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근현대사]민주당 정권의 경제정책과 장면 박정희

장면의 경제제일주의에 대해 그동안 잘 몰랐는데 아래 논문을 통해 많이 배우게 되었음

공채제도를 최초로 시행하고 경제계획원과 국토건설부를 만들고 국토건설개발사업과 경제개발5개년계획을 수립했다는 것은 신선해 보이는 내용. 나아가 전경련의 전신인 한국경제협의회(--->한국경제인협회)도 처음 만들어졌다는 것도 눈에 띄는 듯


민주당 정권의 경제정책과 장면 

                                                                                                                                            김 기 승(순천향대 교수)

1. 서론 

  민주당 정권은 1960년 8월 19일 장면 총리가 국회로부터 인준을 받은 때부터 1961년 5월 16일 군사쿠데타까지 9개월 정도 지속되었다. 이에 비해 민주당 정권을 무너뜨리고 등장한 군사정권은 30여년 이상 지속되었다. 군사정권은 정당성 확보를 위해서 민주당 정권을 부정적인 모습으로 각인시켰다. 이런 까닭에 민주당 정권은 파벌투쟁으로 시종한 부패 무능한 정권이라는 이미지가 고착되었다.

  민주당 정권에 대한 일반적 인식은 경제정책 분야에 대한 부분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났다. 예를 들면 장면 정권이 ‘경제제일주의’를 표방했고 「경제개발5개년계획」을 수립했다는 사실 자체는 인정했다. 그러나 장면 정권은 실천의지도 없었고, 지도력도 없는 정부였기 때문에, 진정한 의미의 경제개발은 군사정권에 의해 처음으로 시작되었다는 식이었다. 이러한 인식은 이승만 정권과 장면 정권기에 경제정책의 수립에 참여했던 인사에게서조차도 확인된다.1)   지금까지 학계에서도 장면 정권의 경제정책에 대해서는 거의 주목하지 않았다. 민주당 정권의 경제정책에 대한 최초의 학술적 연구는 1998년 유광호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는 장면정권기에 구상되거나 실시되었던 경제정책 자료를 새롭게 발굴하여 그 내용을 자세하게 검토하였다. 그리하여 장면정권기의 경제정책은 이승만 정권의 경제정책의 문제점을 극복하고 새로운 대안을 제시한 것이었으며, 그것은 군사정권 경제정책 수립의 토대가 되었다고 그 의의를 높게 평가하였다.2) 그러나 유광호의 연구는 개개 정책의 내용을 소개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따라서 그 경제정책이 구상 또는 수립되는 배경, 개개의 경제정책을 관통하는 장면 정권 경제정책의 기본적 구조와 정서를 해명하는 데는 미흡했다. 또 1999년 장면 탄신 100주년을 맞이하면서 관련 인사들의 회고가 속속 발표되고 있다. 이를 통해 새로운 사실들이  알려지게 됨에 따라 장면 정권기에 추진된 여러 정책에 대한 재평가의 필요성이 제고되고 있다. 본고는 유광호의 연구, 관련자의 증언과 회고, 그리고 기타의 자료를 참고로 하여 민주당 정권의 경제정책의 특성과 의의를 살펴 보고자 한다. 개개 정책의 구체적 내용은 선행 연구에서 어느 정도 밝혀져 있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장면 정권의 경제정책의 기조를 살피면서 의의를 규명하는 데 중점을 두고자 한다. 경제정책의 기조는 ‘사실 스스로 말하게 한다’는 취지에서 당시 관련자들의 글을 직접 인용하는 형식을 취한다.

2. 경제정책의 기조

1) 경제제일주의의 천명 

  민주당 정권은 출발 직후부터 경제문제를 최우선의 과제로 삼는 ‘경제제일주의’를 정책의 지표로 내세웠다. 장면 국무총리는 1960년 9월 30일 민의원 본회의에서 행한 시정연설에서 정부의 경제정책의 기조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경제부문 행정에 있어서는 사회복지의 증진을 대목표로 하여 급속한 경제성장을 도모하는 경제제일주의를 실천하려 합니다.  신정부가 기도하는 바는 첫째로, 과거 부패정권이 취해온 관권경제와 불균형한 산업구조 등을 지양하는 것이 급선무입니다. … 둘째로 농어촌 중심의 투융자계획을 증대하고 소득증가를 도모해서 위축된 중소기업의 건전한 운영을 조장함으로써 균형적 산업구조의 형성을 촉진하려는 것입니다.3) 

  또한 1961년도 예산편성 지침에서는 경제제일주의 정책의 목표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4월혁명 과업의 완수와 경제자립의 목표 달성을 촉진하기 위하여 부패된 관권경제를 일소하고 경제제일주의를 표방하며, 계획성있는 자유경제체제하에 국민경제의 균형된 발전을 이룩할 수 있는 제반 시책을 단계적으로 실현하는 방향에서 … 예산을 편성한다.4)

  민주당 정권이 내세운 경제제일주의 정책은 경제면에서 살펴보면 관권경제의 부패로 인한 산업구조의 불균형을 지양하고 급속한 경제성장을 도모함으로써 자립적 국민경제체제를 수립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경제제일주의는 4월혁명 과업의 완수와 관련되어 일컬어지고 있다. 이것은 4월혁명을 계기로 성립된 민주당 정권이 당시의 경제 문제를 시대적 과제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말해 준다.

  1960년 11월 정무원 사무처에서는 여론조사를 실시하였다. 이 조사에서 응답자의 70% 이상이 가장 시급한 과제가 경제 문제라고 응답하였다. 이를 근거로 민주당 정권이 내세운 경제제일주의는 독자적 정책이 아니라 ‘대중추수주의적’ 정책이라고 비판하는 견해가 있다.5) 그러나 민주당 정권의 경제제일주의 정책의 채택은 출범 직후부터 시작된 것이다. 따라서 여론조사 결과는 오히려 경제제일주의의 천명이 시대적 과제를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으며, 그것이 국민의 인식과 궤를 같이하고 있음을 나타낸다고 보는 것이 온당할 것이다. 민주당 정권이 내세운 경제제일주의는 나름대로의 현실 분석에 기초하여 해결책을 제시했던 독자적인 정책 방향이었다.

  민주당 정권에서는 당시를 경제적 위기의 상황으로 진단했다. 김영선 재무부 장관은 1961년도 예산안에 대한 제안설명에서 ‘구정권이 남겨놓은 積蔽’를 官權經濟로 인한 부의 偏在, 경제성장 둔화, 저축과 투자의 부족, 산업구조의 불균형과 농업소득의 低位, 국제수지의 불균형, 원조의 감축, 인플레 요인의 잠복 등 7가지를 열거했다. 특히 그는 당시의 국고 채무가 2,700억환, 정부출자기관의 부채가 413억환이며, 국제수지가 수입 2억8천만불 수출 1천9백만불로 적자폭이 무려 2억 6천만불에 달한다고 하였다. 이러한 국제수지의 역조는 대부분 원조에 의해 보전되고 있는데, 원조는 급격히 감소하고 있다고 하였다.6) 민주당 정권은 빚더미에 앉아 미국의 원조로 연명하는 고사 위기의 정부를 인수한 셈이었다. 이러한 위기의식에서 경제는 여러 정책 부문 중의 하나가 아니라 민주당 정권, 나아가 4월혁명으로 성립된 민주주의 국가의 존망이 달려있는 문제로 인식되었다.

  민주당 정권의 경제제일주의는 국방과 외교 분야에도 적용되었다. 그리하여 외교는 ‘경제외교’ 위주의 정책을 취했는데, 여기서 외국으로부터 원조와 차관을 들여오는데 중점을 두게 되었다. 국방정책의 내용은 경제제일주의의 특성을 이해하기 위해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장면 국무총리는 1960년 9월 30일 국회에서 행한 시정연설에서 국방과 외교 분야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국토방위를 위한 군사면에 있어서는 … 두 번째로 군의 조직과 편성의 검토․조정을 하고 인사와 군수체제의 개선을 도모하여 국방 예산의 합리적인 절약을 기하고자 합니다. … 네째로 우방과의 공동 방위의 테두리 안에서 년차적으로 減員을 실시할 계획이며, 이 계획 아래에서 군의 장비를 정예화하도록 추진하고자 합니다.7)    

  이처럼 출범 초기부터 민주당 정권은 경제제일주의를 천명하면서 재정적자 문제를 해결하기위한 하나의 방법으로 국방비 절감과 군의 減員을 정책으로 채택했다. 그리고 국방 문제를 우방국가 특히 미국과의 공동 방위 체제를 강화하는 방향에서 해결하고자 하였다. 5.16 군사쿠데타의 배경이 되었던 민주당 정권의 감군 계획은 연차적으로 실시한다는 것이었는데, 1961년도 중에 약 10만명을 예정하고 있었다.8) 

  이러한 감군 계획은 북한과의 체제경쟁을 무력․군사적 측면에서보다 경제력의 경쟁으로 인식이 전환된 것과 관련된다. 1960년 12월에 있었던 종합경제회의에서 김영선 재무부 장관은 남북한의 체제 경쟁은 번영의 경쟁인데, 남한이 크게 뒤지고 있으므로 이를 따라잡기 위해 경제제일주의를 내세운 것이라 했다.9) 이어 1961년 2월에 작성된 「경제개발5개년계획수립요강」에서는 다음과 같이 서술되어 있다.

 한국의 국민소득은 그 수준이나 구성비의 국제적 비교에서 알아 볼 수 있듯이 세계에서 가장 뒤처진 단계에 놓여 있다. 이와같은 만성적 정체로서는 당면한 민족적 과제인 승공통일을 可期하기가 어려울뿐더러 정상적인 국제경제적 연대를 유지할 수 없다. … 북한경제는 그 자본재 설비나 산업구조에 있어서 확실히 우리보다 유리한 처지에 있다는 것과 국제경제가 점차로 자유화의 단계에 이르고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둔다면 우리의 情性的 경제활동으로서는 도저히 세계경제사회의 일원으로서 참여하기 어려움을 인식해야 할 것이다.10)    

  이렇듯 민주당 정권의 경제제일주의는 경제를 중시한다는 소박한 의미가 아니라 당시의 경제현실을 총체적 위기 국면으로 진단하고 그 위기를 타개하기 위한 4월혁명의 민주주의 과제와 국가 발전의 기본적 정책 기조로 채택되었던 것이다   

  2) 경제정책의 기조 : ‘질서와 발전’ 

  민주당 정권이 경제제일주의를 지침으로 삼고 추진한 일련의 경제정책이 기본적으로 지향하는 바는 무엇인가? 1961년 2월 장면 국무총리는 제1회추가경정예산안을 국회에 제출하면서 행한 시정연설에서 자신이 추진하는 경제정책의 기조를 다음과 같이 요약 정리했다.

이상 경정예산에 관련하여 중요 시책의 몇가지를 말씀드렸거니와 그 모든 것을 관통하는 기조는 질서와 발전이라는 2대 명제에 귀착됩니다. 이 2대 명제는 어떤 개인이나 단체의 창안이 결코 아니고 다만 질서의 재건을 목적으로 하는 혁명과업의 지상명령이라고 하겠습니다.11) 

  장면 총리가 말하는 ‘질서와 발전’이라는 2대 명제의 의미는 정치․사회적 안정을 통한 경제 발전의 추구를 주로 의미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그는 ‘우리나라 경제 발전에 있어서 정치적․사회적 안정보다 더 긴요한 것은 없다고 생각됩니다.’라고 했다. 그리하여 의견대립과 다툼이  ‘민주주의의 고귀한 모습’이지만  ‘상호간의 선의와 협조와 관용’을 바탕으로 질서를 회복하자고 호소했다.

  그러나 우리는 장면 총리가 말하는 질서는 정치․사회적 측면 뿐만아니라 경제적 의미도 지니고 있음에 유념할 필요가 있다.

 경제의 발전이야말로 국민과 정부의 지상과업입니다. 그러나 이 분야에서의 선결조건은 먼저 경제적 질서를 정돈하는 것이라고 믿어집니다. … 자유기업주의에 있어서 자원 배분에 합리적 질서가 서는 것은 주로 가격기구를 통해서입니다. 실로 가격제도는 시장에서 표시되는 사회적 수요의 실세와 가용 자원과의 상관 관계를 자동적으로 반영함으로써 합리적인 경제정책의 지표가 되는 것입니다. ... 그러므로 신정부는 경제정책의 출발점으로 먼저 가격기구의 정상화를 기하지 않을 수 없고 그를 위하여 환율, 금리, 공공요율 등의 실세화를 단행하게 된 것입니다. 12) 

  이처럼 장면 총리는 질서를 경제적 차원에서도 고려했고, 경제질서를 정상화하기 위한 첫 번째 조치로서 환율, 금리, 공공요금의 현실화 정책을 추진했다고 했다.

  김영선 재무부 장관은 민주당 정권의 경제정책의 방향을  ‘경제 요소의 현실화와 경제 건설이라는 2대 支柱’로 설명하면서, ‘과거의 부정과 부패의 온상이었던 비현실적인 모든 경제 요인을 현실화하는 것’을 ‘경제질서를 정상화’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환율 현실화의 목표가 경제질서의 정상화에 있다고 하면서, 그것은 부정과 부패의 근원을 제거하여 외환을 절약하게 함으로써 경제자립을 성취하는 데 기여할 것이라고 하였다.13)

  위에서 보듯이 민주당 정권이 취한 환율, 금리, 물가의 현실화 조치는 자유기업주의에 입각한 경제질서를 정상화함으로써 부정부패로 특징지워지는 ‘특권적 경제’를 지양하고자 한 것이었다. 특권적 경제의 지양은 곧 산업 구조의 불균형 문제와 분배의 불공정을 극복한다는 의미였다. 따라서 장면 국무총리는 1960년 9월 국회에서 행한 시정연설에 ‘과거 부패정권이 취해온 관권 경제와 불균형한 산업구조 등을 지향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하면서, ‘환율 현실화’ 정책과 농어촌 진흥정책과 중소기업 육성책을 실시하겠다고 하였다.14) 말하자면 민주당 정권에서는 특권적 경제체제로 인한 부의 편재 현상을 극복하기 위해 농촌 경제와 중소 기업 육성에 중점을 두는 정책을 채택했던 것이다.15)  농촌경제 안정과 진흥을 위해서는 토지세를 금납제로 개정하고 농민의 조세 부담을 경감하는 조치를 취했으며, 중소기업 육성을 위해 중소기업 전담 금융기구 설립 계획을 수립하기도 하였다.16)

  특히 민주당 정권에서는 1961년 2월 6일 국무회의에서 중소기업진흥을 위한 「중소기업금고법안」을 의결했으며, 3월 14일에는 「중소기업육성을 위한 종합대책」을 의결하기도 했다. 「중소기업육성을 위한 종합대책」에서는 중소기업의 지도와 육성을 총괄하는 중소기업센터를 각도에 1개소씩 설치한다는 계획을 비롯하여, 중소기업협동조합의 창설, 중소기업 전담 금융기관의 설치, 중소기업경영합리화촉진법의 제정, 중소기업신용보험법 제정, 중소기업 제품 공동판매제 실시, 중소기업에 대한 조세 경감 조치 등 다양한 방안들이 제시되어 있다.17) 이처럼 민주당 정권은 경제 질서를 정상화하기 위한 방법으로서 중소기업의 육성을 중시했다.

  장면 정권이 제시한 ‘경제질서의 정상화’는 경제 정책의 입안 및 추진 과정에서도 견지된 원칙이기도 했다. 장면 총리는 4월혁명의 과업은 민주주의적 방식과 절차를 통하여 해결할 수 밖에 없으며, 따라서 시간과 기술 상의 제약이 따른다 할지라도 그 원칙을 견지해야 한다는 신념의 소유자였다.18) 민간부문의 자율적 활동과 그에 대한 정부의 유도 혹은 지원이라는 형식은 경제정책 수립을 위해 여론을 수렴하는 과정에서 잘 드러난다. 1960년 12월 15일부터 19일까지 서울에서는 경제계, 학계, 언론계 지도자 및 각 지방의 유지 등 250여명에 이르는 전국의 인사들이 모여 종합경제회의를 개최하였다. 이 회의는 7개의 분과로 나뉘어 분과별로 정부에 건의할 경제정책을 제시했다. 이 때 채택한 「경제발전을 위한 대정부 건의」는 218쪽에 달하는 방대한 문서였다.19)

  이 종합경제회의는 정부가 주도하여 개최한 전국 규모의 경제회의로서는 최초이며, 민간의 광범위한 의견을 수렴하여 정부의 정책에 반영하려는 적극적인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다.20) 이 회의를 계기로 장면 정부와 민간 기업인간의 협력 체제는 보다 더 공식화되었다. 즉 1961년 1월 10일에는 경제계 인사 70여명이 회합하여 오늘날 전국경제인연합회의 전신인 한국경제협의회를 창립하였다. 한국경제협의회의 발족은 장면 정부와의 유기적 협조 하에서 추진되었다고 한다. 또 협의회가 장면 총리 집무실이 있는 반도호텔에 위치함으로써 정부와 협의회 인사들간의 자연스러운 협조가 이루어졌다고 한다. 한국경제협의회 발족시 장면 총리는 축사를 통해 정부 정책의 잘못이 있으면 기탄없이 지적할 것을 당부하면서 협의회와 정부의 상호 협력으로 경제발전을 이룩할 것을 역설했다.21)  당시 부흥부 산업개발위원회에서 경제개발계획 입안에 참여하고 종합경제회의 간사를 맡았던 김입삼은 장면 정권기의 민관협조체제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했다.

 사농공상의 질서가 엄격했던 한국 역사 상 ‘士’로 상징되는 관료 집단과 ‘工商’으로 상징되는 기업가들간의 협조체제가 이 시절만큼 훌륭하게 조화를 이룬 적은 없다고 본다. 바로 민간 創意의 시장경제가 막 꽃피려는 시기였다.22) 

  종합경제회의에서 집약된 경제정책에 대한 민간측의 의견은 장면 정권과 그에 뒤이은 군사정권에 의해 대부분 채택되어 시행되었다.23) 이 점에서 경제정책 수립을 위해 여론을 수렴하기 위한 절차는 실질적이고 효율적인 정책 수립에 크게 기여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때 건의된 정책 중 주목할 만한 것으로는 경제행정기구개편 분과위원회에서 제안한 ‘경제계획원의 설치’‘부흥부의 건설부로의 개편’ 제안이었다.

  경제정책의 체계성을 확립하기 위한 중앙 부서의 설치는 경제정책의 ‘질서’를 수립하려는 의지로 해석될 수 있다. 따라서 ‘경제질서의 정상화’를 정책 기조로 내세웠던 장면 정부는 이러한 건의를 수용하여 중앙기획기구를 만들기 위한 ‘정부기구개편소위원회’를 설치하였다.24) 뿐만아니라 경제정책 기구로서 변희용을 위원장으로 하는 ‘중앙경제위원회’를 운영하기도 하였다.25) 경제정책의 기획과 각 부서와 정책 간을 조정하기 위한 행정 기구는 경제에 대한 정부의 역할을 강화하면서 급속한 경제발전을 추구하기 위해 1950년대 이후 후진국가들에게서 새롭게 설치되기 시작한 기구이다. 이것은 국가 전체의 포괄적 정책 목표와 방침을 설정하고 이를 기준으로 정부 부처 간의 이견을 조정․중재함으로써 경제정책의 효율성을 극대화하여 경제발전을 가속화하려는 목적을 가진 기구이다.26) 따라서 경제계획원 설치 계획과 부흥부의 건설부로의 개편 제안은 경제정책의 ‘질서’와 ‘방향’을 분명히 하는 한편, 과거의 회고적 표현의 ‘부흥’ 대신에 목표가 분명하게 제시된 ‘건설’을 통한 발전의 지향성을 분명히 한 것이라고 하겠다. 이렇게 본다면 경제계획기구의 설치 노력은 ‘질서와 발전’ 정책의 한 표현이라고 하겠다. 

  장면 정권에서 ‘경제발전’ 정책으로 추진한 대표적인 것은 국토건설사업과 경제개발5개년계획의 수립이었다.

3. 국토건설사업의 시행 

  장면 정권의 국토건설사업 구상은 1960년 10월경부터 이루어졌으며, 미국의 대략적인 지원의사를 타진한 후에 본격적인 계획을 수립하였다. 그리하여 11월 28일 국토건설사업 계획을 발표하고, 계획서를 국회에 제출했다. 이어 12월에는 추가경정예산에 국토건설사업비로 280억환을 계상하기로 결정하고, 12월 28일 국무원 제147호로 국토건설본부 설치 규정을 공포했다. 1961년 2월 10일에는 제149호로 개정하여 국토건설본부를 설치하였으며, 협조기관을 중앙과 지방에 설치하기로 하였다. 이어 4월 10일에는 ‘국토건설사업특별회계법’을 제정하여 재정적 뒷받침을 확고히 하였다.27)

  장면 국무총리는 1960년 2월 9일 추가경정예산안을 국회에 제출하면서 행한 시정연설에서 국토건설사업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실업자의 가동과 농촌 소득의 증대와 국토의 보존 및 사회자본의 증대를 연결하는 국토건설계획이 또한 그 조속한 실시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주요 내용은 미잉여농산물을 주로 한 400억환의 재원으로 연인원 약 4천 500만명을 동원하여 치산, 치수 등 공공사업을 하는 것이며, 한편 소양강 댐, 춘천강댐, 남강댐 등을 건설하는 것도 동 계획에 포함되고 있습니다.28) 

  국토건설사업 예산 400억환의 사업별 예산 내역을 살펴 보면, 수리사업 158억환, 치수사업 56억환, 조림사업 12억환, 사방 사업 24억환, 도로사업 35억환, 도시토목사업 20억환, 댐(소양강댐, 남강댐, 춘천댐) 건설비 48억환, 행정비와 예비비 47억환이었다. 400억환의 지출 계획은 270억환은 현금으로, 130억환을 현물 노임으로 지급하도록 되어 있었다. 이 국토건설사업이란 공공사업은 직접적으로 노임 살포를 통해 도시 빈민과 농촌 빈농의 구제와 실업자 대책의 일환으로 시행된 것이었다. 그러나 민주당 정권은 이 사업을 ‘혁명정신을 받들어 건설 의욕을 북돋우어 침체된 경기를 자극하여 가장 신속하게 경제 성장의 터전을 마련할 수 있는 중대한 의의를 갖고 있으며, … 국토를 보전하고 자원을 개발하는 효과를 갖는 획기적인 사업’ 으로 중시했다.29)

  국토건설사업의 추진 주체는 국토건설본부였다. 본부장은 장면 국무총리가 직접 담당하였다. 이것은 당시 장면 정부가 국토건설사업을 얼마나 중시했는지를 말해 준다. 국토건설본부의 조직은 다음과 같다.30)


        본부장 : 장면 국무총리          기획부장 : 장준하(사상계 사장)  

        관리부장 : 신응균(국방부 차관보) 사회홍보부장 : 이만갑(서울대 교수)

        기술부장 : 최경열(토목학자)     간사 : 박경수 


   국토건설본부의 조직은 관민합작적 조직으로 되어 있었다. 따라서 국토건설사업은 관민이 협조하여 추진한 ‘국민운동’으로서의 성격을 띠었다.

  국토건설사업을 현장에서 실질적으로 이끈 조직은 국토건설요원이었다. 국토건설 현장에서 지휘 감독 역할을 맡았던 국토건설 요원은 새롭게 충원되었다. 즉 국무원 사무처에서는  ‘병역을 필한 30세 미만의 대학졸업자’를 대상으로 사무직 1,614명, 기술직 452명(여성 21명 포함)의 요원을 선발했다. 선발된 요원은 1961년 1월 9일부터 2월 27일까지 교육을 받은 후, 3월 1일부터 현장에 배치되었다.31)

  장면 정부에서 핵심사업의 하나로 추진한 국토건설사업은 사회의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다. 특히 국토건설 요원의 공개 채용과 그리고 그들을 3개월 후에 공무원으로 채용한 것은 공무원 공채 제도의 최초 시행으로서 관료제에 새로운 활력을 불러 일으킨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국토건설사업은 국민적 공감을 얻은 ‘국가적 사업’이었다. 따라서 군사정권도 국토건설사업을 계승하여 계속 시행할 수 밖에 없었다. 1961년 7월 군사정권에 의해 작성된 「혁명정부경제청서」에서는 국토건설사업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400억환의 예산으로 지난 봄에 착수된 국토건설사업은 가장 긴급한 국가사업이므로 혁명정부는 이를 계속 추진함은 물론 제2회 추가경정예산에도 6억4천만환을 계상하여 추가사업을 선정함으로써 재정자금에 의한 자본 형성과 고용의 증대를 기하고 있다. 이에 국토건설사업 추진실적을 보면, 6월 30일 현재 계획의 약 55%에 달하는 진척상황을 보여 연인원 1천4백만명에게 고용 기회를 마련하여 주는 등 커다란 성과를 거두고 있다.32)    

  그 결과 군사정권에서는 1961년 3월부터 1961년 12월까지 총투입비 376억원, 연고용인원 2,569만명에 달하였다고 국토건설사업의 실적을 자랑스럽게 보고하였다.33)   

4. 경제개발5개년계획의 수립 

  한국 경제에 대한 최초의 체계적인 개발계획의 수립은 외국기관에 의해 이루어졌다. 즉 유엔한국부흥단(UNKRA)은 네이산(Nathan)협회에 용역을 주었는데, 네이산협회에서는 1953년 3월 「한국경제재건계획」(일명 「네이산보고서」)을 발표했다. 한국인에 의한 경제개발계획은 1958년 3월 송인상 부흥부 장관의 발의로 부흥부 산하에 산업개발위원회를 설치하면서 수립 작업이 시작되었다. 산업개발위원회 위원장은 부흥부 장관이 당연직 위원장이었으며,  朱源 정위원이 위원장 서리를 맡아 실무작업 책임을 맡았다. 이 위원회에서 「경제개발 7개년계획」의 전반기인 「경제개발 3개년계획(1960~1962)」을 완성한 것이 1959년 3월이었다. 그러나 이승만 대통령은 ‘경제계획’ 의미를 사회주의적 계획경제의 의미로 오해하여 극히 부정적이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경제개발 3개년계획」이 시작되는 해인 1960년이 4개월이 지난 4월 15일에 이르러서야 국무회의에서 의결되었다. 그러나 그 조차도 4.19혁명으로 실시되지 못했다.34)

  장면 정권은 출범 직후인 1960년 9월부터 경제개발계획의 시행 의사를 밝혔다. 그리고 미국측의 재정지원을 요청하기 위해 10월4일 「한국의 경제개혁 비망록」이라는 외교문서를 미국에 수교했다.35) 장면 정권 하에서도 경제개발계획의 수립 작업은 부흥부 산하 산업개발위원회에서 추진하였다. 그런데 장면 정권의 출범하면서 부흥부 장관은 주요한, 김우평, 태완선으로 수시로 바뀌었다. 그러나 차균희 박사는 1959년부터 부흥부 지역사회개발위원회 위원장, 1960년 부흥부 기획국장 등을 역임한 뒤 장면 정권이 성립하면서 부흥부 차관이 되었다. 경제개발계획의 실무를 담당했던 산업개발위원회 책임자는 주원에서 재무부 이재국장을 역임한 바 있는 김종대로 바뀌었다. 산업개발위원회 위원으로 새롭게 추가된 사람은 임원택과 홍성유 등이었다.36)

  1960년 12월 장면 정부는 국회 답변을 통하여 ‘자유당 정부가 수립해 놓은 3개년계획을 7개년 계획으로 연장하기 위한 연구에 착수하는 일방 장기개발계획의 입안과 집행․감독을 전담할 部의 신설을 고려 중에 있다.’고 했다.37) 이와같이 장면 정부는 부흥부 산업개발위원회 위원을 교체하면서 이승만정권의 경제개발계획을 수정하는 작업을 추진했다. 그 작업결과는 1961년 2월 「경제개발5개년계획수립요강」으로 정리되었다.38) 이렇게 마련된 계획을 토대로 1961년 3월 내한한 찰스 울프 박사 일행에 대해 한국의 경제개발계획을 설명했다. 이 때의 브리핑은 김입삼이 맡았다고 한다. 찰스 울프 박사는 전체적인 찬의를 표하고 특히 민간 부문의 활기가 두드러지다는 점에서 성장 잠재력을 높이 평가했다고 한다.39) 이후 장면 정부는 울프 박사의 견해를 듣고 참작하면서 경제개발계획을 가다듬었다. 이 작업은 4월말쯤에는 완성된 것으로 보인다.

  장면 국무총리는 1961년 4월 12일 참의원 본회의 답변에서 ‘정부는 외국의 전문가와 연구하여 강력하게 추진할 5개년계획을 세우고 실천이 되면 경제계에 대변모를가져올 것으로 생각한다.’고 답변하였다.40) 이것은 4월 중에는 경제개발5개년 계획이 거의 완성단계에 도달했으며, 그것의 성공 가능성을 장면 국무총리가 확신하고 있었음을 뜻한다고 보겠다. 4월말에 경제개발계획이 완성되었다고 볼 수 있는 이유는 한국측 대표가  5월 9일 미국 워싱턴의 AID를 방문하여 대한원조책임자 캐어리 과장을 만났을 때 경제개발계획안을 제출했기 때문이다. 이 때 제출한 계획안은 2월의 「요강」보다 진일보한 것이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장면 정부가 수립한 「경제개발5개년계획」은 문서화되어 1961년 5월 12일 국무회의에 보고되었고, 동일자로 「경제개발5개년계획」이 부흥부 명의로 발표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러한 사실과 계획의 일부 내용은 당시의 언론에도 보도되었다.41)  

  현재 1961년 5월 12일자로 발표된 장면 정부의 「경제개발5개년계획」 원자료는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다. 따라서 장면 정부의 경제개발계획과 1961년 7월 발표된 군사정권의 「제1차 경제개발5개년계획」과의 구체적 비교 작업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그런데 유광호는 1961년 2월 민주당 정권에서 마련한 「경제개발5개년계획수립요강」과 박정희 정권의 경제개발계획을 비교․분석한 결과를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이 수립요강이 지니는 큰 의의는 3개년 계획서의 약점을 찾아 이를 보완하려는 의지를 보인 것이고, 그 후 군사정부의 경제발전5개년계획의 수립에 결정적 토대가 되었다는 점이다. 이 수립요강에서는 계획의 목적과 전략, 그리고 계획의 추진 방식 등에서 자유당 정부의 3개년 계획과 차별화를 보이면서 그 후에 등장하는 군사정부의 계획안과 유사성을 보였다. 무엇보다 ‘정부의 계획적 유도’ 등이 강조되면서 과거 ‘균형성장’ 전략에서 점차 ‘불균형 성장 전략’으로 방향을 선회하는 신호를 보여주고 있다.42) 

  장면 정부의 「경제개발5개년계획수립요강」에 대한 유광호의 견해는 타당하고 적절한 평가로 생각된다. 그러나 그는 장면 정권과 군사정권의 경제개발계획의 유사성에만 주목하고 있다. 오히려 장면 정권의 경제개발계획의 의의는 군사정권의 그것과 차이에 주목할 때 더 분명히 드러날 수 있다고 생각된다. 유광호는 장면 정권과 군사정권의 경제개발계획은 자유경제의 원칙과 정부 역할의 강조라는 점에서 일맥 상통한다고 보고 있다. 그러나 필자는 정부 역할의 구체적 의미에 대해서는 중대한 차이가 있다고 생각한다. 즉 장면 정부는 경제계획의 초점을 ‘정부 자체가 직접적인 정책 수단을 보유하는 부문’에 중점을 두고 ‘민간부문의 자발적 활동을 기대하며 이것에 필요한 유도정책’을 취한다고 하였다. 이에 비해 군사정권에서는 자유기업원칙을 천명하면서도 ‘지도받는 자본주의 체제’라는 추진방식을 채택하였다. ‘유도’와 ‘지도’는 의미상으로 커다란 차이가 있는 것이다. 즉 경제계획의 추진 방식과 절차에 있어서의 차이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5. 결론 

  장면 국무총리를 중심으로 한 민주당 정권은 9개월 정도 존속한 단명의 정권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4.19혁명이라는 시대적 과제의 해결을 위해 진력을 다한 정권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9개월 동안 장면 정권에서 추진한 경제정책의 기조와 구체적 실행을 살펴 볼 때도 확인된다. 장면 정권에서 추진했던 국토개발사업, 경제개발5개년계획 등은 정권이 몰락한 이후에도 계승되어 시행되었다. 국토종합개발계획, 경제계획원과 건설부 설치 계획 등 장면 정권기에 구상되었던 정책 등은 군사정권에 의해 현실화되었다. 이러한 점은 장면정권에서 추진한 경제정책이 시대적 요청에 부응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장면정권이 내세운 ‘경제제일주의’의 시정 방침은 당시의 심각한 경제적 위기의식의 소산이었다. 그리고 ‘질서와 발전’을 내세워 경제적 질서의 확립을 기반으로 한 경제 발전을 추구하는 정책은 경제의 민주주의 원칙을 천명한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장면 정권은 경제정책의 수립에 있어서 다양한 경제 주체의 의견을 광범위하게 수렴하고 그것을 조정․통합하는 데 주력했다. 그리고 그러한 역할의 중요성을 절감하였다. 그리하여 종합경제회의를 개최하고 중앙경제위원회나 경제계획원과 같은 경제정책 기구를 설치 또는 구상하였다. 그리고 경제개발5개년계획의 구상은 각계의 전문가들로 구성된 산업개발위원회에 맡겼다. 그리하여 경제개발 계획에서도 정부와 민간 부문의 역할 조정에 유의했고, 국토건설사업의 시행은 민관협조 형식으로 추진하였다.

  장면 정권은 경제 전문 관료 집단의 정책 결정 참여를 고무하고, 민간 부문의 경제 정책 건의를 폭넓게 수용하면서 경제정책을 구상하는 방식을 취하였다. 이것은 ‘질서와 발전’을 경제정책의 기조로 채택한 데서 가능한 것이었다. 이를 통해 이승만 정권의 특권적 경제체제 하에서 잠복해 있던 각계의 경제정책 아이디어들이 자유롭게 개진되고, 이를 비교적 충실하게 수렴했던 것으로 보인다. 바로 이런 이유로 이 시기에 구상되거나 실시되었던 경제정책이 이후 시대 경제정책의 토대가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장면 정권은 ‘경제적 질서’, 즉 절차와 과정의 민주주의적 원칙을 중시함에 따라 경제정책의 시행과 집행에 있어서 시간적 지체의 문제를 부득이한 한계로 감수하였다.


☞ 출처 : 운석 장면 선생 탄신100주년 기념 학술회의(주제 : 운석 장면의 생애와 업적)
             발표 논문 < http://unsuk.kyunghee.ac.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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