천 명의 인구가 늘어난 것이었다.  이에 비해 호남의 인구는 60년 말 5백94만8천 명에서 80년 6백6만5천 명이 되었다.  20년 동안에 11만 7천명 밖에 늘지 않은 숫자였다. 60년 말 한국의 총인구는 2천4백98만 명이었다. 그것이 80년에는 3천7백42만 명이 되어 그동안 약 50%의 인구증가를 보였다. 이 증가율을 호남에 적용한다면 80년의 호남 인구는 약 9백만 명이 되어야 한다는 계산이 나온다. 박정희 통치 20년 동안 호남인구는 거의 제자리 걸음을 하고 있었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인가. 자연 증가분에 해당하는 약 3백만 명은 어디로 갔는가? 그 동안 서울의 인구는 2백44만4천 명에서 8백 33만 명으로 늘어났다. 50%의 자연 증가분을 감안하면, 약 4백70만 명이 외지에서 서울로 이주했다는 계산이 나온다. 이 가운데 반 이상이 호남 사람이 아니었을까." 4)

[관련 자료 펌]

일단, 한 지역의 인구 비율이 줄어든다는 것은 그 지역 사람들이 애를 안 낳거나 (가능성은 없지만) 그 지역이 살기 힘들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1949 --> 1960 --> 2000

625직전의 1949년과 박정희 쿠데타 직전의 1960년, 그리고 가장 최근의 인구총조사인 2000의 자료를 비교해보겠습니다.

                1949년                          1960년                      2000년
수도권: 4,186,613 (20.7%) -> 5,194,167 (20.8%) -> 20,767,784 (46.4%)
호남:    5,092,927 (25.2%) -> 5,948,265 (23.8%) ->  5,066,481 (11.3%)
영남:    6,341,030 (31.4%) -> 8,030,466 (32.1%) -> 12,449,418 (27.8%)
충청:    3,174,697 (15.7%) -> 3,897,913 (15.6%) ->  4,496,463 (10.1%)

영남이 32.1 -> 27.8로 약간의 인구비만 준데 비하여,
호남은 23.8 -> 11.3으로 40년만에 반토막으로 줄었습니다.

더 놀라운 것은 인구 수 자체가 줄었다는 것입니다.
1960년에서 2000년까지 90만명이나 사라졌습니다.
충청도 인구는 늘었습니다.

이것은 최소한 영남은 인구수에서 꾸준히 증가함으로써 자체 유지가 되고 있지만 호남은 절대수 인구가 줄 정도로 자체 유지가 안되고 있음을 말해줍니다.(자연증가율도 안된다는 것입니다.) 충청조차도 자연증가율 정도의 자체유지가 되고 있습니다

'시장논리'로 정착된 호남차별

먹고살 길이 없어 고향을 떠나 서울로 이주한 사람들은 이른바 서울의 '달동네'로 몰려들었다. 1979년 발표된 서울시의 <저소득 시미의 생활 실태에 관한 기초조사>에 따르면, 서울시 영세민의 출신 지역별 분포는 호남권 28.3% 충청권 17.3% 서울 14.2% 영남 11.6% 경기 11.1% 강원 4.7% 제주 0.3% 등이었다.

이농 및 서울로 이주한 것에 있어서 호남인과 영남인 사이엔 차이가 있었다. "영남의 경우 농촌 퇴출 인구의 대부분은 영남 지역의 산업부분과 도시로 흡수했으며, 서울로 이주한 영남 출신의 상당 부분은 대학 진학, 관료 진출, 사업가의 형태를 띤 엘리트나 중산층으로서의 이주였"던 것이다. 5)

이러한 이농과 이주로 인해 형성된 반호남주의에 대해 박상훈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당시 저소득층이 밀접해 있는 서울의 빈민가는 비교적 가까운 거리에 있는 공장에 다니는 불안정한 저임금 노동자, 일용직 노동자, 전통적 상업과 서비스 부분 종사자, 그 밖의 다수의 실업 상태에 있는 빈민 등 공식 부문과 비공식 부문을 유동하는 인구가 뒤섞여 경쟁하느 공간이었다. 그리고 이들 대부분은 타지역으로부터 이주한 지 오래 되지 않은 사람들로서 각자의 사회적 관계와 정체성이 사투리를 상징으로 하는 출신지역으로 분리되는 경향을 강하게 띄었다. 이때 도시의 저소득층 이주자들 사이에 호남권 출신이 다수를 점하는 사실과, 고용주와 피고용인 수혜자와 피수혜자의 관계를 맺는 데 있어 호남 출신이 피고용자의 위치에 설 가능성이 높았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한 효과를 발휘했다. 한편으로는 그러한 사실은 정착과 고용을 위해 경쟁하고 계층의 상승 이동을 열망하는 비호남 출신들의 반호남 의식을 자극하는 객관적 기초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피고용자간이 갈등에서 고용주가 그 원인을 호남의 지역성으로 치환시키는 것을 용이하게 했기 때문이다. 산업화의 초기 단계이자 급격한 도시화의 물결 속에 있었던 당시로서는 두번째 측면보다 첫번째 측면이 반호남주의를 자극하는 보다 중요한 계기였다고 할 수 있다. 도시의 과잉인구를 구성하고 있는 이들 하층계급들사이에 정착과 고용을 둘러싼 생존경쟁이 훨씬 강렬할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6)

박정희는 왜 이렇게 호남을 차별했던 것일까? 어떤 이들은 자신의 정치적 경쟁자인 김대중 때문에 차별했다고도 하지만, 박정희의 호남 차별은 이미 60년대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에 그건 설득력이 약하다.

박정희 자신의 편견과 이것저것 따지지 않고 가장 빠른 길로만 치닫기 마련인 군사작전식 경제개발이 주된 이유였던 것으로 보인다. 박정희의 호남에 대한 편견에 대해선 "박정희 대통령이 호남에 대한 편견을 갖고 있으므로 그 밑에서 일하는 공무원들도 그렇게 하는 것이 대통령에 대한 충성으로 알고 호남 편견을 가졌을 것이다." 7)

편견 때무이었건 그 무엇 때문이었건, 일단 그렇게 해서 저질러진 호남 차별은 시간이 흐를수록 구조로 정착되어 자연스러운 '시장논리'로 호남 차별의 악순환을 가동케 하는 가공할 결과를 낳게 되었다. 그래서 후일 부산 동아대 교수는 "경상도와 전라도에 투자한 액수가 10대 1이라는 것이다. 나는 그 글을 읽고 원적을 전라도로 옮길 생각을 했다. 왜냐 하면 전라도 사람들이 불쌍했기 때문이다."라고 말하기까지 했다. 8)


출처

1) 이상우 <박정권 18년 : 그 권력의 내막>(동아일보사 1986, 346쪽)

2) 이상우 <박정희 18년 : 그 권력의 내막>(동아일보사 1986, 341쪽)

3) 강준만 <전라도 죽이기>(개마고원 1995, 50쪽)

4) 이상우 <박정희 18년 : 그 권력의 내막>(동아일보사 1986, 347쪽)

5) 박상훈 <지역균열의 구조와 형태> 한국정치연구회 편 "박정희를 넘어서 : 박정희와 그 시대에 대한 비판적 연구"(푸른솔 1998, 220쪽)

6) 박상훈 위의 책, 220~221쪽

7) 문일석 <비록 중앙정보부> ;  이정석 <분단과 반민주로 본 한국 정치 이야기 상>(무당미디어 1997, 374쪽 재인용)

8) 이정석 위의 책 374쪽에서 재인용

관련자료는 스케렙사이트 댓글에서 퍼왔습니다.

http://www.skepticalleft.com/bbs/board.php?bo_table=01_main_square&wr_id=93031

http://www.skepticalleft.com/bbs/board.php?bo_table=01_main_square&wr_id=93218


덧글

  • 강희대제 2011/01/12 19:46 # 답글

    한국정치연구회 편 "박정희를 넘어서 : 박정희와 그 시대에 대한 비판적 연구" 요책은 저도 소장하고 있는데, 책자체가 imf 시기에 나온거라 이후의 학계의 연구성과가 반영되지 않은게 그책의 크나큰 단점이죤.
  • 블루라이트 2011/01/12 23:22 # 답글

    철도에 대한 오류가 있군요.

    박정희 정권때 호남선 복선화가 제대로 진행되지 못한 가장 큰 이유는 바로 1970년대초부터 KTX 개통 직전까지 계속된 철도 영업계수의 악화입니다.

    1970년대 신문자료만 찾아봐도 충분히 알수 있는 자료입니다만.
  • 블루라이트 2011/01/12 23:38 # 답글

    그리고 호남선 복선화는 광주까지는 88년도에 완공되었습니다. 90년대까지 논란이 된구간은 광주-목포뿐이죠.
  • 경상도_흉노족 2016/03/28 07:16 # 삭제 답글

    ☞ 조선시대 노비출신들이 많았던 가난했던 경상도 ㅡ 경상도 보리문둥이라고 불리우며 ㅡ 호남 대농들에게 멸시와 차별을 받으며 설움을 겪어야만 했던 경상도 ㅡ 그런것이 경상도 주민들 뇌속에 각인되고 누적되어,, 박정희를 통해 표출되었다고 보는게 타당하겠지요 ㅡ 한마디로 경상도의 노비 컴플렉스가 , 박정희의 뇌리속에, 호남에 대한 복수심으로 승화되어 박혀있지 않았을까 싶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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