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조선의 강역, 한4군의 위치, 기자조선의 실재여부 역사


고조선의 강역은 어디까지인가

고조선의 영토는 동북공정의 직접적인 타깃이다. 최근 중국이 고조선ㆍ고구려ㆍ발해의 무대였던 만주의 역사를 자국의 역사를 편입시키려는 ‘요하문명론’(僚河文明論)은 대표적인 작업이다.


고조선의 강역과 관련해서는 고조선의 중심지가 어디인가 하는 것이 고조선의 실체를 이해하는 중요한 관건이다.

고조선의 중심지에 대해서는 크게 대동강 중심설, 만주 요령성 중심설, 초기에는 요동에 있다가 대동강 유역으로 이동했다는 중심지 이동설 등으로 나뉜다.

‘대동강 중심설’은 <삼국유사>에서 ‘단군왕검이 평양성에 도읍해 비로서 조선이라고 불렀다’는 기록과 중국 <한서> ‘조선전’에서 한나라 초기 서쪽 경계를 ‘패수’라고 한 기록 등이 근간을 이루며 일제 강점기에 더욱 심화됐다. 1930년대 평양 일대에서 중국계 유물이 대량 발견되면서 통설로 굳어갔으며 초기 국사학자인 이병도ㆍ이기백 교수를 비롯해 최근의 이종욱ㆍ송호정 교수 등이 동조하고 있다.

대동강 중심설에 따르면 고조선의 영토는 한반도 북부에 그친다. 하지만 다른 문헌사료와 고고학 사료와 엇갈린다.

<삼국지> ‘위서동이전’이 인용한 <위략>에는 ‘연나라 장군 진개를 파견해 조선의 서쪽 지역을 침공해 2,000리의 땅을 빼앗아 만반한을 경계로 삼았다’는 구절이 있는데 평안남도 전체를 합쳐도 2,000리가 안 되기 때문에 서쪽 2,000리를 상실하고도 요동현의 속현을 국경으로 삼았다면 고조선의 영역은 대동강 유역에 국한될 수 없다.

또한 <사기> ‘진시황본기’26년조에는 중국을 통일한 진나라의 영토가 ‘동쪽은 바다에 이르고 조선에 미쳤다’고 하였고 진나라와 조선이 국경을 접한 지역을 요동이라고 말하고 있다.


당시 요동은 현재의 요동과 다르다. <후한서(後漢書)> ‘동이열전’, <삼국지> ‘고구려’전에 “고구려는 요동으로부터 동쪽으로 1,000리 떨어진 곳에 있다”고 기록돼 있다. 즉 고조선과 진나라의 국경은 지금의 요동으로부터 서쪽으로 1,000리 떨어진 곳에 있었다. 대동강 중심설로는 해석할 수 없는 기록이다.


그래서 만주의 요동이 고조선의 중심지라는 ‘요동 중심설’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신채호ㆍ정인보 등 민족주의 사학자들과 이후 윤내현ㆍ이덕일 학자 등이 취하는 학설이다.


요동 중심설은 고조선의 서쪽 국경선인 패수를 현재의 대릉하로 보는 시각(다수설)과 그보다 훨씬 서쪽인 난하로 보는 견해로 나뉘며 고조선의 남쪽 경계에 대해서도 청천강으로 보는 견해와 예성강으로 보는 견해, 남한의 끝까지로 보는 견해 등이 있다.


‘중심지 이동설’은 고조선의 초기 중심지는 요령지역이었으나 후기에는 중국 세력의 확장에 따라 한반도 서북부 지역으로 이동했다는 논리다.


중심지 이동설의 가장 큰 쟁점은 고조선 멸망 당시의 도읍이 현재의 평양인가 하는 것과 관련 대동강으로 이동했다는 견해와 만주의 평양 지역이라는 견해로 나뉜다.


요동 중심설과 중심지 이동설은 고조선의 강역을 한반도와 중국 진나라의 만리장성이 끝나는 옛 요동 갈석산을 경계로 한 만주 전역의 광범위한 영토로 해석한다.  

한사군은 어디에 위치했나

한(漢) 무제는 기원전 108년 위만조선을 물리친 후 그곳에 4개 군(郡)을 설치하였다. 이른바 ‘한사군’이다. 한사군의 설치 여부와 위치는 만주와 한반도 북부 영토에 대한 야욕을 지닌 중국의 동북공정의 주요한 도구로 사용되고 있어 정확한 고증이 요구된다.


한사군의 위치는 고조선의 중심지가 어디인가 하는 문제와 맞물려 있는데 앞서 이병도ㆍ이기백으로 이어지는 주류 사학계의 ‘대동강 중심설’에 따르면 한사군은 ‘낙랑=대동강 유역, 진번=자비령 이남~한강 이북, 임둔=함남, 현도=압록강 유역 동가강’으로 비정된다.


그러나 한사군을 한반도에 위치할 경우 사료와 모순된다. <사기>에 한나라가 조선을 공격하는 과정에 ‘그해 가을에 누선장군 양복을 파견하여 제(齊) 지역에서 발해로 배를 띄워 바다를 건너게 하였으며’라는 구절이 있다. 제 지역은 오늘날 산동반도이며 발해는 산동반도 왼쪽에 있는 바다로 한의 수군이 대동강이나 청천강 쪽으로 항해를 했다면 ‘발해로 배를 띄워 바다를 건너게’하지 않았을 것이다.

또 중국의 <수경주(水經注)>는 ‘패수’에 대해 ‘패수는 낙랑 누방현에서 나와 동남쪽으로 임패현을 지나 동쪽으로 바다에 들어간다’고 설명한다. 낙랑군이 평양 지역에 있었다면 패수가 ‘동쪽으로 바다에 들어가’는 경우는 없다.

대동강 중심설이 근거로 삼는 대동강 일대에서 발견된 낙랑 유물과 대해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소장은 “대동강의 낙랑 유물은 고조선을 멸망시킨 전한(前漢, 기원전 206~서기 24) 때의 것이 아닌 후한(後漢, 서기 25~219) 때의 것으로 한사군의 낙랑은 만주지역에 있었기 때문에 문제의 낙랑 유물은 후한이 멸망시킨 낙랑국의 것”이라고 말했다. 즉 한사군인 낙랑과 후한시대 대동강 유역의 낙랑국은 전혀 다른 세력이라는 설명이다.

기자조선은 실재했나

기자조선은 한국 고대사의 미스터리다. 기자조선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고조선사를 포함한 한국사의 체계가 달라진다.


기자(箕子)는 중국에서 은(殷, 또는 商)나라와 주(周)나라 교체기에 고조선으로 망명한 인물로 고려와 조선 시대에는 기자조선의 실체를 인정하였지만, 광복 이후의 사학계는 이를 부정하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국사 교과서도 기자조선이 빠진채 고조선(단군조선)과 위만조선만 언급돼 있다.


‘기자부정론’은 한반도에 기자와 관련된 은나라 유물(갑골문 등)이 발견되지 않았고 기자가 기원전 1100년 전후의 인물로 한반도의 청동기 시기(기원전 800~1000년)와도 모순된다고 한다.

반면 윤내현 단국대 동양학연구소 소장은 사료에 대한 고증 부족을 지적하면서 “고조선의 강역을 한반도 북부 대동강 유역으로 한정하고 기자조선이 고조선을 대체한 국가로 잘못 이해한 데서 비롯된 것”이라고 말했다.


윤 소장에 따르면 기자가 망명한 곳은 고조선의 서부 변경인 지금의 난하 유역으로 산동반도의 갈석산에서 멀지 않은 곳이라고 한다. 기자는 그곳에서 자리를 잡고 고조선의 거수국(渠帥國, 중국식으로는 제후국)이 됐다는 것이다. 그래서 한반도에서 황하유역 유물이나 갑골문자 등이 발견되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는 설명이다.


<삼국유사> ‘고조선조’에는 기자가 고조선으로 망명해 온 후 고조선은 도읍을 장당경(藏唐京)과 아사달로 두 번 옮겼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것은 기자국이 고조선의 서부에 자리했고 그 동쪽에 고조선이 존재하면서 도읍을 옮긴 것이라는 분석이다. 윤 소장은 기자조선은 고조선의 한 부분으로 한국사의 일부라는 것이다.


덧글

  • 三天포 2008/05/01 11:36 # 답글

    잘읽고 갑니다
  • 콜트레인 2008/05/01 22:02 # 답글

    아 네 님이 처음으로 댓글 달아주셧군요. 제 이글루에 ^^ 방갑습니다.
  • 베르게네프 2008/05/08 18:00 # 답글

    일부 학계에서는 은 제국 또한 우리 민족의 제국으로 보기도 합니다.
  • 콜트레인 2008/05/08 18:39 # 답글

    은의 경우 예맥족과 유사성이 많다고 합니다. 이것은 이미 홍이섭이나 정인보 신채호 선생등이 주장했던 내용인데 랴오허문명이 새롭게 발견되면서 그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져.

    기자조선에 관한 이형구교수의 견해도 좋은 참고자료가 될거라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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