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필을 헌신짝처럼 버린 박정희---국민복지회사건:박정희와 김종필의 애증관계 박정희

박정희의 이간질 용인술

조선일보 68년 1월 1일자 신념대담에서 고려대 교수 김상협은 이런 말을 했다.

"공화당은 점차 당내 귀족이 생겨나면서 달라져가고 있다. 신라시대 골품제도처럼 신흥귀족들은 자기 품계를 유지하자니 '너도 한몫 나도 한몫'나눠 먹기 식으로 되어가고 있다. 특히 월남파병으로 자신을 얻은 듯 '앞으로 백년이 더 가도 (이 나라_는 우리 것'이라는 기분이 도는 것 같다. 그러니 공신들에게 훈록을 내려주고. 봉토를 하고  ...  좋은 의미에서 왕권정치 비슷하게 되어가고 있다. 그러니 왕위계승문제와 같은 것이 대두되고 있지 않은가."1)

잘 보았다. 1968년 공화당, 아니 박정희에게 가장 대두된 가장 큰 문제는, 바로 '왕위계승문제'였다. 가장 유력한 왕위계승자는 누가 머래도 김종필이었다. 그런데 바로 그런 세상 인식이 문제였다.

박정희와 김종필은 애증관계였다. 김종필이 야심을 버리고 평생 2인자로 살면서 박정희를 영원히 떠받들겠다고 하는 걸 박정힁에게 확신시켜 줄 수 있었다면 박정희는 김종필에게 애(愛)만을 베풀었을 것이다. 5.16 동지애가 아니랴 하더라도 자신이 끔찍히 사랑하는 조카딸의 남편인데 무얼 아끼랴. 그러나 김종필은 박정희 못지 않는 야심을 갖고 있는 인물이었다. 박정희는 그걸 용납하는 인물이 아니었다. 박정희가 그런 김종필에게 준 건 증(憎)밖에 없었다.

(본인추가-물론 김영삼이나 김대중도 자기 밑에서 커서 올라오는 사람들을 철저히 견제했다. 하지만 박정희는 대통령이 되어 이미 권력을 쥐었던 인물. 문제는 그 권력을 누구한테 이전하느냐 하는 문제였다. 여기서 박정희는 육사 8기 충청도출신 김종필을 철저히 팽시키고 밑에 육사 11기의 영남출신 전두환을 키우게 된다. 영남패권이란 바로 그런 것이었다. 물론 그전에 육사 5기의 함경도출신 인사들의 숙청이 제일 먼저 선행되었다. 그 과정에서 함경도기업가들도 숙청당한다. 참고로 적어도 김대중은 내부반발이 있었지만 영남출신 노무현에게 길을 열어주었다. 광주경선에서 노무현이 압도적으로 지지받은 배경도 거기에 있다. 솔직히 DJP연합이후 김대중은 김종필과 연합정신에 맞게 내각에 상당수 김종필측 인사를 중용했다. 경제관련 인사중 상당수가 JP계열이였다. 그런데 김영삼은 3당합당 이후 자기가 대권을 먹자 바로 김종필을 팽해버렸다. 그리고 DJP연합과정에서 합의된 내각제부분도 임기말에 햇볕정책등과의 갈등 그리고 자민련의 충청권지지약화 그리고 결정적으로 개헌의석 부족때문에 이루어지지 못한 측면이 강하다.)

김종필에 대한 박정희의 증오를 표현한 대리인은 중앙정보부장 김형욱이었다. 박정희를 하늘처럼 떠받드는 김형욱은 박정희으 뜻에 따라 김종필을 괴롭혔다. 훗날 박정희의 지지자들은 김형욱이 저지른 일들을 김형욱의 탓으로만 돌리고 박정희와는 무관한 것처럼 이야기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다. 정보장교로 잔뼈가 굵은 박정희는 그렇게 어수룩한 사람이 아니었다. 중앙정보부가 저지른 모든 악행은 박정희의 지시에 따른 것이었다. 물론 고문할때 물고문과 전기고문 사이에 어느 걸 택해서 하라는 구체적인 지시까지는 박정희가 내리지 않았겠지만 말이다.

김형욱은 언제가 전과자를 공용해 김종필에게 테러를 가할 계획을 세웠다. 당시 방첩부대장 윤필용이 이 계획을 알고 박정희에게 보고하자 박정희는 "종필이가 너를 그렇게 미워한다면 넌들 가만히 있겠느냐"며 오히려 김형욱 편을 들어 주었다.

김형욱은 김종필 집을 도청하고, 출입자를 체크하면서, 가택수색까지 벌이기도 했다. 견디다 못한 김종필이 66년 말 윤필용에게 당의장을 그만 둘 생각을 밝혔다. 윤필용이 이 사실을  박정희에게 보고하자 "종필이는 옹졸해. 남을 포용할 줄 모르고 심지어 윤 장군 자네도 자르라고 해", "이후락이는 종필이 칭찬도 하는데 종필이는 이후락이 욕만 해"라고 말했다.2)

김종필과 김형욱을 이간질시킨 걸로도 모자라, 김종필과 윤필용, 김종필과 이후락의 사이까지 벌어지게 만들려는 이런 솜씨를 '용인술'이라고 불러야 하는 걸까. 김종필의 대응 방식에도 문제가 있었다. 박정희가 보기엔 김종필이 우쭐하면서 잘난 척 하는 것으로 비쳐졌을 것이다. 김종필은 5.16의 최종 저작권도 자신에게 있는 것처럼 이야기하곤 햇다.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그런 방식으로 '왕위'를 넘보는 것이 과연 현명한  방법이었는지는 의문이다.(본인추가-윤필용 이후락 모두 경상도 출신, 김형욱은 황해도)

김종필의 정계은퇴 선언

68년 봄에 일어난 이른바 '국민복지회 사건'의 진실은 아직도 정확히 알기는 어렵다. 탄압을 가한 측과 받은 측 주장이 각기 다르기 때문이다. 이럴 때엔 탄압을 받은 측의 주장에 프리미엄을 주는 것이 원칙이겠지만, 탄압을 받은 측이 대단히 불쌍한 약자가 아니기 때문에 프리미엄을 주더라도 아주 조금만 주는 것이 타당할 성싶다.

김종필 측의 주장은 이렇다. 예비역 공군대령 송상남이 국민복지회라는 조직 구상을 갖고 김종필 계열에 접근했다. 김종필의 측근인 공화당의원 김용태는 '농어민 생활향상을 위한 순수연구단체'라는 게 그럴 듯해 회장직을 승낙했다. 김용태 명의의 취지서가 공화당 당원들에게 배포되었다. 그런데 한 당원이 "당내에 복지회라는 반국가단체가 조직되어 대통령 각하를 비방하고 있으니 고발한다"는 내용의 제보와 함께 취지서를 청와대 민정수석비서관 유승원에게 넘겨줬다. 이에 대해 김용태 측은 감용태의 지구당 조직부장이 사생활이 좋지 않아 그만두게 했더니 앙심을 품고 저지른 것이라고 주장한다.3)

유승원은 이를 박정희에게 보고했다. 박정희는 김형욱을 불러 조사를 지시했다. "용서할 수 없는 항명이니 주동자를 색출헤 엄단하라"는 말과 함께. 김형욱은 김용태, 최용두, 송상남 등을 정보부로 연행해 고문했다. 중앙정보부는 송상남이 개인적으로 작성했다는 이른바 '시국판단서'(71년 대통령선거 전망 분석를 음모로 몰아갔다. 이 '시국판단서'의 내용 중엔 "복지회는 여당 내 야당" "67년 선거부정은 박정희 책임" "앞으로 3선 개헌공작은 필연적이며 저지세력 확보 필요" "71년 대통령 선거 대안은 오직 김종필 당의장"등이 들어 있었다.

중앙정보부는 3인에게 고문을 가하면서 "3선 개헌을 반대하고 김종필을 차기 대통령후보로 옹립하려는 음모"라는 답을 듣고 싶어했다.4) 고문을 받던 김용태는 김형욱에게 "혁명을 같이 한 자가 이런 짓을 하려고 혁명했느냐"고 꾸짓자, 김형욱은 끝내 부인하면 김종필계열 인사 17명이 희생된다고 협박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중앙정보부의 조작극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이 김용태 측의 설명이다.5)

5월 25일 김용태와 최영두는 공화당에서 제명되었다. 김종필은 자신과 무관하다고 해명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30일 공화당 의장직과 국회의원직을 모두 사퇴하고 정계은퇴를 하겠다고 선언했다. 이를 특종한 동아일보는 5월 30일 호외까지 만들어 뿌렸다. 이 특종은 기자 김진배가 김종필의 청구동 자택까지 쫒아가 단독 인터뷰를 따내 만들어낸 것이었다. 이 인터뷰에서 김종필은 이런 말들을 했다.

"목수가 집을 짓는다 해도 자기가 살려고 짓는 것은 아니다", "나는 욕심이 없는데 주위에서 이러쿵저러쿵 하는 것은 유감이며, 모략중상에서 벗어나고 싶다." "권력이나 재물에 욕심만 없으면 오해가 없을 줄로 알았는데 나는 욕심이 없어도 오해는 뒤따르는 것이 세태라는 것을 또 알게 되었다. 지금은 당신 같은 기자가 악착같이 내 차를 뒤 쫓아와 또 말을 거니 아직 나는 해방되지 않는 모양이다. 오늘 한 말은 공식 기자회견 전에는 쓰지 않기를 부탁했다."6)

김종필 : 박정희에 대한 울분 폭발

1.21사태(본인추가-김신조사건)가 일어났을 때 김종필 진영은 김형욱을 목표로 안보책임자 인책 공세를 펼쳤었다. 그러자 김형욱은 김종필을 아에 당의장에서 밀어내는 역습작전으로 맞섰고, 결국 국민복지회 건수가 걸려들자 밀어낸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7)

김종필과 김형욱 사이의 갈등이 작용한 점이 전혀 없진 않겠지만, 김형욱은 어디까지나 박정희의 하수인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성 싶다. 김종필은 김형욱은 물론이고, 비서실장 이후락, 당내 4인방(김성곤 길재호 김진만 백남억)(본인추가-이중 김성곤 백남억은 영남출신)에 대한 반발로 정계 은퇴를 선언했겠지만, 사실상 그들을 싸고돌면서 자시늘 박해하는 박정희에 대한 울분을 터뜨린 것이었다.8)

이 사건은 국회의원을 고문한 최초의 사건이었다는 점에서 박 정권의 '폭력성'이 극한으로 치닫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6대 국회 문공위원장을 지냈던 전 의원 최영두는 고문 후유증으로 3년도 못 가 사망하고 말았다.9) 김용태는 박정희가 몹시 아끼고 가까이 한 인사 중의 한 사람이었다. 김용태는 김종필과 고향이 같고 서울사대 동창관계였는데, 민간인 신분으로 김종필의 권유로 쿠데타에 참가했다. 박정희가 어려웠던 시절 박정희와 같이 동고동락하던 사이였지만, 이제 박정희의 지시에 따라  5.16동지에 의해 고문을 당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10)

김종필의 정계 은퇴 소식이 알려진 순간 박정희는 최전방 6사단을 시찰 중이었다. 박정희는 보고를 받고도 표정 하나 바꾸지 않은 채 오히려 사단장 이건양에게 엉뚱한 질문을 던졌다. "이봐 사단장, 저쪽 개활지로 적의 전차가 쳐들어오면 무슨 수로 막겠나?'11)

김종필은 6월 3일 부산에서 가진 고별 기자회견에서 '오래 전부터 생각한 일이며 다시 정계에 복귀할 생각은 없다"고 말했다. 6월 4일 박정희는 윤치영을 당의장 서리에 임명했다. 김종필은 63년 8개월 간에 걸친 '자의반 타의반'의 제 1차 외유, 64년 6.3사태로 인한 6개월간의 걸친 제 2차 외유에 이어 세 번째 외유를 떠나게 되었다.

박정희의 일석이조

김형욱은 아 사건과 관련, 김종필이 68년 초부터 71년 대통령 선거에 대한 의지를 공공연히 표명해 와다는 점에 주목했다.

"1968년 신년호에서 대부분의 신문들은 김종필의 '인터뷰'를 특집형식으로 대서특필하였다. 그 것은 두개의 전혀 상반된 공작의 결과였다. 하나는 김종필의 측근들이 서둘러 각 언론기관을 돌아다니며 특별 '인터뷰'를 종용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종용을 받은 언론들이 일부러 김종필을 부각시켜 박정희와의 내홍을 일으키게 함으로써 당시 사실상 기정사실화된 박정희의 3선 개헌공작을 와해시키려는 기도였었다.  아무튼 김종필은 그런 언론의 내심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니면 오히려 그것을 역이용하려 했는지 알 바 없으니 여기저기서 중대발언을 펑펑 쏟아놓고 있었다. "나는 말입니다. 대통령으로 있는 한 헌법의 한 자도 고치지 않겠다는 박 대통령의 말을 믿고 있습니다."12)

김용태는 국민복지회 사건에 대해 이런 결론을 내렸다.

"국민복지회 사건은 어떤 특정인의 계보를 잡기 위해서라기보다 한편으로 나같이 공공연하게 3선 개헌을 반대하는 세력을 꺽기 위한 것이었고, 또 한편으로는 가슴속에 3선 개헌을 반대할 마음을 먹고 있는 인사들에게 "반대하면 이렇게 된다" 하는, 이를테면 본보기를 보여줄 목적으로 꾸며진 음모였다고 나는 밝히고 싶다."13)

그러나 그게 그 말이었다. 3선 개헌에 반대하는 특정 계보를 잡는 것은 일석이조의 효과가 있다고 박정희는 믿었을 것이다. 박정희의 믿음이 잘못되지 않았다는 건 69년에 가서 입증된다. 


출처

1)남재 김상협선생 전기편찬위원회 엮음, <남재 김사협:그 생애/학문/사상>(한울 2004, 438쪽에서 재인용)

2)김충식 <정치공작사령부 남산의 부장들1>(동아일보사 1992, 100~101쪽)

3)김충식 <정치공작사령부 남산의 부장들1>(동아일보사 1992, 141~143쪽) ; 김교식 <다큐멘타리 박정희 4>(평민사 1990, 23쪽)

4)김충식 위의 책, 141~143쪽

5)김교식 위의 책, 22~23쪽

6)허용범 <한국언론 100대 특종>(나남 2000, 106~109쪽)

7)김문 <장군의 비망록 1:격동의 현대사를 주도한 장군들의 이야기>(별방 1998, 133쪽)

8)김충식 <정치공작사령부 남산의 부장들1>(동아일보사 1992, 145쪽)

9)김충식 위의 책, 145쪽

10)김교식 위의 책, 14쪽

11)김문 위의 책, 134쪽

12)김경재 <혁명과 우상 :김형욱 회고록 2>(전예원 1991, 228~229쪽)

12)김교식 위의 책 22쪽


덧글

  • 서두원 2011/07/10 04:22 # 삭제 답글


    김종필의 쓴물 단물 다 빨아먹은 이는 바로 박정희.

    김종필 바보 만든것도 박정희, 이후락, 김형욱, 차지철을 비롯한 동기들.

    김종필이 군인으로서 등단하지만 솔직히 당시에 박정희가 아닌 김종필이 했어야함.. 박통 탄압정치 유신독재 전부 막았을터.. 전두환 노태우라는 인물도 못나왔을터..역사가 바뀌었을텐데. 그러나 김종필도 나중엔 지역에 기대어 그 스스로 무너져버리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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