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역사-k공작 1980년대 역사

박정희가 키운 전두환

1979년 10.26사건으로 박정희와 유신체재는 종말을 고하였지만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는 12.12 쿠데타를 일으켜 군권을 잡고 정권장악을 꿈꾸게 되었다. 전두환은 그럼 어떤 인물일까?

1980년 1월 1일 김수환 추기경과 강원용 목사 등 다시 존경받는 종교지도자들을 불쑥 찾아온 전두환의 세배를 받았다. 일개 육군 소장이 도대체 무엇 때문에 그런 세배 행차를 했던 걸까?

전두환의 타고난 유들유들함과 비위는 거의 경의에 가까운 것이었다. 그는 1970년대 하나회라는 군부내 사조직 결성 때부터 그런 면에서선 천부적인 재능을 갖고 있는 인물이었다. 그는 그 재능 때문인지 몰라도 이미 위관급 장교시절부터 철저한 '정치군인'의 면모를 드러냈고 이후 대통령 박정희와의 잦은 교제를 통해 닳고 닳은 정치인들 뺨을 서너대 치고도 남을 만큼의 권모술수 능력을 길러 왔다.

박정희와 전두환의 관계에 대해 전두환은 87년 4월 12일 청와대 본관식당에서 수석 비서관들과 점심을 먹는 자리에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내가 어디가 있어도 골치아픈 일이 일이 있으면 나를 불렀어요. 군대 얘기도 물어보고 그랬어. 나는 항상 그 양반한테 희망적인 얘기를 많이 했어. 1년에 한두번은 부르셨어요. 이 식당, 여기에서 육여사도 함께. 분식 권장할 때인데 분식으로 식사도 했어. 육여사가 만든 거라고 했는데 별로 맛은 없지만 나는 식성이 좋으니 두 그릇 정도 먹었어요"     

그랬다. 전두환은 그렇게 붙임성이 좋은 인물이었다. 후일 그가 대통령이 되고 나서 그들 '돌대가리'로 욕하는 이야기들이 시중에 많이 떠돌았지만, 그것도 뭘 모르고 하는 소리였다. 탁월한 사교성은 비상한 기억력을 필요로 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전두환의 말이다.

"내가 기억력이 괜찮은 것 같아. 내가 중대장할 때 일주일 만에 180명의 이름을 다 외웠더니 모두 놀랐어. 대통령은 만물박사가 되어야겠더군. 경제도 그래. 내 기억력은 남들도 놀랄 정도지"
박정희가 전두환에게 헛바람만 집어넣지 않았더라도 전두환은 좋은 군인으로 인생의 마지막을 아름답게 장식할 수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아니 굳이 박정희와의 잦은 교제를 탓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청와대 경호실 근무경험만으로 전두환은 '정치군인'으로서 갖춰야 할 모든 자질을 다 갖추게 되었다고 보는게 옳을 것이다. "목에 힘을 주고 패거리의 우두머리 같은 기질을 보이고 행세하는 전두환 소장은 정신 자세부터가 정치적이었고 정치적 야망을 가지고 있었다"는 정승화의 평가는 결코 악의에서 나온 것 같지는 않다. 
                                                                      
그런 '정치군인'이 별도 더 빨리 달고 군부 내에서도 많은 추종자들을 거느릴 수 있다는 건 적어도 5.16쿠데타 이후 한국 군부가 얼마나 '정치화'되었는가를 말해준다. 전두환은 박정희가 뿌린 씨앗을 추수하겠다고 나선 인물이었는지도 모른다.

전두환의 대미공작

전두환의 곁에 전두환 못지않은 정치감각을 가진 '정치군인'들이 포진하고 있었다. 그들은 80년 1월 군장성들의 대대적인 물갈이 이후에도 공사석에서 12.12사태에 대해 비판적인 발언을 했던 장성들을 찾아내어 내쫓거나 보직을 변경하는 식으로 군부를 정권장악의 도구로 이용할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다.

그러나 미국과의 관계에서 신군부의 듯대로 쉽게 풀리진 않았다. 12.12쿠데타 직후 보안사에 잡혀가 조사를 받고 나왔던 한 예비역 장성의 말이다.

"내가 보안사에 붙잡혀 들어가 집사람이 생각다못해 전두환 장군의 부인 이순자씨를 찾아갔다고 한다. 집사람은 이씨와 아우 형인 하면서 잘 지내온 사이였다. 집사람이 '어떻게 남편을 살릴 수 없겠느냐'고 사정을 하자, 이씨는 '우리 형편도 마찬가지다. 미국이 인정을 하내줘 남편의 일이 실패해서 졸도했다'고 말했다고 한다. 당시 전장군은 위컴 사령관이 12.12 거사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으 어떤 인사를 통해 분명히 전해오자 크게 상심했다는 말을 나중에 들은 적이 있다."

1980년 2월 14일 미 8군 영내에서 전두환과 주한 미사령관 존 위컴과의 만남이 이루어졌다.위컴은 발을 책상 위에 걸쳐놓은 채 비스듬히 앉은 자세로 전두환을 맞으면서, 12.12당시의 유혈사태와 9사단의 병력이동 문제를 따지는 등 전두환을 몰아 부쳤다. 그러나 2월 27일 위컴이 남한산성 육군 교도소에 수감중인 정승화의 54회 생일을 맞아 정승화의 집으로 "나라를 위해 최대의 헌신과 봉사를 하셨고 앞으로도 하시게 될 장군의 생일을 맞아 진심으로 축하를 보냅니다"라는 축하카드와 생일선물을 보낸 것을 전두환이 일종의 '협작카드'로 활용하면서 달라지기 시작했다.

상대편의 약점을 잡아 활용하는 전두환의 대미공작술을 주한 미대사 윌리엄 글라이스틴을 향해서도 발휘되었는데, 글라이스틴에게 "가정불화도 해결 못하고 내정간섭이냐"는 말까지 했다. 전두환은 글라이스틴의 협조를 얻지 못하자, 미국의 고위장성들에게 편지르 보내 자신이 워싱턴을 방문할 수 있도록 협조를 요청하기도 했다.

또 손충무, 김재현, 이규환 등 재미 민간인 3인방을 동원한 공작도 벌였는데. 이들의 활동에 대해 전두환의 동서인 김상구는 다음과 같은 증언한다.

"워싱턴포스트나 뉴욕타임스등에 신군부를 선전하는 영어광고를 내고 미국 상하원의원들에게 전두환 장군을 소개하는 영문편지를 보냈습니다. 미국이 정계 언론계 실력자들을 만나 신군부의  입장을 대변해주는 일을 했습니다."

신군부는 심지어 미국 정계에 거액의 정치자금을 뿌리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손충무의 증언이다.

"방미협상의 미국 창구였던 리처드 알렌이 전두환 사령관으로부터 돈을 얻어 쓴 것으로 압니다. '정치자금'이라고는 못하지만 내가 알기로는 전두환 사령관이 약 4백만달러를 미국에 보낸 것은 사실입니다. 보수연구기관으로 널리 알려진 하버드대한 옌친연구소에 1백만달러, 헤리티지재단에 1백만달러를 보냈는데 명의는 모두 무역협회가 제공하는 것으로 했지요. 또 재미교포 자녀들을 위한 장학기금을 1백만달러씩 드 차례에 거쳐 냈습니다."

언론을 장악해야 천하를 얻는다

신군부에게 군부의 장악과 미국의 승인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국내 민심이었다. 신군부는 대대적인 여론조작을 획책하였다. 전두환이 "언론을 장악해야 천하를 언는다"는 허문도의 조언을 받아들인 결과로 알려져 있지만 그런 생각을 허문도만 했겠는가?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미리 허문도라는 인물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80년대 상황에서 허문도로 대표된느 헌문도와 같은 인물과 집단들이 매우 많았기 때문이다. 여기엔 일부 언론도 포함된다. 이들은 불을 보고 달려드는 불난방처럼 전두환과 신군부 실세들을 향해 달려들어 과잉 충성경쟁을 벌였다. 이들 밑엔 이들의 환심을 사기 위한 또다른 과잉 충성경쟁이 벌어졌을 것이다. 이게 바로 박정희 18년 체제가 낳은 한국적 출세의 '게임의 법칙'은 아니었을까?

허문도는 원래 '조선일보' 기자로 일하다가 주잉 한국대사관의 공보관을 전직한 사람이었다. 그는 어떻게 전두환에게 접근했던가? 허문도를 전두환에게 소개시켜준 인사는 이렇게 말한다. 

"80년 2월초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때 주일 한국대사관의 공보관으로 있던 허씨가 귀국해서는 나에게 전화를 걸어왔어요. 너눈 허씨와 그 전부터 안면이 있었습니다. 그는 숙소로 쓰고 있던 프라자호텔에 가서 만났지요. '전두환 사령관을 만나게 할달라'고 부탁하던구요. 나는 박정희 대통령 시절부터 전두환 장군을 비롯한 육사출신들과 막역한 사이였습니다. 알겠다고 응낙하고는 보안사령관실에 면담 신청을 해 다음날 오후 4시로 약속을 받아 냈어요. 허씨를 전장군에 소개해주고 나는 먼저 나왔는데, 나중에 들으니 전장군이 허씨의 열변에 큰 관심을 보이더라는 겁니다.30분으로 예정됐던 면담시간이 1시간 반으로 늘어나고 다음날에 또 한차례만났다고 들었습니다"

허문도는 전두환을 처음 만난 자리에서 "지금 3김씨나 최규하대통령의 지도력으로 나라의 장례는 불안하다. 힘을 바탕으로 한 새 질서가 창출되지 않으면 우리나라는 자칫하면 브리질이나 그리스꼴이 될지도 모른다"며 전두환을 감동시켰다.

그 결과, 허문도는 나중에 전두환이 나중에 중앙정보부장을 겸직할때 그 비서실장을 발탁되었고, 전두환이 11대 대통령이 되었을 때 청와대 정무비서관으로 따라 들어갔다. 전두환의 귀를 붙잡은 그의 권세는 막강했다. 무언가 자신의 주도로 한 건 크게 올려야겠다는 허문도는 야욕은 나중에 언론통폐합을 밀어붙이는 동력이 되었다. 이제 우리는 곧 수많은 허문도들을 만나게 될 것이다.

**허문도 그는 82년도엔 문공부차관을 발탁됐다가 '장영자사건'으로 2허(허화평, 허삼수)와 함께 한직으로 물러났으며 84년에 다시 대통령 정무 제1비서관으로 복귀했다가 86년 국토통일원장관을 역임했다. 그 자신 14대 총선 도중 한 유세에서 "나는 40대에 이 나를 동으로 가자, 서로 가자 해본 사람"이라고 말했다. 전두환의 비서실장을 지낸 한 인사는 허문도는 "한마디로 말해 퍼내틱(fanatic 열광적인)한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정치군인 사조직의 과대망상

신군부가 시도한 대대적인 여론조작과 관련해 우리가 가장 크게 주목해야 할 것이 12.12쿠데타 세력과 5.16쿠데타세력의 차이점일 것이다. 12.12쿠데타는 5.16쿠데타로부터 18년이나 지난 시점에 일어났다. 

18년동안에 많은 변화를 겪은 한국인들이 또 다시 일개 육군 소장이 집권하는 걸 반길 리는 만무했다. 그래서 신군부에겐 과거와는 다른 차원의 치밀한 음모와 공작이 필요했다.

12.12사태는 영관급 중에서도 17기가 주도한 것이었으며, 이들은 그 이전 기수들과는 달리 뛰어난 마리를 갖고 있었다. 12.12사태의 주동자 가운데 한 명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정규육사 4년제 출신 가운데서 피난육사 등을 제외하면 17기가 바로 진짜 육사고 최고 엘리트다. 가난해서 육사를 갔을 뿐 누구도 서울 일류대학 갈 수 있는 머리와 실력이 있었다. 대한민국 육군을 통틀어 연대가 00개하고 볼때 79년말 반 가까이 17기 대령들이 연대장을 하고 있었다. 어떤 의미에서 전장군을 비롯한 윗기들은 업힌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누가 업고 업혔건, 여기서 중요한 건 17기의 그런 강한 자존심은 자기들이 국가운영을 맡아야 한다는 과대망상으로 변질되었으며, 그들의 뛰어난 머리는 '음모와 공작'에 바쳐졌다는 점일 것이다. 그들은 이를 '기획'으로 간주했겠지만, 그들의 모든 '기획'이 잔인한 고문과 살인을 필수요건으로 수반했다는 점은 간과할 수 없다.

게다가 신군부는 전두환을 중심으로 일심동체였다. 12.12사태당시 한 주동자의 견해처럼 11기 전두환을 비롯한 17기의 윗기수 장성들이 17기에 업힌 것이라는 주장도 있지만, 적어도 전두환만큼은 17기의 절대적 지지를 받고 있었다. 이에 대해 박보균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12.12에서 정권을 장악하기에 이르기까지 정규 육사출신들은 전두환 외에 누구도 지도자로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단합되어 있었다.  말하자면 전두환은 감히 누구도 넘볼 수 없을 정도의 그들간에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리더쉽은 어느날 권력을 손에 쥐고부터 생긴 것이 아니다. 오랜기간 쏟아 부은 노력과 정성을 결정적일 후배들의 충성확보로 보상받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리더쉽의 실체는 바로 여기서 출발한다."

그거 바로 사조직의 특성이었다. 전두환의 부하들은 전두환의 리더쉽을 미화하지만, 과거 어떤 군인도 전두환만큼 사조직 결성과 유지에 공을 들이지 않았다는 점에 주목하는 것이 더 공정한 평가가 될 것이다. 곧이어 발생할 '광주학살'이라는 천인공노할 범죄행위도 바로 그런 사조직의 기이한 단결력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70년대 보안사가 하난회를 조사했을때 수사관이었던 백동림의 증언은 '광주학살'을 비롯한 신군분의 잔혹한 범죄행위에 대해 아무런 브레이크가 없었던 가장 큰 이유가 하나회라는 사조직의 마피아적인 성격에 있었다는 걸 시사해주고 있다.

"나는 평소 육사출신이야말로 우리 사회에서 가장 모범적이고 귀감이 되는 사함들로서, 그 언행에 있어 정정당당하고, 정직하고, 정의롭고, 명예롭다는 신조를 갖고 이를 큰 긍지로 삼고 있었다. 그런데 군율이 엄하고 지훼체제가 일사불란해야 하고 군기가 생명이라는 군대 내에 마치 간첩조직처럼 서로 차단된 점조직으로 구성된 불법적인 조직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데에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더구나 이 조직은 조직방법과 조직목적 그리고 행동강령이라고 할 수 있는 선서내용과그 구성원의 행태가 그 유명한 범죄조직인 마피아 조직과 너무나 흡사하여 개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이들 조직원은 회장인 전두환 대령 앞에서 오른손을 들고 "만일 서약을 어겼을 때는 인간이하의 대우를 받는다"는 선서를 했다. ..... 이들은 자기들끼리 계획적으로 진급과 요직을 독차지하기 위하여 진급담당 요직을 점거하고 심지어 돈을 받아 진급시키기도 하면서 서로 보호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부정을 거침없이 자행하여 조사관들 모두가 분개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박정희정권시절 보안사령관이었던 강창성의 조사결과, 하나회는 대해 다음과 같은 것들이 밝혀졌다 "하나회는 1)정규육사출신을 매기별로 정원제를 유지하여 가입시키되 약 5프로수준인 10여명 내외로 하고 2)회원의 다수는 영남출신이 점하고, 여타지역출신은 상징적으로 가입시키며 3)비밀 점조직방식으로 조직하되, 가입시 '조직에 신명을 바쳐 충성할 것을 맹세케 하고 4)고위층으로부터 활동비를 지급받거나 재벌로부터 자금을 수령하며 5)회원이 누릴 수 잇는 혜택은 진급 및 보직상의 특혜라고 하는데, 당시 육군에는 인사 정체가 심화되어 정규육사출신들은 의무복무기간 5년이 끝나고 장기복무에 들어가게 되면 매기별 현역 총원의 1/2씩만 상위계급으로 승진할 수 있었기 때문에 하나회에의 가입은 군부 내에서의 출세가 보장된 것이나 다름없다**
 
'전두환 대통령 만들기'를 위한 여론조작

신군부가 추구한 음모와 공작의 핵심은 여론조작이었다. 신군부는 언론이 자기들의 집권을 적극옹호하면서 지켜주는 '애완견이기도 하면서 보호견'이 되어주기를 원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신군부는 이미 1980년 3월 중순 이전에 보안사 언론대책반을 통해 이른바 'K(King)공작'을 입안하였다. 'K-공작'은 '전두환 대통령 만들기'를 위한 여론조작 방안으로 보안사의 권정달 정보처장, 정도영 보안처장. 허삼수 인사처장, 이학봉 대공처장, 허화평 사령관비서실장 등 이른바 전두환그룹 '5인방'이 주도하였다.

K-공작의 큰 시나리오는 3김을 민주정치세력, 신군부를 안정구축세력으로 차별화하여 '선안정 이론'을 확산시키고 언론계 간부들의 성향을 분석하여 협조가능한 사람들을 포섭한다는 두 가지로 구성돼 있었다.

이에 따라 보안사팀은 연일 계속되던 대학생 시위와 노동쟁의를 '혼란'으로 몰아붙였으며 3김의 대결양상을 '구태의연한 정치작태' '대통령병에 사로잡히 추악한 파벌싸움'으로 비춰지도록 언론의 논조를 유지하였다.

K-공작의 실무총책을 맡은 보안사 언론팀장 이상재는 시청검열단에 사무실을 차려놓고 '강기덕 보안사사령관보좌관'이라는 가명 타이틀로 언론과 보안사 간의 대화채녈 역활을 맡았다. 이상재는 계급은 준위였지만, 전두환의 가방모치(고급장교의 부관)를 했던 경력 하나로 천하를 호령하게 되었다. 이와 관련 K-공작의 실무요원이었던 김기철은 다음과 같이 증언한다.

"12.12사태 후 권력장악에 자신감을 얻은 신군부는 집권에 가장 중요한 요쇼인 대중조작을 위해 3월초부터 언론대책반을 가동시켰어요. 사실 보안사의 언론대책박은 12.12이전부터 보안처 산하에 설치돼 있었습니다. 그것이 2월초 신설된 정보처 산하로 옮겨지면서 확대개편된 것이지요. 이상재씨의 활동도 그때부터 시작됐어요. 3김씨를 타도하고 권력을 장악하겠다는 길로 확실하게 나선 것입니다. 언론검열의 방향은 다분히 '혼란방치'의 성격을 띠고 있었지요. 혼란이 극심해져야 안정세력의 명분이 생기는 것 아니겠습니까"

K-공작의 전위대를 자처한 언론

지난 96년 공개된 K-공작 문건에 따르면, 신군부는 7대 중앙일간지와 5대 방송사,2대 통신사 사장, 논설위원, 편집국장 등 95명을 1단계 회유 대상자로 선정했으며 이 가운데 회유정도가 양호한 이들을 2단계, 3단계로 넘겨 이들을 적극활용한다는 등의 세부 계획까지 마련해 실천에 옮겼다.

자발적으로 신군부의 집권을 돕기 위해 애쓴 언론인도 있었다. 조선일보의 선우휘 주필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그는 80년 1월 30일 일본 산케이신문과의 회견에서 신군부를 지지하면서 언론통제를 정당화하는 망언을 하여 신군부를 기쁘게 만들었다. 이는 이후 조선일보의 노선을 예고하는 것이기도 했다.

언론인 94명 이외에 지식인들도 포섭대상이었다. 학자, 평론가, 외국인사 등 '지식인 투고를 조종'하는 방안과 신문의 '일반독자란을 활용'하는 방안까지 입안되고 실천되었다. 예컨데, '강력한 지도력으로 안보 안정을'(연세대 안모교수) '다시는 분열과 대립 자초할 수 없다'(고려대 한모교수) '부패척결 결단이 정치풍토 바꿔'(소설가 이모씨)등 교수 문인 종교인의 기사는 바로 K공작계획의 일환으로 나오게 된 것이었다.

반면 언론사주들은 '사교'의 대상이었다. 조선일보 사주 방우영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노태우와의 만남을 회상하면서 노태우가 싱거운 사람이었다고 비웃고 있지만. 그건 그만큼 언론사주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애를 쓴 것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1980년 봄 노태우 보안사령관이 각사 발행인들을 태릉 골프장에 초대했다. 노사령관과 한조가 되어 라운딩하는 도중 그가 옆에서 다가와 자신의 특기를 보여주겠다면서 휘파람으로 뻐꾸기 우는 소리를 흉내냈다. 본인은 정색을 하고 열심히 불었겠지만 나는 속으로 '참 싱거운 사람이다'라고 생각했다"

신구부의 제 2인자였던 노태우가 일개 신문사주에게 그렇게 싱거운 짓을 햇다는 것을 무얼 의미하는가? 이는 이후 본격화될 신군부의 조선일보를 비롯한 언론과의 밀월관게를 예고하는 것이었다. 일부 언론은 K-공작의 전위대를 자처했던 것이다.



                                   강준만의 한국현대사산책 광주학살과 서울올림픽까지 1980년대편 1권중에서 P49~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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