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 지역 분열주의의 원흉 지역주의

박정희와 영남패권주의

5,16쿠데타 직후부터 불안했던 박정희의 위치는 영남지연 의존도를 심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양병기는 박정희의 통치방식은 5,16쿠데타 직후부터 "철저히 지역주의와 특정지역 패권주의의 원칙에 입각해 있었다"고 말한다.

"박정희는 자신의 출신 지역인 영남지역 출신 편중의 정치 충원을 통하여 5,16군사쿠데타에 의한 집권과정상의 정통성 결여를 보완하고 정권의 안정화와 재생산을 추진하고자 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영남지역출신이 최고의 정치 충원률을 보이는 가운데 영남의 지역패권이 강화되고 영남지역을 중심으로 한 지배동맹이 구축되었던 것이다. 이 과정에서 호남 차별 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게 되었다."1)

1964년 '호남 푸대접론'이 공개적으로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전남매일 64년 10월 25일자에 실린 <전남은 푸대접받고 있다>라는 제목의 기사가 아마 그 시초일 것이다.2)

전북일보 편집국장 진풍기는 66년 4월 13일자에 쓴 대통령에게 보내는 공개서한에서 "지금 서울의 거리에서 배움의 길을 찾아야 할 어린 나이에 모진 직업전선에 나선 불우 소년소녀들이 들끊고 있습니다. 구두닦이로 혹은 여관, 음식점, 심부름꾼으로  인간 이하의 대접을 받아가며 살아가는 버려진 싹들 말입니다. 이들이 거의 전라도 출신이라면 각하꼐선 놀라실 것입니다"라고 호소했다.3) 영남만 챙기지 말고 호남도 좀 신경을 써 달라는 주문이었다.

66년 5월 광주 '공업단지유치' 추진위원회, 9월엔 '푸대접' 시정위원회, 그리고 67년엔 호남권익투쟁위원회, 호남지방 근대화추진위원회 같은 기구가 호남 유력인사들에 의해 조직되었다. 일부 호남 출신 의원들은 호남 푸대접의 실상을 박정희에게 직접 서한으로 호소하기도 했다.4)

'호남 푸대접의 진상'

그러나 박정희는 요지부동이었다. 67년 4월 29일 박정희는 대선 공약으로 경부고속도로 건설을 발표하였다. 이건 호남을 두번 죽이는 일이었다. 경부고속도로는 총체적 국부의 증대엔 어떤 기여를 할망정 지역균형 발전은 영영 불가능한 '구조'를 만드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세계은행의 자매 기구인 국제개발협회가 "경부고속도로같은 남북 종단보다는 횡당도로가 더 시급하다'며 차관 지원에 난색을 표한 것도,5) 바로 그런 문제와 관련된 것이었다.

이상우는 "제 6대 대통령 선거가 실시되던 67년 무렵에는 '호남 푸대접'론이 한창 비등하던 시기였다"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제 2차 5개년계획이 마무리되어 가던 67년에 이루도록 호남 지방에는 이렇다 할 공장 하나, 그리고 반듯한 도로 하나 건설도지 않았다. 6대 대통령 선거 때 호남인들을 무마하기 위해 박정희 정권은 호남 푸대접의 상징처럼 되었던 호남의 복선화를 공약했으나 착공만 했을 뿐 실제 공사는 조금도 진척되지 않았다."

전남일보 부주필 양동균은 신동아 1968년 11월호에 쓴 <호남 푸대접론의 진상은 어떤가?>라는 제목의 글에서 이렇게 말했다.

"호남 사람들에게 가장 외형적인 치욕감을 주는 것의 하나는 아직도 단선 운행을 하는 호남선 철도다. ... 해방 20수년래에 호남선의 복선화에 대해 구체적인 저부의 시안조차 나온 일이 업다. .... 호남은 영남에 비해서 현저하게 차별 대우를 받고 있다는 사실이다.말로는 지방적인 편재와 격차를 지양한다고 돼 있지만, 실제 공장 건설이나 지역사회 개발을 위한 투자에 있어서 호남은 영남에 비해 현저하게 푸대접을 받아 온 건 사실이다.  울산 공업지내니 마산 공업지대니 하는 대단위 공장 건설은 주로 영남에 배정됐고, 1967년부터 작공한 경부고속도로도 호남은 제외되고 있다. 이밖에 대일 청구권 자금 배정 문제, 항만 건설, 도로 건설, 철도 체신사업, 국고보조금 보조 배정 등 각 면에서 호남 푸대접이 이뤄진 것이 사실이다."7)

"공업은 영남, 농업은 호남"이라는 구도 때문이었을까? 그것도 아니었다. 박정희 정권은 농업 생산의 기본이 되는 수리 시설마저도 영남에 더 투자했다.  68년 현재 시설사업이 완성된 수리조합아 영남에는 72개, 호남에는 23개였다. 67년 한발이 매우 심각했고, 특히 호남지방의 한발이 가장 심했는데, 양수기 배정은 영남 6 호남 1의 비율로 이루어 졌다."8)

그런 차별이 '호남 죽이기'를 위한 무슨 음모에서 비롯된 건 아니었을 것이다. 문제의 핵심은 앞서 지적했듯이, 박정희가 겉으로 떠든 것과는 달리 연고와 정실에 매우 약했으며, 인사 정책도 연고와 정실의 지배를 받았다는 점에 있었다. 그는 쿠데타 하듯이 통치했다. 쿠데타란 믿을 수 잇는 배짱이 맞는 사람 위주로 꾸미는 게 아닌가. 박정희 인사가 연고 위주로 흐르다보니. 모든 행정이 연고 중심을 이루어졌고, 그 결과 후 수십 년간 지속될 지역 갈등의 씨앗을 심게 된 것이다.

36년 걸린 호남선 복선화

1966년 252만 명을 넘어섰던 전북 인구는 2004년에 이르러 190만명대로 떨어졌으며, 이마저도 위협받아 곧 180만대로 전락할 지경에 처해 있다. 그 이유는 60년대와 70년대의 역사에서 비롯된다. 60년대와 70년대 내내 "전남북도와 강원도는 만성적인 인구 감소 지역이 되었고, 경상남북도의 신흥 공업 도시는 높은 인구 성장률을 보여 한국공업의 지역적 불균형성을 반영하게 되었다."9)

1960년 이후부터 따져 보더라도 호남의 인구 감소는 매우 놀라운 수준을 보여주었다. 이상우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5.16 전 해인 60년 말, 영남의 인구는 819만 4천 명이었는데 10.26 다음 해인 80년에는 1천 142만 9천 명이 되었다. 그 동안에 323만 5천 명의 인구가 늘어난 것이었다. 이에 비해 호남의 인구는 60년대 말 594만 8천 명에서 80년 606만 5천명이 되었다. 20년 동안 11만 7천 명밖에 늘지 않은 숫자였다. 60년 말 한국의 총 인구는 2천 498만 명이었다. 그것이 80년에는 3천 742만명이 되어 그동안 50프로의 인구증가르 보였다, 이 증가율을 호남에 적용한다면 80년의 호남 인구는 약 900만 명이 되어야 한다는 계산이 나온다. 그런데도 박정희 통치 20년 동안 호남 인구가 거의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었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인가. 자연 증가분에 해당하는 약 300만 명은 어디로 갔는가? 그 동안 서울 인구는 244만 5천만 명에서 835만 명으로 늘어났다. 50프로의 자연증가율을 감안하면 약 470만 명이 외지에서 서울로 이주했다는 계산이 나온다. 이 가운데 반 이상이 호남 사람이 아니었을까?"10)

박정희가 호남을 위해 던진 '호남선 복선화' 카드는 마지못해 던진 것이었기 때문인지도 몰라도 공수표로 되고 말았다. 호남선 복선화가 이루어진 건 그로부터 36년 후인 2003년 12월 8일이었다. 호남선 복선화가 이루어진건 그로부터 36년 후인 2003년 12월 8일이었다. 그 날에서야 비로서 호남선 복선화의 마지막 잔여 구간인 전남 무안군 삼향면 임성리-목포역간 7.3km 구간 공사가 완료된 것이다.

박정희를 사랑하는  영남인은 '호남 푸대접론'에 별로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그건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누가 옿건 그르건 극심한 분열이라고 하는 사실 그 자체다. 문제의 요점은 이것이다. 박정희는 한국인의 분열주의를 증오했다. 즉 누구보다도 한국의 분열주의를 증오하고 개탄했던 박정희는 자신의 사후 20년이 넘도록 꺼지지 않는 지역 분열주의의 화마 또는 그 원흉이 된 것이다.


출처

1)양병기 <1960년대 국가통치기구의 개편; 군부통치의 내용을 중심으로>,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편 "1960년대 정치사회변동"(백산서당 1999, 269~270쪽)

2)정근식 <지역감정과 지역문제>; 고영욱 편 <한국사회문제>(사회문화연구소 1991. 543쪽)

3)고길섶 <우리시대의 언어게임 : 언어로 보는 한국현대사>(토담 1995, 323~324쪽)

4)이상우 <박정희 18년 : 그 권력의 내막>(동아일보사 1986, 341쪽) ; 정영태 <개발연대의 노동자계급 형성 :인천지역 노동자를 중심으로>, 이정구 외 "1960~70년대 한국의 산업화와 노동자 정체성"(한울아카데미 2004, 295쪽)

5)김용환 <임자, 자네가 사령관 아닌가 : 김용환 회고록>(매일경제신문사 2002, 54쪽)

6)이상우 <박정희 18년 : 그 권력의 내막>(동아일보사 1986, 341~342쪽)

7)고길섶 <우리시대의 언어게임 : 언어로 보는 한국현대사>(토담 1995, 323쪽에서 재인용)

8)이상우 <박정희 18년 : 그 권력의 내막>(동아일보사 1986, 341)

9)박경애 <인구변동과 사회변동>, 홍두승 편 "한국사회 50년:사회변동과 재구조화"(서울대학교 출판부 1997,30쪽)

10)이상우 <박정희 18년 : 그 권력의 내막>(동아일보사 1986, 34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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