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총선 : 3선 개헌을 위하여-박정희의 '김대중 죽이기' 1960년대 역사

'야당 토벌작전'

박정희의 대통령 임기는 1971년에 끝나게 돼 있었다. 박정희는 늘 그점이 아쉬웠다. 제 6대 대통령 선거를 치르기 전부터 늘 그 점이 마음에 걸렸다. 여권의 박정희 추종자들 사이에선 3선개헌은 이미 66년부터 거론하고 있었다. 그간 벌여놓은 일을 마무리 짖고 이 나라를 제대로 이끌기 위해서는 오직 박정희가 계속 집권해야 가능하다는 소위 '나만 돼. 나 아니면 안돼' 논리였다.1)

1967년 6월 8일에 치러진 제 7대 국회의원 선거는 박정희에게 3선 개헌의 성패를 결정짓는 '전쟁'으로 다가왔다. 그래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부정이 자행되었다. 자유당 시절에 동원되었던 온갖 수법들이 되살아났다. 참으로 묘한 일이었다. 박정희는 자유당의 그런 작태가 저주스러워 쿠데타를 일으켰다고 항변하던 인물이 아니던가? 네가 하는 부정 선거는 저주스럽지만, 내가 하는 부정 선거는 국가와 민족을 위해 불가피하다는 것이었을까?

온갖 부정에 더하여 이른바 '야당 토벌작전'까지 도입되었다.

신민당 전국구 후보 10번 김재화는 재일동포 실업인이었다. 중앙정보부는 총선 일주일을 앞두고 김재화를 국가보안법, 반공법, 외환관리법 위반 협의로 구속하였다.(본인추가-이명박 검찰이 선거 얼마 안남기고 한명숙을 기소한 거랑 비슷하군, 물론 사안은 좀 다르지만) 중정은 조청련계 자금 유입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로 신민당 중앙 경리장부를 압수하고 당 간부들을 잇달아 불려들어 조사했다. 선거자금 등 경비지출도 동결시켰다.(본인추가-아직 이명박은 이 단계까지는 가지 않는 듯) 순식간에 야당 선거 전열은 마비되었다. 지도부 인사들은 지방유세를 중단하고 서울로 올라와 긴급대책회의를 가졌다.

그 시간에 공화당은 흥청망청 돈을 뿌리고 다녔으며, 하다못해 농협조합장에서 영림서장에 이르기까지 온갖 관권의 총동원령이 내렸다. 이 선거에서 밀가루에 이어 보리쌀이 공짜로 뿌려졌고, 여당을 찍으면 판잣집을 헐지 않겠다는 은밀한 공약이 판을 쳤다.2)

박정희의 '김대중 죽이기'

가장 큰 관심을 모은 선거구는 김대중이 출마한 목포였다. 박정희는 김대중의 잠재력을 높이 평가했던 것인지 목포에 집착에 가까운 지대한 관심을 기울였다. 박정희는 중앙정보부와 내무부에 "여당 국회의원 10명이든 20명이든 낙선시켜도 상관없다. 반드시 김대중만은 당선이 안되도록 하라"는 지시를 내렸다.(본인추가-이거슨 박정희추종자들의 김대중스토킹과 비슷하군.) 이 지시에 따라 공화당은 2만여 명의 '유령 투표권자'를 만들어내는 등 상상을 초월하는 부정을 감행했다.3)

목포에 출마한 공화당 후보는 육군 소장 출신으로 체신부장관을 지낸 김병삼이었다. 그는 진도 출신이었지만 박정희가 직접 명령을 내려 내키지 않는 출마를 한 상태였다. 박정희는 김병삼을 당선시키기 위해 선거기간 두 번이나 목포를 방문했다.

박정희는 목포역 앞의 지원연설에서 '김병삼 후보가 당선되면 목포경제를 활성화시키고, 대학을 지어주겠다.고 공약했다.(본인추가-이런 싸가지를 봤다. 표를 가지고 경제어쩌고 흥정을 하네. 에라이 ㅉㅉㅉ) 얼마 후 다시 와선 유달산 기슭의 한 호텔에서 각 부서 자관을 모아 놓고 국무회의를 열었다. 국무회의의 주제는 목포 발전이었다. 경제기획원 장관이자 부총리인 장기영은 목포에 공장을 수십 개 유치하겠다고 공약했다.(본인추가-목포는 수심이 앝어 공장과 같은 공업시설은 적합하지 않다던 수꼴들은 도대체 자신들의 숭배자 박정희가 국무회의에서 말한 것은 전혀 안보나 보지?) 선거관리위원회는 지금까지의 결정을 뒤엎고 대통령은 당 총재를 겸하므로 선거운동을 해도 상관없다고 인정했다.4)(본인추가-오우 이런 박정희는 해도 된다면서 왜 노무현은 선거운동을 하면 안된다고 했던건지. 물론 모두 해서는 안된다.)

(본인추가-박정희가 친히 전라도까지 내려간 것은 그때까지만 해도 전라도와 경상도 두 여도가 박정희를 상대적으로 더 지지했기 때문에 전라도를 지키려 했던 측면도 없지 않는 듯 하다. 나아가 전라도를 지켜야 의석 2/3를 얻어 3선개헌이 가능한 측면도 있고 하지만 박정희는 경상도만 편애했다. 자기 고향이라서 그런건지 모르겠지만. 경상도 출신 군인만 키웠고. 쓰발 무슨 정부가 자기 고향출신가지고 장난하는 곳이냐?)

박정희는 3선 개헌 때문에 그런 몸부림을 친다고 판단한 김대중은 선거 유세에서 이렇게 말했다.

"당신네 여당이 이처럼 부정한 방법을 사용해서까지 선거에 힘을 쏟고 있는 것은 결국 헌법을 개정하여 또 다시 대통령이 되고자 하는 의도가 아닌가?  그 개헌이 필요한 3분의 2 이상 의석을 어떤 무리를 해서라도 확보하고 싶은 생각 때문이 아닌가?

박정희는 다음날 연설에서 이렇게 답했다.

"나는 헌법을 고쳐서 세 번이나 대통령이 될 생각이 절대로 없다. 내가 3선 개헌을 하려고 한다는 것은 정치적 모략이다."5)(본인추가-어익후 아에 거짓말이 입에 쩌셨군.)

김대중은 2천 표 차이로 당선되긴 했지만, 전체 선거 결과는 공화당의 압승으로 나타났다.

공화당 130석 신민당 44석

공화당의 득표수는 549만 표로 50.6%, 신민당의 득표수는 355만 표로 32.7%였지만, 공화당은 헌법 개정에 필요한 117석의석을 훨씬 웃도는 의석을 얻었다. 공화당은 전국구를 포함해 130석(지역구 103석, 전국구 27석) 신민당은 44석(지역구 27석, 전국구 17석), 대중당 1석이었다.(본인추가-득표율에는 고작 20프로 차이인데 의석수는 엄청나게 벌어졌네. 득표율데로라면 공화당은 87, 신민당은 51석 그리고 무소속 기타 나머지가 35석정도 차지해야 맞다.)

선거 과정뿐만 아니라 투개표 과정에서도 전국적으로 엄청난 부정이 자행되었다. 야당은 6.8총선을 무효로 선언하고, 재선거를 요구하면 국회 등원을 거부했다. 유진오는 6.8 선거의 관권 개입을 비난하면서 이를 '선거에 의한 쿠데타'로  규정했다.

학생들도 야당의 주장에 동조해 전국의 대학에서  6.8 부정선거 규탄데모가 벌어졌다. 6월 13일 서울의 대학생들이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대규모 시위를 전개하자, 박 정권은 그 날로 전국 21개 학교에 휴교령을 내렸다. 14일엔 5개 대학, 21개 고등학교를 추가시켰다. 결국 16일까지 전국 31개 대학과 163개 고등학교 휴교령이 떨어졌다.(본인추가-과거 60년대에의 고등학생의 수준은 장난아니었던 듯)

사태가 심상치 않게 돌아가자 공화당은 부정선거를 비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야당과 타협할 자세를 취하였다. 이게 또 야당 내에 분란을 일으켰다. 야당이 타협파와 비파협파로 양분된 것이다. 7월 10일 7대 국회는 야당의 등원거부 투쟁으로 인해 공화당 의원들만 참석한 가운데 개원되었다. 타협파인 신민당의 대변인 김대중은 총재인 유진오에게 이렇게 말했다.

"계속 등원 거부 투쟁만 전개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총재는 국회의원 선거를 다시 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현실은 그것은 불가능하지 않는가? 그보다 여당의 입장에 대한 야당의 입장 정리가 서 있어야 한다. 즉, '정부 여당은 개헌으로 박대통령이 추구하는 3선 위한 길을 열지 않겠다는 보증과 3분의 2의 여당 의석을 3분의 2 이하로 줄이고, 초과 의원의 의석은 당선을 사퇴시키겠다'고 제안하고 있다. 지금은 무엇보다도 박 대통령의 3선을 저지하는 것이 중요하니까 이 제안을 받아들여야 한다. 개헌하지 않겠다는 보증을 십수 의석의 사퇴로 얻고 타협하자. 또 하나는 지방자치 문제다. 부정선거가 일어나는 것은 위에서는 국무총리부터 이장, 반장까지 전원이 정부에서 임명하는 사람들이라 선거 때는 여당 후보를 위해 일하게 된다. 그 병폐를 막기 위해서는 지방자치제를 도입할 수 밖에 없다.(본인추가-원래 지방자치제는 1,2공화국때 시행되다 박정희 3공화국때 폐지되었다고 함) 시장도 동장도 선거로 뽑으면 사태가 호전될 것이다. 그러니까 정부 측에 3선 개헌을 할 수 없는 보증을 얻을 것과 지방자지를 실시할 것, 이 두가지 조건을 내세워 타협을 모색하는 것이 어떤가?"

유진오는 김대중의 제안을 승낙했다. 김대중은 신문과 방송에 그걸 흘려 크게 보도되도록 했다. 그러자 비타협파인 강겨파가 불만을 터뜨렸다. 강경파에 다시 설득된 유진오는 "대변인이 말은 당의 의견과 다르다"고 부정했다. 김대중은 유진오에게 "결국 여당의 생각데로 되어서 헌법은 개정되고 지방자치마저 실현시키지 못하는 최악의 사태가 오고야 말 것이다"고 항변했지만, 자신의 뜻이 관철되지 않자 좌절하고 말았다.6)

야당의 등원 거부 투쟁

끝까지 야당 의원들이 등원 거부 투쟁을 벌여 국회의원직을 내던지고 낙향해 버린다면 그게 오히려 더 좋은 일일 수 있었지만, 절대로 그럴 사람들이 아니었다. 결국 모든 게 김대중의 말대로 되고 말았다. 야당은 "이번 선거가 문제를 남기고 끝난 것을 유감으로 생각한다"는 박정희의 8월 1일 발언을 '사죄'로 간주하였고, 부정 선거구의 재선거와 그 처분문제는 국회 내 특별조사위원회에서 처리하고 아울러 부정선거가 앞으로 일어나지 않도록 법률을 제정한다는 수준의 타협안에 동의해 선거 169일 만인 11월 29일 등원했다. 김대중의 개탄이다.

"얻은 성과는 전혀 없었다. 3선 개헌을 하지 않겠다는 보장이나 지자체를 실시한다는 약속을 얻을 수 없었다. 여당이 앞서 제시한 타협안에서 후퇴한 탓에 아무 소득도 없이 모처럼의 기회를 허망하게 놓쳐 버린 것이다. 나는 이 나라의 정치를 망쳐 독재정치를 초래한 것에 야당에게도 일정 책임이 있다고 생각한다. 한일협정 문제에 이어 이번에도 실현 불가능한 '선거 재실시'를 요구해 아무 것도 얻을 수 없었다. 이는 '한일회담  절대반대' 주장과 궤를 같이 한 것이다. 이러한 야당의 불행한 체질이 이번에도 일을 그르치게 했던 것이다. 강경론과 극한투쟁이란 공허한 명분주의로 야당이 국민으로부터 멀어지고, 독재정권을 돕는 결과를 몇 번이나 초래했는지 모른다"7)

당시 중앙선거관리위원장 사광욱도 야당의 행태에 어이없어 했다. 훗날에 나온 증언이다.

"국회에서 청문회가 열렸어요. 자연 여야 국회의원들이 이번 국회의원 선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으면 나는 '부정선거였다'라고 대답하려고 준비를 하고 나갔어요. 그러면 의원들이 당신이 주관한 선거가 부정선거였다면 책임을 져야 할 것이 아니냐고 물을 것이고, 그럴 경우 그 책임으로 지금 사표를 낸다면서 시원스레 사표를 내려고 사표를 써서 안주머니에 넣고 나갔는데 의원들이 그런 추궁이 없어요. 그래서 뜻을 이루지 못했어요."8)

698년으로 해가 바뀌면서, 1월 21일 북한 무장공비들이 청와대를 습격하는 사건이 벌어지자 부정선거 문제는 완전히 사라져 버렸고 국가안보이슈가 전 사회를 지배하게 된다.(본인추가-이걸 보면 북한은 독재정권에 매번 유리한 행동을 해왔던 것이 아닌가 의심된다. 왜냐하면 그래야 남한을 계속 욕할 수 있으니까. 예를 들면 이때 김신조간첩사건으로 부정선거문제가 국가안보이슈에 막혀버렸고 87년 대선때도 김현희사건이 있었다. 그래서 독재국가 북한과 독재정권 박정희와 전두환은 적대적 공생관계였다.) 결과만 놓고 보면 북한은 늘 박정희의 든든한 우군이었다.


출처

1)김문 <장군의 비망록 1:격동의 현대사를 주도하는 장군들의 이야기>(별방 1998, 63쪽)

2)김충식 <정치공작사령부 남산의 부장들 1>(동아일보사 1992, 137~138쪽) ; 동아일보사 <민족과 더불어 80년:동아일보 1920~2000>(동아일보사 2000, 376쪽)

3)김대중, 일본 NHK 취재반 구성, 김용운 편역 <역사와 함께 시대와 함께:김대중 자서전 1>(인동 1999, 200~201쪽) ; 동아일보사 <민족과 더불어 80년:동아일보 1920~2000>(동아일보사 2000, 376쪽)

4)김대중, 위의 책 200~201쪽

5)김대중, 위의 책 201~202쪽

6)김대중, 위의 책 213~214쪽

7)김대중, 위의 책, 215쪼

8)주돈식 <우리도 좋은 대통령을 갖고 싶다;8명의 역대 대통과 외국 대통령의 비교평가>(사람과 책 2004, 14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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