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수출주도공업화정책의 뿌리와 장면의 한국경제협의회 박정희

1. 한국경제협의회는 장면정부하에서 최초로 만들어진다.

김기승 <민주당 정권의 경제정책과 장면> 

종합경제회의는 정부가 주도하여 개최한 전국 규모의 경제회의로서는 최초이며, 민간의 광범위한 의견을 수렴하여 정부의 정책에 반영하려는 적극적인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다.20) 이 회의를 계기로 장면 정부와 민간 기업인간의 협력 체제는 보다 더 공식화되었다. 즉 1961년 1월 10일에는 경제계 인사 70여명이 회합하여 오늘날 전국경제인연합회의 전신인 한국경제협의회를 창립하였다. 한국경제협의회의 발족은 장면 정부와의 유기적 협조 하에서 추진되었다고 한다. 또 협의회가 장면 총리 집무실이 있는 반도호텔에 위치함으로써 정부와 협의회 인사들간의 자연스러운 협조가 이루어졌다고 한다. 한국경제협의회 발족시 장면 총리는 축사를 통해 정부 정책의 잘못이 있으면 기탄없이 지적할 것을 당부하면서 협의회와 정부의 상호 협력으로 경제발전을 이룩할 것을 역설했다.21)  당시 부흥부 산업개발위원회에서 경제개발계획 입안에 참여하고 종합경제회의 간사를 맡았던 김입삼은 장면 정권기의 민관협조체제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했다.

사농공상의 질서가 엄격했던 한국 역사 상 ‘士’로 상징되는 관료 집단과 ‘工商’으로 상징되는 기업가들간의 협조체제가 이 시절만큼 훌륭하게 조화를 이룬 적은 없다고 본다. 바로 민간 創意의 시장경제가 막 꽃피려는 시기였다.22) 

 종합경제회의에서 집약된 경제정책에 대한 민간측의 의견은 장면 정권과 그에 뒤이은 군사정권에 의해 대부분 채택되어 시행되었다.23) 이 점에서 경제정책 수립을 위해 여론을 수렴하기 위한 절차는 실질적이고 효율적인 정책 수립에 크게 기여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때 건의된 정책 중 주목할 만한 것으로는 경제행정기구개편 분과위원회에서 제안한 ‘경제계획원의 설치’‘부흥부의 건설부로의 개편’ 제안이었다.



2.. 한국경제협의회는 5.16쿠데타로 해산되었다가 이름만 한국경제인협회로 바뀐다.(그래서 장면정부하의 한국경제협의회와 그 조직이 고스란히 이름만 바꾼 한국경제인협회는 전경련의 전신이다.)

김입삼 <김입삼 회고록 '시장경제와 기업가 정신'> (27) 경제인협회

외부적인 힘에 의해 결성된 재건촉진회가 민간 경제단체로 탈바꿈하는데는 한달이 채 걸리지 않았다. 창립총회에서 1개월후 회장직을 맡기로 했던 이병철 삼성사장은 61년 8월 16일 임시총회를 열고 한국경제인협회를 출범시켰다. 이병철은 특유의 치밀성과 구상력을 동원해 이전 한달 동안 경제단체가 지향해야할 바를 연구했다. 그는 우선 5.16 직후 군인들이 중구난방식으로 표명하는 경제운영에 대해 방향부터 제대로 잡아야겠다고 결심했다. 이를 효과적으로 추진하기 위해 기존의 경제재건촉진회를 해체하고 조직 이념과 기풍을 일신하는 새조직으로 혁신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결심이었다. 그래서 단체 명칭부터 바꾸기로 했다. 

 이전의 한국경제협의회를 다시 살리는 방안도 고려됐으나 새출발하는 마당에 협의회의 창립이념을 계승할지언정 이름만은 바꾸자는 의견이 우세했다. 한학에 조예가 깊은 대한양회 이동준 회장과 어렸을 때 조부에게 한학을 배운 이병철 회장은 "경세제민 또는 경국제민의 뜻을 가진 사람들의 모임"이라는 의미에서 "한국경제인협회"라는 이름을 지었다. 

 이때부터 우리나라에서 "경제인"이라는 용어가 널리 통용되기 시작했다. 그 이전까지는 한국경제협의회의 취지문 등에 드러나있는 대로 일본식 용어인 "실업인"이라는 말이 자주 쓰였다.

3. 그런데 한국경제인협회가 박정희로 하여금 수입대체형공업화가 아닌 수출주도형공업화전략을 취하도록 조언한다. 그리고 이들의 조언은 해산되기전 한국경제협의회가 마련한 안이었다.

1) 김입삼 <김입삼 회고록 '시장경제와 기업가 정신'> (24) '제안'

61년 6월 하순 어느날. 최고회의 유원식 상공담당 최고위원으로부터 연락을 받은 김용완 경방사장, 전백보 천우사사장, 정인욱 강원산업사장 등이 최고회의에 나타났다. 곧이어 유원식과 함께 박정희 최고회의부의장이 접견실로 들어왔다. 박정희는 자리에 앉자마자 곧바로 본론을 꺼냈다. 

"경제를 어떻게 하면 살릴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 고견을 듣기 위해 뵙자고 한 것입니다"

검은 안경에 깡마른 체격, 풍기는 인상과는 달리 매우 정중하고 공손한 말투였다. 박정희는 이후에도 그랬지만 기업인들을 매우 정중하게 대했다. 기업인들도 국가최고 지도자라고 해서 머리를 "조아리는" 경우는 드물었다. 그만큼 당당했다. 소신있는 몸가짐에 나는 늘 강한 인상을 받아왔다. 이날도 그랬던 모양이다. 

나중에 이들 세 사장에게 들은 이야기를 중심으로 이날의 대화내용을 다시 꾸며본다. 박정희는 주로 묻고 듣는 편이었다. 

"순서없이 어느 분이나 평소의 생각을 자연스럽게 말씀 해주시지요"

김용완 사장이 전택보 사장에게 먼저 하라고 눈짓을 했다. 전 사장은 낮은 목소리로 말문을 열었다. 

"
지난 5월 하순 정회된 한국경제협의회가 최고회의에 건의한 내용을 앞으로 경제운용에 반영해주시길 바랍니다. 학계나 언론에서는 한국경제 앞날에 대해 비관하는 경향이 강하나 우리 경제인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특히 여기 계신 두 분과 저는 우리가 자립경제를 능히 이룩할 수 있다는 소신을 갖고 있습니다"

이후 이어진 전 사장의 경험담은 박정희를 솔깃하게 했다. 

"47년 홍콩에 갔을 때 얘깁니다. 당시 홍콩에는 중국 본토에서 모택동군에 쫓겨 홍수처럼 밀려든 피난민들이 우글거렸습니다. 물까지 수입해서 먹는 홍콩이 몇백만의 피난민에게 일터를 마련하고 활기차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고 비결이 궁금했습니다. 바로 "보세가공"을 해서 수백만이 살아가고 있더군요. 홍콩에 비하면 우리 여건은 잘 운영만 하면 몇갑절 유리하다고 봅니다"

박정희는 보세가공이란 말을 처음 듣는 듯 했다. 좀더 자세히 설명해달라고 부탁했다. 계속되는 전 사장의 설명이다. 

"홍콩은 작은 섬이라 자기들이 직접 생산하는 원자재는 하나도 없습니다.
전부 외국에서 수입합니다. 외국에서 원자재를 들여와 가공 수출하는게 보세가공입니다. 이를테면 원단을 수입해서 아동복이나 봉제완구 크리스마스 장식품을 만들어 다시 수출하는 거지요. 홍콩의 부녀자들은 재봉틀 하나를 갖고 4~5명의 식구를 먹여 살리고 있습니다. 우리 여성들의 봉제기술은 아마 세계에서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정도일 겁니다" 

박정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확실히 잡히지 않는 듯했다. 

"미안하지만 내일 별도로 시간을 낼테니 다시 오셔서 설명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미안하지만 내일 별도로 시간을 낼테니 다시 오셔서 설명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전택보가 이튿날 박정희를 만났음은 물론이다. 이때부터 제대로 알기위해 철저히 파고드는 박정희의 기질이 나타나는 듯했다. 전택보 사장에 이어 김용완 사장의 제언이 계속됐다. 

"무엇보다 정국을 빨리 안정시켜야 합니다. 정국이 안정되지 않으면 경제도 불안하고 경제인들은 손을 놓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오래 지속된 저곡가 정책으로 농촌 사정이 말이 아닙니다. 이제부터는 미가 등 농산물가격을 현실화해야 합니다. 그래야 구매력이 생기고 내수시장도 확대돼 경기가 회복되지요. 그리고 대학이 너무 많습니다. 4년제 대학의 반은 기술전문학교로 개편해 경제건설에 필요한 기술인력을 양성해야 합니다"

 박정희가 고개를 끄덕이자 김용완은 조심스럽게 소위 "부정축재자" 석방 문제를 제기했다. 

"그 사람들을 하루 빨리 풀어줘 경제건설에 참여시키십시요. 기업인이란 개미처럼 죽을 때까지 일할 운명을 지닌 사람들입니다. 게 중에는 잘못을 저지른 자도 있겠으나 많은 사람들이 환경과 상황에 못이겨 그렇게 됐다고 생각합니다"

박정희의 자세는 이제 진지함을 넘어 긴장감마져 느끼게 할 정도였다. 이야기에 온 정신을 집중시키고 있는 탓이였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정인욱 사장이 소견을 폈다. 그는 5.16 군사정부로부터 "기획위원" 제1호로 위촉받은 인물.젊은 장교들이 태백산오지에서 수도승 같은 생활속에서 매년 50t 이상 무연탄 증산을 이룩하는 정 사장의 모습에 매료돼 그를 제1호 기획위원으로 추천했었다. 

"우리 힘으로 경제재건은 물론 급속한 공업화도 이룩할 수 있고 이북을 능히 따라 잡을 수 있습니다. 본인이 지난 20여년간 태백산종합개발에 관여하고 있지만 우리나라에선 30m 이하 심층에 있는 지하자원을 탐사한 일이 없습니다. 무슨 광물이 있는지도 잘 모르고 있습니다. 이를 정밀 탐사하고 실업자에 일터를 주면 경제발전에 큰 추진력이 될 것입니다. 특히 재력과 능력있는 경제인들에게 태백산종합개발에 관심을 갖게하는 것도 한 방법일 것입니다. 우리 근로자들의 근면성도 큰 자원입니다"

경제정책에 목말라하고 있던 박정희에게 이날 모임은 큰 의미가 있었다.
군인으로서 전란과 사회풍랑을 거쳐온 그는 이날 전혀 새로운 유형의 인간 들을 만난 것이다. 그는 기업가들에게서 소위 권력이나 힘에서 얻지 못하는 그 무엇을 느낀 듯 했다.


2) 서재진 <한국의 자본가 계급>(나남 1991, 81-82쪽 84쪽)

군사정권은 62년 통화개혁 실패이후 수출주도의 산업화 전략으로 선회하였다. 한국경제인협회도 농업위주의 정책에 강력히 반발하면서 공업화와 수출주도로 가게끔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63년 1월 8일  한국경제인협회는 박정희를 자신들의 회의에 초대했다. 한국경제인협회는 기존 수출의 10배를 늘릴 수 있는 수출산업 개발이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수출제일주의 정책을 건의하였다. 박정희는 이에 크게 고무되어 수출산업 발전을 위한 총력지원 정책을 채택할 것을 약속했다.

1963년은 '수출의 해'로 지정되었다. 모든 대중매체들이 앞 다투어 수출주도의 전략을 홍보하였다. 63년 3월 3일 한국경제인협회 내에 수출산업촉진위원회가 설치되었으며, 63년 8월 서울 구로동에 한국수출공업단지가 건설되었다.

4. 1,2,3의 소결론-결국 박정희시기의 수출주도공업화정책도 그 뿌리를 보면 상당부분 장면정부와 연결된다는것을 알 수 있다. 특히나 장면정부시기의 환율정책과 한국경제협의회조직 그리고 그들의 수출주도의 공업화제안등을 볼때 수출주도공업화정책이 박정희만이 할 수 있는 그런 것은 아님을 알 수 있다. 즉 장면정부하에서도 얼마든지 가능했고 그 가능성도 상당히 높았지 않나 생각된다.

5. 나아가 박정희시기 수출주도로의 변환에는 그 당시 미국의 대외정책의 변화도 한몫했다고 한다.

군사원조의 성격이 강하고 미국의 재정균형을 우선시하는 아이젠하워 정부의 뉴룩(New Look)정책 하에서는 저개발국의 ‘현상유지’는 가능하지만, 저개발국의 성장은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또한 미국의 대외정책의 변화를 주도했던 로스토우(W Rostow) 교수의 근대화론은 저개발국의 경제발전에 더 많은 신경을 쓸 것과 저개발국의 자본 흡수능력을 높이기 위해 사회개혁이 필요하다는 로스토우의 주장은 케네디 행정부에 적극 받아들여져 미국 대외정책의 기조가 됐다.

미국 대외정책의 변화는 곧 대한(對韓)정책의 변화를 가져와 이전의 안정중심의 정책에서 성장우선정책으로 바뀌기 시작했고, 이런 미국의 대외정책변화도 초기의 경제개발계획이 수출주도의 성장정책으로 변용시킨 원인이라는 것이다.


그 결과 보완계획에서는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서 야심 차게 계획했던 기간산업 건설 계획들이 모두 제외되었다. 미국이 기간산업 건설을 위한 자금 지원을 거절했기 때문이었다. 박정희 의장은 일본과의 협정을 서두르고 독일로부터 자금 지원을 받고자 시도하였지만, 이 역시 쉽지 않았다. 결국 보완계획을 통해 기간산업 건설 계획을 백지화하고, 대신 미국 정부가 주장했던 노동집약적 경공업 중심의 산업 계획을 수립해야만 했다.

http://blog.joins.com/media/index.asp?day=20100116&folder=0&uid=dalispark
http://book.daum.net/review/media/read.do?seq=21157

6. 따라서 4와 5를 종합해 보면 수출주도공업화정책은 박정희만의 독보적인 그 무엇이라기 보기 어렵고 상당부분 장면정부와 미국의 영향하에 이루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다만 박정희가 이런 점을 무시하지 않고 잘 받아들인 점은 그나마 인정할 만 하다. 하지만 박정희 시기 대규모 무역적자 나아가 정부의 소수재벌들에 대한 특혜정책등은 기업 경쟁력의 약화, 중복 투자를 통한 비효율성 나아가 재벌문제등의 후유증을 많이 남기게 된다. 마치 프랑스 절대왕정시기의 콜베르주의 즉 중상주의를 보는 듯 하다. 이러한 박정희 경제는 솔직히 자유주의와는 상당히 먼 정책이 아닐까 한다.

김흥기 편 <영욕의 한국경제; 비사 경제기획원 33년> 매일경제신문사 1999년 144쪽

차관특혜, 세제 특혜, 금융 특혜, 수출원자재특혜, 역금리 특혜 등 모든 특혜를 부여함으로써 인위적인 수출 진흥이 이루어졌다.  정부 기업 국민 모두 수출 진흥에 총동원되었고, 엄청난 특혜가 주어졌다.

임영태 <대한민국 50년사 1; 건국에서 제 3공화국까지> 들녁 1998년 392쪽

어느 정도 엄청난 특혜였을까? 은행 대출을 보자. 64년 8월말 금성방직 대한제분 삼성물산 등 9개 재벌기업에 177억 원이 집중 대출되었다. 이는 당시 화폐발행고의 82프로, 통화량의 43프로, 일반 금융기관 대출 잔액 462억의 약 40프롱 해당되는 것이었다.

핑백

덧글

  • 아니 2010/09/07 05:52 # 삭제 답글

    글을 전부 노랑색 형광처리해놓으면 눈아파서 어떻게읽습니까..
댓글 입력 영역
* 비로그인 덧글의 IP 전체보기를 설정한 이글루입니다.



메모장

Yahoo! blog bad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