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전에 조선은 개항 20년만인 1898년에 국채를 모두 갚았다.
그리고 1900년 조선의 GDP순위는 아시아 2위 세계 27위인 850달러를 달성한다
그리고 1900년 조선의 GDP순위는 아시아 2위 세계 27위인 850달러를 달성한다
아시아에서 1위 일본(24위 1185달러) 다음이 2위 조선(27위 850달러)으로
청나라(35위)는 652달러였다.
그럼 세계순위는 어땠을까
1위 영국이 4593달러, 2위 뉴질랜드 4320달러, 3위 호주 4299달러 4위 미국 4096달러 5위 벨기에 3652달러 순위를 기록하고 있었다
그럼 세계순위는 어땠을까
1위 영국이 4593달러, 2위 뉴질랜드 4320달러, 3위 호주 4299달러 4위 미국 4096달러 5위 벨기에 3652달러 순위를 기록하고 있었다
그리고 일제 강제병합 35년 도둑질 약탈후
1945년 해방직후엔 1인당 소득은 다시 한일합방수준으로 돌아가버린다. 순위 역시 100위 밖으로 밀려나 버린다.
1900년대 고종과 조선의 노력으로 한양은 미국 워싱턴 D.C를 모델로 도시 전체가 개조되고
전국 각지에서 빠르게 근대화의 변화를 맞이하고 있었다
850달러로 세계에서 상위권을 기록했지만
일제 35년을 거치고 1945년 독립했을때 조선은 아프리카 보다 못하게 된다
출처는 앵거스 매디슨(Angus Maddison)의 "20세기 세계 경제: 역사적 통계"
(http://www.oecdbookshop.org/oecd/display.asp?TAG=XZHJ28XX4X581X5X1S1IUY&CID=&LANG=EN&SF1=DI&ST1=5LMQCR2K1TD7)
여기 5장 아시아편
(http://www.oecdbookshop.org/oecd/display.asp?TAG=XZHJ28XX4X581X5X1S1IUY&CID=&LANG=EN&SF1=DI&ST1=5LMQCR2K1TD7)
여기 5장 아시아편

대한제국의 근대화 일부의 모습들
~행정~

1897년 관제개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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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8년 의회 설립 (중추원 : 임명의원 25명, 민선의원 25명)

서울시청[한성부 청사]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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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년 경무청(警務廳) 창설.
근대경찰 제도 시작.

1895년 근대 소방시스템 도입.

1895년 전국민 평등법 제정.
~교통, 통신~

1898년 전차개통

1898년 한성전기회사 설립. 전기보급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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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9년 철도개통. (1899년 촬영)

1897년 착공, 1900년 개통된 한강철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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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4년 근대 우편제도 실시 (우체부)

1885년 電信 개통.
통신원 직원 기념 촬영.
통신원 직원 기념 촬영.

1885년 電信 개통......1886년 전신교환원 사진

1903년 자동차 수입시작.
~의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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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5년 서양의학 도입
(1904년 촬영, 세브란스병원)
(1904년 촬영, 세브란스병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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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년 촬영, 대한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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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에스더(1877-1910)
최초의 여의사
최초의 여의사

1903년 제네바협약 가입. 적십자 활동시작.
~군대~

1881년 군제 개편

대한제국군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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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식 무기 도입(암스트롱 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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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년 사관학교 설립
(1900년 촬영, 해군사관학교)
(1900년 촬영, 해군사관학교)

1903년 신식군함 도입
~교육~

1883년 근대교육 실시

1883년 근대교육 당시의 교과서

1885년 서양시찰 유학생

1886년 여성교육 실시

1899년 외국어 전문학교 설립
~언론~

1883년 근대 언론 시작
(신문사의 모습)
(신문사의 모습)

1896년 민간 신문 발간
독립신문-한글판과 영어판으로 발간.
독립신문-한글판과 영어판으로 발간.

1898년 일간지 발행시작.

1898년 민중집회 시작
만민공동회
만민공동회
~경제~

1902년 근대 화폐제도 실시

유통된 금화

1904년 은행권

1883년 전환국 설치. 근대화폐 발행시작.

1897년 보험회사 설립, 보험업무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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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7년 민간 자본은행 설립 , 1898년 대한제국의 채무 해결.
(한성은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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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익산 금광
(1899년 촬영)
(1899년 촬영)

1895년 운산광산

1906년 공업전습소 설립. 공업개혁에 박차.

1899년 상업, 경제전문 일간지 창간
~외교~

1883년 미국에 외교사절단 파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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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8년 미국 워싱턴 주재 영사관 업무시작.
(사진은 1891년)

1907년 네덜란드에 특사파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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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년 중명전 (외교사절 접견장)
~문화 예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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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창작소설 출판(혈의 누.1906년)이인직 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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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5년 영화관 개관(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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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공연문화 시작 (1895년 협률사 공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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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극장 원각사 (1908년)
~종교~

1886년, 종교와 선교의 자유 획득, 1898년 명동성당

1892년 신학교 설립.

1898년 개신교 교회설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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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0년 성공회 병원(성누가병원)설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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샬트수녀원(1905년 촬영)
~SPORTS~

1906년 야구팀 설립.

1896년 축구팀 설립.

1900년 골프장 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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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년 필드하키(또는 격구)를 즐기는 사람들
덧글
이런 형편이니 정부 재정이 심각하게 나빴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고, 이렇게 부족한 재원을 내장원이 메우다가 1905년 통감정치가 시작되면서 재정관련 고문관에 의해 이런 재정 문제의 해소를 핑계로 내장원 대신 일본 정부 차관으로 정부를 운영하게 만든 겁니다. 그러면서 내장원 수입 역시 사용을 극단적으로 억제시켰고, 황제 역시 내장원 수입으로 정부 재정의 적자를 메워 줄 생각이 없었던 것이 문제였습니다. 그리고 이 내장원 자금 역시 재원 및 출처를 명확히 하지 못하는 - 통치자금이었으니까요 - 약점 때문에 1905년 이후부터는 사용에 극심한 제한이 붙었고, 이 때문에 내장원 역시 1906년부터는 일본 다이이치 은행에서 대출을 받는 형편이 됩니다.
하여튼 요약하자면, 일단 대한제국 시기 세입/세출 구조가 정부 세입/세출과 황실재산 세입/세출 사이의 경쟁(특히 황제의 치부 및 통치자금 확보 목적) 때문에 서로 제살깎아먹기를 심하게 하고 있는 상태였던 것이 문제입니다. 이때 발생한 인플레이션과 과도한 세출 증가 때문에 대한제국 정부의 재정건전성은 심각하게 약화된 상태였고, 이 상태에서 일본은 정부의 요직에 고문관을 배치한 상태에서 재정건전성의 회복이라는 명분으로 군비 강제 감축(즉 군대해산의 선조치)과 함께 고액의 일본 차관을 받아들이도록 강요한 겁니다. 그 결과 1907년 시점에선 정부 1년 총예산의 7~80%에 달하는 국채가 쌓여 있게 된 거죠.
당시 대한제국 정부 세입과 내장원 관련 데이터는 한국사 권42 <대한제국>편, II. <대한제국기의 개혁> 5. <대한제국기의 재정정책>에 있는 표들입니다.
이러다 일제에 넘어갔는데 일제도 마찬가지로 앞에 정치적 부분에서 총독이 와서 다스렸기 때문에 고종과 별반 다를게 없습니다. 다만 근대적 제도 수입에 있어서 고종이 하던 걸 그들이 대신 했죠.
따라서 일제가 아니더라도 고종이 대신 할 수 있는 일이 일제가 했다는 측면이 있습니다.
그리고 정치적 개혁부분은 3.1운동에서 정점을 이루었고 3.1운동은 일본의 다이쇼 데모크라시와도 연결이 되는 것 같습니다. 독립협회때는 입헌군주정을 지지했지만 고종때 전제군주정으로 돌아갔고 일제시대에도 일본본토가 아닌 대한민국내에서는 총독부통치로 사실상 전제군주정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3.1운동때는 공화정을 지지했구요.
일제때 조선에 일본법률이 적용되기도 했지만 그것은 엄연히 조선총독부령에 의해 의용된 것일뿐이고 대한민국에 연방의회같은 조직이나 최소한 지방의회같은 조직이 만들어져서 그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닙니다. 총독부의 총독에게 조선에서의 입법권 행정권 군대통수권 사법권이 주어졌다는 점에서 고종의 전제군주정이나 총독부의 총독통치나 정치적인 면에서는 비슷하든 것이죠.(그리고 총독은 현역 육 해군 대장중에서 임명되었습니다.) 나아가 합방 후 조선에는 일본 헌법이 적용되는 것이 아니었고 소위 천왕의 대권(칙령)으로 통치하는 것이 기본지침으로 세워졌습니다.
그나마 일제에 좀 나아진 것은 사법기관이 총독부아래 세워졌다는 부분입니다.(총독부와 별개가 아닙니다. 즉 3권분립이 아님) 하지만 이 부분도 과거 홍법14조에서 부분적으로 받아들여졌고 그 당시 민법과 형법을 제정하여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한다는 규정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독립협회때에는 입헌군주제, 일제하 3.1운동때는 공화정을 지지하는 민중운동도 있었습니다.
고종의 대한국제가 정치적인 부분에서 엄청나게 후퇴했고 전제군주정이었지만 일제의 총독부정치도 별반 다르지 않다는 거죠. 고종이나 일제나 정치적인 부분을 제외하고 근대적인 문물과 제도를 도입할려고 했구요. 일제는 고종대신 자신이 그것을 하겠다고 나선 것인데 그정도는 이미 고종도 할려고 했던 내용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일제에 대해 하등 고마워할 필요가 없다는 거죠.
나아가 조선이 일제에 먹힐 당시에 즉 1910년에 조선은 세계27위수준이었는데 해방이후 조선은 100위아래도 밀려났습니다. 그런 면에서 오히려 일제에 대해 따져야 할 부분이많죠.(수탈론에서 말하는 수탈도 부분적으로 있었다는 점도 같이) 일제에 의해 조선에 채워진 근대적 제도는 고종에 의해서 그리고 그 뒤의 역사적 발전에 의해서 충분히 채워질 수 있는 내용이었고 경제발전도 오히려 더 후퇴합니다.
사실 박정희도 그런 면에서 마찬가지입니다. 나아가 박정희는 제2공화국의 민주적 정부를 군대의 힘으로 무너뜨려버렸습니다. 그 결과 한국에 40년이상 군부독재의 시대를 엽니다. 물론 자신의 집권기 중 3공화국때에는 연성독재 4공화국때에는 아에 강성독재로 빠져버립니다. 그리고 박정희시절 전두환군부세력이 커가게 됩니다. 군부독재의 장기화의 조건이 이미 박정희시절 마련되었던 것이죠.
물론 박정희지지자들은 박정희가 한국의 경제개발을 했다고 하고 그게 마치 박정희만이 할 수 있는 것처럼 말합니다. 하지만 이미 2공때의 한국은 경제개발에 목말라 있었습니다. 장면정부에 대핸 연구해보면 그 시절 장면이 막 시작하려던게 경제제일주의였습니다.
그리고 2공화국 초기의 혼란스러움은 처음 자유가 주어졌을때 자연스럽게 나올 법한 그런 것이었고 그 이후 사회혼란도 많이 줄어가고 있었습니다. 박정희는 4.19일주년 기념일에 엄청난 데모가 일어나 쿠데타에 유리한 정국이 만들어지길 바랐지만 정작 당일은 조용했습니다. 나아가 정작 데모가 일어났다고 박정희가 보고되었을때 그것은 고작 수십명의 창녀와 포주들이 매춘을 합법화해 달라는 데모였고 그것이 박정희를 좌절시켰을 정도였습니다. 나아가 박정희는 장면 정부가 출발하자 마자 쿠데타를 이미 계획하고 있었습니다. 장면정부의 잘잘못을 떠나 무조건 쿠데타를 해야겠다는 전제가 이미 선 상태였습니다. 따라서 쿠데타 이유로 장면정부를 걸고 넘어지는 것은 역사적 사실과 배치됩니다.
그리고 경제계획원 경제개발계획 한국경제인협의회등이 이미 장면정부시절에 있었던 제도입니다. 그리고 미국의 대한정책의 변화는 한국이 수출주도로 갈 수 밖에 없었던 환경이었습니다. 더욱이 내자도 없어서 그 당시 외자에 의한 발전외 대안이 없었습니다.(박정희 화폐개혁이 실패한 이유를 보시면 됩니다.)
이번 포스팅은 박정희가 중심이 아니므로 관련 내용은 앞으로의 포스팅을 통해 추가해 가겠습니다.
정리하자면
일제는 고종의 대한국제를 엎어버리고 일본제국주의를 출범시켰습니다. 하지만 둘 다 정치체제는 전제군주정이었고 일제하에 이루어진 근대적 제도나 문물의 도입은 고종도 대한국제를 유지하기 위해 하고자 했던 내용입니다. 그리고 일제때 조선인은 3.1운동을 통해 공화정을 지지했을 정도로 정치적인 지향점이 확실히 바꿔 있었습니다. 3.1운동의 영향을 받은 임시정부도 공화정이였구요.
이러한 조선인의 태도로 봤을때 대한국제에도 마찬가지로 똑같은 3.1민주혁명이 일어났을 것이라고 봅니다. 마찬가지로 이러한 대한국제를 지지하는 세력은 근대적 문물을 수입하려고 했을 것이고 3.1운동을 일으켰던 세력은 근대적 문물과 제도도입에 정치적 혁명도 추가하려고 했을 겁니다.
결국 일제는 조선의 민주발전에 있어서는 고종보다 더 큰나큰 암덩어리였고 경제발전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초기 27위에서 100위밖으로 밀려남) 고작 고종때 하려고 했던 근대적 제도와 문물의 수입정도가 있었지 않나 생각합니다. 물론 고종 때 지계제도나 기타 근대적 제도의 부분적 수입이 있었습니다.
나아가 박정희는 일제 30년의 역사를 다시 독립한국에 연장시킨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전제군주정의 역사를 다시 말입니다. 특히 4공은 사실상 전제군주정이라고 밖에 볼 수 없습니다. 박정희는 그가 만주군관학교와 일제육사출신이라는 면에서도 친일파이지만 그의 집권기간과 후의 군부독재기간동안 대한민국에 일본제국주의 역사를 연장시켰다는 점에서 진짜 친일파입니다. 아이러니하게 일제 총독부통치도 군부통치였습니다.
-오두환, 「한말 차관문제의 전개과정」중에서 발췌.
본인께서 말씀하신 어느 구절을,'기억에 감안하였으니 양해해 주십시오'라고 할 문제는 아닌것 같기에 부연합니다. 더군다나 콜트레인님께서는 다른 분 블로그에서는 이런 증거나 세부자료의 제시를 중시하시는 분 같기에 양해해주시리라 믿고 감히 올려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