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라이트 역사관의 종착지는 '수구세력의 복권' 역사

박정희 전두환이야말로 민주화의 일등공신?

[심층기획-뉴라이트<5>] 뉴라이트 역사관의 종착지는 '수구세력의 복권'

이정무 기자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으로 과거사 논란이 불붙고 있다. 일본의 교과서 왜곡은 그저 지나가버린 일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학술 논쟁이 아니라, 일본의 재무장과 군국주의화를 동반하는 정치적 논쟁이다. 이처럼 역사해석은 언제나 특정의 정치적 목표와 직접 연관된다.

뉴라이트는 우리 역사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을까? 이들의 역사인식 또한 지나가버린 일에 대한 단순한 학술해석이 아니다. 이제 ‘뉴라이트’의 역사인식, 그 속으로 들어가 보자.

박정희, 전두환 정권의 전략이 ‘민주화’(?)

"우리 나라의 민주화의 역사를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정권에 대한 반대투쟁의 역사'를 중심으로 봐야할지 아니면 '민주주의의 중요한 기초를 이루는 경제를 중심으로 한 전반적 사회발전을 강력히 추진하고 그에 상응하는 점진적 민주화를 추구한 박정희, 전두환 정권 등의 전략이 관철되어온 역사'인지 동시대인인 우리는 지나치게 모호해서 감히 단정적으로 말하기가 어렵다. 이 양쪽 중 어느 쪽이 중심인가? 나는 '박정희, 전두환 정권의 전략이 관철되어온 역사'쪽이 좀더 역사적 진실에 가깝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좀더 확정적인 결론은 50년 혹은 100년 후의 역사학자들에게로 미루기로 하자."

‘뉴라이트’의 이론가로 알려져 있는 김영환의 글이다. 상당히 조심스럽게 쓴 문장이지만 꼼꼼히 읽어보면 그 의미를 이해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요컨대 우리나라 ‘민주화’의 역사는 ‘박정희 전두환 정권의 전략이 관철되어 온 역사’라는 것이다. 주의할 점은 우리나라의 역사가 그렇다는 것이 아니고, 우리나라 ‘민주화’의 역사가 그렇다는 것이다.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독자들이 많을 것이다. 우리나라 역사에서 박정희, 전두환이 정권을 잡고 일방적으로 주도권을 휘둘렀다는 것이야 그렇게 볼 수도 있겠지만, ‘민주화’의 역사가 군사정권의 전략이 관철되어 온 역사라니? 말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독자들이 많겠지만, 이것이 바로 ‘뉴라이트’ 역사인식의 핵심을 이룬다. 즉 박정희, 전두환 정권에 의해 경제발전이 이루어졌고, 경제발전 없이는 민주화는 불가능했을 것이며, 나아가 급격한 민주화를 반대하면서 ‘점진적으로 민주화를 추구한’ 박정희, 전두환이야 말로 민주화에 기여한 핵심인물이라는 주장이다.

이 주장은 뉴라이트의 핵심부대로 알려진 자유주의연대 신지호 대표의 말에서도 반복된다.
"이승만과 박정희가 없는 김영삼과 김대중 그리고 노무현은 탄생할 수 없었다. 건국과 호국 과정이 있었기에 산업화가 가능했고 산업화를 이루었기에 ‘불가역(不可逆)적 민주화’가 가능했다. 이 점에서 민주화만을 인정하고자 하는 단절적 역사인식은 결국 자신의 뿌리에 대한 부정으로 귀착된다." (신지호 자유주의연대 대표의 신문기고글)

신 대표는 한발 더 나아가 항일독립운동, 민주화와 통일운동을 역사의 주류로 이해하는 입장에 대해 일본 극우파 용어를 그대로 차용하여 ‘자학사관’이라는 냉소적 단정을 내린다. 그는 "자학하는 사람치고 제대로 되는 사람 없다. 자중자애(自重自愛)하는 인간만이 성취한다고 했다. 국가공동체에 대한 태도 역시 마찬가지"라며 독재정권을 두둔하는 데 열을 올린다.

‘실증'을 앞세운 식민지 근대화론

‘박정희 전두환이 민주화의 일등공신’이라는 현대사에 대한 ‘뉴라이트’의 해석은 너무나 엉뚱해서 실소를 금하기 어려울만큼 엽기적이다. 그러나 그러한 해석의 모체라고 할 수 있는 일제 식민지 시대에 대한 이들의 역사 인식은 ‘실증’을 앞세워 과학적인 포장을 시도하고 있다.

"일제강점기에 일제가 조선의 토지와 쌀을 수탈했고, 정신대를 강제 동원해 일본군 위안부로 삼았다고 기술한 중고교 국사교과서는 신화(神話)에 불과합니다."

이영훈 서울대 경제학과 교수가 '한일, 연대21' 발족 기념 심포지엄에서 발표한 ‘국사 교과서에 그려진 일제의 수탈상(收奪相)과 그 신화성’이라는 발표문에 나온 말이다. 우리에게 ‘종군위안부=공창’이라는 발언으로 널리 알려지게 된 이 교수는 뉴라이트의 일각을 이루고 있는 교과서포럼의 공동대표를 맡고 있는 인물. 경제사를 전공한 이 교수는 일제시대 벌어진 일본의 조선 ‘수탈’은 사실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실상 TV시사토론에서 이 교수는 ‘실언’을 한 것이 아니라, 평소의 ‘지론’을 펼친 것 뿐이다.

‘전두환 박정희 민주화 추진론’과 마찬가지로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독자들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이 교수의 주장은 나름대로의 실증근거를 제기하고 있다.

이영훈 교수 류의 주장을 통칭하는 '식민지 근대화론'이란 일본 식민주의자들이 일제의 조선통치를 정당화하기 위해 내놓은 이론으로, 식민지 시기 일제가 조선의 근대화와 경제개발에 기여한 바가 크다는 주장이다.
이들 주장의 가장 중요한 근거는 일제시대 일본이 낸 경제통계다. 이들은 식민지 시기 한국경제의 연평균 성장률은 4.2%(차명수 영남대 교수)였다면서 농업이 국내총산업생산액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1918년 85%에서 52%로 낮아진 반면, 공업 비중은 8%대에서 26%대로 상승했다며 산업구조의 근대적 변화도 이때 이루어졌다고 주장한다.
한발 더 나아가 일제는 조선의 토지와 쌀을 강제적으로 ‘수탈’한 것이 아니라, 정상적인 자본주의적 ‘매매’를 통해 토지와 쌀을 사들였을 뿐이라고 주장한다. 물론 당시 조선총독부의 통계 자료는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종군위안부가 일종의 자본주의적 매춘 행위라는 이들의 주장은 이런 맥락에서 보면 아주 자연스러울 뿐이다.

이러한 주장이 근거한 ‘조선총독부 통계’가 설사 사실이라 하더라도 형식적인 실증 자료를 동원해 이들이 은폐하고 있는 것은 ‘누구를 위한 개발인가'라는 본질 문제이다. 이들은 국내총생산(GDP)이 계속 성장했다는 사실을 근거로 식민지시대 경제가 발전했다는 주장을 펼쳤는데, 해방 이후 '50년대 초반 한국의 1인당 국내총생산은 일제시대 초기에 비해 더 낮아졌다(허수열 충남대 교수)’는 사실은 외면한다. 일제가 물러간 후 이 땅에 남은 것은 조선왕조 말기 수준의 생산력이었다. 즉 일제시대의 개발은 철저하게 일본인을 위한 일본인의 경제개발이었던 셈이다.

수탈이 아니라 자본주의적 매매라는 주장도 어이없기는 마찬가지다. 총칼을 손에 들고 무자비한 탄압을 저질렀던 일제가 오직 경제관계에서만 정상적인 ‘매매’를 했다는 것이 어떻게 성립할 수 있는가? 일제 총독 정권의 전적인 비호없이 일본인들이 식민지에서 '시장경쟁'을 통해 막대한 부를 획득했다고 주장하는 것이 상식인의 사고방식인가?
이는 마치 전두환 노태우 등이 정상적인 ‘기부’를 받아 천문학적인 비자금을 조성했다고 주장하는 것과 아무런 차이가 없다.

민족허무주의, 투쟁무용론을 거쳐 수구세력의 복권을 목표로

앞에서도 지적했듯이 역사인식은 지나간 일에 대한 학술논쟁이 아니다. 역사인식은 반드시 현실의 정치적 목표와 연관되어 있기 마련. 그렇다면 뉴라이트의 역사인식이 목표로 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민족허무주의’와 ‘투쟁무용론’을 거쳐 ‘수구세력의 복권’으로 향한다고 볼 수 있다.

일제식민지 시대를 해석하는 이들의 논리는 ‘일제의 조선지배에 의해 근대화가 촉진되어 잃은 것에 못지 않게 얻은 것이 많다(한승조 고려대 교수)’는 말로 집약된다. 요컨대 민족이 뭐 그리 중요하냐는 것이다. 나라를 잃어도 얻은 것이 많다면 굳이 나라의 독립을 위해 싸울 이유가 무엇이며, 그런 태도야 말로 세계화 시대를 역행하는 낡은 민족주의적 사고방식이라는 것이다.

김영환의 주장은 이런 면에서 오히려 솔직하다.
“나는 개인적으로 어떤 형태의 민족주의에 대해서도 강력히 반대한다. 한국의 민족주의든 일본의 민족주의든 중화민족주의든 티벳의 민족주의든 아랍민족주의든 유태민족주의든 그 어떤 민족주의도 인류 발전에 도움이 되지 않을 것으로 본다”는 것이다.
침략을 정당화하기 위한 강대국 민족주의건 자주권을 지키기 위한 약소국 민족주의건 이름이 민족주의니까 똑같다는 주장이다. 이러한 주장은 당연히 일제 식민지건 미국의 식민지건 그것이 무슨 상관이냐는 민족허무주의로 이어지며, 친일파든 친미파든 무엇이 문제냐는 논리로 이어질 수 밖에 없다.

또 이들은 자주와 민주주의를 위한 민중의 투쟁을 폄하한다. 민주화의 일등공신이 민주화를 위해 싸운 민중들이 아니라, 박정희 전두환이라는 도착적인 주장이 그것이다. 이렇게 되면 일제하 독립운동도 무의미한 것이 되고, 군사독재에 맞서 싸운 열사들의 투쟁도 ‘별 의미없는 일에 목숨을 바친’ 바보스러운 행동이 된다. 이러한 주장은 역대 수구보수세력의 논리와 한치도 다르지 않다. 이처럼 구태의연한 수구적 주장들을 비밀스럽고 이색적인 언어로 포장해서 뭔가 새로운 주장처럼 슬그머니 꺼내놓은 것이 뉴라이트의 ‘역사관’이다.

뉴라이트 역사관의 최종 목표는 ‘수구세력의 복권’이다.
한나라당과 조선일보로 상징되는 수구세력은 식민지시대와 해방 후 50년을 거치면서 그 매국적, 사대주의적, 반통일적 성격과 독재정권옹호, 부패성으로 인해 이미 국민의 신망을 잃었다. 한나라당은 뭘 해도 친미당이요, 분단세력당이요, 차떼기 부패당이며, 조선일보는 친일 친독재 신문이라는 국민적 인식이 그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뉴라이트는 수구세력의 친일, 친미행위는 나쁜 짓이 아니었고, 군사독재정권이야말로 민주화의 기틀을 확립한 ‘진정한 민주세력’이었다고 역설한다. 이처럼 이들의 역사인식은 수구세력의 복권이라는 정치적 목표를 향해 정조준 되어 있다.

새것을 내세우려면 낡은 것과 절연해야 한다. '뉴라이트'는 '올드라이트'와 절연할 때만이 그나마 새로운 것으로 대접받을 가망이 있다. 그러나 변절한 386이 중심이 된 ‘뉴라이트’는 그 자체로는 인적으로 보나 물적 기반으로 보나 자립적 생명력을 갖고 있다고 보기 어렵다. 오직 '올드라이트'의 물적 인적 기반위에 설 때만 이들의 정치적 야망은 실현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뉴라이트의 딜레마이다.
결국 뉴라이트의 반동적인 역사관은 이러한 딜레마에 직면해서 '올드라이트'의 과거를 ‘세탁’해주는 대신 올드라이트로부터 물적 인적 기반을 제공받으려는 추악한 거래라는 혐의를 벗기가 어렵다.


2005년04월26일 ⓒ민중의 소리

............

산업화가 민주화는 아무런 인과관계가 없다.(민주주의 경제적 가치는 얼마?)


가난한 사회는 민주주의를 할 능력이 없으니 독재를 해서라도 경제를 발전시키는 게 낫다는 군부독재 정당화논리는 아직까지도 광범위한 사회적 지지를 획득하고 있다.  박정희-전두환-노태우로 이어지는 군부독재 정권에 빌붙어 호의호식했던 사람들이 민주화 이후에 머쓱해지니까 꺼내 놓은 논리가 한술 더떠서 우리가 이만큼 경제를 발전시켜 놓은 덕택에 민주주의를 할 수 있게 된거라는 이른바 "선근대화-후민주화론"이다.  최근들어 더욱 기세를 떨치고 있는 민주화세력 무능론도 이런 논리의 연장선상에 있다. 경제적으로 무능한 민주화세력을 가장으로 두느니 돈 잘 벌어오는 산업화세력이 낫다는 발상은 과연 타당한 것인가? 

돈만 있으면 안되는 것이 없다는 사고방식을 가진 황금만능주의자들은 돈이 있어야 민주주의도 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미국과 유럽을 봐라. 그리고 아프리카를 봐라.  잘 사는 나라들은 민주주의를 하고, 못사는 나라들은 대부분 민주주의가 아니다. 박정희-전노의 리더쉽으로 이만큼 먹고살만 해지니까, 민주주의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아래 그림 (1)을 보면 틀린 말이 아니다.



출처: Acemoglu et al. (2006). Income and Democracy. NBER Working Paper No. 11205

가로축은 1인당 국민소득을, 세로축은 프리덤 하우스가 산출한 민주주의 점수이다 (1에 가까울 수록 민주주의국가이다). 1990년대 한국은 소득수준도 높고 민주화도 잘 된 국가로 평가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일본에는 뒤지지만, 아시아권에서 발군인 한국은 대만과 국민소득 수준은 엇비슷하지만 민주화에서 좋은 평가를 받았다. 

전체적인 그림을 보면, 경제적으로 잘 사는 나라들이 민주화도 보다 진전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고로 독재부역세력들이 주장하는 "선근대화-후민주화론"은 일리가 있다고 봐야 맞는 것일까?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되어야 민주주의도 누릴 수 있다는 주장은 경제발전이 민주화의 선결조건임을 전제하고 있기에 일정수준의 소득수준은 민주주의를 촉발하는 원인으로 작동한다.  위의 그림 (1)은 이런 인과관계를 그럴듯하게 보여주는 것같지만 실은 경제발전이 민주주의를 추동하는 인과과계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단순한 상관관계만을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각 국가별 고유의 상황변수를 통제하고, 민주주의와 경제성장 사이의 인과관계를 보다 정밀하게 검증해 보기 위한 한 방편으로 소득수준의 변화정도와 민주주의의 변화 정도의 관계를 생각해 볼 수 있다. 교양없기로 정평이 난 연봉 2천의 남자가 1년 후에 연봉 3천이 되었다.  소득이 천 만원이 늘었는데, 교양수준은 나아졌을까?  나아졌을 수도 있고 나빠졌을 수도 있다.  이렇게 연봉의 변화와 교양수준의 변화를 비교해 보는 것이 보다 타당하게 상관관계가 아닌 진짜 인과관계를 평가해 볼 수 있는 방법이다.



출처: Acemoglu et al. (2006). Income and Democracy. NBER Working Paper No. 11205

1970년에서 95년 사이 국가별 소득수준의 변화정도와 민주주의 점수의 변화정도를 추적해 본 결과, 먹고살만 해졌다고 해서 민주화가 진척되었다는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다. 앞서 <그림 1>에서는 잘 살수록 민주화가 되는 우상향의 직선이 나타났지만, 막상 변화 대 변화의 관계를 비교해 보니 잘 살게 된다고 해서 민주화가 진전된다는 우상향의 직선은 사라지고 평평한 직선 (먹고사는 것과 민주화는 무관함을 의미한다)만이 남았다.

한국과 태국은 경제도 발전하고 그만큼은 아니더라도 민주화가 진전된 케이스지만, 경제가 발전했는데도 민주주의는 제자리인 싱가폴과 중국같은 케이스도 존재하고, 경제는 발전했는데 오히려 민주주의는 뒷걸음질친 인도같은 나라도 있다. 

위 그림에서 좋은 포지션을 차지한 태국은 얼마전 군사쿠데타가 일어나 민주주의가 크게 후퇴했다는 점에서 민주주의와 경제발전을 동시에 달성한 한국같은 나라는 극히 예외적인 케이스란 걸 알 수 있다.

여기에서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경제가 발전한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민주주의로 이행하는 것은 절대 아니라는 것이다.  졸부란 개념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니다.  부는 단기간에 빠르게 증식할 수 있지만, 교양이나 지성은 속성으로 축적되지 않는다.  졸부가 달리 졸부인가?  재부가 증가한다고 교양도 절로 증가하는 것이 아님은 조금만 생각해도 쉽게 알 수 있다.  밤마다 술먹고 여자끼고 놀면 교양이 느는 게 아니라 타락해서 인생막장으로 가게 된다.  돈이 없다고 해서 교양이 없는 것도 아니다.  돈이 많으면 교양을 쌓을 기회가 더 많은 게 사실이라도, 돈을 버는 길과 지성인이 되는 길은 필연적으로 만나는 것은 아니다. 

졸부는 있어도, 졸지에 지성인이 되는 경우는 없다.  경제적으로 급성장한 나라는 여럿이지만, 졸지에 민주주의국가가 된 경우는 없다.  민주주의를 이식해 줘도 말아먹는 경우가 거의 대부분이고, 극히 예외적 케이스라고 할 한국도 50년의 독재로 퇴행했다가 민주화를 쟁취했다.  민주주의가 그만큼 시간을 두고  숙성이 필요한 것이라면, 보다 공평하게 백년의 시차를 두고 경제성장과 민주주의의 함수관계를 평가해 보는 건 어떨까?


출처: Acemoglu et al. (2006). Income and Democracy. NBER Working Paper No. 11205


1900년에서 2000년까지 1백년동안 경제발전과 민주화의 관계를 측정해 본 결과 역시 민주화와 경제발전은 따로 논다는 것이다.  민주주의를 체득하기엔 백년도 부족한 것일까?  그렇다면 5백년을 두고 보면 어떨까?



출처: Acemoglu et al. (2006). Income and Democracy. NBER Working Paper No. 11205



1500년에서 2000년까지 5백년의 시차를 두고 경제발전과 민주주의의 관계를 봤더니, 놀랍게도 다시 소득이 증가할수록 민주화도 진전되는 정의 관계가 나타났다.

MIT와 하바드의 경제학자들이 5백년에 걸쳐서 민주주의를 체득하려면 얼마나 소득이 증가해야 하는 지 추산해 보았다.  1990년도 달러 기준으로 계산된 1500년의 세계 평균 소득수준은 566달러라고 한다.  당연히 5백년 전에는 민주국가란 게 없었다.  이 나라들이 민주화가 되려면 소득수준은 얼마나 늘어나야 할까? 

순전히 소득증가만으로 민주화를 달성하려면 566달러의 국민소득은 984조까지 늘어야 한다는 게 Acemoglu등의 결론이다.

여기에서 우리가 배울 것은 다음과 같다. 이론적으로 민주주의를 돈으로 살 수 있다. 가능하다. 내 일년 소득이 984조가 된다면 피를 흘리지 않고도 민주화가 찾아온다.  아시아 최고수준의 민주주의를 누리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 한국의 현 일인당 국민소득은 2만불 정도에 불과하다. 984조에는 상당히(!) 못미치는 국민소득 수준인데, 이말은 다시 말해 우리 선배들이 흘린 피와 눈물값이 984조의 가치를 나에게 안겨 준 것임을 의미한다. 

민주화 세력은 우리에게 구찌같은 명품 핸드백을 선물해 주진 못했을 지 몰라도, 6월항쟁으로 흘린 그들의 피와 땀과 눈물은 민주주의라는 세계 최고가의 명품을 우리 모두에게 골고루 안겨주었다.  우리모두가 누리고 있기에 값싸 보일지 몰라도, 잊지 마시라.  99% 초대박 할인판매라도 민주주의는 여전히 럭셔리한 사치품이며, 우리를 부러워하는 사람들이 지구상에는 모래알처럼 많다는 사실을... 그리고 분명히 하자. 박정희가 조선왕조 5백년만큼 살아 통치를 했어도 남한땅에 민주주의는 오지 않았다. 압축성장보다 더 자랑스러운 것이 우리가 일구어낸 압축민주화다.


덧글

댓글 입력 영역
* 비로그인 덧글의 IP 전체보기를 설정한 이글루입니다.



메모장

Yahoo! blog bad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