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육강식과 부정부패 그것이 박정희시대였다--조폭정치와 박정희 1960년대 역사

부패를 단속하면 행정이 마비되는 나라

앞서 지적했듯이, 1965년부터 공화당 재정위원장을 맡은 김성곤은 박정희의 지시에 따라 정부가 발주하는 사업에는무조건 10%를 떼어내 정치자금을 조성하였다. 당시의 전반적인 부패 수준에 비추어 보면 10%는 매우 낮은 수준의 뇌물이었다. 그래서 재벌들은 10%를 뜯기면서도 고마워하면서 "앞으로 이런 기호를 자주 달라"고 애원하였던 것이다.1)

대통령부터 부정부패를 천연스럽게 해대는데, 공무원들이라고 가만있을 리는 만무했다. 박정희는 공무원의 부정부패가 너무 극심하다는 걸 알았던지 67년 중앙정보부에게 부정부패 단속 지시를 내린 적이 있었다. 그래서 중앙정보부가 부정부패 단속에 뛰어들었느데, 그 일을 계속할 수가 없었다. 부패 공무원이 워낙 많아 행정과 치안이 마비될 지겨에 이르렀기 떄문이다.2)

67년 미군 군납에서 발생하는 한인 업자들간의 덤핑을 조정하기 위한 업무를 맡았던 중앙정보부 감찰실장 방준모는 그 일에서 발생하는 온갖 부패의 악취를 맡으면서 이런 결론을 내렸다. "빽과 돈, 힘을 쥔 자들만이 살아남는 풍토였다."3)

도로 공사비의 30~40%는 뇌물

당시 이병철의 장남으로 경제계에서 맹활약을 하던 이맹희의 증언이다.

"내가 다른 사람들과 함께 차를 타고 가다가 '우리나라 대부분 공사비 중 30~40%의 돈은 엉뚱한 데로 흘러가고 건설비의 60~70%로 지은 것이다.'라고 하면 아무도 내 말을 믿지 않으려 한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것은 사실이다."4)

이맹희는 삼성전자를 만드는 데에 들어간 뇌물만 5억 원이었으며, 당시엔 뇌무을 바칠 줄을 찾는 데에도 뇌물이 필요했다고 말한다.

"당시는 어느 기업이나 모두 공장의 건설이나 외자(차관) 도입에 연관되어 정부나, 혹은 박 대통령에게 적절한 대가(?)를 전해야 했다. 삼성전자를 설립할 당시 내 기억으로는 5억 원을 주었던 것 같다. 이 액수는 당시 차관액의 3%에 해당되는 돈이었다. 그래도 내 경우에는 삼성전자를 설립할 무렵, 박 대통령과 적절한 라인이 있어서 비교적 액수가 적었던 셈이었다."5)

기업인의 능력은 줄을 짧게 만들 수 있느냐에 달려 있었다. 줄이 다단계로 길어지다 보면 망하기 십상이었다.

"을이라는 회사가 있었다. 종이 관련 회사였다. 처음 공장을 설립하면서 이 회사는 정치자금을 너무 많이 냈다. ......  이 회사가 상납한 자금은 자신들이 상납한 자신들이 제공한 차관의 무려 20%에 달하는 정도였다. 박 대통령에게는 5%밖에 전달되지 않았지만 나머지 15%는 박 대통령에게 전달되기까지 이른바 '줄 찾는데' 들어간 돈이다. 물론 권력 측근의 사람들이 나눠가졌을 것이다. 이렇게 많은 돈을 낭비하고 회사가 정상적으로 운영될 수는 없었다. 결국 오래지 않아 망했고, 그 회사는 다른 기업인의 손으로 넘어갔다."6)

그 줄의 상층부에 속하는 권력자들이 점잖게 앉아서 기다리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약점이 있는 기업에겐 적극적으로 달려들어 돈을 뜯어내기도 했다. 그건 박 정권 내부의 권력 투쟁이기도 했다.  권력자들들 사이에서 영역 다툼이 벌어지기도 했고, 누구에겐 얼마를 주었는데 난 왜 이것밖에 안 주느냐고 협박해 더 뜯어내기도 했다. '조폭'의 행태와 크게 다를 바 없었다.

이맹희는 66년 한국비료 사건 시 삼성이 박 정권의 그런 내부 권력(야권) 투쟁에까지 휘말려 들어 곤욕을 치렸다고 주장했다. 그 전에는 박정희의 눈치를 보느라 꼼짝 못하던 자들이 이젠 박정희와의 줄이 끊어졌다 싶으니까 삼성에게 정치자금을 내놓으라고 험상궂게 생긴 손을 내밀더라는 것이다.7)

개발독재 체제는 '동물의 왕국'

박 정권의 부정부패 잔치판의 상당 부분은 이미 박정희의 통제권 밖에 있었거나 박정희는 자신에게 도전하지 않는 한 그걸 모른 척 했다. 약육강식(弱肉强食)은 시대정신이었다. 박정희의 개발독재 체제는 '동물의 왕국'을 방불케 했다. 사자가 식사하기를 기다리는 하이에나와 독수리 떼들의 모습은 아프리카에서만 볼 수 있는 건 아니었다.

하이에나와 독수리 떼의 정신은 사회 전 분야로 확산되었다. 위에서 먹는데 왜 나라고 못 먹느냐는 '평등 정신'의 발로였을까? 그래서 전문적으로 줄을 팔러 다니는 장사꾼들도 생겨났다. 줄이 있으면 안 당하지만, 줄이 있더라도 돈이 꼭 필요했다. 돈 독이 오른 사람들이 권력을 주무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경제는 당연히 대통령이 마음대로 주무르는 것으로 생각하고 아랫사람들도 대통령과의 물리적 거리가 가까우면 얼마든지 부정한 짓을 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했다. 경제인들 역시 박 대통령에게 최소한 밉게 보이지 않아야 살아 남을 수 있었으니 심지어는 '대통령에게 말을 잘 해줄 터이니 돈을 달라'고 뻐기는 사람들도 있었을 정도였다. .,.....  친구로 오랫동안 사귀었던 정 아무개 장관도 나와 경북중학교 동기로 어린 시절부터 무척 친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미국에 출장을 가 있는 사이, 삼성에 와서 일방적으로 돈을 뜯어가곤 했으니 모두가 제 정신이 아닌 것같이 살아가던 시절이었다."8)

제정신이 아닌 게 아니라, 그게 바로 시대정신이었다. 삼성도 바로 그 정신으로 한국 제1의 재벌로 성장하게 된다. 그 시대정신에 부응치 못한 이맹희가 나중에 아바지로부터 쫒겨난 건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안국화재에 세무감사가 들어왔다. 국세청 세무감사가 아니라 청와대 세무감사였다. 아무리 뒤져도 비리가 안 나왔다. 그러자 답답해진 청와대 직원들이 사장 이맹희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대로 우리가 돌아가면 청와대에서는 야단이 납니다. 그리고 비리가 발견되지 않은 것은 우리 능력이 부족해서라고 생각하고, 또 다른 팀을 보낼 겁니다. 안국화재의 입장으로서는 그들이 새로 감사를 한다 해도 새롭게 밝혀질 비리는 없습니다. 그러니 새로 감사를 받게 되면, 업무상의 지장도 많고 또 퍽 불편할 겁니다. 그러니 비리를 얼마간 있는 것으로 서류를 만듭시다. 그러면 위에서도 인정을 하고 그냥 지나갈 겁니다."

안국화재는 그 제의를 받아들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청와대 감사팀과 협의를 해서 600만원 정도의 비리가 있었던 것으로 서류를 조작했다. 그래서 300%에 해당되는 벌금 1천 800만원을 냈다.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었다. 이맹희에 따르면,

"재미있는 것은 이때도 감사 나온 직원들에게 뇌물이 건너갔다는 것이;다. 처음 3명과 나중의 12명에게 각각 100만원 씩 모두 1천 500만 원을 주었다. 박 정권 하에서는 모든 일이 이런 식이었다. 기업의 자율도, 정당한 이윤추구와 자본주의의 기본 원리도 지켜지지 않았다."9)

정치자금 징수 경쟁

박 정권 하에서 정치자금 징수는 공화당 재정위원장만의 몫은 아니었다. 힘을 쓸 수 있는 모든 권력자들이 다 동원되었다.

69년 하반기 어느 날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장관 김학렬은 현대건설(정주영), 대림산업(이재준), 극동건설(김용산), 삼부토건(조정건), 동아건설(최준문)의 사장 5명에게 소집 명령을 내렸다. 이유는 간단했다. 3선 개헌과71년 대선과 총선을 위해 돈을 내놓으라는 것이었다.

이들은 "우리는 공사를 수주할 때마다 공화당 재정위원장에게 정치작므을 상납하고 있다. 그런데 경제기획원장이 또 정치작금을 상납하라는 것은 사리에 맞지 않는 일이다."고 반발했다. 그러나 김학렬이 그렇게 경우가 없는 사람은 아니었다. 김학렬은 정치자금을 내는 대가로 '잠실 공유수면 매립공사'라는 카드를 제시했다. 잠실섬의 남쪽 흐름을 막아 육지와 연결시키고 북쪽에 제방을 쌓으면 섬은 없어지는 대신에 엄청난 양의 택지가 조성되는데, 그걸 주겠다는 것이었다. 그건 엄청난 이권이었다. "진작 그 이야기부터 할 것이지!" 아마도 그렇게 말했을 성싶다.사장들은 선뜻 그 제의를 받아들이면서 감학렬이 요구한 정치작므을 냈다."10)

손정목의 이 사실을 안 서울시장 김현옥이 노발대발했다고 말한다.

"김 사장의 입장에서는 잠실섬 공유수면 매립면허는 서울시장의 권한이었고, 정치자금을 수합해서 윗분에게 상납하는 일도 자신에 의해서 이루어져야 했다는 인식이 있었다. ...... 잠실공유수면 매립면허를 둘러싼 김학렬-김현옥 간의 알력은 김현옥 시장이 그 자릴 물러남으로써 결말이 났다. 1970년 4월 8일 마포구 와우산 허리에 징느 시민아파트 한 동이 무너져 사망 33명 부상 40명이라는 사건이 일어나 김현옥 사장이 시장 자리를 물러났던 것이다."11)

실력자들 사이의 정지자금 징수경쟁이렀다고나 할까?

박정희의 금권(金權)정치

박정희 정권은 무력에 의해서만 유지되었던 건 아니었다. 무력 못지 않게 중요한 건 금권이었다. 박정희는 엘리트층 인사들에게 아낌없이 돈을 씀으로써 그들을 자신의 지지자로 만들거나 적어도 저항만은 하지 않게끔 하였고, 이는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런 돈질은 엘리트층 내부에선 '불우이웃 돕기'수준의 선행으로 여겨지거나 박정희의 인정과 도량을 말해주는 것으로 여겨지기도 했으니,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는 일이었다.

훗날 박정희 옹호에 열을 올리는 사람들이 거의 대부분 박정희로부터 개인적으로 큰 은혜를 입은 사람들이라는 것이 이 점을 잘 말해준다 하겠다. 박정희는 바로 그런 목적을 위해서도 거액의 정치자금을 절실히 필요로 하였던 것이다.

박정희는 숙청된 쿠데타 동지들에게도 생활비를 대주었으며, 야당 인사들에게도 격려금을 주었다. 푼돈이 아니었다. 박정희를 다시 보게 만들 수 있을 만큼 큰 돈이었다. 박정희가 돈으로 수많은 사람들을 구워 삶았다는 걸 수많은 증언들이 있다.

이맹희의 증언이다.

"내가 직접 본 것으로도 박 대통령은 장군들이 청와대로 인사를 하러 오거나, 혹은 자신이 군부대를 방문하면 늘 '서울에서 양옥 한 채 살 수 있을 정도의 돈'을 주었다. 이런 관행은 비단 대통령과 장성들 사이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고, 그 하급의 청와대 경호실장이나 중정부장, 각급 정치인들도 그 대열에 끼어 들었다. 어느 경우에는 주는 입장에서 받는 입장으로 처지가 변한 일도 있었지만 대부분 그런 고리 속에서 생활을 했다."12)

이경남은 이렇게 말했다.

"국가 원수로서 그늘진 구석의 불우한 사람이나 품위 유지가 소망스러운 사람에게 '온정의 봉투'를 쥐어주는 것은 있어 마땅한 일이다. 그러나 박 대통령의 촌지봉투는 용인술의 한 수단으로서 마법처럼 활용되었으므로 부도덕한 매수행위라는 지탄에서 면죄될 수 없는 일이다. 소위 대통령 하사금이니 격려금이니 하는 봉투들이 수백만 원, 수천만 원씩 두터웠고 그것을 받아든 수혜자들은 눈물을 찔끔거리면서 감읍에 겨운 충성을 다짐하였으니, 그 자금의 출처는 어디였으며 예산 회계 범위 밖에서 자행되는 '돈질'을 어떻게 합리화할 수 있단 말인가."13)

박정희의 돈 주는 버릇 때문에 인사(人事)를 점치는 인사한 일까지 벌어졌다. 박정희는 장관을 그만 둔 사람들에게도 돈을 주었는데, 적게 받은 사람은 웃지만 많이 받은 사람은 울상을 지었다. 돈을 많이 받은 사람은 박정희가 이제 자신을 더 기용할 뜻이 없다는 것으로 해석하였다.14)

7년 간 땅값 14배 폭등

60년대 후반의 부정부패애 대해 고개를 설레설레 흔드는 이맹희는 "이 시절 한국 경제는 속으로 골병이 들대로 들어 있었다."고 말한다.

"박 대통령이 한국 근대화의 공로자라고 하는 말을 내가 부정하는 것은 바로 이런 점 때문이다. 언젠가는 청와대 내의 야당이라고 불리던 육영수 여사가 어느 부정 사건을 듣고는 '이렇게 부정을 하는데도 예전에 비해면 살기가 좋아졌다는 이야기가 들리니 도무지 이해가 안된다'고 할 정도였다. 그러나 내부적으로는 썩을 대로 썩어 있었으니 그 당시 그런 경제체제 하에서 우리가 수출을 할 수 있었다는 것이 지금도 불가사의한 일로 여겨진다."15)

앞서 지적했듯이, 그 불가사의는 후진국에서의 부정부패는 엘리트들 상호간이 싸움의 비용을 줄이고 자본축적을 용이하게 함으로써 경제개발에 도움이 된다는 이론 이외엔 달리 설명할 길이 없을 것 같다. 그러나 이 이론은 온 국민의 의식과 형태를 부정부패에 절게 만든다든가 하는. 그 이후의 사회적 비용에 대해선 말하지 않는다.

군사주의와 재벌주의는 같은 속성을 가진 '일란성 쌍둥이'였다. 그 속성은 '독점'이었다. 심지어 양측이 결합한 '부패의 독점'까지 이루어졌다.

60년대엔 약 40개의 기업이 거의 모든 산업을 독점했었다. 박 정권은 온갖 특혜를 준 건 말할 것도 없고 경쟁자까지 막아줬다. 기존 산업에 신규 업체가 진입하는 것을 막기 위해 120여 가지의 규제가 만들어졌다. 훗날 재벌들은 규제가 많다고 아우성치게 되지만 그 시초는 기존 재벌들의 독점을 보호해 주기 위한 것이었다.16)

독점의 장점은 많다. 무엇보다도 일사불란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상황, 어떤 점에선 탁월한 효율과 능률도 올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건 국가주의의 관점에서 볼 때에 인정할 수 있는 장점일 것이다. 독점에서 배제된 약자들은 어쩌할 것인가? 국가를 위해 개인은 희생되어도 좋은가? 멸사봉공을 외친 박정희는 '그렇다'고 답을 하겠지만, 그건 박정희가 총사령관임을 전제로 한 답일 것이다. 박정희건 그 누구건, 졸의 입장에서 멸사봉공의 국가주의를 반길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이에나 독수리 때가 활개치던 박정희의 약육강식 체제에서 저질러진 최대의 부정부패는 정치자금 조달은 아니었다. 아마도 최대의 부정부패는 부동산 투기였을 것이다. 63년에서 70년까지의 7년간 물가는 2배, 국민총생산은 5배가 증가한 반면, 서울의 땅값은 14배 이상 폭등하는 '혁명적' 상황을 맞이하였다.17)

(본인추가-지난 10년의 부동산상승어쩌고 하는 수구꼴통들은 박정희시절 서울 땅값도 좀 보고 말해라.)

전태일의 탄원서

박정희는 63년 <국가와 혁명과 나>에서 한 자신의 말을 배신하고 있었다.(본인추가-대필이었다고 한다.)

"고운 손으로는 살 수 없다. 고운 손아, 너로 말미암아 우리는 그만큼 못살게 되었고,빼앗기고 살아왔다. 소녀의 손이 고운 것은 미울리 없게지만, 전체 국민의 1%내외의 저 특권 지배층의 손을 보았는가? 고운 손은 우리의 적이다. 보드라운 손결이 얼마나 우리의 마음을 할퀴고, 살을 앗아간 것인가. 우리는 이제 그러한 정객에 대해여 증오의 탄환을 발사하여 주자.18)

그러나 주동산 부자들이 탄생하는 셋상은 고운 손이 대접받는 세상이었다. 1% 내외의 특권층이라 하더라도 그들이 국부의 증대에 기여한다면, 그걸도 족하다는 것이 박정희 개발독재의 기본 원리였다. 70년 11월 13일 분신자살한 전태일은 69년 11월 박정희 앞으로 이런 내용의 탄원서를 썼다.

"1개월에 첫 주일과 셋째 주일, 2일은 쉽니다. 이런 휴식으로서는 아무리 강철같은 육체라도 곧 쇠퇴해 버립니다. 일반 공무원의 평균 근무시간 일주 45시간에 비해, 15세의 어린 시다공들은 일주 98시간의 고된 작업에 시달립니다. 또한 평균 20세의 숙련여공들은 대부분 6년 전후의 경력자들로서 대부분이 햇빛을 보지 못해 안질과 신경통, 신경성 위장병 환자입니다. 호흡기관 장애로 또는 폐결핵으로 많은 숙력여공들은 생활의 보람을 못 느끼는 것입니다. 응당 근로기준법에 의하면 기업주는 건강 진단을 시켜야 함에도 불구하고 법을 기만합니다. 한 공장의 30여 직공 중에서 겨우 2명이나 3명 정도를 평화시장주식회사가 지정하는 병원에서 형식상의 진단을 마칩니다. x-레이 촬영 시에는 필름도 없는 촬영을 하며, 아무런 사후 지나 대책이 없습니다. 1인당 300원의 진단료를 기업가가 부담하기 때문입니까? 아니면 전부가 건강하기 때문입니까? 이것도 이 나라의 경제발전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실태입니까?
하루 속히 신체적으로 약한 여공을 보호하십시오. ....  저희들의 요구는, 1일 15시간의 작업시간을 1일 10~12시간으로 단축해 주십시오. 1개월 휴일 2일을 늘려서 일용일마다 휴일로 쉬기를 원합니다.  건강 진단을 정확하게 하여 주십시오. 시다공의 수당(현재 70원 내지 100원)을 50% 이상 인상하십시오. 절대로 무리한 요구가 아님을 맹세합니다.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읜 요구입니다."19)

(본인추가-박정희가 자기 정권을 유지하고 자신의 기쁨조를 만들기 위해 10프로씩 또는 30~40프로 뜯어내던 정치자금만 안받고 기업에게 돌려줬어도 충분히 시다공들의 최소한의 요구는 들어줄 수 있었겠다.)

그러나 당시의 이런 탄원이 먹힐 수 있는 세상이 아니었다. 그래서 전태일은 결국 죽음으로 저항의 메시지를 전달할 수 밖에 없었다. 죽은 자는 말이 없는 법이다. 약한 자는 아무리 말을 해도 강한 자의 말만큼 무게를 갖지 못한다. 약한 자들의 희생 위에서 경제성장의 공로는 훗날 박정희와 그 일행에게로만 돌아간다.(본인추가-그렇게 선동하는 무리들이 있다. 한마디로 추잡한 xx들이다.))

출처

1)우종창 <중정 신분증에 권총 차고 정치자금 나랐다 : 박정희 정치자금 창구 성곡 김성곤씨의 비서 '미스터 리' .... 24년만의 고백>(주간조선 1995년 5월 4일, 42~46면) ; 조용중  <1971년 10.2항명파동의 전말 : 대정객 김성곤, 박정희에 항명하다.>(월간조선 1995년 4월, 673쪽)

2)문일석 <KCIA 비록-X파일 2:중앙정보부 저 감찰실장 방준모 전격증언>(한솔미디어 1996, 59~70쪽)

3)문일석 위의 책 199, 244쪽

4)이맹희 <하고 싶은 이야기 : 이맹희 경제단상>(청산 1993, 168쪽)

5)이맹희 <하고 싶은 이야기 : 이맹희 경제단상>(청산 1993, 162쪽)

6)이맹희 <하고 싶은 이야기 : 이맹희 경제단상>(청산 1993, 163쪽)

7)이맹희 <묻어둔 이야기 : 이맹희 회상록>(청산 1993, 140쪽)

8)이맹희 <묻어둔 이야기 : 이맹희 회상록>(청산 1993, 228쪽)

9)이맹희 <하고 싶은 이야기 : 이맹희 경제단상>(청산 1993, 166쪽)

10)손정목 <서울 도시계획 이야기 : 서울 격동의 50년과 나의 증언 3>(한울 2003, 188~189쪽)

11)손정목 <서울 도시계획 이야기 : 서울 격동의 50년과 나의 증언 3>(한울 2003, 190~191쪽)

12)이맹희 <하고 싶은 이야기 : 이맹희 경제단상>(청산 1993, 169쪽)

13)이경남 <철혈대통령 박정희 재평가>(월간중앙 1992년 10월, 285쪽)

14)손정목 <서울 도시계획 이야기 : 서울 격동의 50년과 나의 증언 3>(한울 2003, 95~96쪽)

15)이맹희 <하고 싶은 이야기 : 이맹희 경제단상>(청산 1993, 161쪽)

16)서재진 <한국 자본가 계급>(나남 1991. 85~86쪽)

17)강명구 <1960년대 도시발달의 유형과 특징 : 발전주의국가의 공간조작>,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편 "1960년대 사회변화연구:1963~1970"(백당서당 1999, 86쪽)

18)박정희 <국가와 혁명과 나>(지구촌 1963 재발간 1997, 275~276쪽)

19)김인걸 외 편저 <한국 현대사 강의>(돌베게 1998, 303쪽)


덧글

  • silkflower 2010/07/30 06:27 # 삭제 답글

    좋은글 잘 읽었네여
  • -_- 2010/08/01 10:28 # 삭제 답글

    개발독재 = 뇌물독재 = 부정독재

    어따 독재한번 비싸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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