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03월 06일
구원의 확신과 헌신 1
기독교를 구원의 종교라고 하는데, 구원의 확신과 확신후에 이어지는 헌신, 진정한 헌신에 대해서 말씀을 나눌려고 합니다.
최근에 우리 한국 신학자들 중에 ‘다른 종교에도 구원이 있다’하는 그런 이론을 가져와서 신학생들을 많이 혼란스럽게 하는 그런일이 간간히 들려오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른바 다원주의적 신학이라는 입장인데요 지금까지는 우리가 ‘기독교만이 유일하고 절대적 구원론을 가지고 있다’ 이렇게 생각했는데, 이 기독교의 근본을 뒤흔드는 다른 종교에도 구원이 있다 이런 말이 나오면서 성도들이 듣고는 큰 혼란에 빠지고, 그 신학교수님들이 그런 말씀을 하시니까 일선에서 목회하는 분들도 혼란에 빠져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성경이 말하는 구원에 관한것을 좀더 공부하고, 또 구원에 관한것을 마치 구원파의 전유물인 것처럼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잘못된 것이고, 또 구원에 관한 것을 잘 가르치지 않는것도 문제가 되겠고, 또 그것만 문제가 아니라 마치 기독교가 정말 구원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는것처럼 구원만 말하고 딴것을 가르치지 않는, 이런것도 문제가 됩니다.
기독교를 구원의 종교라는 것은 틀린말은 아니지만, 딱 구원 그 외에는 가르치지 않을 때, 교회는 이상한 교회가 됩니다.
그래서 오늘은 구약과 신약에서 말하는 구원에 대한 의미를 좀더 새겨보고, 지금 정말 종교 다원주의자들이 말하는 대로 다른 종교에도 정말 구원이 있는것인지도 잠깐 살펴볼려고 합니다.
만약에 기독교외에 다른종교에도 구원이 있다고 한다면 예수님이야말로 가장 어리석은 분중에 한분이 될꺼예요.
다른 종교에는 십자가에 못박히지도 않고 구원받는다면, 예수님은 피투성이가 되어서 혼자만. 어떻게 생각하세요? 말이 안돼요. 그렇죠?
그리스도교에서 예수님은 정말 십자가를 지고 피를 흘려서 대속의 죽음과, 그 보혈로서 우리죄를 도말함으로 우리가 죄사함 받고 구원을 얻게되고 영생을 얻게된다는 것은 기독교의 기본이되는 건데, 이것을 흔들어버리면 기독교는 있으나마나죠. 다른 종교에도 구원이 있다면 선교할 필요도 없잖아.
그래서 원래 진리는 간단한건데, 단순하고 간단한건데 자꾸 학문적으로 이상하게 만들어서 타 종교에도 구원이 있다 이런 말을 하는 것 같애요.
‘다른 모든 종교의 교주가 아무 피도 흘리지 않고 십자가도 지지 않고도 구원의 길을 닦았는데, 예수님만 비참하게 십자가를 지면서 구원의 길을 닦았다’ 매우 이상한 이론 아닙니까?
제가 신학교에서 공부할 당시에 신학교 논문중에 ‘오늘의 구원’이라는 오늘의 구원 다르고 어제의 구원 다릅니까? 오늘의 구원론 하면서 오늘의 구원이 뭐냐? 그때 신학자들은 오늘의 구원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보혈로서 죄사함 받고 구원받는 것이라고 보지 않고, 그 당시 오늘의 구원이라는 말을 쓰는 사람들은 ‘인간화’가 구원이다. 어렵죠?
인간들을 자꾸 비인간화해왔는데, 인간을 다시 인간화하는 것이 구원이다. 이렇게 신학적으로, 우리가 공부할 당시, 30년 전에 벌써 그런말이 나왔어요.
현대 산업사회가 혹은 공산주의가 인간을 기계화하거나 아니면 기계에 들어붙어있는 부속품처럼, 돈을 위해서 인간성이 파괴되고 기계에 매여있는 기계의 부속품처럼, 그렇게 돌아간다고해서 역시 비인간화 된 것이고, 또 비인간화의 극치가 군인을 만드는 거예요.
군인은 그야말로 무기죠 무기. 그래서 어지간하면 전쟁이 나지 않아야 하는데, 전쟁이 나면 그야말로 사람이 무기처럼 되어서, 사람 가지고 사람 죽이는, 정말 없어야 될 일인데 군인을 만드는 것이 비인간화의 극치다 하면서 신학자들이 그런 말들을 했습니다.
이념을 위해서 싸우다가 죽게하거나, 또 어떤 다른 인간을 신격화하는것도 비인간화예요.
한 사람을 지나치게 신격화 하는것도, 인간이 인간으로 남아야되는데, 인간을 신격화하니까 그것도 비인간화죠.
이런것을 두고 당시에 오늘의 구원은 인간을 인간되게 하는 것이다. 인간화. 이런말을 했어요. 그러니까 성도들이 들으면 굉장이 어려운 이야기죠?
그래서 ‘인간화’라고 구원을 규정하고 모든 사상에서 모든 이데올로기에서 다시 비인간화된 것을 인간화하는 것이 오늘의 구원이다. 이런식으로 주장을 했단 말이예요.
처음에 제가 신학교에서 얼마나 혼란스러웠는지 몰라요. 내가 이런걸 배우러 신학교에 왔는가 싶을정도로 혼란이 있었습니다.
한때, 그 전후해서 ‘오늘의 예수’라는 논문도 나왔어요. 오늘의 예수. 우리는 오늘의 예수도 오늘의 예수고, 2000년전의 예수도 오늘의 예수고, 내일의 예수도 오늘의 예수고, 항상 똑같은 분인데, 오늘의 예수라는 신학이 등장하면서 오늘의 예수는 2000년전 마리아의 몸에서 난 예수그리스도가 아니고, 그것은 그때 당시에 그리스도예수이고, 오늘의 예수는 다르다. 오늘의 예수는 누구냐? 이한열이가 오늘의 예수다. 이런 신학이 있었어요.
그래서 옛날에는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면 하나님이 들으시지만, 오늘에는 이한열의 이름으로 기도해야 하나님이 들으신다. 이런 신학이 신학자들입에서 공공연히 나와서 주창되고 했는데, 성도들이 알면 정말 졸도할 일이죠?
오늘의 예수라는 말도 그렇고, 오늘의 구원이라는 말도 전부다 잘못된 신학인데도 그런 학설들이 신학교에서 난무했다는 사실을 다행히 성도들이 모르죠. 알았더라면 장학금도 안나오고 신학교 후원도 안 할텐데..
그리고 한때 또 독일에서는 히틀러가 오늘의 예수라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 히틀러’라는 말을 썼어요. 오늘의 예수는 히틀러로 성육신되어 나타났다. 히틀러가 오늘의 구세주다. 이렇게 그런 신학이 대두하면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히틀러의 이름으로 기도하면 하나님이 들으신다. 이런 신학이 나왔어요. 독일신학이.
그래서 여러분 어설프게 신학을 시작했다가 이런말 들으면 당장 봇짐싸서 집에 가겠죠?
이런 신학 사조가 판을 치다가 좀 조용하는가 했더니 최근에 와서는 종교다원주의, 다시말하면 다른 종교에도 구원이 있다. 정상으로 올라가는 방향은 똑같고 출발점이 다를 뿐이다. 이렇게 해서 종교다원주의자들은 다른 타종교, 예를들면 세계 4대종교, 8대종교 이런 종교는 다 구원이 있다고 주장하는 거죠.
그러면 도대체 구원이 뭔가? 도대체 무엇을 구원으로 보기 때문에 있다고 주장하고 없다고 주장하는가?
여러분 다 아는줄 아는데 물으면 잘 모릅니다. 안 물으면 아는데, 물으면 잘 몰라요. 여러분 구원이 뭐요? 내가 어디가서 물으니까, 10원에서 1원 모자라는 거요. 하하하.
우리가 ‘구원’하는 개념이 변천되어 왔어요. 구약시대의 구원이라는 말과, 신약시대의 구원이라는 말이 달라요. 신약시대에도 구원이라는 단어가 나온다고 해서 다 오늘 우리가 말하는 죄사함 받고 영생으로 구원받는것과 다른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신약성경 안에도.
구원이라는 단어를 쭉 뽑아보니까 구약시대에 구원이라는 것은 대개 전쟁같은 위험에서 위기를 모면하는것 이런것을 구원이라고 해요. 대부분 구약시대에 구원이라는 것은 전쟁에서 구원받는 겁니다. 전쟁에서. 하도 전쟁이 많이 나니까.
그리고 이스라엘 나라가 지정학적으로 강대국 틈새에 끼어있기 때문에 항상 외부로부터 침입을 받고 그런 위기를 날마다 경험하는 그런 위치에 있었어요. 그러니까 전쟁이 나거나 위험을 닥쳤을 때 어떻게 구원받을 것인가? 그런 구원으로 구약성경에는 거의 그런 구원입니다. 개념이.
그러다가 오늘 우리가 마태복음을 보겠는데, 마태복음 1장 18절 봅시다.
신약에 와서는 전혀 다른 구원관이 나오는데, 마태복음 1장 18절. 제가 읽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 모친 마리아가 요셉과 정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그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저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가로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 말라 저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거기 줄을 그으세요.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그래서 복음서 안에서 맨처음 나오는 구원이라는 단어가, 천사가 일러준 구원이예요. 천사가 한 말이죠. 천사가 요셉의 꿈에 나타나서 아들을 낳거든 이름을 예수라 하라 예수라는 말은 전쟁에서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백성을, 자기 백성입니다. 모든 만백성이 아니예요.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그래서 저희 죄에서 구원받는다 하는, 이것은 그야말로 청천벽력같은 얘기고, 구약시대에서는 전혀 이런 개념도 없었어요.
그러다가 이제 천사가 처음으로 구원의 개념을 전혀, 그야말로 혁명적인 그런 변화가 온 겁니다. 유대인들은 메시야 다시말해서 구세주를 기대하고 고대할때도 이런 메시야를 고대한게 아닙니다.
유대인들이 메시야가 온다, 다윗의 자손이 온다, 베들레헴에서 탄생한다 할 때, 일반적으로 유대인들은 죄에서 구원하는 그런 메시야 말고, 그냥 오자말자 로마를 끌어 엎어버리고 헤롯을 박살을 내버리고 온 천지를 다윗처럼 여호수아처럼 가는곳마다 승승장구하는, 그래서 모든 세상 이방인들을 전부다 노예로 삼아버리는, 그런 강력한 어떤 군주가 어떤 영웅이 나타나기를 바란 것이지, 누구 뭐 자기 피를 흘려서 남의 죄를 구속하는 이런 메시야는 상상도 안 한 거예요.
그러다가 이 사도들에게 큰 충격이 온 거예요. 정말. 예수님을 따라 다닐때도, 심지어 12제자 까지도 예수님을 따라가면 뭔가 한자리 한다. 누가 주의 우편에 좌편에 앉느냐? 그런 신경전을 벌이고 따라다녔거든요. 그러다가 마태복음을 기록할 때 연도가 정확하지 않습니다만 AD 50년에서 60년, AD 50년부터 55 56년, 70년까지도 안 갔을 겁니다.
그 어간에 이 마태복음이 기록되었는데, 이미 이들은 메시야가 이제는 다윗처럼 여호수아처럼 외부 주변의 나라들을 쳐부수고 무력으로 물리적인 어떤 구원이 아니고, 죄에서 구원한다 하는것을 안 거죠.
그런데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3년동안 사역하실 때, 말씀 전하실 때, 내가 온것은 죄에서 구원할려고 왔다. 이런말을 직접했느냐 하면 별로 그런것도 없어요. 그렇게 명확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이후에 어떻게든지 한 교회의 역사가 25년 예수님이 승천하신후에 25년 30년 그 어간에 벌써 구원에 관한 얘기가 우리가 지금 예수님이 오셔서 우리에게 제시한 구원이라는 것은, 무력으로 어떤 다른 외부 적을 물리치는 그런 구원의 차원이 아니라 죄에서 구원한다 하는 쪽으로 확정이 된거요.
그리고 천사가 한 말을 필두로 해서 바울 서신까지 가게되면 바울 서신 중에서 특히 로마서 11장까지 로마서 1장부터 11장까지 보면 구원론을 아주 체계적으로 정리를 하죠?
혹은 갈라디아서라든지 에베소서 같은데서도 구원론에 관한 이야기가 전혀 구약시대 유대인들이 갖고있는 구원론과는 다른 구원론이죠.
많은 성도들 심지어 교역자들까지도 사람 소원에 대해서는 상당히 열심을 갖고 추구를 하는데 하나님 소원은 거의 다 관심없어 합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어보면 하나님의 소원이 뭔지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라고 했는데도 불구하고 전 성경 전체를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소원에 관심을 기울여야 되는데, 전혀 그렇지 못해요.
그래서 이런것도 공부를 좀 하겠습니다.
그러니까 가장 중요한 것이 늘 빠져있고, 한국교회가 모든 사람이 다른 나라보다 찬양도 열심히 하고, 기도도 열심히 하고, 전도도 어느나라보다도 열심히 하고, 헌금도 잘하고 예배 출석율도 당연히 한국교회가 거의 한국기독교는 99%죠? 출석율이.
이런 기독교가 없어요. 서양 서구에 가면 기독교라고 하면서도 예배 출석율은 10%도 안 됩니다. 기독교인인데 예배 출석율이 10%가 안되요. 3, 4% 아니면 5, 6%. 그렇게 밖에 안되는데 우리는 딱 믿는다 하면 예배 출석하는게 99% 나오죠?
다 잘합니다. 헌금도 우리나라 같으면, 기부는 잘 안하지만, 헌금은 잘해요.
기부문화는 우리나라가 약한 편인데, 헌금은 상당히 잘해요. 헌금하는 목적이 좀 고약한데, 바친것의 100배 받을줄 알고. 상당히 투자가치가 있는걸로 알고 그렇게 합니다. 그것은 곤란하죠. 그래서 다 잘하는데 딱 한가지 잘 못하는데 성경을 제대로 못 가르쳐요.
더 아쉬운거죠. 한국교회가 모든 것을 다 잘하는데, 제일 근본이 되고 핵심이 되는 성경 66권을 한절도 안빼고 제대로 가르쳐야 되는데, 대개 설교시간에 듣는 얘기는 잘된다 복준다 죄사함 받는다 이런얘기. 그리고 거의 밝은 반짝반짝 하이라이트 이런것만 우리가 사건이나 인물중심으로 이렇게 설교하고 만다는 거죠.
그래서 성경 전체를 성도들이 잘 몰라요. 그래서 이런것도 우리가 지금쯤은 우리 한국교회가 각성을 하고 어느면이 우리가 많이 취약해 있는가? 제가 볼때는 성경을 너무 부분적으로 배우고 너무 이기적으로 배운다는 겁니다. 꼭 잘된다 복준다 그런 말만 살피고 또 예배시간에 설교들은 것으로 교육으로 생각하니까 또 설교로 교육이 부분적으로 되지만 그것은 거의 어림도 없습니다.
예배시간에 설교 그 짧은 것으로는 평생 교회를 다녀도 66권중에 한권도 잘 몰라요.
그래서 반드시, 예배는 예배고, 예배후에 공부시간이 있어야 되는데, 거의 공부시간은 교회학고 아동부 중고등부 조금 할 뿐이고, 그것도 깊이 못하고 하니까 일평생 교회 다니면서도 성경 66권을 통달하는 것은 꿈같은 얘기죠.
성경을 제대로 공부하고 나면 구원도 헌신도 개념이 나올텐데, 우리가 예배시간에 설교 들은 것 정도가지고 유지하기 때문에 구원에 관한것도 확신이 없고, 거기다가 헌신같은 것은 주일저녁이나 주일오후에 헌신예배 드린 것으로 되었지 않느냐. 그것을 헌신한 것으로 착각하는 거예요. 매우 잘못된 생각입니다.
그래서 오늘 이 강의를 끝까지 들으시면 우리가 지금 바르게 믿고 바르게 사는 것이 아니다. 특히 바르게 헌신되지 않는 것 때문에 하나님이 누구 잡고 일할사람이 없어요.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서 움직이고 활동하지만 하나님께서 쓰시는 것이 아니라, 자기 좋아서 하는 경우가 많아요. 그 얘기는 나중에 뒷부분에 가서 한번더 정리 하겠습니다.
자 이제 다시한번 구약에서 구원의 의미를 정리해 볼려고 합니다.
구약에서는 구원이란 대개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과 위기에서 벗어나는 것 정도. 그렇게 대체로 용어가 그렇게 쓰였습니다.
그 다음에 신약에 들어오면서 구원이라는 것은 전혀 다른 뜻으로 기록되었는데, 신약에서는 보통 ‘소조’ 라는 말이 쓰여지고 ‘소테리아’ 이런말인데, 죄에서 구원받는 것으로 변하게 되었다는 것으로 정리하면 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실제로 우리에게 보여준 것은 죄에서 구원받는 것 뿐 아니라, 조금 여러 가지 이야기를 보여주는데, 죄도 원죄 문제가 있고 자범죄 혹은 죄과 혹은 허물 이런 문제도 있고, 그 다음에 죄의 세력, 범죄한 어떤 행위가 용서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죄의 권세 죄의 파워가 사람 속에 우리 지체속에 한 법으로 있어서 우리 양심을 자꾸 약하게 만들고 그리고 우리 육체를 죄의 도구되게 만드는 것, 우리속에 살아있는 죄성, 이런문제.
죄의 권세에서 구원받는 문제, 나중에 바울이 하는 얘기인데요.
그 다음에 귀신으로부터 구원받는 것.
구약시대에 그 많은 예언자가 왔다 갔지만 아무도 어떤 예언자도 귀신을 제어하거나 귀신을 쫓아내거나 그런 예언자는 없었어요. 그런데 예수님이 오시면서 귀신으로부터 구원받은 것은 굉장히 중요한 문제죠?
오늘도 우리 한국 기독교가 전혀 귀신에 대해서 잘 모르기도 할 뿐아니라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는 그런 기독교. 귀신을 쫓아내려 생각도 하지 않고 귀신을 분별도 못하게 이렇게 영적으로 어두워져 있는 심각한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오시면서 제일먼저 귀신들이 쫓겨나가고 질병들이 치료되고 그리고 정죄, 죄를 지은, 옛날에 지은 죄나 지금 지은 죄에 대해서 정죄로부터 구원받는 것, 그리고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 구원하는 것.
그래서 결과적으로는 영생, 예수님도 예수님 입으로 구원이라는 말을 잘 안썼어요. 종말에 가서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하실 때 정도. 복음서 한권에 한번 쓴 것이고 별로 예수님 당신 자신의 입으로는 구원이라는 말을 자주 안 썼습니다.
이렇게 여러면에서 구원하시는 것을 보여주시는데, 이러한 구원은 단순하게 정리하면 더 쉽게 이해할수 있습니다.
근본 문제를 이야기 하는게 쉬워요. 근본적인 문제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관계회복이다’ 하는 쪽으로 정리하면 쉬울겁니다.
그러니까 구원 혹은 영생 하는 문제를 뭐 무슨 죄가 어떻고.. 다 나누면 복잡해져요.
제일 쉽게 하면 하나님과 관계회복.
하나님과 우리 사람이, 사람이 만약에 한 가운데 있다면 한쪽에는 하나님이 계시고, 한쪽에는 악령이 사탄이. 사람이 여기에 있다가 하나님과 손을 잡고 마귀와 연결된 줄을 끊으면 구원이 되는 것이고, 반대로 마귀와 손을 잡고 하나님과 연결된 끈을 끊어버리면 지옥가는 거죠.
그래서 어느쪽을 잡을 것인가? 하나님쪽을 잡을 것인가? 사탄쪽을 잡을 것인가? 선택을 해야죠.
그래서 하나님께 연결되면 구원이 되는 것이고, 영원한 생명과 연결되는 것이고, 마귀 귀신 사탄 악령에게 연결되면 지옥 가는거죠.
간단해요. 구원의 개념이. 어렵게 하면 한없이 어려운데 하나님과 관계회복.
그리고 세상사람들에게 전도할 때, 예수님을 믿는다 하나님을 믿는다 하는 것은, 악령 혹은 귀신 마귀편에 있다가 하나님께로 귀순하는 거예요. 귀순.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 그렇죠?
지금까지 사람들이 아담의 자손은 모두다 원죄에 빠져있는 모든 사람들이 죄의 편에 서있고 죄의 종노릇하는, 죄의 종, 죄의 종노릇 하고 결국은 마귀가 죄를 짓게 하는데, 죄를 짓게한다해서 마귀를 따라 죄를 짓다보면 결국 우리도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한 영영한 불에 들어간다는 겁니다. 이게 예수님 말씀이예요.
그래서 그 죄와의 관계 혹은 귀신들과의 관계를 딱 잘라야 돼요. 그러니까 한쪽을 자르면 한쪽으로 가는거죠? 어차피. 그러니까 만약에 우리가, 에덴동산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잘라버리고 뱀에게 귀신에게 들어붙어서 사탄에게 연결되어 살아왔는데, 그러면 그 사탄과 연합되어 있으면서 아무리 선한일을 해도 하나님께 용납이 안 됩니다.
이 봐요. 여러분 혹시 여러분의 아내가 본남편 버리고 다른 남자와 선한일 하고 다녀봐.
아무리 선한일을 해도 그게 인정이 안되죠. 그렇죠? 이해가 안되는 모양인데..
그렇게 하면 쉽죠? 우리가 다른 종교에서 선한일을 하지 않느냐? 글쎄 마귀도 광명의 천사처럼 가장합니다. 선한일도 해요. 요즘 놀랍게도 마귀의 종교에 있는 사람들도 악마가 만든 종교에 있는 사람들도 선한일을 많이 해요. 그래서 기독교인들 보고 슬슬 욕을 하면서 믿는놈들이 더 나쁘다 하면서. 자기들이 더 선한 것처럼 그렇게 한다는 거예요.
하나님앞에서 그것은 전부 위선이예요. 위선. 하나도 수에 안치죠. 그 자체는 사람에게는 유익하지만 하나님께는 아무, 그 위신이 도리어 하나님을 믿지 못하게 만듭니다.
차라리 죄를 짓고 자기가 악하다면 나는 천하에 악당이고 하면서 회개할 여지가 있는데, 자꾸 선한일 하기 때문에 그것 때문에 하나님앞으로 안 나와요.
그래서 어떤사람들이 저렇게 착한 사람도 지옥 가야되느냐? 잘 모르겠는데, 제가 볼때는 하나님께 가기 어려워요. 하나님과 연결이 안되고 아무리 귀신들과 좋은일 많이 해도 하나님께 못가.
그러니까 우리 개념을, 다시말하지만 구원에 대한 개념을 악령과의 관계를 끊고 착한일을 우선 안해도 좋으니까 일단 하나님에게로 와서 하나님과 관계회복이 먼저예요, 선한일은 그 다음이예요. 그 다음. 관계회복된 다음에 하는 것이고 중요한 것은 하나님에게로 돌아는 것입니다.
마귀와의 관계를 끊고 돌아오는 것이 중요합니다. 아까 얘기한 여자 이야기 이상한 여자 본 남편과의 관계를 끊어버리고 다른 남자와 놀아나면서 아무리 선한일 해봐야 하나도 본남편에게 유익이 안되는 것처럼, 인간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끊어버리고 악령에게 가서 아무리 좋은일 많이 해도 하나님에게는 인정이 안된다는 거야.
그점을 사람들이 이해를 못하는 것 같애요. 이것은 성경을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여러차례 읽어보면 현저합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나중에 로마서 편지에 보면 로마서 6장에 보면 어느곳에 가서 순종하든지 순종함을 받는자의 종이 된다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른다.
그래서 하나님께 순종하는 의의 종이 될 것인가? 죄에게 순종하는 죄의 종이 될 것인가? 이렇게 얘기합니다.
여러분 자동차 타이어가 못 쓰게 되는게 구멍 500개 나서 못쓰는건 별로 없습니다. 한개나면 못쓰는거야. 그냥. 그렇죠? 뻥구 500개 나서 못쓰는게 어디있어요? 한개나면 못쓰는거지.
사람이 죄를 많이 범하고 적게 범하고 차이일 뿐이지 다 죄인이예요 사실은.
근본 죄가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고 하나님 등져버린게 이게 죄니까 그 근본을 어떻게 교회에가서 알게되었은데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요.
그래서 여러분 사도바울도 처음에는 내가 율법의 의로는 흠이없는 자로다 이렇게 하고 지극히 큰 사도보다 조금도 부족한게 없다 하면서 큰소리 뻥뻥 쳤거든요.
연세가 들어갈수록 점점 겸손해져서 모든 성도중에 지극히 작은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렇게 나가더니 내가 죄인중에 괴수다 사도바울이 그렇게 나가는 거예요.
갈수록 겸손해져요.
놀랍게도 하나님을 알면 알수록 우리가 참 부족하고 모자라고 또 그러면서 어설프게 조금 죄를 덜 지은 것으로 교만하게 그렇게 하나님께 죄송하고 그래서 제가 울었던 것 같애요.
이틀밤 동안. 그렇게 울고 나니까 사람이 눈이 열리는 거예요. 그때부터는 정말 하나님 말씀이 들리고 보이고 이해가 되는데, 설교하시는 분의 설교를 100%만 알아듣는게 아니라 200% 300% 알아들어요. 죄의 권세로부터 딱 잘라버리고 하나님앞에.. 이른바 중생이라고 그러죠? 구원의 단계를 말씀 드리는데, 혹시 여러분중에서 그런 경험을 안 하신분이 있다면 한번 깨어져야 돼요. 자아가 완전히 무너지고 깨어지고 그러면서 거듭나는 정말 중생을 체험하게 되는데, 그런 경험이 없는 사람도 있습니다. 없어도 자기도 모르게 스무스하게 지나가는 사람도 있는데 우리는 요란하게 넘어갔어요. 온 동네가 다 소문날만큼, 너무 요란하게 그렇게 회개가 터지고 했는데,
제가볼때 요즘 그런 사람이 별로 없는 것 같애요. 영 죄를 아예 안 짓는건지. 우리는 너무 요란하게 그렇게 해서 소강대상을 때려 부셨으니까. 그렇게 자아가 무너지면서 깨어지는데 그러고 나서 성경이 보이기 시작하는 거예요.
이런 여러 가지 체험들을 가지고 이야기하면 이야기가 복잡해지니까, 원리는 아까 말씀드렸죠? 죄와 혹은 죄와 마귀 귀신 사탄 악령의 세계 어둠의 세계와 관계를 끊고, 그 다음에 하나님과 관계를 다시 회복하는 것. 하나님과의 관계회복이 구원이다.
나머지는 전부 지엽적인 문제입니다. 근본이라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회복입니다. 관계 정상화. 관계회복.
그래서 우리가 기독교의 믿음이라는 것은, 할 수 있다 긍정적인 사고방식 적극적인 사고방식 그것과는 다릅니다. 그것은 그 나름대로 믿음이라 할수 있지만 진정한 기독교 신앙이라는 것은 인격적 대상과의 관계 회복입니다. 하나님을 등지고 살던 사람이 하나님을 믿고 살뿐 아니라 믿는데서 끝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을 믿을뿐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데까지. 왜냐? 관계니까.
우리가 믿는데까지 가서는 되는게 아니고, 우리가 교회에서 성도들이 믿습니다 하는데 대개 믿음이 없을수록 믿습니다를 강하게 해요. 안믿어지면 믿쓰~~~습니다. 그렇게 ㅅ을 다섯 개정도 해서 믿씁니다. 그렇게 하는 사람은 믿음이 좋은게 아니고 믿음이 한방울도 없는거야. 억지로 짜내볼려고. 믿음이 안 나오니까. 그런데 속으면 안 돼요.
목사님들 잘 들으세요. 성도중에 누가 ‘믿씁니다’ 하면 믿음이 강하구나 생각하지 말고 아 저분이 믿음이 한방울도 없구나 그렇게 알아야 돼요.
맨날 그 상태에서 발전이 없고 맨날 믿습니다 그러고 있어요. 그렇게 하면 안 돼고,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우애를 형제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 그런 단계를 거쳐서 믿음이 성장해서 성숙해서 마침내 하나님과의 관계회복이, 그 관계의 완성은 사랑으로 완성해야 됩니다.
믿음으로는 관계회복의 시작 출발점이고, 그러니까 역시 정말 믿고 돌아왔다하면 이미 구원받은거나 마찬가지죠?
실제로 구원이라는 것은 우리가 부활해서 영화로운 세계에 들어가야 구원이 완성되지만, 보장이 되니까, 지금 진심으로 회개했다면 그 다음에 그 이후에 모든 단계는 보장이 되니까 우리가 구원얻었다고 확신한다고 하지만, 확신이라는 것도 감정은 별로 의미가 없는 것 같애요. 내가 구원받은 것 같다는 감정이 중요한게 아니고 사실이 중요하니까, 그래서 내가 정말 하나님께 돌아왔느냐?
그리고 그것보다 더 기본적인 것은 교회에 다니면서도 열심도 있고 봉사도 하는데, 주일도 성수하고 심지어 헌금도 드리고 하면서도 근본을 모르고 근본이 안돼는 사람이 있어.
예를들면 이런겁니다. 한참 교회에 다녔는데 그사람보고 진심으로 솔직히 말해서 하나님 계신 것을 믿습니까? 물으면 ‘글쎄요’ 하는거라. 그러면 구원받았다는 확신은 아무 의미가 없는거라. 계시는것도 안 믿는데, 그게 어떻게 믿음이 되겠습니까?
그래서 맨 기초부터 우리가 믿음을 점검을 해서 자꾸 진도만 나갈려고 할게 아니라 맨 기초부터 하나님이 계신 것을 믿는가 물어봐야돼요.
저는 세례받을 때 꼭 물어봅니다. 맨 먼저 폐일언하고 십자가나 삼위일체는 한참뒤에 일이고 맨 기본적으로 하나님이 계신것을 믿는냐? 꼭 물어봅니다.
그게 안 믿어지는 사람은 그 문제부터 해결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계신것도 안 믿어지는데 믿는다는 말 자체가 전부 거짓말이니까.
거짓 믿음으로 스스로 속이면 안된다는 겁니다. 믿음자체가 믿을만한 믿음인지 사실에 기초한 아무리 흔들어도 흔들릴수없는 사실에 기초한 믿음인지 그런 믿음을 갖고 있는지 점검을 해봐야 돼요.
여러분 교회에 가서 솔직하게 한번 이야기해보자 하면 가짜 믿음은 많다는 거예요.
사도바울이 디모데에게 편지하면서 네 속에있는 거짓없는 믿음을 보고자 함이라 그런 말이 나와요. 거짓없는 참 믿음.
자 그래서 조금더 근원까지 올라가서 보니까, 우리가 구원되고 하는것은 출발점이 우리에게서 출발하는게 아니라 하나님의 예정에서부터 출발하고 있는 거예요. 우리 구원이.
구원파에 있는 사람은 잘 안 믿는 얘기인데, 예정, 예정은 그리스도안에서 예정이라면 어정쩡하게 이야기하는데, 성경은 말하기를 창세전에, 창세전에 우리를 예정하셨다.
지난번에 예정론 말씀드렸죠? 예정을 하셨고 그리고 때가되면 불러주셔요. 하나님이.
대개 전도라는 방법을 통해서 부릅니다. 전도. 자기 지혜로는 거의 하나님을 찾지 못합니다. 여간 철학자 신학자 대학문.. 학문으로도 안돼요. 하나님께서 어떤 영혼을 불러서 거듭나게 하지 않으면 사람이 자기 지혜로는 절대 하나님을 찾지 못해요. 몇천년을 시간을 줘도 철학자들은 하나님을 찾지 못합니다. 어디까지 가느냐? 하나님같은 어떤 절대자 전능자 일자 제일원인 어떤 그런 모든 존재를 존재케한 존재자, 그런게 있기는 있겠다. 까지 가요..
인간의 인지한계로 어떤 모든 만유 만물을 존재케한 어떤 존재자가 있기는 있겠다. 그것을 일자라고도 합니다. 일자. 모든 것을 움직이게 하면서 자기는 움직이지 않는 부동의 동자 이렇게 해요. 철학자들이. 자기는 움직이지 않으면서 모든 것을 움직이게 하는 어떤 운동의 원인으로서 그런 일자가 있다. 제일 원인이 있다 하면서도 하나님이라고 못 불러요.
하나님이라고 부르면 신학이 되어버리니까.
거기까지 가기는 가는데 하나님을 인격적으로는 절대로 알지 못해요. 철학으로는.
그래서 위로부터 계시가 주어져서 그 사람을 불러서 그 사람을 계시로서 알게 해주지 않으면 절대로 사람이 자기 지혜로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이것을 보통 신학적인 용어로 내적 조명이라고 해요. 내적으로 성령이 반짝 비춰줘야 사람이 이것을 깨닫게 된다는 겁니다.
성령의 조명이 없이는 사람이 진리를 잘 깨닫지 못하는 겁니다. 성령이 어떻게 역사하느냐? 지금처럼 진리의 말씀을 가르치고 선포할 때 성령이 역사하시면서 우리 마음속에 하나님을 아는 빛을 이렇게 조명 비춰주면 그때서야 사람이 중생하게 돼요. 깨어나는 겁니다.
여러분, 죄사함 거듭남의 비밀 하면서 구원파가 운동장에서 그렇게 하면 전부다 자기죄도 사 사함받은지 모르겠고 내가 중생한지도 모르겠고 그래서 알아보자. 하고 넘어가지 말고.
중생이라는 것은 본인이 노력하는게 아닙니다.
여러분 애를 낳는데, 어머니 뱃속에 있는 아이가 내가 몇 년도 몇월 몇일에 꼭 나가야겠다 하면서 나오겠다하는 애는 없습니다.
엄마가 산고를 치르는 것이지 아이는 가만히 있다가 나오는거야. 가만히 있는데로.
그런것처럼 중생도 우리 개인이 내가 노력해서 중생되는게 아니고,
여기까지가 예정이나 소명이나 중생까지가 전부다 하나님이 하게하신겁니다. 하나님이.
그리고나서 중생 사람이 중생해야 믿음이 생겨요. 하나님을 믿는 믿음.
나중에 믿음은 따로 하겠고 믿음은 크게 해 놨죠? 믿음은 아주 중요하니까.
거듭나야만 사람이 믿습니다. 우리는 믿어야 거듭나는 것처럼 생각하는데, 그게 아니고 예정하신 하나님께서 사람을 불러요(소명). 소명도 나누는데 외적 부르심, 내적 부르심 이런말도 합니다. 외적부르심은 교회까지 오게하는 정도고, 내적으로는 그 영혼이 하나님께로부터 부름받는 그런 소명이 있고, 그러면서 바로 중생인데, 이것이 소명과 중생과 믿음과 회개가 이것이 거의 동시적으로 일어나는 사건입니다. 대체로.
소명을 받으면서 중생하면서 믿어지면서 회개가 터지는게 거의 동시적 사건인데, 순서로 논리적 순서로 할때는 하나님이 부르실 때 사람이 거듭나게 되고, 거듭나야 믿음이 생기는 거야. 거듭나지 않으면 믿음이 없습니다. 거듭난 사람이 중생한 사람이 믿음이 생기고, 믿음이 생겨야만 회개가 터지는 거예요.
그래서 이런것이 거의 일순간에 함께 일어나는데 보통 구원파는 중생 여기에만 초점을 맞추어서 이것만 극대화합니다.
사도바울은 믿음이라는것을 중심에 놓고 이야기 하는데, 그리고 성경전체는 중생보다는 믿음을, 중생과 회개 그 사이에 믿음이 있어서 믿음을 갖고 믿음이 있어야 소망이 생겨요.
하나님이 약속하신것을 지적으로 깨닫고 그것을 믿으니까 미래니까 소망이죠.
미래에 대한 믿음이 소망이죠. 무슨말인지 이해가 됩니까? 미래에 더 좋은 세계가 있다는 것을 내가 믿으니까 그게 소망이 되는거죠. 믿음이라는 거예요.
과거에 나를 예정하셨고 선택하셨고 나를 부르셨고 나를 거듭나게 하셨다는 것을 믿는것이고, 미래에 영원한 세계가 있다는 것을 믿으니까
그래서 전체가 믿음인데, 그러면서 회개라는 것은 결정적 일회적으로 결정적으로 한번 있습니다. 한번은 있는거죠. 결정적 회개가. 한번있고 그 뒤에서 사람이 한번 회개했다 해서 잘못된길로 안 가느냐? 사소하게 지옥으로는 다시 돌아가지 않지만 또 삐딱한길로 갔다가 또 원길로 다시 돌아와야 돼요. 이런것도 회개라 할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구원파는 회개 한번하면 다시 회개하면 안 된다. 이렇게 하는데 다른길로 안 가면 회개 안해도 되죠. 구원받은 후에도 사람이 곁길로 갈수 있습니다. 영 옛날로 믿지않던 세계로 마귀에게로 귀신에게로는 돌아가지 않지마는 구원받아 회개한 후에도 또 정로로 못가고 곁길로 가는 수가 있다니까.
여러분 운전하다가 그런수도 있죠? 교회가다가 집으로 가지는 않지만 곁길로 잘못빠지면 아 잘못왔다 하면서 돌아오잖아 그렇죠? 그것도 회개라 할수 있다 말이야.
꼭 회개 자백 나눌것 없이 일반적으로 말할때는 그것도 회개입니다. 돌아오니까.
결정적으로 한번 중생과 함께 터지는 회개가 한번 있고, 한번 있을뿐 아니라 그 뒤에도 사람이 옛날로 돌아가지는 않지만 사람이 곁길로 잘못된길로 갔다가 다시 돌아온다는 것도 회개로 보니까 개념의 차이일 뿐이죠.
그래서 루터같은분은 이런 말을 합니다. ‘나는 죽을때까지 죄를 안 짓고 살기는 어려울 것이다. 고의적인 죄, 어떤 반복적이고 계획적이고 의도적인 것은 아니지만 실수라는 의미에서의 죄라는 것은 내 평생에 완전히 해결이 안 될것이다. 그래서 나는 평생에 죄를 지을수가 없어서 나는 평생에 예수님이 필요하다’ 그런 말을 했어요. 루터가.
이런것은 결정적으로 다시 마귀에게로 돌아갈리는 없지만 하나님을 향해 가다가도 정로에서 벗어나서 곁길로 빠지는 수가 있다는 겁니다. 사람이. 그것도 없으면 참 좋겠죠?
그래서 여러 단계를 거쳐서 구원이 완성되는데, 그 완성은 영화, 부활이죠? 부활. 우리가 영화로운 몸이 되는것. 그때가야 우리 구원이 완성되는 것이고 지금은 우리가 예정으로 소명으로 중생으로 구원받았으며, 또 구원받아가고 있으며, 앞으로 구원이 완성이 될겁니다.
언제가 부활로서. 그리고 부활한 후에 진주문 열고 새예루살렘 생명수 강가에 심은 생명나무 과실을 따먹어야 그 다음에 큰소리 칠수 있어요.
그 다음에는 큰소리 쳐도 괜찮아. 아무도 말릴사람 없으니까. 영생의 나무, 영생을 주는 생명나무 과일을 에덴동산에서 못먹고 엉뚱한것을 먹어서 잘못되었으니까.
결국은 지금 죄를 지은후에는 그것을 따먹으면 안된다 해서 하나님께서 두루도는 화염검으로 따지 못하게 죄를 지은주제에 영생하면 안되니까 생명나무 과실을 따먹지 못하게 했다 하시고 언제 딸수 있느냐 부활한 후에 새예루살렘에 진주문 열고 들어가서 길가운데 생명수강이 흐르고 강 좌우에 생명나무 과일이 있는데 그것을 먹어야 정말로 영생으로 갑니다.
그것까지는 그때까지는 항상 우리가 경건한 마음으로 두렵고 떨림으로 그렇게 조심해야지, 막 구원받았다고 길길이 뛰면서 회개도 안 하고 제할짓 다하고 욕심 다부리고 그렇게 하면 안된다는 겁니다.
그런식으로 잘못가면 구원파 비슷하게 되는수가 있는데 아주 위험해요.
그런데 실제로 성도가 믿음을 가지고 확신가운데 선다는 것은 이런 도식만으로 도식만의 믿음이 유지되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맨먼저 성도가 믿음을 갖게되는 개인적인 체험이라는 것은 사람마다 차이가 있을수 있는데, 예를들면 모태에서부터 믿은 사람들의 체험과 우리처럼 다 커서 세상에서 까불고 교만을 떨다가 전격적으로 믿은 사람과는 차이가 있어요.
그래서 늦게 중간에 살아가다가 믿은 사람은 굉장히 표가나게 체험이 분명하고 요란하게 그렇게 하는데 기복이 심해요 그런 사람들은. 그런데 모태에서부터 믿은 사람은 믿는것같기도 하고 안믿는것같기도 하고 힘이 없어보이고 특별한 체험도 없는것 같은데 어려운일 겪게되면 너무 어렵지 않게 넘어가요. 스무스하게 어지간해도 넘어갑니다. 그런게 차이가 있어요.
(2부에 계속..)
[정리]
◎ “비인간화 → 인간화 시키는 것” 오늘의 구원이라고 주장
◎ 구약시대의 구원 : 위기모면, 전쟁에서의 구원
◎ 마태복음 1장 18절-21절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 모친 마리아가 요셉과 정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그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저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가로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 말라 저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 예수 : 자기 죄에서 구원
◎ 바울서신중 로마서 1장 - 11장 : 구원론을 체계적으로정리
◎ 갈라디아서, 에베소서 : 구약시대의 구원론과 다름
◎ 구약시대의 구원의 의미
: 위기모면, 전쟁에서의 구원
◎ 신약시대의 구원의 의미
: 죄의 권세에서의 구원 (소조, 소테리아 - 헬라어로 ‘구원’을 뜻함)
◎ 구원의 개념 :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
◎ 죄, 마귀, 귀신, 사탄, 어둠의 세계와의 관계 끊과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 : 구원
◎ 기독교 신앙의 기본 : 인격적 대상과의 관계 회복
◎ 관계의 완성 → 사랑
◎ 구원의 출발점 : 하나님의 예정
◎ 구원의 단계
부르심 → 거듭남 → 믿음 → 회개
◎ 미래에 대한 믿음 : “소망”
◎ 구원의 완성 → 부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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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y | 2009/03/06 03:43 | 예수님사랑해요(간증) | 트랙백 | 덧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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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하실 자에게 주님은 임재하시고 구원의 증거를 주시는데, 받는 자 외에는 아무도 모른다(계2:17).
진리는 스스로 증거하는 것이지, 사람이 증거하면 사람이 하나님 보다 높은 위치에 있는 셈.
시33:17구원함에 말은 헛것이라, 고전4:20하나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요5:34 나는 사람에게서 증거를 취하지 아니하노라 다만 이 말을 하는 것은 너희로 구원을 얻게 하려 함이라.
사람 증거는 구원을 커녕 오히려 구원 받을 수 없는 것임을 명심 또 명심
골2:8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노략할까 주의하라
고후10:5모든 이론을 파하며 ...
성경은 기독교라는 제도화된 종교와 무관하다. 성령/기름부음이 오면 오직 그 속에 들어있는 진리 뿐이다. 종교는 없어져도 진리는 영원하기 때문.
고후13:8우리는 진리를 거스려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오직 진리를 위할 뿐이니, ...
요일2:20너희는 기름부음을 받고 모든 것을 아느니라
27 기름부음이 임하면 그가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핑요가 없느니라
성경 밖에서 사람의 지혜로 성경을 들여다보고 분석정리하는 것이 죄의 능력. 기름부음이 오시면 반대로 그가 우리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 성경 안으로 데리고 들어가 진리를 성경 밖으로 드러내시는 것. 이것을 성령의 내주방식이라 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