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행 총재도 모르게 한 화폐개혁 1960년대 역사

한은 총재도 모르는 화폐개혁

군사정권에서 군사문화의 특성이 가장 잘 드러난 것 가운데 하나가 바로 통화개혁이었다. 군사정권은 62년 6월 9일 밤 0시를 기해 긴급통화조치법을 의결, 10일 0시를 기해 3차 화폐 개혁을 단행했었다. 9년여 동안 사용했던 환화는 원화로 바꿔었다. 옜날 돈 10환은 새 돈 1원으로 평가절하 되었다.

 화폐개혁은 61년 8월 극비리에 추진해온 것이었다. 당시 재무장관 천병규를 비롯한 5명의 화폐개혁 준비반은 "기밀을 누설할 경우. 총살형도 감수한다"는 선서를 하고 업무를 추진했다. 새 돈은 보안유지를 위해 영국의 민간 화페 제조회사에 의뢰했으며, 영국제 새 돈은 정기 화물선에 실려 62년 4월 28일 부산항에 도착했다. 아직 44일간의 시간이 남아 있어 이 돈은 폭발성 화확물질로 위장된 채 군함에 옮겨져 한동안 바다에 떠 있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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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라운 사실은 한국은행 총재마저도 화폐개혁을 전혀 몰랐다는 점이다. 군사정권은 6월 9일 하오 7시 반에서야 한은 총재 민병도에게 설명을 해 주었다. 민병도의 회고다.

"회의실에 들어서자 벌써 최고의원 의원들은 모두 제자리에 앉아있고, 분우이기는 착 가라앉아 있었다. 의장이 착석하자 곧 재정경제위원인 유원식 장군이 통화개혁에 대한 제안 설명을 했다. 혹시나 했던 예감이 적중하자 나는 쇠망치로 뒤통수를 크게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아닌 밤중에 홍두께 겨이란 이를 두고 한 마일까. 졸지에 당하는 통화개혁, 한 나라의 중앙은행 총재가 이 통화개혁의 제안 설명을 듣는 광경, 이는 매우 아이니컬하 모습이 아닐 수 없었다. 결국 이날 회의에서 통화개혁안은 만장일치로 통과되었다. 그리고 나에게는 앞으로 한은 총재로서 해야 할 중요한 임무가 부여되었다. 이것이 내가 맞은 일생일대의 큰 사건인 통화개혁의 전부였다. 나는 무척 기분이 나빴다. 나쁜 정도가 아니었다. 화가 났다."

화가 난 건 민병도만이 아니었다. 경제기획원장관 김유택도 까맣게 몰랐다. 이젠 혁명 주체가 아니라 통화개혁주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관련 분야의 혁명주체 중에서도 소외된 이들이 있었다. 통화개혁주체는 최고회의 재경위원장이었던 김동하에게도 사전에 통화개혁을 알리지 않아 큰 반발을 불러 일으켰다.

미국의 강력 반대

그러나 그런 반발이 아무리 크다 해도 통화개혁의 성패를 좌우할 정도는 아니었다. 가장 큰 문제는 미국이었다. 통화개혁주체는 미국에게도 통화개혁을 사전에 알리지 않은 것이다. 미국은 불쾌감과 더불어 통화개혁이 사호주의적 정책이라는 이유로 강하게 반발하였다.

통화개혁주체가 이토록 유별나게 군 것은 기밀 누설보다는 반대론을 꺼려쓸 가능성이 높았다. 그런데 바로 이게 문제였다. 반대론을 꺼려 꼭 의논해야 할 당사자들을 배제시키다보니 심각한 판단 착오를 저지른 것이다.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기대했던 돈이 나오질 않은 것이다. 이석재는 이렇게 말한다.

"통화개혁은 혁명정부가 경제 사정을 너무 안이하게 판단한 데서 기인한 뻐아픈 실수였다. 극비리에 단행된 통화개혁의 주된 목적은 사회에서 퇴장하여 장롱에 숨겨진 현금을 실물경제로 끌어들이기 위한 포석이었다. 특히 화교들은 잉여자금을 은행에 넣지 않고 철저하게 자신들의 금고에 쌓아두고 있었다고 믿었다. 이러한 퇴장자금을 끌어내 경제건설에 투입해보려는 의도는 보기 좋게 실패로 막을 내리고 말았다. 생각한 만큼 현금이 나오질 않았던 것이다. 나타나지 않았다기보다는 국민들이. 가진 돈이 없었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 듯 싶다. 혁명정부는 국민들 장롱에 돈이 있느냐 없느냐의 상황판단을 잘못해서 일을 크게 그르치게 된 것이다"

미국은 통화개혁 실시 48시간 전에서야 통고를 받은 데 대해 분노했다. 미국의 엄청난 원조를 제공받는 나라가 '멋대로' 행동하는 것에 대해 배신감까지 느꼈다는 것이다" 미국은 예금 동결을 용납할 수 없었다. 미국은 기한 1년 미만짜리 예금의 일부를 동결한 것은 부당하다며 해제를 요구했고, 이어 원조 중단을 무기로 삼아 모든 봉쇄 계정의 해제를 요구했다.

군사정권은 미국의 요구를 뿌리칠 수 없었다. 나올 돈도 없는데 버틸 이유도 없었다. 7월 13일 봉쇄 예금이 전면 해제되었다. 최고회의는 통화개혁의 실패의 책임을 물어 재경위원장 김동하를 외무국방위원장으로 돌리고 통화개혁의 발상자인 유원식을 사임시켰다.

유원식은 군으로 복귀했다. 유원식과 같이 일했던 서울대 교수 박희범도 정책 라인에서 퇴장했다. 그 전에 내각수반 송요찬과 재무장관 천병규도 증권파동의 책임을 지고 물러났다. 그리고 통화개혁에 반대했던 김정렴이 중용되었다.

먼 훗날(1987년) 유원식은 자신이 해임을 당한 게 아니라 미국의 압력에 굴복한 박정희는 "배신자이니 더 이상 함께 일할 수 없다"고 말하며 자진사퇴했다고 주장했다.

내자동원에서 외자도입으로

62년 12월 17일 박정희는 1년 만에 처음으로 공식 기자회견을 갖고 "화폐개혁은 확실히 실패했습니다.....내자 동원을 위해 화폐개혁을 하긴 했는데 뚜껑을 열어보니 뜻대로 되지 않았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박정희가 한가지 밝히지 않은 게 있다. 화폐개혁은 다목적이었다. 앞으로 있을 선거를 염두에 두고 야당의 정치자금줄을 봉쇄하겠다는 것도 부수적인 목적이었다.

이 사태 이후 군사정권은 자력갱생 노선을 버리게 되었다. 유원식과 박희범의 퇴장은 '내포화 공업화 전략' 또는 '자립경제를 지향하는 자주적 공업화 전략'의 폐기를 의미했다. 통화개혁 실패는 내자 동원에 의한 민족주의적 경제 개발이 어렵다는 걸 보여 주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후 군사정권의 경제정책은 외자도입, 보세가공무역, 수출입국과 같은 대외 개방노선으로 선회하게 되었다.

5.16 쿠데타 후의 첫 경제백서인 <1962년>이나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서>에는 수출은 국제 수지 개선을 위한 수단으로만 언급되었을 뿐 큰 무게는 주어지지 않았다. 이제 곧 나타날 전면적인 수출전쟁은 그런 시행착오를 겪은 후에서야 나온 결과였다.

그러나 그 시행착오엔 미국의 뜨거운 입김이 가세했음을 간과할 수 없다. 미국은 미국 방식과 다른면 무조건 '사회주의적'이라고 몰아치는 못된 버릇을 갖고 있었다. 군사정권 초기 "균형성장 전략"은 미국의 관변 교수 로벝 스칼라피노에 의해 사회주의적이란 비판을 받았다. 일단 이런 평가가 내려지면 미국의 지원은 커녕 방해를 당하다가 실패로 갈 수 밖에 없었다. 그게 한국의 현실이다.


출처는 한국현대사산책 1960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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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기사 2010/07/02 20:20 # 답글

    좋은 정보글 잘 읽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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