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역사-'서울의 봄'에 꾼 동상이몽 1980년대 역사

3김의 생각

10.26 이후 신구부는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등 이른바 3김에게 차례로 접근을 시도하였다. 신군부는 이들에게 각각 "국가가 위난의 시대로 들어갔다. 우리(신군부)는 정치를 모른다 당신이 나서서 정국을 수습한다면 우리는 뒤를 받치겠다"고 말했지만, 3김은 모두 이 제의를 거절했다. 그 이유에 대해 언론인 손광식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회는 격동의 와중에 들어갔지만 자신들의 시대가 왔다는 걸 정치9단들은 간파하고 있었던 것이지. 또다른 이유가 있을 수도 있어. 시국이 안정되고 새로운 틀이 마련되고 나면 권력은 곧바로 이동하거나 자신이 혹여 대통령으로 옹립되더라도 허수아비가  될 것이라는 사실이야.

3김은 윤보선을 밀어낸 다음 장도영이라는 허세를 몰아내고 집권한 박정희의 전례를 철저히 학습해온 정치인들이니까, 이때의 순회특사였던 최창윤 전 공보처장관은 3김을 만나고 온 반응과 결과를 놓고 평가한 결과 그래도 순서는 JP, YS, DJ였다고  하더군. 신군부의 국가주의라는 관점에서 보면 당연한 결과이고 JP는 육사출신에 쿠데타 전력이 있었으니 그들의 정서가 평점에 엄청 작용했으리라 짐작이 가는 대목이야"

당시 신민당총재 김영삼은 부마사태와 10.26으로 이어진 역사적 격량 속에서 자신에게 정치적 기회가 오리라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다. 신민당은 1980년 1월 31일 서울시지부 결성대회를 시발로,전국 시.도지부 및 지구당 결성 등 조직정비에 박차를 가했는데, 당원 1천여 명이 참석한 서울시지부 결성대회에서 김영삼은 그 '순리'의 이행을 위해 1980년 2월 9일 예비역 장군 5명과 영관급 장교 7명을 영입하였으며, 2월 29일의 관훈토론에서 그 '순리'를 역설하였다. 김영삼이 제시한 '순리'의 논거는 다음과 같다.

"YH사건-야당총재 제명-부마사태-10.26에 이르기까지 유신체제를 무너뜨린 장본인이 나와 신민당인 만큼, 10.26이후의 대체세력은 당연히 심민당이어야 한다"

한편 김대중은 1980년 1월 17일 연금이 풀리긴 했지만 여전히 신군부에 의해 김영삼보다 훨씬 더 엄격한 통제를 받고 있었다.그는 연금해제 후의 첫 지방나들이라고 할 수 있는 대전 천주교 연수교육장에서 다음과 같은 불만을 토로하였다.

"나도 명색이 표깨나 얻은 대통령후보였는데 내 소식에 궁금해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 아닌가. 그런데 신문에 동정 한 줄도 못 나가게 검열을 하는 건 너무해! 항간에 내가 불구자가 됐다느니 정신이상이라느니(하는) 소문이 있다던데 TV에 한 장면만 나가도 그런 유언비어는 사라질 게 아닌가"

김종필은 여당이었던 공화당의 총재로서 유신헌법에 의하여 쉽사리 대토영이 될 수 있었지만 그 길을 거부하였다. 최규하가 1979년 12월 6일 통일주체국민회의대의원 대회에서 대통령으로 선출된 후. 김종필은 자신은 "통대 대통령'은 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던 것이다. 김종필은 새로운 시대를 맞아 깨끗하고 당당하게 대권을 안겠다는 것이었겠지만, 세상은 김종필의 뜻대로 돌아가지는 않았다.

김상만의 만찬과 '충정작전'

2월 25일 동아일보 회장 김상만은 서울 계동의 인촌기념관에서 3김을 위한 성대한 만찬을 마련했다. 그 자리엔 미국대사 윌리암 글라이스틴을 비롯한 일본 및 캐나다 대사와 그 밖의 여러 저명인사들이 초청되었다. 이 행사는 언론의 각광을 받았고, 일부 사람들에게는 3김 가운데 한 사람이 차기 대통령이 될 것이라는 기대를 부풀게 했는지는 모를 일이었지만, 사정은 그렇게 돌아가진 않았다. 글라이스틴은 워싱턴에 다음과 같은 보고를 올렸다.

"김상만으로는 영광의 시간이었겠지만 정부와 군의 국민적 도덕체제 수호자들은 그날 밤의 행사를 조금은 냉철하게 봤을지도 모른다. 그들은 한국을 위한 최선의 길은 3김 모두의 집권을 차단할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는 생각을 더욱 굳게 했던 것이다."

**윌리엄 글라이스틴, 황정일 역 "알려지지 않는 역사"에서 나온 내용임. 그러나 동아일보사가 발행한 "민족과 더불어 80년"은 "아마도 그(김상만)는 '서울의 봄'이 채 피어나기도 전에 불어닥칠 신군부의 정권장악 조짐을 예감하고 이 자리를 빌어 민주세력은 단결을 도모했는지도 모른다"고 적고 있다. 동아일보 80년사 편찬위원회 476쪽**

김상만의 3김초청은 당시의 유화국면을 웅변해준다. 언론 검열은 완화되기 시작했고, 휴교령이 내려졌던 대학도 3월 1일을 기해 다시 문을 열었다. 박정희시절 축출되었던 교수와 학생들이 다시 학원으로 돌아왔으며, 학생들에게는 거리로 진출하지 않는다는 조건하에 학내에서의 비폭력 시위와 자치권의 일부가 허용되었다. 김대중도 3월 1일 완전히 복권되어 정치적 자유를 누릴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권력장악을 위한 신군부의 준비는 치밀하게 준비되고 있었다. 80년 2월 특전사는 '충정명령'이라는 강력한 폭동진압 훈련에 돌입했다. 말이 좋아서 훈련이지, 이건 '인간폭탄 만들기' 훈련이었다. 영외 거주는 말할 것도 없고 외출과 외박이 전면금지된 상황에서 전장병은 인간의 한계를 초월하는 가혹한 지옥훈련을 받으면서 까닭 모를 적개심과 본노를 키워가고 있었다. 병행된 정신교육 훈련은 장병들이 그래야만할 분노를 키워가고 있었다. 그 주요내용은 '시위 군중의 배후에는 빨갱이가 도사리고 있다. 단호하고 무자비하게 때리고 짓밟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80년 3월 6일부터 2박 3일 동안 당시 노태우가 사령관으로 근무하던 수도경비사령부에선 노태우와 특전사령관 정호용이 참가한 가운데 이른바 '충정작전'이라는 회의가 열렸다. '충정작전'은 후끈 달아오르는 민주화의 열기를 진압하기 위한 것으로. 그 결의내용은  "군의 투입이 요구되는 사태가 발생할 때는 강경한 응징조치가 요망된다"는 것이었다.

3월 중순 글라이스틴이 작성한 한국의 정치상황보고서는 전두환에 대해 "그는 이미 3성장군을 향한 싸움에서 승리했고, 전군에 대해 정보보안망을 확장했으며 일개 보안장교라기보다는 국가지도자처럼 각계각층과의 접촉을 활발히 하고 있다. 그는 직접. 아니면 민간인을 전면에 내세워 권력을 잡기 위해 시간을 버는 듯한 인상이디"고 말했다.

김대중의 김영삼에 대한 불만

김대중과 김영삼은 1980년 4월 4일에 만나 신민당과 재야의 통일협상을 벌였지만, 이후의 역사가 증명하듯 이 두 사람은 평생 화합할 수 없는 적대적 관계임이 곧 드러나고 말았다. 그들은 4월 7일에 '협상결렬'을 발표했고, 이후 각자의 길을 감으로써 신군부의 집권을 용이하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하고야 말았다.

이런 분열엔 두 사람 모두에게 책임이 있겠지만, 근본적인 이유는 김영삼이 김대중에 비해 탄압을 덜 받은 덕분에 제도권적 우위를 십분활용하려고 한 반면, 김대중은 그걸 불공정경쟁으로 거부했기 때문이었다. 박정희도 그랬지만 신군부가 양김을 차별대우한 것도 바로 그런 분열을 염두해 두었던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정치학자 이강로는 다음과 같은 말한다. "김영삼은 당내 파벌투쟁에서 자신의 세력을 확대하기 위하여 총재에게 구정된 권한을 반대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어김없이 행사하는 적나라한 권력행사도 주저하지 않았다. 즉 김영삼은 1976년 전당대회를 둘러싸고 공석인 정무위원과 중앙상무위원을 반대파의 공정성 시비에도 불구하고 임명하였고 1980년 봄 신민당 대통령 단일화 논의과정에서 김대중을 견제하기 위해 재야세력 입당, 지구당 위원장 임명, 중앙상무위원 임명 등에 있어 총재의 권한을 최대한 행사하였을 뿐만 아니라, 87년 김대중과 대통령후보 다일화 논의때도 통일민주당 총재로서의 우월성을 강조하였다"**

그런 이유 때문이기도 했겠지만, 두 사람 사이엔 10.26이후 시국을 보는 시각에 있어서도 큰 차이가 있었고 또 이것이 두 사람의 갈등관계를 만들어냈다. 어떤 차이였을까? 양 진영의 핵심적인 인사들의 증언을 통해 살펴보자.

먼저 김대중쪽 시각이다.

박정희 대통령의 장례식이 끝나는 날 신민당은 시내 안국동 모 음식점에서 총재단회의를 갖기로 했었다. 상오 10시에 만나기로 했는데 김(영삼)총재가 나타나지 않았다. 하오 3시까지 기다리고 있으니 연락이 왔따. 국립묘지에서 거행된 하관식에 참석하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기가 찰 노릇이었다.  결국 회의를 하지 못했다.

박대통령의 국장기간 동안에도 공식적인 조의를 표하는 등 제1야당으로서의 주두권 장악 준비를 소흘히 했다. 우리는 10.26 사건의 성격을 역설하며, 시간을 끌면 군대가 흩어진 부대를 모아서 다시 역공하게 될 것이니, 하루 속히 공세를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중국 고사에도 "정권투쟁은 시체를 보는 순간 시작하는 것이다"는 얘기가 있다.

12.12 사태가 일어났을 때에도 김총재의 인식은 너누마 안이했다. 전두환 합수본부장이 발표문에서 박대통령을 "각하 각하께서"라는 말하는 것을 보고 우리는 "박대통령 사망에 대한 뒤처리도 중요하지만 야당이 집권해서 민주화를 이끌어야 한다는 것이 더 중요하다. 전본부장이 박대통령을 계속 '각하'라고 호칭하는 것을 보면 군부의 흐름이 다시 10.26 이전으로 돌아가는 것 같다"고 거듭 경계심을 촉구했다. 그러나 김총재는 "지금이 어느때인데 군이 나오느냐?"면서 오히려 말을 삼가라고 힐책까지 하곤 했다.

결국 박대통령이 사망한 상황에서 자연스럽게 스스로에게 정권이 넘어올 수 밖에 없다는 안이한 생각을 갖고 있었기에 군이 흩어진 세력을 다시 모을 수 있는 여유를 주게 된 것이다.

김영삼의 낙관주의

반면 김영삼의 시각은 어떠했던가?

 

김대중씨 등 재야인사의 복권문제가 한창 논의될 무렵 김(영삼)총재는 최규화 대통령과 요담을 했던 적(2월 18일)이 있다. 저녁식사와 함께 5시간 가까이 최대통령과 대화를 나눈 김총재는 몹시 밝은 표정이었고 확신에 차 있었다.

최대통령은 그날 정치권력이 공백상태에 있는 만큼 신민당이 과거의 공격 일변도 태도를 지양하고 시시비비를 가리는 자세로 대해줄 것을 당부했고 김총재도 흔쾌히 약속했다.

특히 김대중씨의 북권문제에 관해 두 사람은 많은 얘기를 나눴다. 회담 후 발표내용은 "복권이 안된 유신의 희생자들에 대해 정치적 배려가 있어야 하며 당국은 이를 검토하기로 했다"는 원칙론 뿐이었다. 

그러나 김총재는 이후 계속 복권투쟁을 요구하는 우리에게 "걱정 말라"고 얘기했다. 하루는 나를 불러 "이달(2월) 안에 김씨가 복권될 것이니 그렇게 알고 준비하라"고 말했는데 2-3일 후인 29일 보권 발표가 있었다. 물론 김씨가 포함됐었다.

당시 현실적인 파워를 쥐고 있던 계엄사 내의 신군부 중심세력이 김씨의 복권을 반대했던 것은 주지의 사실이었다. 따라서 정가의 관측도 김씨의 복권에 대해선 비관적이었다. 그러나 김총재는 최대통령과의 회담 내용을 굳게 믿었으며 군부의 강력한 '비토'에도 불구하고 김씨는 결국 복권이 됐다.

같은 맥락에서 김총재는 최대통령의 정치일정에 대한 약속도 굳게 믿고 있었다. 더구나 최대통령이 가장 중요한 정지 동반자로서 김총재의 협조를 요구해왔기 때문이었다. 김총재는 당내의 당권파들이 김씨가 복권되면 곧바로 대통령후보 지명을 위한 임시전당대회를 열자고 주장했으나 "재야인사(김대중씨)의 복권문제가 해결되고 공정한 경쟁 분위가가 조성된 후에 소집할 계획이며 절대 서두르지 않겠다"고 밝혔다. 최대통령이 제시한 정치일정에 흐름을 맞춰나가는 게 가장 현실적인 방법이라는 것이었다

나중에 역사가 증명했지만 최규하는 믿을 만한 인물은 결코 아니었다. 사람이 나빠서가 아니라 너무 소심하고 무능했기 때문이다. 사실 문제는 당시 양김이 굳게 단결했더라도 무슨 뽀족한 대안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3김을 싸잡아 비판하면서 그들을 배제하고자 하는 음모가 가동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음모엔 알게 모르게 외신까지 가세하였고, 또 신군부를 지지하는 국내 언론까지 거들었다.

예컨데, '뉴스위크'지 4월 3일자는 <한국의 변화바람>이라는 제목으로 한 외교관의 말을 빌려 "김영삼은 능력이 부족하고, 김대중은 너무 과격하고, 김종필은 너무 때묻어 있다"는 내용의 기사를 게재했는데. 4월 11자 '조선일보'는 이같은 내용을 내보냈다. 조선일보의 보도에 대해 당시 전남대생들은 "다시 말해서 4월 3일자 '뉴스위크'지 기사를 8일 뒤 11일자 일간지에 3김을 보도하게 한 것은 3김을 고립시킨 뒤. 그네들 신다의 부상을 꾀하려는 망동으로밖에 볼 수 없는 것이다"며 정치공작에 의한 것이라고 규탄했다.

전두환의 중앙정부장 겸직

신군부의 리더인 보안사령관 전두환은 철저한 '정치군인'이었다. 그는 정보분야 출신이었고 청와대 경비단장의 경험으로 "대통령자리를 철저하게 벤치마킹하고 이너서클(소수의 권력자 집단)이 돌아가는 틀을 파악"한 인물이었던 것이다.

전두환은 1980년 3월말 국무총리 신현확을 찾아가 중앙정보부장도 겸직해야 겠다고 말했다. 10.26 이후 활동이 침체된 중앙정보부를 정비해 보안사와 함께 정권창출을 위한 양대 축의 하나로 삼고자 했던 건 아니었을까? 당시 상황에 대한 신현확의 증언이다.

"총리인 나는 이미 3월 중순 최규하 대통령에게 정보부를 흐트러진 상태로 두지 말고 책임자를 임명하되, 군인보다는 민간인을 부장으로 써서 정보기가의 양립화를 추진하라고 진언했다. 그런데 갑자기 全사령관이 나를 찾아와 정보부장을 겸하겠다고 하면서, '그래야 정보부도 안정시키고 올바른 궤도에 올릴 수 있다'고 말했다. 그때 나느 겸무는 안하는게 좋겠다는 의견을 말했다.

그러나 전두환은 1980년 4월 14일 정보부장(서리) 자리를 차지하고 말았다. 중앙정보부법이 보직을 가진 현역 군인이 중앙정보부장을 겸할 수 없게끔 규정했기 때문에 '서리'라는 편법으로 밀어붙였다. 전두환의 중장 지급도 그랬다. 소장에서 중장으로 진급하면서 최소한 6년이 지나는 것이 관례였지만, 전두환은 소장으로 진급한 지 3년밖에 지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마음대로 3월 1일부로 별을 하나 더 달아던 것이다.

전두환의 중정부장 겸직은 부총리급으로 국무회의에 참석할 수 있고 국방부장관을 제치고 군부를 장악할 수 있는 이점을 제공했다. 당시 한 관계자의 증언이다.

"全장군이 이따금 계엄사합동수사본부장 자격으로 주영복 국방장관을 수행하는 형식으로 국무회의장에 들어오는데 대해 신현확 국무총리를 비롯해 몇몇 장관이 문제를 지적하자 아에 全장군이 중정부장을 겸직해버렸다"

또한 중앙정보부는 정보장악 이외에도 막대한 정치자금을 제공할 수 있는 돈줄이기도 했다. 당시 특전사령관 정호용의 정보보좌역을 담당했던 김충립으 증언이다.

"80년 4월 중순께 정호용 사령관은 전장군이 정치권을 움직이려면 자금이 있어야 할 텐데 전장군은 물론 보안사에도 돈이 없는 모양이니 자금을 좀 마련해볼 수 없겠느냐고 나에게 말했다. 전장군 주변에 능력있는 사람들이 많은데 왜 내게 이런 부탁을 할까 의아스럽기도 했지만 주위의 사업하는 친구들에게 부탁해 상당액의 자금지원을 약속받아놓았다. 그런데 그로부터 며칠 후 정사령관은 자금이 필요없게 됐다고 말했다. 전장군이 정보부장을 겸하기로 했기 때문에 자금운영에 걱정이 없게 됐다는 것이었다."

당시 중정 예산은 약 8백억 원 정도였는데, 전두환은 실제로 정권장악 준비자금으로 이 가운데 120억 원을 빼내 썼다.
*함성득 "대통령 비서실장론"(나남 2002) 138-139쪽

그 시절 청와대는 신군부가 완전히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모든 게 전두환 마음대로였다. 일개 육군대령이 대통령을 잡아넣겠다고 큰소리를 치는 등 속된 말로 모든 게 '개판'인 세상이었다. 당시 한 청와대 비서관은 그때의 상황을 이렇게 묘사한다.

"전장군의 중정부장에 취임한 4월 중순경의 일이었습니다. 청와대 신관의 어느 방에서 우연히 흘러나오는 소리를 엿들은 일이 있었습니다. 당시 신군부의 실세로 일컬어지던 권정달씨의 목소리가 들렸어요. 권씨는 누구에겐가 '崔통(최규하대통령을 지칭)한테 그마두라고 그래. 그만두지 않으면 잡아넣겠어'라고 소리를 치는 거에요. 아무리 군인세상이고, 난장판이라고 하지만 일개 육군대령이 청와대 안에 들어와서 대통령을 잡아넣겠다고 소리를 치는 데는 정말 소름이 끼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날부터 청와대가 아니고 감옥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밥맛이 완전히 떨어지더군요."

양김의 착각과 환상

전두환의 중앙정보부장 서리 임명에 대한 3김의 반응은 어떠했던가?

김종필은 임명 발표 직후 당사에서 기자들에게 "철학에, 문제가 되지 않은 것을 문제로 삼는 것이 바로 문제라는 말이 있다"면서 특유의 선문답식의 답변으로 질문공세를 피해갔다.

김영삼은 4월 15일 설악산관광호텔에서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전장군의 중정부장서리 겸임이 민주화 일정에 관계가 있을 것으로 보느냐"라는 질문에 "상관없다. 민주화 일정은 예정대로 진행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이기택은 "김영삼씨는 이러한 군의 동향이 혼란을 수습하는데 도움이 되기를 기대한다며 사실상 지지를 표명하는 커다란 오류를 범했다"고 말했다.

**이도성 <전두환의 정치무대 복귀> 17쪽-1980년 5월 15일에 나온 지식인 134인의 시국선언'시에도 전두환의 중정부장서리 임명은 뜨거운 논란의 대상이었는데, 이에 대해 김정남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여기서 지식인들은 '국토방위의 신성한 임무를 수행하고 있는 우리 국군은 정치적으로 엄정중립을 지켜야 한다. 그런데 한 사람이 국군보안사령관직과 중앙정보부장직을 겸직하고 있다는 사실은 명백한 불법이므로 마땅히 시정되어야 한다'는 단호한 입장을 천명하고 이다. 이 선언문의 기초단계에서부터 선언문의 수위를 놓고 많은 논의가 있었다. 처음에는 재벌해체 등의 문구도 포함되었으나 준비회의에서 삭제되었으며, 군의 정치적 중립과 관련해서도 당초에는 '군은 정치적 중립을 지킬 것을 확신한다'는 온건한 표현으로 되어 있던 것을 홍성우변호사가 '전두환의 중앙정보주장 겸직은 명백한 불법'암을 분명히 하자고 하여 수정하였다. 이 선언 관련자들이 전두환 군부로부터 철저한 보복을 받게 된 것은 이러한 표현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김정남 <김대중 내란음모사건과 지식인 134인 선언>(생활성서 2003년 2월 47쪽)**

문제의 심각성을 제대로 깨닫은 건 김대중이었다. 김대중은 4월 16일 한국신학대학 강당에서 열린 강연을 통해 "전부장서리 임명은 국민의 판단이나 기대와는 차이가 있는 것으로 국민간에 상당한 우려가 대두되고 있다"고 말했다. 후일 김대중의 말이다.

"이것은 심상치 않은 일이었다. 나는 국민에게 이번 겸직으로 민주주의의 앞날이 걱정된다고 경고했다. 그 경고는 신문 구석에 조그맣게 실렸다. 그러나 당시 신문을 보면 알겠지만, 그 경고를 어느 한 사람도 진지하게 들어주지 않았다. 공화당은 물론 신민당 내에서도 전두환 소장이 막강한 권력기관을 두 개씩이나 장악하는 것에 대해 '걱정할 필요는 없다'고 말했다. 더욱이 신민당에서는 '민주주의는 반드시 실현된다. 그렇게 되면 권력은 반드시 우리에게 온다. 이것은 옳은 수순이다. 민주주의의 실현을 의심하는 자는 소신이 없는 자이다'라며 나를 비난하고 있었다.

글라이스틴은 전두환 중정부장 서리 임명에 대해 워싱턴에 "하룻밤 사이 그는 12.12이후 쓰고 있던 가면을 벗어던지고 1면 뉴스로 등장하면서 자신을 서부 개척시대의 영웅과 같은 고결한 인물로 묘사하고 있다"고 보고했다. 또한 글라이스틴은 전두환의 중앙정보부장 서리 임명이 뒷날 80년의 역사를 뒤틀리게 만든 결정적인 계기였다고 말했다.

"최대통령의 굴복은 전두환으로 하여금 무소불위의 막강한 권력기관 장악을 통해 민간부분으로 진출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준 것이었다. 내가 보기에 전국적으로 긴장이 고조되고 4주 후인 5월 중순 드디어 폭발하게 만든 가장 중요한 원인은 그런 갑자스럽고도 무분별한 조치 때문이었다. 미국의 방해를 박기 위한 것으로 추측되지만 한국정부는 전두환의 임명 30분 전에야 우리에게 그 사실을 통보했다. (우리가 소문을 들은 것은 약 4시간 전이었다."
*윌리엄 글라이스틴, 황정일 역 <알려지지 않은 역사>(중앙 m&b 1999, 158쪽)

미국의 전두환의 중앙정보부장 서리 임명에 대한 반발로 예정되었던 연례 안보회의를 연기하는 한편 글라이싄은 직접 최규하를 만나 전두환의 중앙정보부장 서리 임명에 대해 항의했지만, 아무런 성과도 얻지 못했다. 이후 미국은 전두환에게 끌려다닐 수 밖에 없었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양김은 따로 놀기에 바빴다. 급기야 김대중은 4월 7일 신민당 입당 거부선언을 하였고, 양김은 윤보선의 중재로 4월 12일 3자회동을 하였지만 아무 소득 없이 끝나고 말았다. 이후 양김의 갈등과 세 불리기 경쟁은 더욱 깊어지고 치열해졌다. 4월 28일에 벌어진 '사건'은 그걸 잘 웅변해주었다. 한국일보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서울의 봄'이 깊어지면서 김영삼 신민당 총재와 김대중씨 간의 세 불리기 경쟁은 눈에 띄게 치열해지고 있었다. 김총재가 80년 4월 신민당 당직자를 대동하고 충남 현충사를 참배하러 나서자 같은 날 같은 시각 신민당 내의 이른바 '동교동계'의 의원들을 대동하고 현충사 인근 윤봉길 의사 생가를 방문했다. 이 날 양김씨의 행렬은  현충사입구에서 서로 만났으나 서로가 서로를 '소 닭 보듯' 했고 수백 명씩 몰려나온 양측 지지자들은 피켓과 플랜카드를 흔들며 세력을 과시 마치 대선 전야를 방불케 했다."

이 경우 전두환의 중앙정보부장 서리 임명의 의미를 전혀 깨닫지 못하고 낙관론에 젖어 있던 김영삼보다는 그 의미를 간파하고 크게 우려했다는 김대중에게 더 큰 책임을 물어야 할 일이었다. 신군부가 무력으로 대통령 기능과 모든 정보 기능까지 장악한 상황에서 사실상 3김이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었기에 그들의 단합은 더욱 절실한 것이었지만, 그들은 18년 만에 찾아온 '서울의 봄'의 온기와 향기에 취해버렸던 건지 민주화가 다 된 세상처럼 서로 경쟁하기에 바빴다. 그런 경쟁구도하에서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설마'하면서 '서울의 봄'에 대한 환상을 계속 키워가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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