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외교와 국방을 위기로 몰아갔던 박정희 [부제-닉슨 독트린과 대미외교] 1970년대 역사

박정희의 닉슨 푸대접

1968년 11월 5일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리처드 닉슨의 영웅은 프랑스의 대톨영 샤를 드골이었다. 강력한 리더쉽을 열망했던 닉슨이 드골을 존경하는 건 당연하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그럴 만한 개인적인 이유도 있었다. 닉슨의 공보보좌관으로 일했던 데이비드 게젠은 그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1960년대에 두 번의 선거에서 패배한 닉슨은 고독하고, 겉보기에 망가진 사람처럼 계속해서 세계 여러 나라의 수도를 전전했다. 각구의 각료들은 대부분 그를 만나는 것을 불편하게 생각했고, 그는 서열이 낮은 대표단이나 미국의 외무성 관리들의 접대를 받으며 식사를 하는 정도로 만족해야 했다. 그 당시 드골은 감각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 자신도 망각속에 묻혔다가 부활했던 터라, 닉슨이 언제가는 대통령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계산을 했다. 그를 맞아 정중히 붉은 융단을 펼쳤던 것이다. 아내와 함께 엘리제궁에 초대를 받은 닉슨은 들뜬 기분에 도취되었고, 드골은 그가 언젠가는 미국에서 '최고의 자리'에 오를 것이라고 추켜세웠다. 그 같은 관대함은 우정 이상의 것을 주었다. 닉슨은 남은 여생 동안 헌신적인 추종자를 만들었던 것이다." 1)

당시 닉슨의 기분은 어떠했을지는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1960년 대선에서 패배한 뒤 자신의 고향인 캘리포니아 주지사 선거에서도 패배했으니, 누가 닉슨의 정치적 재기를 예상했겠는가? 모두 다 닉슨을 정치 퇴물로 여길 때에 드골은 그렇게 극진한 환대를 해주었으니 닉슨으로선 어찌 드골을 좋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세계 각국의 수도를 떠돌던 닉슨은 1966년 9월 서울에도 나타났다. 물론 개인 자격의 방문이었다. 닉슨은 서울에 오기 전 동경에서 비교적 환대를 받았기에 서울에서도 그와 같은 대접을 기대했던 건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박정희의 생각은 달랐다. 닉슨을 만나줄 필요조차 없다고 생각했다. 2) 주한 미국대사 브라운이 직접 청와대를 접촉했지만 여의치 않자 외무장관을 지낸 이동원의 도움을 요청했다. 이동원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브라운 대사에게 떠밀리다시피 청와대로 들어왔지만  사실 나도 속으론 박 대통령이 닉슨을 꼭 만나 주었으면 싶었기에 강력히 닉슨과의 만찬을 종용했다. 그러나 그는 달갑잖은 표정이었다. '그 사람 이미 끝난 사람인데 구태여......' '그래도 각하....' 속이 탄 내가 재차 건의했으나 여전히 박 대통령의 얼굴엔 찬 기운이 감돈다. 결국 닉슨은 박 태통령과 점시도 못하고 그저 커피 한 잔 마시는 걸로 끝낸 모양이었다. 그러나 안되려면 뒤로 자빠져도 코가 깨진다더니 예상외의 예우에 몸이 단 브라운이 그 날 저녁 급히 장관들과 함께 하는 만찬을 추진했는데 공교롭게도 마침 같은 시간에 박 대통령이 장관들을 청와대로 불러 져녁을 하게 된 것이었다. '하느님 맙소사' 내 입에서 탄식이 새어 나왔다. 아니나 다를까 내가 미 대사관 만찬장에 들어서니 미국 장성들과 함께 앉아있는 사람들이라곤 불과 두서너명에 불과하지 않는가. 내 느낌으로는 식사 내내 닉슨의 표정은 텅빈 좌석만큼이나 공허해 보였다." 3)

박정희가 닉슨에게 당한 굴욕

아마도 닉슨은 당시 박정희에 대해 이를 갈았을지도 모른다. 2년여 후인 1968년 11월 5일 미국 대선에서 닉슨이 승리해 다음해 1월 20일 37대 대통령에게 취임했을 때 박정희가 받은 충격은 어떠했을까? 일국의 대외 정책에 무슨 대통령의 개인 감정이 작용하겠느냐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게 꼭 그렇진 않다. 닉슨의 드골 존경에 개인적인 잉가 다분히 작용하듯이, 박정희가 닉슨을 반대한 것이 이후 닉슨 행정부의 대(對) 한국 정책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앟았을 것이라고 보기에는 어려운 것이다. 이동원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예상대로 닉슨은 취임식이 끝나기 무섭게 '닉슨 독트린'을 제창한다. 아울러 주한미군 철수까지 거론한다. '그까짓 한국 힘 없으면 망하라고 해. 무슨 상관이야. 일본만 자유민주국가로 남아도 충분한데.... . 갑자기 청와대에서 비상벨이 울리는 건 당연한 일..... . '모든 루트를 다 원해서 박 대통령과 닉슨의 면담을 주선하라.' 한국의 정계는 발칵 뒤집어 졌고 워싱턴행 비행기엔 우리 쪽의 밀사가 줄을 이어, 당시 외무장관이던 최규하는 물론 나까지도 워싱턴 정가에 고개를 내밀었다. 그러나 닉슨의 정책성도 좀 가미된 보복은 이때부터였다. 백악관 빗장은커녕 근처에 접근하는 것조차 허용치 않는 것이었다. 그렇게 끌기를 반년. 그  사이 박 대통령은 <워싱턴 포스트>와 회견에서 미국에 제주도를 군사기지로 내주겠다는 등 추파를 던졌고 끝내 닉슨은 못 이기는 척 입을 연다.  '그럼 좋소. 그러나 워싱턴에서는 안되고 8월 내 여름 휴가 때 내 고향 근처 샌프란시스코에서 만나도록 합시다.' 이 얼마나 수치스러운 일인가. 휴가 때 별장으로 놀러가는데 그 쪽으로 오라니 그것도 그의 고향인 샌클레멘티 집엔 그나마 헬리콥터 이착륙장까지 갖춰져 있어 박 대통령의 체면을 살려 줄 수 있는 최소한의 예우 시설이라도 있었으나 닉슨은 그것마저도 아깝게 여거 샌프란시스코의 샌프란시스코호텔에서 보자는 것이었다. 무릎꿇고 피눈물을 흘리며 머리를 조아리느 굴욱이 차라리 더 나을 듯 싶었으나 이 쪽이 잘못한 것도 있으니 어쩌랴. 박 대통령은 자존심의 눈물을 머금고 1969년 8월 21일 미국 방문길에 올랐다." 4)

그건 닉슨의 명백한 보복이었다. 모든 거물 정치인들이 다 그렇긴 하겠지만 닉슨의 강한 승부욕과 복수심은 유별난 점이 있었으니, 그가 박정희에게 받았다고 생각한 모욕을 어찌 잊었겠는가? 박정희는 훗날 이동원에게 닉슨을 만나던 날의 비참한 심정을 다음과 같이 토로했다.

"난 그 날 비통함의 연속이었소. 약속 시간에 맞춰 자동차로 호텔에 가면서도 난 최소한 호텔 로비에선 닉슨이 맞아 주리라 기대했었소. 그러나 호텔 로비에서도,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 내릴 때도, 방문을 열고 들어갈 때도 닉슨은 나타나지 않았소. 방에 들어선 후 왼쪽의 큰 문이 열리길래 보니 그 쪽 방 저 끝 구석에 닉슨이 선 채 날 맞이하는게 아니오. 저녁 식사 땐 시시껄렁한 자기 고향 친구들 불러다 앉혀 놓곤 같이 식사하라는 게 아니겠소. 내 아무리1966년 닉슨이 방문했을때 섭섭하게 대했기로소니 나무 한 것 아니오." 5)

70년대 한국을 지배한 주한미군 문제

그러나 얼마든지 그럴 수 있는게 인간 관계요 국제 관계였다. 이동원의 말마따나, 박 정권의 "손님 대접은 어제와 내일이 없는 오늘뿐"이었다. 6) 닉슨 독트린은 박정희와는 무관하게 나온 닉슨의 세계 경영 구상이었지만, 그 독트린은 한국에 어떻게 적용시킬 것인가 하는 점에 있어선 닉슨의 박정희에 대한 악감정이 적잖은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도 있는 것이다.

이동원은 "닉슨의 보복은 집요하다 못해 고개를 흔들 정도였다"며 그 후에도 계속된 '보복'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월남 전을 끝내면서도 마찬가지였다. 본래 마닐라 정상회담에 의해 미국과 한국은 종전시에도 함께 협의하게 돼 있었다.  하나 닉슨은 이 약손을 깡그리 무시해 버리고 키신저를 시켜 월남전을 끝냈다. .... 또한 워낙 닉슨의 심기가 칼날 같았기에 우린 월남 종전을 마음대로 처리하는 미국에 눈치조차 한번 못 주고 그대로 당해야 했다. 키신저가 북경과 파리를 오가며 레둑토 월맹 대표와 노벨평화상 문안을 작성할 때도 우린 그저 쓴맛 다시며 멀뚱히 쳐다보고만 있었던 것이다." 7)

닉슨의 이른바 '닉슨 독트린'을 발표한 것은 1969년 7월 25일이었다. 괌에서 발표했다 하여 '괌 독트린'이라고도 불렸다. 그 주요 내용은 "아시아 국가들은 미국 의존도를 줄이고 그들의 안보 문제를 독자적으로 해결하기 바라며 미국이 또 다시 월남전과 같은 사태에 말려들지 않도록 협조해야 한다"라는 것이다. 이 독트린이 미 의회를 통해 공식화된 건 1970년이었다. 8)

1970년 1월 20일 닉슨은 미국 의회에 대한 일반 교서에서 지금까지의 봉쇄 정책을 폐기하고, 중공과 대화를 시작할 것임을 밝힌 데 이어 2월 18일에는 닉슨 독트린의 정책백서라 할 <1970년대 미국 대외 정책-평화를 위한 새 전략>보고서를 제출함으로써, 이른바 미국의 해외 주둔 병력을 삭감하는 요지의 닉슨 독트린을 공식적으로 제시하였던 것이다. 9)

이후 주한미군 문제는 70년대 내내 박 정권의 주요 현안이 되었고, 주한미군 문제와  밀접히 연계된 국가안보는 민주화운동을 탄압하는 '정가의 보도'로 활용되기도 했다. 40년대 후반보다는 덜했을망정 70년대는 대미관계가 한국의 운명을 결정짓는 중요한 변수로 작용하게 된다.

국가안보 문제를 떠나서 대미관계와 대일관게는 70년대 내내 박 정권을 옭아매는 족쇄로 작용했다. 무엇보다도 정권의 존망을 걸고 추진한 추진한 수출전략의 대미 대일 의존도가 너무 높았기 때문이다. 1971년의 경우 전체 수출량의 75%가 미국 일본 시장에 의존하였으며, 두 나라에 대한 수입의존도는 68%에 이르렀다. 10) 박 정권은 늘 수사적 차원에서 두 나라에 대해 강경한 자세를 취하는 척 하였지만, 구조적으로 두 나라의 영향력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던 것이다.

70년 6월 12일자 <뉴욕타임즈>는 미군 2만 명을 철수할 것이라는 보도를 함으로써 한국민들에게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언론이 연일 반대의 뜻을 대서특필할 정도로 주한미군 삭감은 국민들에게 큰 불안감을 안겨 주었다. 7월 들어 상황은 더 나빠졌다. 7월 6일 미국은 주한미군 2개 사단 중 1개 사단의 철수 방침을 한국 정부에 통보했다. 8월 24일 내한한 미국 부통령 스피로 애그뉴는 1년 후인 1971년 6월 말까지 철수시킬 방침을 밝히는 동시에  "앞으로 5년 이내에 나머지 주한미군도 완전히 철수될 것"이라고 말했다. 11)

71년 3월 실제 2만명가량의 미 7사단과 3개 공군비행대대가 철군하게 되고 남한에는 5만명가량의 미 2사단만 남게 되었다. 이후 박정희는 핵 개발에 착수하게 된다.(본인추가--북한 김일성 김정일이 하던 짓을 박정희가 하고 있음)  이 미 2사단도 미국 부통령 스피로 애그뉴가 언급한데로 철군될 운명이었지만 닉슨이 워터게이트사건에 휘말려 74년 물러나면서 살아남게 된다. 그리고 76년 지미카터가 당선되면서 다시 미군 철군이 주요 이슈로 부각하게 된다.(본인추가---만약 닉슨이 워터게이트사건으로 물려나지 않았다면 한국에 주한미군은 모두 철수하고 결국 한국은 전쟁위험에 노출 되었을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외교적 결례를 범했던 박정희때문에 일어난 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본인추가---나아가 1971년 8월의 미국의 대통령 닉슨은 베트남전쟁 등 대외 원조와 군사비 지출 증대로 인하여 악화된 경제와 달러 가치의 회복을 위하여 신경제 정책을 발표하였다. 이른바 달러방위책이라고 불리는 이 정책은 달러와 금의 교환을 정지하고 수입하는 모든 상품에 대해 10%의 수입과징금을 부과 실시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로 인하여 한국과 일본, 중남미 국가 등 수출 의존도가 높은 많은 나라에 큰 변화와 충격이 발생하였는데, 이러한 현상을 일컬어 닉슨 쇼크라고 부른다. 이 닉슨 쇼크로 상대적으로 대미의존도가 훨씬 높았던 한국 경제는 위기에 처하게 되었고 이것은 박 정권의 닉슨 푸대접외교와 어느정도는 연결된다고 본다.


출처

1) 데이비드 거젠, 서윤택 옮김 <ceo 대통령의 7가지 리더쉽 : 리처드 닉슨에서부터 빌 클린턴까지>(스테디북 2002, 56쪽)

2) 정진석 <총성 없는 전선 : 격동의 한 미 일 현대 외교 비사>(한국문원 1999, 23쪽)

3) 이동원 <대통령을 그리며>(고려원 1992, 144~145쪽)

4) 이동원 <대통령을 그리며>(고려원 1992, 146~147쪽)

5) 이동원 <대통령을 그리며>(고려원 1992, 147~148쪽)

6) 정진석 <총성 없는 전선 : 격동의 한 미 일 현대 외교 비사>(한국문원 1999, 25쪽)

7) 이동원 <대통령을 그리며>(고려원 1992, 148쪽)

8) 현대연구소 연구팀 <주한미군 철수 6>(중앙일보 1995년 10월 24일 10면)

9) 김성진 <한국 정치 100년을 말한다 : 우리들이 꼭 알아야 할 한국 정치의 실상>(두산동아 1999, 295쪽)

10) 한배호 <한국정치변동론>(법문사 1994, 185쪽)

11) 오원철 <한국형 경제건설 7 : 내가 전쟁하자는 것도 아니지 않느냐>(한국형경제정책연구소 1999, 32쪽)







관련자료 - DJ가 닉슨 미국 대통령에게 보낸 편지


어제 김영삼 전 대통령이 닉슨 미국 대통령에게 보낸 편지를공개한 바 있다. 이어 오늘은 김대중 전 대통령이 닉슨 미국 대통령에게 보낸 편지를 공개한다. 김대중 문건의 출처는 National Archives and Records Administration, Nixon Presidential Materials, NSC Files, Gen. Co.78 12/1/69, Line Item 18(미국국립문서보관소, 닉슨대통령 자료, 국가안보파일, 일반서신 78 1969년 12월 1일, 항목 18)이다.

DJ의 서신에 대해 간단한 설명을 곁들이면, 이 서신은 그가 방미 중 1970년 4월 27일자로 닉슨 대통령에게 보낸 것으로, 골자는 ‘닉슨 독트린’과 관련한 아시아의 국제정세, 그리고 한국의 정치, 경제, 안보 상황 등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담은 것이다. YS의 경우와 달리 미국측은 DJ의 편지에 대해 국가안보회의(NSC) 수석보좌관 명의로 적절한 조치와 함께 답신을 보냈다는 점이다.

앞서 김영삼 문건도 별도의 해석 없이 번역문만 소개했듯이 이번 김대중 문건도 마찬가지로 제보자가 번역한 내용만을 싣기로 한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닉슨 미국 대통령에게 보낸 편지. 첫 장 말미에 DJ의 서명이 보인다.



 

                                                                                                                    1970년 3월 27일

수신: 미합중국 대통령 리차드 닉슨 각하

친애하는 대통령 각하:

본인이 이번 달 초에 워싱톤 D.C.를 방문했을 때, 각하를 만날 수 없었기 때문에 우리나라가 오늘날에 처한 긴급한 일부 이슈에 관한 저의 견해를 제시한 짧은 논고를 전송하고자 합니다.

각하가 관심을 보여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행복을 기원하며,

                                                               /서명/
                                                               김대중
                                                  대한민국 국회 국회의원


 

<첨부문서>


 

대한민국과 미국의 공동 관심사에 관한 본인의 견해


 

I. 아시아에서의 닉슨 독트린

A. 아시아 국민의 심적 불편
B. 일본과 기타 아시아 국가 

II. 대한민국의 안보

A. 한국에서의 전면전
B. 게릴라 전쟁 

III. 한국 정치

A. 한국에서의 독재의 증가
B. 한국의 민주주의 정세

IV. 한국의 경제적 조건

A. 한국에서의 왜곡된 자유경제 시스템
B. 경제 개발과 분배의 문제

C. 한미 경제 협력


 

I. 아시아에서의 닉슨 독트린

      나는 닉슨씨가 “아시아인에 의한 아시아의 방어”라는 독트린을 주창한 것이 잘 정당화된다고 본다. 월남에서 미국이 애초부터 이와 유사한 정책을 추진했더라면 오늘날 월남의 상황은 지금과는 달랐을 것이다. 

      그러나 미국에 의한 이와 같은 정책의 시행 시기와 실제 시행은, 이 정책 자체의 정당화보다 더 비판적인 고려를 받아야 한다. 이러한 정책의 사려 깊은 적용만이 미국과 자유 아시아 국가에서 최선의 이해를 초래할 수 있다.

      A. 아시아 국민의 심적 불편

      아시아 특정 국가에서의 탈-미국화 정책을 서둘러 부주의하게 시행하는 것은 공산 붉은 중국에게만 이익이 될 것이며, 향후 그들의 팽창을 위한 준비를 강화시켜 줄 것이다. 자유 아시아인들은 그 탈-미국화가 형성되는 과정에 대해서는 인정을 하면서도, 이 정책의 시행은 그들에게 너무 즉각적인 [결과를 가져다 주는]것이다. 왜냐하면 3년간의 전쟁이 벌어진 곳이 한국이고 공산주의와의 열전이 벌어졌던 곳이 월남과 라오스이기 때문이다. 탈-미국화 정책의 성공적인 수행은 필히 완만하게 진행되어야 하며, 그 정책 계획의 유형과 추진 속도는 나라마다 달라야 한다.

 

B. 일본과 기타 아시아 국가 
 

일본이 아시아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맡게 격려하는 미국의 정책은 아시아인들에게 또다른 중대한 관심사이다. 만약 이러한 주도적 책임이 일본에게 성급하게 이전된다면 가까운 미래에 전적으로 예상치 않은 상황 전환이 초래될 수도 있다고 명백하게 경고되어야 한다. 지난 수십년간 일본 침략의 희생자였던 한국, 태국, 필리핀, 인도네시아 같은 아시아 국가들은 모두 일본에 의한 아시아의 지배의 부활에 경계하고 있다.  

한국 국민은 공산주의 침략에 맞서 싸우는데 일본과 협력하는 것을 주저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아시아에 설령 어떤 상황이 닥쳐오더라도 일본이 아시아 국가를 지배하는 것을 용납할 수 없다.  

아시아인들로부터 그러한 우려를 제거하기 위해 나는 모든 자유 아시아 국가들이 초대되어 아시아의 문제를 토의하는 국제 기구를 미국이 주도하여 수립할 것을 제안한다. 이러한 포럼과 더불어 우리 국가들은 함께 일본의 지배 가능성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을 것이다. 나아가 현재 일본에서의 움직임으로 판단해 볼 때, 이러한 국제 기구는 일본인들 사이에 반미 감정을 완화시키는데 또한 도움이 될 것이라고 믿는다.

II. 대한민국의 안보

 

대한민국의 방어의 한국화 선상에서 미국 국방부 장관은 최근 한국으로부터의 미군 철수를 발표했다. 이것은 진실로 미국이 그간 종종 강조했었던 사실인 북한의 공세적 태도의 강화에 역행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문제와 관련하여 나는 다음과 같은 내 생각을 제시한다.
 

A. 한국에서의 전면전
 

북한 공산주의자들이 비록 그들의 극단적인 반미 적대성이 악명 높다 하더라도 한국에서 또 다른 전면전을 감행할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공개적인 전쟁의 가능성이 전적으로 배제될 수는 없다. 한국 방어의 완전한 한국화는 그러므로 그러한 가능성의 정도에 따라 제한된다.  

한국화는 다음 단계가 선행되어야 가능할 것이다. 

a) 미국은 소련과 중국을 통해 북한의 불가침을 보장받아야 한다.  

b) 현재의 한미 상호방위조약은 다음과 같은 방향, 즉, 북한과 그들의 붉은 동맹국간의 모든 군사 협정에 대응하여 남한의 군대가 미국으로부터 보충을 받아 군사력이 강화되어야 한다.  

c) 대한민국의 자주 국방 노력을 강화하기위해 미국으로부터 즉각 전면적인 지원과 원조가 제공되어야 한다. 

현실적으로 한국에서의 국방의 한국화는 장기적인 프로그램으로 계획되어야 한다. 전면전의 가능성과 더불어 이 한국화는 실제적 적용성은 제한된다.
 

B. 게릴라 전쟁  
 

한국에서의 공산주의의 침략은 남한을 또 하나의 월남으로 변환시키기 위한 지속적인 대남 게릴라 침투 형태로 일어나기가 더 쉬울 것으로 보인다. 그러한 위협에 대항해서 미국으로부터 충분히 지원받고 무기를 제공받는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을 방어하는 능력에 대해 자신감을 느낀다.  

그렇지만 남한은 공산주의의 침투에 군사적 준비 태세보다는 정치적으로 더욱 취약하다는 점이 여기서 강조될 필요가 있다. 왜 정치적으로 취약한가? 그것은 남한의 내부적 사회적 조건이 다음과 같기 때문이다. 

1) 박정희 정부의 독재정치가 강화되는 것 때문에 한국 국민은 반공이라는 국가적 목표에 무덤덤해지기 시작하고 있다. 

2) 현 지배 계급의 부패는 정부와 여당에 대한 한국 국민의 깊은 불신과 증오를 초래했다. 

3) 소수 특권층의 급속하고 막대한 부의 축적과 농촌 경제발전의 실패는 빈부 격차와 도시 주민과 농촌 주민의 격차를 결정적으로 심각하게 확대했다. 

이러한 조건에서 공산주의나 혹은 공산주의에 대한 동감이 국민들 사이에 증대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며, 게릴라 전쟁에서 패배하는 결정적 요인이 될 수도 있다. 중국 본토와 월남에서의 경험은 이것을 잘 증명하고 있다. 
 

III. 한국 정치
 

한국에 민주주의가 도입된 후 25년이 지난 뒤에도 우리는 아직 독재정부 하에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유감이다.  

그러나, 한국에서의 어지러운 내부 사정에도 불구하고 한국 야당의 한 지도자로서 나는 우리의 국내 문제에 대해 외부의 간섭을 원하지도 않고 앞으로도 원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단호하게 선언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굳게 믿는 바와 같이, 그러한 민주적 정부를 획득하기 위한 투쟁에서 우리가 자주적으로 결정하고 정직하다면 결국에는 진정한 민주주의가 올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에서 정치적 현실은 가혹하다. 그리고 지난 25년 동안 우리가 민주주의를 수립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을 도와줬던 우리의 미국 친구들은 오늘날 이러한 상황에 대해서 알고 있어야 한다. 
 

A. 한국에서의 독재의 증가
 

오늘날 한국은 더 한층 가속화된 독재 형태로 나타나는 정부에 의해 움직여지고 있다.  

국민의 뜻에 어긋나게 박정희 대통령은 대통령직의 세 번째 임기에 출마할 뿐 아니라 자기 정당에 대한 독재적 지배를 영속화하고 있다. 현행 헌법이 3선을 허용하지 않았으므로 작년에 박은 이 목적을 위해 헌법 개정을 강제로 밀고 나갔다. 지난 선거 기간 동안 박정희 정부가 자행한 불법 사례를 일부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a) 억압과 위협으로 야당과 일반 대중은 사실상 공개적으로 헌법 개정에 대해 비판하는 것을 봉쇄당하고 있다.  

b) 중앙정부의 엄격한 명령에 의해 지방 정부에서의 풀뿌리 치원에서의 자유로운 정치 활동이 부정되고 있다. 

c) 집권 여당에 비판적인 조직에 대한 자금의 유입이 또한 철저하게 동결되어 있다.  

개헌안의 통과 이후, 정치 경제 전제정치의 강도는 얼마간 완화되었지만 한국에서 정부의 억압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야비한 일은 이 정권이 의도적으로 반공활동의 이름으로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다는 것이다. 시민권의 박탈에 압박을 받아 한국 국민들은 공산주의에 대항하여 싸우는 일의 중요성에 대해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기 시작하고 있다. 
 

B. 한국의 민주주의 정세
 

한국에서 제 구실을 하고 있는 유일한 야당은 내가 속해 있는 신민당(NDP)이다. 본인이 국회의원으로 있는 국회에서-한국은 단원제이다-신민당은 현재 의석의 4분의 1을 차지하고 있다.  

신민당은 그 역사와 정통성이 특징이다. 아직까지는 신민당이 한국에 민주주의를 되돌려오는데 성공하지 못했다. 그러나 당이 새로운 지도층을 채택한 신민당의 전국 전당대회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다. 신선한 출발과 함께, 우리는 한국의 국민 대중으로부터 광범위하고 열렬한 지지를 기대하고 있다. 

민주주의의 역사가 상대적으로 짧기 때문에 한국의 민주주의는 대체로 학생과 지식인에게 의존해왔다. 이들은 이승만 정부를 붕괴시키는데 주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그리고 이들은 정부의 감시에 놓여지게 된다 하더라도 민주주의를 지지하기 위해 다시 봉기할 준비가 되어 있다.  

우리의 투쟁에서 중요한 병목은 한국에서의 언론의 자유의 부재이다. 문화공보부는 언론을 통제하고 조종하기 위해 창설되었다. 언론인들이 경찰과 정보 당국에 의해 부당하게 조사받는 일은 흔치 않은 일이 아니다. 심지어 서울에 있는 주요 언론의 소유주들이 정부와의 “협력”이 불가결한 산업 연합체나 혹은 금융업 연합체의 소유주이기 때문에 자신들이 발행하는 언론 매체에서 자유 언론을 적극적으로 격려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시민권과 언론의 자유는 신민당 정강에서 가장 높은 우선권을 갖고 있다.
 

IV. 한국의 경제적 조건 
 

한국의 최근의 경제 발전은 미국에서 높게 칭송되어 왔다. 지난 10년 동안 한국의 노동 세력은 경제적 추구에서 그들의 능력을 훌륭하게 발휘했었다. 나는 박정희 행정부가 한국의 경제 발전에서 수행한 역할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의 경제 발전 노력에 아주 중요한 숨겨져 있는 양상을 지적해야만 한다.

      A. 한국에서의 왜곡된 자유 경제 시스템

 

한국에서는 자유 경제 시스템의 원칙을 찾아보기 힘들다. 국가 경제의 60 퍼센트 이상이 정부의 통제 하에 있다. 모든 금융기관은 정부에 의해 치밀하게 감독받고 있으며, 대부분의 공익 설비 산업은 국영 기업체가 운영하거나 소유하고 있다. 생산에 사용되는 일부 투입분에 대해서는 정부가 가격을 결정하고, 다른 데 사용되는 물질은 해외로부터 수입된 것으로서 수입 관세가 적용됨으로써 물가는 정부에 의해 직접적으로 혹은 간접적으로 규제된다.        
        이익이 남는 기업을 할 기회는-정부 계약이나 국제 합작 투자 기업에의 참여-공개 입찰에 의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정치 자금의 은밀한 기부를 통해 집권 여당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소수의 기업체에 주어진다.

 

B. 경제 개발과 분배의 문제
 

박정희 정부의 경재 정책에서 무시되고 있는 효과는 한편으로는 부자와 가난한 자 간, 다른 한편으로는 도시 인구와 농촌 인구 간의 넓어진 격차에서 가장 잘 찾아볼 수 있다. 소득 분배의 양극화와 불균등한 지역 개발은 심각한 경제 문제를 발생시킬 뿐 아니라 그들의 정치적 사회적 의미도 또한 중요하다.  

농업의 경우는 좋은 사례를 제공한다. 1967년과 1968년에 전체 경제 성장률은 각각 10퍼센트와 13퍼센트였다. 반면에 농업 부문에서 경제 성장률은 1967년에 마이너스 6 퍼센트였고 1968년에 단지 1 퍼센트였다. 이러한 실패의 결과, 한국은 증가하는 인구를 먹이기 위해 해외로부터 식량을 수입해야 했다. 한때 쌀과 곡식을 수출하던 한국은 이제 연이어 곡식을 수입하는 나라가 되었다.

        게다가, 수입 곡식의 가격은 도시 소비자들을 달래기 위해 정부에 의해 인위적으로 낮게 유지되었다. 농업 생산자는 이러한 정책의 직접적인 희생자이다. 그리고 농업지역에서 구매력은 급속히 하락했다. 이러한 농업 조건은 다만 농촌의 불만을 불러일으키기에 더할 나위 없을 뿐이며 이러한 농촌의 불만은 아시아의 공산주의자들이 권력을 획득하기 위해 찾는 전통적인 목표물이다. 

요약하자면, 지금이 이 시점이 바로 한국에서의 경제개발 노력에 결정적인 전환을 해야 할 시점이라고 나는 굳게 믿는다. 자유 경제 시스템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정부의 개입이 과감하게 축소되어야 한다. 동시에, 더 많은 자원이 이 나라 경제의 중추인 농촌의 경제 발전에 할당되어야 한다.
 

C. 한미 경제 협력 
 

한국은 1952년부터 1969년까지 미국으로부터 39억 2100만 달러의 원조를 받았다. 우리는 그 원조에 대해서 감사하게 생각한다. 그 원조를 가지고 우리는 이제까지 우리 경제를 재건하고 발전시켰다.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가 경제적 자립 생존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원조를 구걸하는 정신자세는 반드시 없어져야 한다. 그러므로 내가 미국으로부터 바라는 것은 양국 간의 상호 호혜적 경제 협력이다.  

그러한 협력은 양국 간의 무역 불균형을 포함한다. 한국의 대미 무역 적자는 1968년에 2억 1300만 달러, 1969년에 1억 3100만 달러였다. 한국은 미국에 더 많은 물자를 수출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면방직 제품 등 한국 제품에 대한 미국의 무역 제한이 제거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한미 경제 협력의] 또 다른 사례는 한국에서의 미국의 합작 투자이다. 그것은 전부 7600만 달러 혹은 한국에 대한 전체 해외 자본 투자의 60 퍼센트에 달한다. 한 편으로는 한국은 미국이 어떤 문제도 겪지 않는 유일한 동맹국이다. 다른 한 편으로는 한국의 노동 세력은 그 근면함과 훈련을 잘 받은 것으로 유명하다. 미국의 자본과 기술적 노우하우 그리고 경영이 한국의 경제적이면서도 경쟁력 있는 노동과 결합하면 세계 시장에 새로운 세력이 될 것이다.


 

수신: 김대중, 대한민국 국회

김[대중]씨 귀하:

 

본인은 귀하가 대통령에게 보낸 3월 27일자 노트에 대한 답신을 하도록 요청받았다. 

공동 관심사에 관한 귀하의 견해를 저희가 주목하게 전달해 주신 것에 대해 감사한다. 본인은 귀하의 글의 사본을 정부 내 적절한 인사에게 전달해 주려고 한다.  

귀하의 미국 방문이 즐거운 방문이었으면 한다. 그리고 귀하를 만날 기회를 가지지 못해서 유감이다.
 

John H. Holdridge
                                                                               수석 보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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