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화와 민주화의 그 미묘한 관계에 대해서 정치

1. 산업화와 민주화에 대한 전반적 논의

민주화와 산업화와 관련하여, 한국사회에는 산업화에 대해서 부정한 세력은 민노당과 같은 운동권소수그룹에 한정되었던 반면에 민주화에 대해서는 지금의 대한민국에서 우파연 하는 수구보수세력전반이 민주화를 부정하고 독재를 찬양했던 세력이라는 점을 먼저 지적해야 할 것으로 본다.

소위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까지 소위 산업화세력으로 불리는 집단은 철저하게 민주화를 탄압했던 세력임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즉 과거 민주화운동을 했던 김영삼이나 김대중은 결코 산업화에 반대한 적이 없는 세력이라는 것이다. 다만 김영삼은 대통령이 되서 남한경제를 파탄으로 몰아간 반면 김대중은 남한 경제를 살렸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따라서 산업화와 민주화의 가치를 모두 담아낸 세력은 김영삼과 김대중세력인데 이중에 김영삼세력은 나중에 3당합당과 아이엠에프로 나라를 거덜냄으로써 산업화도 망치고 민주화도 망친 후안무치한 세력이 된 반면, 오직 김대중세력만이 산업화와 민주화 모두를 공히 발전시킨 세력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승만과 장면정부의 성격을 마저 짚어보면 이승만은 산업화와 민주화에 있어서 초보수준정도 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산업화의 경우 초기전쟁을 겪었긴 했지만 근본적으로 수입대체화라는 정책적 방향을 취했기 때문에 그리 후한 점수를 주기 어렵고 민주화도 임기후반 부정선거를 하다가 국민에 의해 하야를 했기 때문에 민주화에도 좋은 점수를 주기가 머하다는 것이다. 그런면에서 이승만은 산업화와 민주화 이 양자를 근본적으로는 부정하지는 않았지만 분명 문제가 많은 세력이라고 봐야 한다. 특히 잘못된 산업화의 방향과 잘못된 민주화의 씨앗을 뿌린 점에서 원죄가 많음을 지적할 수 있겠다.

그리고 장면정부의 경우 경제개발5개년계획을 수립하고 또 수출주도형개발정책을 처음으로 만들었다는 면에서 장면정부는 분명 산업화의 특징을 그것도 올바른 산업화의 특징을 가지고 있었던 정부였다고 할 것이다. 동시에 4.19라는 민주주의혁명을 통해 탄생한 정부로서 그 당시 민주주의 수준이 매우 높았다는 점에서 동시에 좋은 민주화의 싹도 틔운 정부라 할 것이다.

이런 올바른 산업화와 민주화를 추진하려던 장면정부를 쿠데타를 뒤집어 버리고 장면정부의 산업화 정책을 사실상 그래로 베껴 시행하면서 오히려 장면정부를 무능한 정부로 몰아갔던 박정희야 말로 역사의 죄인인 것이다. 동시에 박정희는 이승만과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의 독재정부였다는 점에서 민주화를 파탄시킨 정부였다는 것이다. 박정희시절 산업화는 장면에서게 빼앗아 온것이고 그리고 민주화는 아에 부정했다는 점에서 박정희야 말로 대한민국의 역사에서 가장 수치스런 존재라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2. 왜 박정희 경제가 사이비인가?

동시에 박정희가 장면정부로 부터 빼앗아 시행한 산업화의 경우 실제 그 내용을 들여다 보면 어이가 없을 정도로 한심한 경제성적이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일게 군바리가 경제정책을 함부로 농단하다가 나라를 부도위기로 몰아간 것이 장난아니게 많았으며 동시에 임기내내 무역적자를 기록하는 참으로 초라한 경제성적을 거둔다. 이러한 막대한 무역적자로 나라가 거의 망하기 직전까지 가다고 5공화국때 그나마 김재익과 같은 관료출신이 경제에 주도적으로 관여하면서 조금씩 나아졌고 또 운이 좋게도 프라자합의로 달러가 약세(엔화상승)로 돌아서고 금리가 내려가고 석유값이 하락하는 3저호황으로 인해 한국은 새로운 경제적 기회를 얻게 된다.(단군이래 최대호황이라는 말로 회자되었다.) 이것은 6.25가 결정적으로 일본경제가를 회생하게 한 기회가 되었던 것과 비슷한 구도인 것이다.

하지만 이것도 잠시뿐 1989년 3저현상이 소멸되었을 때 다시금 한국 경제가 침체국면에 빠지고 큰 폭의 무역수지적자로 전환되고 만다. 이것은 한국 경제의 대외의존성을 잘 보여 주는 대목으로 특히나 대일무역관계에서 그 정도가 심하게 나타났다. 1986년 이후 엔고에도 불구하고 대일무역에 있어서는 수출보다 수입이 급증하여 그 수지적자의 폭이 1985년 30억 달러에서 1986년 54억 달러로 더욱 증가하게 되었다. 이는 한국의 산업이 핵심적인 부품, 생산시설 등을 일본에 지속적으로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발생한 현상인 것이다.  

한편 3저 호황기의 막대한 국제수지흑자에도 불구하고, 이후 국제경쟁력의 약화현상이 대두된 것 역시 문제로 지적될 수 있다. 그것은 국제수지흑자에 따른 자금사정의 호전에도 불구하고, 여유자금이 설비투자, 연구개발 등에 사용되지 않고, 부동산투기와 주식투자 등에 집중되었기 때문이다. 경쟁의 원천이 가격에서 기술로 옮겨가고 있는 국제경제환경 속에서 투기적 부문에의 집중은 국제시장에서의 비가격경쟁력을 증대시킬 수 있는 ‘호기’를 놓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오히려 한국의 비가격분야에서 국제경쟁력이 비약적으로 증가하는 시기는 바로 DJ정부시기였다는 사실을 잊어서는안된다. 바로 그 시기에 우리나라는 처음으로 제대로 된 구조조정을 통해 내실을 다지는 시기였다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그러면 박정희시대의 경제성적으로 보도록 하자.

***숫자로 본 박정희시절의 경제***
박정희시절(1961-80)에 년 평균 8.5%의 경제성장을 기록, 국민총생산은
약 4배로 커졌으며, 1인당 국민소득은 1962년 87달러에서 1981년 791달러로
거의 열 배가 늘었다. 수출은 4천만 달러에서 약 210억 달러로 늘었다.
(경상대 장상환교수의 글에서); 엄청난 변화가 있었다. 그런데...............

[박정희시대의 소비자물가 상승률(cpi)]
박정희시절의 소비자 물가는 평균 년 16.5%의 상승률을 보였고
1974년 24.3%, 1975년 25.7%, 마지막해인 1979년에는 18.3%였다.
살인적인 물가상승이었다.
-지난 10년의 김대중 노무현 같으면 살아 남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박정희시대의 은행대출금리]
-60년대 은행대출 금리가 년17.5%-26%였다. 70년대는 15.5%-24%였다.
1965년도에는 금리가 년 30%까지 치솟았다. 이 역시 살인적인 수치이다.
-지난 10년의 김대중 노무현 같으면 살아 남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박정희시대의 수출현황]
박정희는 날이면 날마다 수출의 노래를 불렀다.
그러나 결과는 박정희 18년간 수출 638억불에, 수입 871억불, 무역적자 233억불(지금과 비교해서 그 당시의 경제규모가 지금의 10/1 수준이므로 지금의 치면 2330억불 적자인 셈)

-박정희시절; 233억불의 무역적자
-전두환시절; 8억불 무역흑자 (전두환은 8억 흑자를 자랑으로 여긴다)
-노태우시절; 132억불의 무역적자,
-김영삼시절; 366억불의 무역적자,
-김대중시절; 846억불의 무역흑자,

**이게 바로 박정희가 자랑하는 수출의 모습이다.
박정희가 노무현.김대중의 수출실적과 수출흑자를 보면 깜짝 깜짝 놀라야 한다.
(박정희정권은 언론과 합작으로 수출성과를 대대적으로 선전했으나
엄청난 적자의 이야기는 속 빠진 체였다)

[박정권시절, 농민들 약 50%가 농촌을 떠나다]
-박정희의 새마을 운동, 농촌이 잘사는 나라운운해도 사실은 그 반대다.
박정희시절은 년간 약 50만 명씩 이농을 했다.
박정희정권 전기간에 걸쳐 농촌인구의 거의 절반이 도시로 떠났다.
농촌이 잘 사면 왜 이농을 하는가?

-1960년 농업인구가 58.3%였는데 박정희의 저곡가.공업화정책과
미국에서 들여온 엄청난 잉여농산물로 살기가 어려워 그리고 농촌부채로
이농을 함으로 1975년에는 37.5%까지 줄었다. 1967-1976 년 사이에
670만명의 농촌인구가 도시를 떠났는데, 이는 한국전쟁동안의 인구이동보다
더 심대한 것이었다.

박정희시절은 수출을 위해선 저임금이 필요했고, 저임금을 유지하기 위해서
저곡가 정책이 강행했다. 저곡가정책으로 농촌은 몰락해갔다.

-충남대 박진도교수의 말
(박정희시절은) 저임금으로 수출을 했다. 저임금으로 수출을 하자면
농촌에서 사람을 뽑아 내야 합니다. 그렇게 노동력을 충당했다.
그런 면에서 농촌을 잘 살게 해야 할 이유가 없었다.

[박정희시절의 부동산]
63년 기준으로 하여 7년 후 강남의 부동산은 학동이 20배,
압구정동이 25배, 신사동이 50배로 올랐다. 충격적이지 않는가?
같은 기간 서울의 중구 신당동은 10배, 용산구 후암동은 7.5배 상승했고,
전체적으로 서울의 땅값은 이기간 동안 14배나 폭등하는 혁명적 상황이었다.
-이래도 박정희가 위대하다고 하면 도대체가 정상적이라고 할 수 있는가?
김대중.노무현 같으면 몇 번이나 쫓겨났을 것이다!

[도시빈민. 판자촌. 광주투쟁]
-박정희시절에 살기 어려워 농촌을 떠난 사람들이 도시빈민층을 형성했다.
그들은 산동네에 판자촌을 이루어 살았는데 서울의 경우 박정희 정권은
그들을 강제로 철거, 광주(성남)으로 이주를 시켰다.

도로도 없고, 물도 없고, 전기도 없는 지역에 사람만 추방을 했다.
그들은 천막을 치고 살았는데 무엇보다 일자리가 없어 굶주리다 못해
대대적으로 저항에 나선 거였다. 20만 명의 철거민들이 투쟁을 일으켰다.
그게 소위 광주투쟁이라는 거다.

(민노당 김혜경대표의 증언에 의하면 한 여자가 해산을 했으나
너무나 배가 고파 정신이 혼미한 상태에서 자신의 아기를 삶았다고 한다)

[서민들이 삶]
1. 박정희시절은 노동자들의 노동시간이 세계에서 가장 길었다.
1. 임금은 미국노동자의 1/12 정도에 불과했고, 산업재해는 세계 최고였다.
1. 피고용인 가운데 1976년 74.9%, 1978년 76.7%가 근로소득 면세점 이하였다.
(태반의 근로자가 최저생계비조차 못 버는 상황이었다)
1. 60년대 초반 학교에서 점심을 굶은 아동수는 50%를 넘었다.
1. 1970년대 중반 서울인구의 1/3-1/5에 해당하는 100만-300만 명이
판자 촌에서 비참한 생활을 했다.
1. 근로자들은 노조를 결성하거나 노조에 가입했다는 이유만으로 쫒겨 나든가
빨갱이로 몰리기도 했다.
1. 서울 평화시장의 경우 17세 이하의 여성노동자 1만여 명이 하루 16시간 이상
1인당 1평도 안 되는 면적에서 최저임금의 1/5도 안 되는 돈을 받으며 혹사당했다.

[박정희시대의 경제성장률]
⊙ 단순 숫치상으로 전두환이 1위, 박정희 2위, 노태우 3위, 김대중 4위
역대 집권자들의 연평균실질성장률(이하 연평균성장률)은 전두환 9.3%,
박정희 8.5%, 노태우 7.0%, 김대중 6.8% 순으로 단순 수치상으로는 박정희가 2위이다.

⊙ 상대평가에서는 김대중 1위, 전두환 2위, 노태우 3위, 박정희 4위
박정희의 경제성장률은 주요국가 보다 3.3% 더 높았으나 대만보다 1.5% 낮았고,
전두환의 경제성장률은 주요국가 보다 5.7% 더 높았고 대만보다 0.8% 더 높고,
김대중의 경제성장률은 주요국가 보다 4.8% 더 높았고 대만보다 3.7% 더 높았다.

*대만을 포함한 주요국(8국:미,카,영,독,프,이,일,대)의 연평균성장률을 비교하면
김대중 1위, 전두환 2위, 노태우 3위, 박정희 4위다. 그리고 성장율은 대체로
선진국에 갈수록 작아진다는 것을 참조하면 김대중과 전두환의 경제는 박정희보다
훨씬 나은 것이다. 김대중의 경우 한국전쟁이후 가장 큰 국란이란 외환위기를
극복하고도 세계 최고수준의 성장을 이루었다.

*김대중은 또한 경제성장에서 세계 최고수준이었을 뿐만 아니라,
단 5년만에 대한민국을 IT강국, 전자제품강국, 생명공학의 강국으로 올려 놓았고,
수출 최대 그리고 흑자, 경상수지 흑자, 외환보유고 세계 4위로 올렸고,
한국의 영화산업을 세계 2위 수준으로 끌어 올렸고, 한류의 꽃을 피웠다.

*제주대 강기춘교수의 정권별 경제성적표 (김영삼정권 2년까지)
1위: 전두환.노태우정권 각각 12점, 김영삼정권:10점, 박정희: 6점의 점수를 주었다.

[박정희가 한국경제의 기반을 닦았다??]

이 말은 박정희란 슈퍼스타가 나와 하루아침에 무에서 유를 창조했다는
말이고 (박정희숭배자들 이런 말을 많이 쓴다), 또 박정희 이후 대한민국의
경제가 승승장구하여 드디어 세계 약 300개국 중에서 11위에 등극 한 것도
다 박정희가 한국경제를 탄탄하게 다진 덕분이라는 말이다.
이런 주장의 80%는 거짓이다.

(다음의 경제학자 최용식의 글이다)
경제성장은 이미 1950년대(이승만시절) 후반부터 시동을 걸었다.
성장률이 57년에 7.6%, 58년 5.5%, 59년 3.9% 등을 기록하여 본격적인
성장가도에 들어섰던 것이다. 매년 50% 안팎으로 오르던 물가도 57년부터는
한 자리수로 안정되었다.

이승만정권이 붕괴되던 60년에는 성장률이 1.2%에 그쳤지만, 4ㆍ19혁명으로
사회혼란이 극에 달했다고 군사정권이 선전했던 61년에는 다시 5.9%로 뛰어올랐다.
또한 물가 역시 안정세를 유지했다.

**박정희가 등장하여 하루아침에 세상이 하루아침에 달라진 것이 아니다.
(60년대 초반 학교에서 점심을 굶은 아동수가 50%를 넘었다)
처음 5년간은 부정부패이외는 별로 달라진 것이 없었고,
한국경제가 좋아진 것은 60년대 후반부터 일본과 베트남으로부터
돈이 들어오면서 좋아졌다. 말기에는 또 완전히 망할 정도로 몰락해 가고 있었다**

초기 박정희 정권 5년간은 4대의혹사건 등 부정부패를 제외하고는
경제가 특별히 달라진 없었다. 1960년~1964(?)년의 연평균 GNP성장률은
5.5%로 박정희초기에는 별로 달라 진 것이 없었다. 이승만 시절인 50년대
후반보다 나아진 것이 하나도 없었다. (현재, 중국은 7.5-10%, 베트남도 7%
이상의 성장을 기록하고 있다)

박정희의 경제가 좋아진 것은 60년대 후반기에 한일협정으로 돈(무상 3억 달라,
차관 2억 달라)이 들어오고 베트남전쟁에 따른 특수로 10억 달라 이상
들어오면서부터였다. (다른 대통령들은 외국으로부터 돈을 받은 것도 없어도,
그리고 월남특수가 없어도 박정희이상의 경제발전을 이루어 냈다.
그래서 지금의 한국의 경제력이 세계 11위이다)

*베트남 전에서 한국군 5만 명이 이 5년간 받은 수당은 1억3,000만 달라였다.
당시(60년대) 외화보유고는 3억 달라에도 미달 했으므로 한국외환 보유고의
거의 반에 해당하는 숫자였고, 또한 한국 총수출액의 40%에 해당하는 거였다.

둘째, 박정희정권의 말기에는 경제는 거의 몰락상태에 있었다.
그 이후의 정권들이 잘했기 때문에 박정희 경제의 후유증이란 외환위기를
극복하고도 지금까지 승승장구를 했다고 해야 말이 맞다.

(다음은 강준만의 <현대사 산책>에서)
박정희의 마지막 해인 1979년 GNP는 마이너스로 돌아섰고,
경상수지는 사상최악인 41억5천만 달러의 적자를 냈고,
기름재고는 7일분 밖에 남지 않았고,
소비자 물가상승도 18.3%나 뛰었고,
외환보유고도 바닥을 들어내기 시작했습니다.
(전두환이 등장하고 일본에서 40억 달러를 빌려 수습을 합니다.
MBC의 <5공화국>에도 나오는 내용입니다)

"박정희 때문에 한국경제가 발전한 것이 아니라 박정희에도
불구하고 한국경제가 발전한 것이다"
-경제학자 최용식, 《경제역적들아 들어라》의 저자

“가시적인 실적 위주의 박정희 개발독재야말로 시장 경제를
병들게 한 암세포였다. 나아가 그것은 IMF 금융위기의 뿌리였다”
-고려대교수 이필상

**박정희시대는 물가상승, 집값 상승 등 정권에 불리한 내용은
언론에 내 보낼 수가 없었다. 물가상승도 물가조정이라는 말로 표현해야 했다.
박정희시절처럼 물가가 오르고 은행대출이자가 높으면 김대중. 노무현은
몇 번이나 쫓겨났을 것이다

결국 위 경제성적표가 말해주듯이 박정희때문에 남한경제가 발전한 것이 아니고 오히려 박정희에도 불구하고 남한경제가 발전했다고 밖에 볼 수가 없다는 것이다. 앞에서 말햇듯이 이미 경제개발5개년계획을 통한 국가주도경제발전과 더불어 수입대체화가 아닌 수출주도형경제발전계획이 장면정부하에서 만들어졌었고 그 당시 우리나라의 경우 산업화의 열망으로 들끓던 시대였다는 것과 또 이승만 정권하에 토지개혁이 어느정도 이루어졌고 동시에 우수한 인적자원이 확보되었다는 점에서 경제성적의 가능성이 어느나라보다 충만해 있었던 것이다. 다만 박정희는 장면정부의 계획을 도적질해가서 시행을 하긴 했지만 오히려 다른 아시아국가에 비해서 그리 좋은 성적표도 아니었고 더군다나 막대한 무역적자와 족벌재벌의 폐혜를 남기므로써 나중에 아이엠에프의 간접적인 원인이 되었던 것이다.

3. 지역주의적 관점에서 본 산업화와 민주화

자 그렇다면 이제 지역적으로 산업화와 민주화의 문제를 이야기 해보도록 하자.

앞에서 이야기했듯 우리나라 정치세력중 유일하게 산업화와 민주화 이 두 가치를 공희 인정하고 또 제대로 발전시킨 세력은 DJ로 대표되는 민주개혁세력이었다. 이승만은 산업화와 민주화가 초보적인 단계였고 나중에는 잘못된 산업화와 부정선거로 인해 국민들로부터 쫒겨남으로서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장면은 그에 비해 제대로 된 산업화(경제개발5개년계획과 수출주도경제성장모델확립)모델을 정립했을 뿐만 아니라 또 우리민족이 민주화의 황금기를 구가하던 시기였다. 4.19혁명이라는 자랑스런 경험을 축적하는 그런 시기였던 것이다. 그런데 이런 소중한 산업화 민주화의 싹을 철저히 망친 세력이 바로 영남패권주의세력의 대부 박정희인 것이다. 그는 산업화에 있어서 철저하게 장면의 올바른 정책을 도적질해 간 사람이다. 문제는 선무당이 사람잡는다고 올바른 정책을 도적질해서 정작 산업화과정에서 막대한 기회비용을 지불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영남패권이라는 봉건적파쇼잔재를 유산으로 남기고 또 산업화과정에서 노동을 소외시켰으며 또 경제성적의 면에서는 막대한 무역적자라는 덧을 만들어 놓는다. 거기에 족벌재벌체제를 통해 경제민주화에 엄청난 쥐악까지 만들었던 것이다. 동시에 거기에서만 그치는 것이 아니고 박정희는 철저하게 민주화를 부정하고 민주화세력을 탄압했다.  박정희시절 수출주도라는 산업화자체는 올바른 것이었지만 이것 역시 그가 독자적으로 만든것이 아니고 장면정부의 것을 도적질했으면 그 산업화과정에서 너무나도 부정적인 유산을 많이 만들어내었던 것이다. 민주화까지 부정해가면서 말이다.

이야기가 다시 반복될 것 같아 이정도로 박정희는 각설하고, 지역적으로 볼때 산업화를 위해서 남한의 모든 지역은 다 헌신했다. 산업화에 있서 특정지역이 더 헌신했다는 실증적 데이타는 존재하지 않는다. 충청도든 전라도든 강원도든 모두 서울에서 처절하게 고생하며 남한의 경제를 살리기 위해 헌신했던 것이다. 문제는 그럼에도 그 경제적 과실이 특정 지역위주로 돌아갔었다는 점이다. 이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봉건적이고 파쇼적인 영남패권의 결과인 것이다. 경상도외에 타 지역도 산업화에 대해서는 모두 긍정적이었다는 점에서 산업화는 대한민국 모두의 공로라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더구나 소팔아 땅팔아 자식공부시켰던 우리내 부모님들이야말로 선각자적인 안목으로 진정한 경제성장의 밑거름인 인적자본에 투자했던 분들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문제는 민주화라는 측면에서는 그 기여에 있어서 지역적으로 확연히 차이가 난다는 점이다. 오직 경상도지역 특히 경북지역만이 반민주화에 앞장섰던 수구적 지역이었던 것이다. 물론 경상도사람중에 민주화에 헌신한 사람도 상당히 있다.(이 중 김영삼계는 처음에는 민주화운동을 하다가 3당합당으로 독재세력과 한몸뚱아리가 되어 민주화를 배반한다.) 하지만 남한 민주화 역사에서 경상도는 항상 부정적 역활을 해왔다는 점을 부정할 수 없다는 점이다. 그에 비해 그 반대편에서 남한 민주화를 위해 희생했던 지역은 당연 전라도였다. 물론 전라도만 그런 것은 아니지만 최전선에서 경상도사람들의 마타도어의 희생이 되어야 했다는 점에서 가장 피해를 많이 받은 지역이라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물론 전체적으로 남한 민주화에 기여한 지역은 서울과 전라도 그리고 충청의 일부가 거기에 해당된다.

그렇다면 경상도는 앞으로 어찌해야 할까? 아직까지도 경상도는 영남패권적인 반민주적 정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거기다 남한 모두의 경제성과를 자신들만이 독자지하려는 뻔뻔한 작태를 여전히 보여주고 있다. 경상도는 더 이상 우리가남이가로 경제파탄시킨 김영삼같은 얼치기 인간을 대통령으로 뽑을 생각하지 말고 또 그동안 독재의 편에 섰던 자신들의 잘못을 반성하고 민주화의 길로 들어서길 충고하는 바이다. 경상도가 대오각성하고 반성할때 남한의 진정한 경제성장과 배분도 민주화도 또 남북평화와 통일도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전에 주요모순과 기본모순에 대해 이야기 했었는데 그런의미에서 영패야 말로 남한사회의 주요모순인 것이다. 즉 한국적 현실에서 주요모순과 기본모순의 관계는 영패모순>민족모순>계급모순인 것이다. 왜냐하면 영패모순이 해결되어야 민족모순이 해결되고 민족모순이 해결되어야 계급적 좌파정당이 한국민중에게 정치적으로 어필할 길이 열리기 때문이다.(물론 나는 좌파를 단지 계급적 관점만으로 제단하는 유럽식 기준에 반대하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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