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혼, 아들의 죽음, 암…이민아 변호사 다시 태어나다 jesus recovers us

하나님은 살아계십니다....다만 우리 인류가 죄악과 탐욕으로 영안이 감겨 보지 못할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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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혼, 아들의 죽음, 암…이민아 변호사 다시 태어나다
레이디경향|
입력 2011.09.02 1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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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문화부 장관 이어령 교수의 큰딸 이민아 변호사가 간증집 「땅끝의 아이들」을 내놓았다. 이 책의 마지막 장을 넘겼을 때, 그동안 이민아를 대신해주던 많은 수식어를 이제는 내려놓아야 할 때라는 것을 깨달았다. 한 사람의 인생에서 모두 일어났다고 볼 수 없을 만큼, 험난했던 인생의 끝에서 그녀가 다시 태어났기 때문이다.

젊은 시절의 사진에만 눈에 익은 기자는 올해 52세가 된 이민아 변호사를 처음 봤을 때 조금은 놀랐다. 출판사 관계자가 "건강이 좋지 않다"라고 하더니, 그녀의 얼굴에는 험난한 인생의 비바람이 할퀴고 지나간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먼저 건강부터 염려됐다. 올 초에 백내장 수술을 했고, 오래전 일이긴 해도 암 수술도 세 번이나 받은 그녀였다. 가녀린 몸매에 소녀 같은 웃음을 짓는 그녀는 "이야기하는 것은 하나도 힘들지 않다"라며 기자를 안심시켰다.

나를 바라보는 시선에서 자유롭고 싶었다



이민아 변호사는 "나를 바라보는 시선에서 자유롭고 싶었다"며 말문을 열었다. 아닌 게 아니라 최근 발간된 간증집 「땅끝의 아이들」에서 그녀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자신의 이야기를 드러냈다. 솔직하게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바닥에 내려놓은 것이다.

아버지에게 사랑받고 싶었던 유년 시절의 아픔과 죽도록 사랑했던 사람과의 이혼, 싱글맘의 고통, 세 차례에 걸친 암 수술, 둘째 아이의 자폐 진단, 그리고 창창한 26세 아들의 죽음에 관한 이야기까지 담담히 풀어냈다.

"한창 힘들었을 때 간증집을 구해서 많이 읽어봤어요. 다른 사람들은 다 잘하는데 왜 나는 못할까, 하는 실패감이 들었어요. 그때의 나와 같은 사람들을 위해 이 책을 쓰게 됐어요. 결국 우리 힘으로 나의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어요. 내가 지쳐 쓰러졌을 때, 나를 구원한 힘에 대해 쓰고 싶었어요."

그녀의 고백은 어린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아버지를 실망시키기 싫어서 하기 싫은 공부를 억지로 해야 했던 외로운 소녀, 이민아. 늘 아버지 체면과 명성의 그늘에 살아야 했던 그녀는 자신의 어린 시절에 대해 "텅 비어 껍데기만 있는 달팽이와 같았다"라고 말한다. 바쁜 아버지는 품속에 안기려는 딸을 밀쳐냈고, 늘 아버지의 사랑에 목말랐던 그녀는 아버지가 자신을 미워한다고 생각했다. 밤마다 잠이 안 올 때면 아버지 서재에 몰래 들어가 아버지의 술을 훔쳐 먹기도 했다.

"저는 항상 아버지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기를 원했고, 아버지의 사랑을 받고 싶다는 소망을 완전히 놓아버리는 데까지 갔던 것 같아요. 제 스스로 내가 원하는 사랑을 아버지에게 못 받을 거라 생각했죠."

그녀는 이화여자대학교 영어영문학과를 조기 졸업하고 죽을 만큼 사랑한 남자, 김한길 전 국회의원과 아버지가 반대하는 결혼을 한 후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저는 참 말을 잘 듣던 아이였어요. 마음이 약해서 반항을 못했어요. 그런데 언젠가는 아이가 부모의 곁을 떠나야 하는 순간이 있잖아요. 그때의 진통을 견뎌내지 못했던 것 같아요. 어른이 되기가 힘들 만큼 마음이 약해서 자신의 영역을 설정하지 못했던 개인적인 문제였던 거죠. 제가 처음으로 제 의지대로 했던 것이 바로 남편을 선택하는 일이었죠."

가진 것 없는 학생 부부의 생활은 빠듯했다. 당시에는 유학생의 공식적인 취업이 금지되던 때라 남들이 다 꺼리는 일밖에 할 수 없었던 그들의 삶은 고되기만 했다.

그 와중에 첫째 아들 유진이가 태어났고, 이민아는 아이를 키우며 헤이팅스 로스쿨에 들어가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먹을 것이 없을 정도로 힘들었을 때도 제가 한 선택이 잘한 것이라는 걸 아버지께 보여드리고 싶었어요. 그래서 힘들다는 사실조차 이야기할 수가 없었어요. 아버지가 저를 밀쳐내신 게 아니라 제가 아버지를 밀쳐내고 떠나왔던 거더라고요."





4년간의 결혼 생활을 끝으로 이혼 할때까지 아버지에게 투정 한 번 안 하던 이민아는 이혼하자마자 아버지 앞에서 무너져내렸다. 결국 아버지를 망신시킨 딸이 된 것 같아 무척이나 괴로웠다. 그런데 이혼하고 돌아온 딸에게 화를 낼 줄 알았던 아버지는 "애가 말랐다. 밥 좀 먹여"라는 말로 마음을 대신했다. 그때 이민아 변호사는 자신이 지금껏 아버지에 대해 오해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지만 수년간 쌓여왔던 오해와 거리감은 순식간에 사라지는 것이 아니었다.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라는 것은 계속 만들어가는 집인 것 같아요. 아버지가 나를 사랑할 거라는 기본적인 신뢰와 내 딸이 나를 존경한다는 기본적인 토대가 가장 중요해요. 실패 속에서 약해졌던 그때 처음으로 아버지가 저를 사랑한다는 것을 알았어요."

내 생애 가장 뜨거운 불


이혼 후 이민아 변호사는 학업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아이를 헤이팅스 로스쿨에 부속된 탁아소 겸 학교에 맡겨놓고 공부를 했다.

"저에게는 고아 멘털리티가 있었어요. 싱글맘으로 3년 동안 일하고 공부하고 아이를 돌보는 걸 혼자서 해내야 했거든요. 내가 돈을 안 벌면 우리 둘은 굶어죽겠지, 내가 잘못하면 우리는 끝나, 하면서 저는 유진이만 쳐다보고 유진이도 저만 바라봤죠. 저의 아픔과 짐을 수없이 아이에게 지워주었기 때문에 아이가 힘들어했던 것 같아요."

이민아 변호사는 본인이 모두 책임져야 한다는 생각에 너무 많은 신경을 쓰다보니 편두통, 위궤양, 요통, 불면증 등 아프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였다.

그러던 중 유진이가 16세가 됐을 무렵 아이도, 이민아 자신도 더 이상 버틸 힘이 없었다. 아이가 다시 제자리에 돌아오기까지 1년간 요란한 사춘기 시절을 보냈다. 그 외에는 늘 긍정적이고 밝았던 아이. 버클리 대학을 졸업한 IQ 159의 똑똑하고 멋있는 청년이었던 유진이는 26세 되던 해 여름, 갑자기 쓰러져 코마 상태에 빠진 뒤 19일 만에 병명도 모른 채 세상을 떠났다.

"저에게는 가장 뜨거운 불이었어요. 장례식 날 이후 꼬박 3년을 울었어요. 1년은 거의 매일 울었고요. 3개월 동안은 아예 침대 밖으로 나오지도 못하고 이불 속에서 울기만 했어요. 천국을 믿을 수 없었고, 왜 나에게 이런 시련이 닥쳤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죠."

그래도 이민아 변호사는 신앙의 힘으로 침대 밖, 세상 속으로 다시 걸어 나왔다. 유진이 또래의 비행 청소년들을 만나며 아들에 대한 사랑을 돌아보고 '내 아이'와 '다른 아이'가 다르지 않다는 것도 깨달았다. 그녀는 유진이가 떠나던 해인 2009년 목사 안수를 받고 미국, 아프리카, 남미, 중국 등지를 돌며 청소년 구제 활동에 전념하고 있다.

사랑의 기적을 믿는다


지난 2월, 이민아 변호사는 국내에서 백내장 수술을 받았다. 지금은 안경이나 렌즈 없이 밝은 세상을 보고 있지만 사실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세상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살아왔다. 안경으로는 교정이 되지 않을 만큼 고도근시였던 그녀는 렌즈를 껴도 운전을 겨우 할 만큼 시력이 좋지 않았다. 평생을 렌즈와 함께 살아왔기 때문에 늘 망막 손상의 위험이 있었고, 이미 렌즈에 닳고 닳아 의사로부터 조심하라는 '경고'도 여러 번 들었다. 자칫 망막이 찢어지면 영구적으로 복구할 수가 없고 점차 앞을 보지 못해 실명한다는 것이었다.

재혼한 후 낳은 둘째 아들이 자폐 진단을 받은 것은 이때 즈음이었다. 열 두살이 되도록 아이는 엄마의 지시를 이해하거나 따를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아이의 치료를 위해 하와이로 건너가 특수 초등학교에 입학시켰다. 이미 초등학교를 다섯 번이나 옮겼고 중학교도 1년을 다니다가 쫓겨난, 사면초가의 상태였다.

재정 상태가 좋지 않던 하와이 크리스찬 스쿨은 개인적인 관리가 필요한 둘째 아들을 받아주는 대신 그녀가 상근 보조교사로 일할 것을 조건으로 내걸었다.





"제가 단순한 작업을 잘 못해요. 학교에서 제가 하는 일이 주로 채점이었는데, 자꾸 틀리니까 선생님이 보기엔 일부러 그런다고 생각하셨나봐요. 변호사라는 여자가 단순한 채점도 제대로 못할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던 거죠. 저는 일부러 그런 게 아닌데, 제가 괘씸하게 보였는지 점점 일거리가 많아졌어요. 그때 좋지 않은 눈으로 엄청난 양의 채점을 해야 했기에 눈에 큰 무리가 왔어요."

하지만 엄마의 정성이 통했는지 1년이 흐르자 둘째의 자폐 증세가 기적처럼 사라지기 시작했다. 자폐증은 불치병에 가까워 회복되는 경우가 거의 없는데, 둘째 아이는 이제 운전도 하고 일반적인 생활도 가능할 정도다.

하지만 이민아에게는 결국 우려했던 일이 터졌다. '망막박리' 현상이 일어나 거의 앞을 보지 못할 지경이 된 것이다.

수술은 불가능한 상황이었고, 이민아는 물론 이어령 교수 부부도 절망에 빠졌다. '한국 최고의 지성'이자 무신론자, 이성주의자임을 자처하던 70대 학자, 이어령은 2007년 개신교 목사에게 세례를 받았다. 이어령은 자신의 책 「지성에서 영성으로」에서 '만약 민아가 어제 본 것을 내일 볼 수 있고 오늘 본 내 얼굴을 내일 또 볼 수만 있게 해주신다면 저의 남은 생을 주님께 바치겠나이다'라고 밝히기도 했다.

이민아 변호사는 망막박리 7개월 만에 찢어진 망막이 다시 붙는 기적을 경험했으나 다시 앞이 보이지 않아 병원에 찾아갔을 때 백내장 진단을 받고 현재는 수술한 후 양쪽 눈 시력을 모두 회복했다.

"셋째와 넷째는 첫째와 둘째로 인해 흘리고 뿌린 눈물이 선물로 준 아이들이에요. 둘째가 19세, 셋째가 17세, 넷째가 15세예요. 첫째가 유난스러운 사춘기를 보낸 터라 아이 셋이 모두 10대가 되는 때를 무척 두려워했는데, 이 아이들은 그런 것도 없어요. 참 마음이 착한 아이들이에요."

이민아 변호사는 인터뷰 다음날 막내딸이 한국에 들어온다며 즐거워했다. 건강상의 문제로 한국에 머물고 있는 엄마의 여정이 길어지자 막내딸이 한걸음에 달려오는 것이다. 아직 확실하진 않지만 막내딸은 잠시라도 한국에서 학교에 다닐 계획이라며 환하게 웃어 보였다.

뜨거운 불구덩이에서 되살아난 삶


사실 이민아 변호사는 세 번의 갑상선암 수술로 생사의 기로를 넘나들었다. 갑상선암의 사망률은 극히 낮지만 세 번의 재발로 심신이 쇠약해진 것이 사실이다. 젊은 사랑의 묘약에 취해 아빠 품을 떠났던 22세 때부터, 실명 위기에 처했던 올해 초까지, 30년 동안 웃는 날보다 우는 날이 더 많았던 이민아 변호사. 하지만 기자를 맞는 그녀의 웃음은 티 한 점 없이 맑고 순수했다.

"저는 지금껏 살아오면서 자유와 평화로움을 누려본 적이 없었어요. 하지만 이제 저는 죽음이 두렵지 않아요. 죽음에 자유로워지면서 사는 게 더 즐거워지고 무서운 것이 없어졌죠. 저는 같은 믿음을 가진 사람들과 이야기 나누는 것만으로도 삶의 활력을 얻을 수 있어요."

<■글 / 진혜린(객원기자) ■사진 / 이성원 참고 서적 「땅끝의 아이들」>

죄의 본성과 자아를 죽이는 방법 jesus recovers us

죄의 본성과 자아를 죽이는 방법

죄의 본성을 죽이는 방법


죠 크루스


그리스도인이 거듭난다고 할지라도 타락한 육체의 본성은 사라지거나 제거되지 않는데, 어떻게 승리의 삶을 살 수 있는가? 성경은 그리스도인이 참된 거듭남을 경험할 때에 육체의 죗된 본성이 사라지거나 제거된다고 말하는 대신에, "죽는다"고 표현하고 있다. 죄의 본성이 죽는다는 것이 무슨 뜻인가? 이 중요한 문제를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그리스도인과 독수리 같은 본성 사이에서 벌어지는 대쟁투를 이해해야만 한다. 이 전쟁은 상대방을 죽이지 않으면, 오히려 자신이 죽임을 당하게 되는 매우 치열한 전쟁인데, 바울은 이 전쟁에서 독수리를 죽이고 승리하는 방법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로마서 6:6. “옛 사람”은 죗된 본성을 말하는데, 여기서 우리는 그것을 독수리라고 표현하기로 하겠다. 옛 사람(죗된 본성) 즉, 독수리를 죽이기 위해서는 그것을 품고 있는 내 자신이 십자가에 못박혀서 죽는 경험을 해야만 한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죽는 것이 필요합니까?” 또는 “꼭 죽어야 합니까?” 라는 질문을 던지며 죽기를 거절하고 있다. 그들은 자신이 죽기보다는 자기 안에 있는 선한 어떤 것을 계발시킴으로써 그리스도인이 되려고 한다. 그리하여 그들은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악하고 이기적인 존재이므로,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고 할지라도 악을 행하며 살아가는 것이 당연하다” 라는 결론을 내리면서, 좀더 나은 방향으로 향상시켜 나가기 위해서 애쓰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자아의 죽음과 선의 계발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는 창조와 진화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와 같다. 사도 바울은 자아의 죽음을 통하여 새로운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는 재창조에 대해서 말하고 있지만, 어떤 사람들은 자신 안에 있는 어떤 것을 선한 것으로 발전시켜 나가는 진화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어떤 것이 하늘가는 길을 걷고 있는 그리스도인의 참 경험일까?





독수리를 알아야 독수리를 잡는다





“입에서 나오는 것들이 마음에서 나오나니 이것이야말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적질과 거짓 증거와 훼방이니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요.”마태복음 15:18~20. 겉으로 나타나는 열매의 출처는 마음이다. 마음 속에 그리스도의 영이 함께 계시면 자연스럽게 성령의 열매가 맺히지만, 사납고 비열하며 이기적인 독수리 같은 본성이 살아서 우리를 지배하면, 독수리와 같은 말과 생각과 행동을 하면서 살게 된다. 독수리를 죽이기 위해서는 먼저 독수리를 잡아야 하는데, 독수리의 본성을 잘 이해해야만 그것을 잡을 수 있다. 독수리를 잡기 위해서는 먼저 독수리가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싫어하는지를 알아야 한다. 우리는 독수리가 죽은 시체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독수리는 참새나 비둘기 같으면 전혀 관심도 갖지 않은채 지나쳐 버릴 죽은 송장에게 침을 흘리며 달려든다. 왜 그럴까? 왜냐하면 그는 독수리이기 때문이다. 독수리는 바로 그러한 본성을 가지고 있는 동물이다. 그는 신선한 과일이나 야채나 곡식보다는 썩어서 냄새가 나는 죽은 시체를 좋아한다.

한번은 어떤 사람이 독수리를 잡아서 그것의 태도와 습관을 잘 길들여서 온순한 동물로 변화시키려고 애쓰고 있었다. 그는 먼저 독수리가 들어갈 만한 커다란 새장을 만들어서 그 속에 독수리를 넣었다. 그리고 먼저 독수리의 식생활 습관을 변화시키려고 날마다 사과, 오렌지, 바나나 등을 주었다. 독수리는 여러 주일 동안 주인이 주는대로 잘 받아 먹다가, 어느날 새장 한 구석에 구멍이 뚫려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재빨리 그 구멍을 통해 날라가 버렸다. 독수리는 하늘 높은 곳에 떠있다가, 죽어서 쓰러져 있는 당나귀를 발견하고는 쏜살같이 내려가 작고 빨간 혀를 날름거리면서 맛있게 뜯어 먹었다. 주인은 독수리를 위하여 훨씬 더 선하고 아름다운 생활을 준비해 두었지만, 독수리는 자신의 옛 습관을 결코 바꾸지 않았다. 왜 그럴까? 그것은 그가 독수리이기 때문이다.





비둘기가 되어야 비둘기처럼 살 수 있다





사랑하는 형제들이시여, 우리는 우리 자신 속에 독수리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우리 자신이 가지고 있는 독수리 같은 본성의 형편을 정확하게 이해해야만, 참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는 길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한동안 비둘기와 함께 먹이통 곁에 앉아 있을 수 있다. 또한 비둘기와 함께 어울려서 주인이 주는 모이를 먹고 놀기를 좋아하는 것처럼 흉내낼 수 있다. 그러나 그 주인이 우리를 지켜보지 않거나, 누군가가 우리 곁에서 지켜보지 않는다는 사실을 느끼게 되면, 가차없이 독수리의 근성을 있는 그대로 나타내어서 주변에 있는 비둘기들에게 날카로운 발톱과 부리를 들이댄다. 바로 그 때, 곁에서 우리를 지키고 있던 천사는 눈물을 흘리며 우리가 다시 독수리로 돌아간 사실에 대해서 하늘 왕께 보고서를 기록하게 된다.

바로 이것이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경고하셨던 말씀이다. “네가 진정으로 회개하여 새로 거듭나지 않는다면, 너는 곧 매우 두려운 일을 당하게 될거야. 그러니 너는 깨어서 기도해야 한다. 너는 깨어 있어야 해!” 주님의 당부에 대해서 베드로는 이렇게 대답했다. “주님, 걱정하지 마세요. 다른 사람들이 모두 당신을 버리고 갈지라도 저는 끝까지 따르겠습니다.” 그러나 위기가 오자, 베드로는 닭이 두번 울 때, 세번이나 부인하고 말았다. 그렇다면 베드로가 주님께 의도적으로 거짓말을 했단 말인가? 아니다. 적어도 베드로는 정직하게 말했다. 그는 정말 주님을 끝까지 따르기를 원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 속에 숨어 있는 독수리의 참 모습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렘 17:9. 여러분들은 여러분 자신의 마음을 알고 있는가? 예수께서 여러분 자신의 마음을 아시고 있는 것처럼 정확하게?

우리의 죗되고 이기적인 본성은 시간이 지나면서 차차 나아지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체면과 위선이 좀더 완벽한 가면을 만들어 내는 것일 뿐이다. 독수리는 그가 살아 있는한 언제까지나 독수리일 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어린 양같은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을까? 그것은 우리가 어린 양으로 다시 태어나는 방법 밖에는 없다. 그것이 유일한 방법이다. 독수리를 길들여서 어린 양 흉내를 잘 낼 수 있게 훈련시키는 그러한 신앙을 가지고 있는한, 우리는 적당한 때가 되면 다시 독수리의 기질을 유감없이 발휘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독수리인 우리는 어린 양으로 새롭게 다시 태어나는 경험을 해야만 하는 것이다. 이러한 거듭남의 경험이 없이는 참된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시작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거듭나지 않은 그리스도인은 좀더 완벽하게 위장된 가면과 위선 속에서 이웃과 가족을 속일 뿐 아니라, 결국에는 자신마저 기만하는 깊은 늪에 빠지게 된다.





독수리를 죽이는 방법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거듭날 수 있을까? 유일한 방법이 있는데, 그것은 독수리를 죽이는 것이다. 성경은 우리에게 그 죽음의 모본을 보여주고 있는데,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다. 예수께서 돌아가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못박히셨던 것처럼, 우리의 자아도 십자가에 못박혀야만 한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여 함이니” 라고 말했던 것이다(롬 6:6). 그분의 죽음은 우리 모두가 동참해야 할 죽음을 보여주고 있다. 우리의 죗된 자아 즉, 독수리의 본성은 십자가에 못박혀야 한다. 그러나 십자가의 죽음은 매우 처절하고 고통스러운 것이다. 우리 속에 있는 독수리가 원하는 것을 주지 않음으로써 배고픔으로 허덕이게 해야 하며, 외쳐대는 그의 요구를 거절해야 하는 결단이 필요하다. 그러나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자아를 죽일 수는 없다. 오직, 그리스도를 바라봄으로써 이 일이 가능하게 된다. 그리스도의 생애와 그분의 죽음을 바라볼 때, 우리 속에서 그분의 희생을 통하여 이루어진 용서와 구원에 대하여 깊이 감사하는 정신이 샘솟게 되며, 동시에 그분처럼 의롭고 경건하며 거룩한 생활을 살고자 하는 소원이 우리의 마음을 채우게 된다. 우리 속에서 생긴 이러한 전격적인 변화는 하늘의 능력에 의해서 이루어진 마음의 재창조인데, 이러한 변화를 날마다 경험하는 그리스도인만이 자신 속에서 올라오는 독수리의 요구를 거절하고 자아를 십자가에 못박을 수 있다. 독수리의 요구에 대해서 “안돼”라고 대답하는 거절이 우리의 생활 속에서 계속해서 이루어질 때, 드디어 독수리는 점점 세력을 잃고 죽어가게 된다. 전에는 커다란 유혹으로 느껴졌던 시험이 이제는 아무런 유혹거리가 되지 않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독수리가 우리를 지배하는 힘을 잃어 버렸기 때문이다.





가장 위험한 두가지 오해





사랑하는 형제 자매들이시여, 독수리와 그리스도인 사이에서 벌어지는 대쟁투는 평생을 통하여 계속되는 경험이다. 오늘의 승리가 내일의 승리를 약속해 줄 수 없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자신의 경험을 간증하면서, “나는 매일 죽노라” 라고 말했던 것이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혼돈하고 있는 한가지 경험이 있는데, 그것은 거듭남에 대한 경험이다. 하나님께 마음을 바치고 진심으로 회개하는 그리스도인에게, 하나님께서는 새로운 마음을 주신다. 그러나 그러한 경험을 한 후일지라도, 때때로 자신 속에서 올라오는 옛 본성으로 인해서 당혹감을 느끼게 된다. 이러한 경험이 반복됨에 따라서,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헌신과 회개를 받지 않으셨다고 오해하게 된다. 그리하여 그들은 실망과 좌절 속에서 방황하다가 참된 그리스도인의 길을 떠나고 만다. 옛 본성의 요구에 굴복하는 죗된 생애를 살다보면, 결국에는 성경의 진리를 자신의 죗된 경험에 맞추어서 철저하게 합리화 시키게 된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는 일단 한번 거듭난 그리스도인은 정죄하지 않으시며, 한번 구원받으면 그 구원은 그 생애가 어떠하던지 간에 결코 잃어버릴 수 없다는 위험천만한 결론을 내리게 된다. 대개 이러한 결론을 내린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두가지 주장을 하게 된다;





1. “십자가에서 율법이 폐하여 졌습니다” : 그리스도께서는 인류를 향하여 율법이 요구하는 죄의 값을 완전하게 치루시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다. 십자가는 죄를 범해도 좋다는 허가증이 아니라, 죄가 요구하는 댓가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를 보여줌으로써, 인류에게 죄짓기를 중단하라는 그리스도의 피뭇은 호소이다. 십자가는 율법을 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율법의 권위와 그 의미를 완전하게 세우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던 것이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 마 5:17.





2. “한번 구원받았으면 영원히 구원받은 것입니다(Once saved, Always saved)” : 옛 본성의 요구대로 살아가는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경험을 성경적으로 정당한 것으로 합리화시키려고 한다. 그래서 과거에 한번 받은 구원은 어떠한 경우에도 잃어 버릴 수 없으며, 심지어는 구원을 거절할 수도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구원은 날마다 유지되고 지켜져야 한다. 어제 구원받았다고 할지라도, 오늘 내가 그리스도와 그분의 진리를 거절하면, 구원은 더 이상 나의 것이 될 수 없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한번 구원받았으면, 나의 믿음과 생활이 어떻하든지간에 무조건 구원받게 된다” 는 가르침을 믿고 있다. “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하는 자는 하늘에 들어오지 못”한다는 사도 요한의 경고를 무시하지 말라(계 21:17). 구원은 과거에 이루어진 한순간의 결정에 의해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하라. 한번 결정한 후에도,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서 계속 성장해 나가는 일이 필요하다. 한번 거듭났다고 할지라도, 옛 본성의 요구를 계속해서 거절하는 선택이 필요하다. "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롬 6:16.


다시 이야기를 계속해 나가자. 그렇다면, 진실한 그리스도인이라고 할지라도 죄를 지으려는 충동을 느낄 것인가? 그렇다. 왜 그런가?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 기 때문이다(갈 5:17). 거듭남을 경험한 후일지라도, 육체의 소욕 즉 옛 사람(독수리의 본성)이 우리 속에서 계속 부르짖기 때문이다. 그것은 사과나 당근처럼 유익하고 선한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그것은 언제나 무엇인가 썩고 부패한 것을 원한다. 비록 독수리가 그러한 것들을 강력하게 요구한다고 할지라도, 놀라거나 실망할 필요가 전혀 없다. 왜냐하면 유혹과 충동을 느끼는 자체는 죄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 유혹에 굴복하여 그것이 요구하는 바에 따라서 끌려다니기로 선택할 때, 바로 그 순간에 죄는 성립된다. 밖으로부터 다가오는 유혹과 우리 속에서 그 유혹에 굴복하라고 종용하는 독수리의 요구에 대하여, 우리가 굴복하느냐 아니면 거절하고 승리하느냐가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는 관건이다. 그런데 성경은 오직 새롭게 거듭난 자들만이 승리할 수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는 사실을 주목하라.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날마다 마음을 그리스도께 바치고 독수리의 요구를 거절하기로 선택해야만 한다.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





조금 다른 각도에서 이 문제를 다시 살펴보자. 그리스도인의 마음 속 이 쪽에는 십자가가 있고, 저 쪽에는 마음의 보좌가 있다. 우리가 마음의 보좌에 그리스도를 앉도록 모신다면, 옛 사람 즉 독수리 같은 본성은 십자가에 못박히게 된다. 시험과 유혹이 접근해 왔을 때, 우리가 예수께 대하여 “예”라고 대답한다면, 자신 속에 있는 독수리에 대해서는 “안돼”라고 대답하는 것이 되는데, 바로 이것이 그리스도인이 매일 경험해야 할 생애이다. 그러나 너무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께 대하여 “예”라고 말하면서, 동시에 독수리의 부르짖음에 대해서도 “예”라고 대답하고 있다. 그들은 십자가에는 어떤 것도 못박으려고 하지 않는다. 공개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못박지는 않지만, 독수리 역시 못박아 죽이려고 하지 않는데, 그러한 사람들이야말로 뜨뜻미지근한 라오디게아 교인들로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마음 속에 독수리와 예수님과 세상을 함께 모시고 살기를 원한다. 그러나 참된 그리스도인이란 자신의 마음 속 보좌에는 오직 예수님 한분만 모시며, 십자가에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독수리 같은 본성을 못박는 사람을 의미한다. 바로 이런 사람만이 승리의 생애를 살 수 있다.

십자가에 못박힌 독수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자신을 놓아달라고 소리치고, 협박하는 것일 뿐이다. 못박힌 독수리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달라고 요구하며, 자신이 원하는 곳에 가라고 부르짖고, 자신이 범하기 원하는 죄를 범하라고 졸라댄다. 자신의 날개와 발에 박힌 못을 빼달라고 애원하며 절규한다. “나를 풀어 주세요! 잠시 풀어 놨다가 다음 주에 다시 못박아도 되쟎아요!” 못에 박힌 독수리는 항상 논리적으로 우리 자신을 설득하려고 애쓴다. 이러한 논리에 휘말린 그리스도인은 오늘은 독수리를 못박았다가 내일은 풀어주는 생활을 되풀이 하면서, 독수리의 요구에 끌려 다니는 피곤한 신앙 생활을 하게 된다. 그러다가 결국에는 “내일이면 또 독수리를 풀어줄텐데” 라는 생각 때문에 독수리를 십자가에 못박는 일을 중단하게 된다. “어차피 다시 풀어줄 독수리를 구태어 힘들게 못박을 필요가 어디있나?” 라는 논리에 휘말리게 된다. 그러나 우리가 독수리를 십자가에 못박는 일을 중단하는 순간,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박기 시작하게 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자아가 죽는다는 말의 의미




이제, 죽음에 대한 이야기로 다시 돌아가자.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 죽은 ... 자로 여길지어다.” 롬 6:11. 여기서 우리는 “여길지어다(consider)” 이라는 말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여길지어다” 라는 말에는 “꼭 그러한 것으로 간주하라” 는 뜻이 담겨 있다. 아마 여러분 중의 어떤 분은 이렇게 항의할 수 있을 것이다. “조금 전에는 죽어야 한다고 말해 놓고서, 이제는 죽지 않았지만 죽은 것으로 여기라고 말하는 것입니까?” 그렇다. 아직 살아 있지만, 죽은 것으로 여기라는 것이 성경이 말하는 바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육체는 예수께서 재강림하시는 그 날까지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기 때문이다.

옛 본성이 십자가에 못박혔을 때, 옛 본성의 손과 발이 십자가에 못박혀 있기 때문에, 그것이 원하는 어떤 것도 이룰 수 없다는 의미에서 죽었다고 말하는 것이지, 그것이 어떠한 것도 요구하지 못하거나 부르짖을 수 없는 상태로 되었기 때문에 죽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오늘날 수많은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이 절제와 극기의 생활을 하고 있지만, 사도 바울이 말한“죽은 것으로 여길지어다” 의 의미를 오해하거나 깊이 생각하지 않음으로써, 열심을 잃어버리고 실망하여 뒤로 후퇴해 가고 있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영감적인 기록에 깊은 주의를 모아야 할 필요가 있다. “진실한 그리스도인이라고 할지라도 죄를 지으려는 충동을 느끼게 되는데, 이는 육체의 소욕이 성령을 거스려 싸우기 때문이다. 마음 속에서 성령과 육체 사이에서 벌어지는 대쟁투는 쉼이 없는 투쟁인데, 그리스도의 도우심이 필요되는 곳은 바로 여기이다.” Messages To Young People, 114.




독수리의 요구를 거절하라




우리 속에 항상 독수리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면, 자신에 대해서 결코 자부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우리 속에서 냄새를 피우고 소리를 지르고 있는 독수리의 모습을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바로 그것이 나의 진짜 모습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우리가 자신의 그런 추한 모습을 보면서 자신에 대해 실망하고, 미워하며, 불신하게 될 때, 우리는 비로서 진정으로 선한 어떤 것을 사모하게 되는데, 바로 이 때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리라” 라는 말씀이 우리 안에서 이루어지기 시작한다. 우리는 우리의 마음 속에서 들려주시는 비둘기 같은 성령의 음성과 독수리의 요구를 동시에 받아들일 수 없다. 한 음성에 순종하면, 다른 하나는 자동적으로 거절하게 된다. 우리의 마음 속에는 두마리의 새가 있다. 하나는 죗된 옛 본성을 상징하는 독수리이고, 다른 하나는 성령의 역사를 상징하는 비둘기이다. 우리가 비둘기를 사랑하여 비둘기를 기르기로 선택하였다면, 우리는 비둘기에게만 먹이를 주어야 한다. 반면에 독수리는 굶겨야 한다. 우리는 독수리와 비둘기에게 동일한 먹이를 줄 수 없다. 왜냐하면 비둘기는 죽은 시체나 썩은 고기는 전혀 먹을 수 없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성령님과 독수리같은 본성을 동시에 만족시킬 수 없다. 우리는 하루를 사는 동안에 어떤 먹이를 선택하며 살아가고 있는가? 우리가 텔레비젼 속에서 튀쳐나오는 각종 썩은 것들을 즐겨 받아 먹을 때, 그리고 각종 책이나 잡지에서 더럽고 추악한 사상들을 즐겨 받아 먹을 때, 독수리는 먹이를 찾은 환희의 소리를 크게 지르며 “바로 이것이 내가 기다리고 원하던 것이야! 좀더 자극적이고, 더러운 것들로 나를 즐겁게 해달라!” 고 외치면서 달려드는데, 이런 경우 우리는 힘없이 독수리의 요구에 굴복하게 된다. 독수리와 비둘기는 우리가 주는 먹이에 비례하여 성장한다. 만일 우리가 독수리가 좋아하는 먹이로 마음과 생각을 가득 채우면, 독수리는 에너지를 얻어서 더욱 활개를 치면서 우리를 자신이 원하는 바대로 끌고 다닐 것이다.

우리는 독수리의 요구를 거절할 때에 매우 단호하게 해야 한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어정쩡한 모습으로 독수리에게 끌려다니고 있다. “독수리야, 안돼! 나는 그 사람에게 복수하기 싫어. 그렇지만 그를 은근히 다른 사람들의 눈에 뜨이지 않게 괴롭힐 수는 있지. 독수리야, 나는 결코 네가 원하는대로 그 사람의 뺨을 치지는 않을 거야. 그러나 그의 약점을 아프게 건드림으로써 그를 괴롭힐 수는 있지.” 얼마나 많은 경우에, 이러한 모습으로 독수리와 타협하고 있는가?

우리는 자신을 하나님께 드린 후일지라도 우리 속에 숨어 있는 독수리의 근성이 그리스도인 생애를 괴롭힐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분명히 이해해야 한다. 우리 속에서 독수리가 다시 머리를 쳐들고 부르짖는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우리가 회개하지 않았다는 증거가 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이해해야 한다. 단지 그것은 독수리의 근성이 여전히 내속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입증할 뿐이다. 그러나 우리는 참된 회개를 통하여 독수리의 근성이 우리를 주장하거나 장악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능력을 하늘로부터 공급받을 수 있다. 참된 회개는 독수리를 못박아서 가두어 놓는다. 비록 독수리가 못박혀지고 가두어진채로 우리에게 자신이 원하는 바를 부르짖을지라도, 그 소리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는 없다. 독수리를 죽은 것으로 여기고, 그리스도인의 삶을 힘차게 살아가면 된다. 독수리의 요구를 거절하거나 무시하기로 선택하고, 비둘기 같은 성령님의 호소에만 귀를 기울이는 삶을 살아갈 때, 드디어 독수리는 십자가에 못박힌채 피를 흘리면서 굶어 죽게 된다. 힘을 잃고 굶어 죽어가는 독수리의 절규와 애원을 추호도 동정하지 말라


“죄가 너희 죽을 몸에 왕 노릇하지 못하게 하고 ... 너희 지체를 ... 하나님께 드려라.” 로마서 6:12~13. 사랑하는 형제 자매들이시여,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우리 속에 계신 비둘기 같은 성령의 속성을 살찌우게 하자. 독수리는 십자가 형에 처하고, 오직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영광만이 나타날 수 있도록 믿음으로 전진하자.






자아가 죽는다는 의미





그대가 소홀한 취급을 받거나 의도적으로 따돌림을 당할 때,

화내거나 맘 상함 없이 온유함을 유지하고

그것을 가치있는 고통으로 여기면서

상대방을 웃음으로 대하기로 결심한다면,

그것이 자아를 죽이는 것이다.




그대가 어떤 어려움, 어떤 귀챦음,

어떤 성가심을 이웃으로부터 받고 있을 때,

예수께서 보여주셨던 사랑스러움과 유쾌한 분위기를

이웃에게 계속 선물할 수 있다면,

그것이 자아를 죽이는 것이다.




그대가 어떤 음식, 어떤 외로움, 어떤 직업, 어떤 의복, 어떤 지위,

어떤 방해 하에서도 겸손한 만족과 평안함을 누릴 수 있다면,

그것이 자아를 죽이는 것이다.




그대의 최선의 노력이 오해받고 잘못 전달됨으로서

그대의 소원이 좌절되고,

그대의 충고는 무시되고, 그대의 의견이 비웃음을 당할 때,

그대의 마음 속에서 솟구치는 분노와 억울함을 부인하고

그리스도께서 받으셨던 억울함을 생각하면서

그대의 경험을 자신에게 꼭 필요한 교훈으로 생각할 수 있다면,

그것이 자아를 죽이는 것이다.




가장 혹독한 시련과 형제의 냉정하고 가혹한 대우로 인하여 생긴 가장 암울하고

우울한 감정이 그대의 영혼을 엄습할 때,

힘찬 찬미를 부르며 오히려 슬픔과 낙담에 빠져있는 가족과 이웃을 위로할 수 있다면,

그것이 자아를 죽이는 것이다.




그대가 그대보다 부족해 보이는 사람으로부터

책망과 충고를 받았을 때,

그대의 육체로부터 치밀어 오르는

자존심과 반발심과 고집을 슬픔의 눈으로 내려다 보시는

그리스도께 도움을 청하는 긴급한 기도를 드린 후,

감사와 겸손으로 그것을 받아들인다면,

그것이 자아를 죽이는 것이다.




그대가 인생의 황혼기에서 자신의 영혼을 압도하는 듯한

죽음의 그림자와 외로움과 서러움을 힘있게 밀쳐버리고,

오히려 연약하고 우유부단한 젊은 자들을 꾸짖으며,

그들에게 진리를 위하여 자신의 온 힘과 정력을

불사르는 모습을 보여줄 수 있다면,

그것이 자아를 죽이는 것이다.




그대가 인생의 청장년기에서,

이기적인 경쟁심과 그대를 자극하고,

물질에 대한 욕망이 그대를 사로잡으려고 으르렁거리며,

세상이 주는 유혹이 그대를 압도하려고 할 때,

또한 그대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그런 것들을

즐기면서 아무런 문제없이

그리스도인의 신앙을 유지하는 것처럼 보일 때,

그대가 그대의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을 무시하고

오히려 진리를 위하여 가난해지고

고난을 당하며 그 가운데서

참된 평화와 행복을 발견하기로 선택한다면,

그것이 자아를 죽이는 것이다.




그대의 타락하고 이기적인 본성으로부터 날마다 솟구쳐 올라오는

죗된 욕망과 절규를 무시하고 날마다 하늘의 거룩한 법을

순종하기로 선택한다면,


바로 그것이 자아를 죽이는 것이다.




현대기독교음악(CCM),어떻게 볼 것인가? jesus recovers us

현대기독교음악(CCM),어떻게 볼 것인가?

 

현대 기독교 음악을 보는 서로 다른 시각들

CCM의 역사

북악골에 울리는 CCM

국내 CCM의 현실과 전망

"얼마전 미국 LA에서 활동하는 교포 찬양팀의 공연을 보았습니다. 20대가 되지 않은 듯한 멤버들의 옷이나 머리모양 등은 `서태지와 아이들'의 것과 비슷했고, 새로운 시도라는 그 팀리더의 소개 후, `랩음악'이란 것을 영어로 했는데, 모자는 거꾸로 쓰고, 뛰면서 정말 한바탕 하는 것 같았습니다. 문화적 차이라는 것을 염두에 둔다하더라도, 대부분 그곳에 참석한 사람들에게는 그 시간이 하나님을 사모하는 것보다는 그들을 구경하기에 여념이 없었다고 하는 것이 옳은 표현일 것 같습니다." (대구에서 김은경,회사원)

"악기나 믹서기도 다룰 줄 모르는 것 같은데 자꾸 드럼이랑 신디사이저를 사달라고 해서 골칩니다. 찬양예배 드린다면 좋긴 좋지만 원, 그 놈의 소리 정신 사나와서..." (나현석,B교회 장로)

"예배 음악은 하나님을 향해 하나님께 드려지는 음악입니다. 따라서 인간을 향한 복음성가는 예배의식을 위한 음악이 아닙니다. 요즘 복음성가라 하기보다는 종교가요가 많은데 이같은 음악은 예배 제단에 놓여 질 수 없는 세속화된 것들입니다." (김호림,A음악 선교원장)

"요즘 복음성가의 형태는 히피족들의 오락적 또는 오락의 록음악을 본따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젊은이들에게 많은 환영을 받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신앙에서의 환영이라기 보다는 오락적인 면에서 환영받는 것이 아닐까요?" (전이숙,K교회 집사)

현대 기독교 음악. CCM이라고도 불리우는 요즘 복음성가에 쏟아지고 있는 우려의 목소리다. 과연 이러한 우려와 염려들은 얼마만큼 정당한 것일까? 70년대 청년기를 거친 사람은 알겠지만, 그 당시 `기타는 사탄 의 악기'이기 때문에 그것을 치고 다니는 사람은 죄인, 혹은 불량청년 취급을 받았던 적이 있었다.

그러나, 기타는 이제 장년 예배는 아니더라도 청년들의 예배에는 너무도 당연한 필수악기가 되었다. 우리나라에서 가스펠이 불려지기 시작한 것은 60년대 말. 당시에는 주로 '69년 처음 활동을 시작한 정신노래선교단처럼 피아노 반주의 합창 스타일이었고, 그러다가 70년대 들어서 기타반주의 중창이나 그룹사운드 스타일의 팀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이때는 주로 미국의 가스펠을 번역해서 불렀고 연주 분위기는 대체로 포크(Folk)나 컨트리(Country) 스타일이었다. 80년대 들어서는 우리나라 현대 기독교 음악에 획기적인 선을 그은 주찬양 선교단이 창단된다.(81년도) 그때까지의 선율 위주의 작곡 및 연주경향에서 탈피, 당시로서는 과감한 리듬과 화성을 이용하여 가사 전달을 더욱 효과적으로 만든 것.

그 뒤 80년대 중반, 더욱 대중적인 스타일의 최인혁과 박종호가 등장했고, 이어 '87년에는 사건이라면 사건일 수 있는 두란노 경배와 찬양이 시작되어 한국 교회에는 찬양예배의 일대 열풍이 일어나게 된다.

90년대 들어선, 일반인들에게는 쉽게 다가갈 수 있는 대중가요 스타일의 노래들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복음가요 대중화의 선두주자라 할 수 있는 하덕규. 뛰어난 외모와 가창력으로 `한국의 에미 그란트'라는 평을 듣고 있는 김선경. 그리고 최근 가스펠 음악을 낸 `015B' 마저도이 계열의 주인공들.

이 외에도 국악찬송, 어린이 랩찬송, 기독교 노래운동 등 다양한 시도들이 현재 이 땅 위에서 진행되고 있다. 그렇다면 이렇게 다양한 시도들을 어떻게 봐야 할 것인가? 이에 대하여 하덕규(복음성가 가수. 기독교방송 `가스펠 아워' 진행자)는 "록과 헤비메탈도 수평적인 의미에서 볼때 때에 따라서는 전도의 수단으로 사용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렇지만 미국에서 록과 헤비메탈은 교회 내에서 연주되는 예배음악이 아니라 하나의 독특한 선교사역임을 그는 강조하고 있다. 반면 곽용화 목사(인천 한국중앙침례교회 음악목사)는 메탈에 심취한 사람들을 전도하기 위해 메탈의 옷을 입으며, 뉴에이지 음악에 심취한 사람들을 전도하기 위해 뉴에이지 음악의 옷을 입어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 이의를 제기한다.

즉, 그들의 의도는 좋지만 세상에 뛰어든다는 의미는 그것에 묻히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세상 사람의 거부반응을 감수하면서 세상 속에서 교회의 영역을 확보하고 복음으로 세상을 변화 시키는 것이지 무조건 그들의 옷을 입고 그들의 문화에 젖어드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둘 다 맞는 말일까? 아니면 어느 한 쪽이 옳고, 한 쪽이 그른 말일까? 우문이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유사 이래로 기독교는 세속화의 길을 걷고 있다는 사실이다.(`세속화'라는 말이 부정적 의미를 풍긴다면, 이것을 `현대의 옷을 입은', '좀더 대중에게 접근된'이란 표현으로 바꾸어도 좋을 것이다.) 베드로의 환상(사도행전 10:13) 이후 당시 교회가 배척했던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한 것도 그렇고, 독일어로 성경을 번역하면서 시작된 루터의 종교개혁 역시, 엄밀한 의미에선 기독교의 세속화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현대 기독교 음악 역시, 이러한 세속화의 발로라 생각된다. 박정관 목사(충신교회 음악목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컨템퍼러리의 정신은 동시대를 사는 사람들과의 커뮤니케이션입니다. 그 형식이 우리 고유의 것이든 외래적인 것이든 오늘을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모든 것을 나누려는 마음이 거기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말도 많은 현대의 기독교 음악들. 저마다의 시각 차이가 있어 방향을 잡기가 쉽지 않았지만 발전과 성숙, 화합과 일치를 위해 우선 몇 개의 가닥이라도 잡아야 하지 않을까 싶어 특집을 꾸며 보았다.

(편집부)

<특집 1> 현대 기독교 음악을 보는 서로 다른 시각들

의견 1 - "나는 록을 정죄하고 싶지 않습니다."

"전 개인적으로 크리스천 록그룹 페트라의 팬입니다. 록과 메탈 찬양을 반대하시는 분들께 제가 그들의 테잎을 보내드리고 싶군요. (편지로 주소를 알려주시면...) 아니면 사서 들으시던가... 여의치 않으시면 매 주일 저녁 10시부터 기독교방송국(AM 837KHz)에서 하는 `가스펠 아워'를 들어 보시라고 권하고 싶군요.

TV를 원하시면 매주일 아침 8시경에 (매주 달라짐) AFKN에서 CCM뮤직비디오를 방영합니다. 제목이 리얼 비디오인가 리얼 뮤직인가 할겁니다. 록과 메탈에 대한 찬반이 물론 미국에서도 초창기에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랩까지 있지요. 허상에 대한 공격과 반발. 이건 참 위험하다고 생각합니다. 실체를 접하지 않고 피상적인 지식으로 비판한다면 우리는 혹 귀중한 것과 단절되는 손해를 보게 되지 않을까요?

미국에서도 크리스천들이 하는 록은 화이트 록이라고 부르고 그 밖의 사람들이 하는 록을 블랙 록이라고 한다더군요. 안 믿는 DJ들이 그렇게 구분할 정도로 다르답니다. 그 풍기는 분위기가요.

그리고 어떤 분이 미국에 가서 라디오를 틀어 보니까 거긴 기독교 계통의 라디오 방송만 해도 몇 백 개가 될 정도로 방송이 많은데 주파수를 이리저리 돌려 보며 들으면 가사를 확실히 안 듣더라도 똑같은 스타일의 록이고 메탈이고 랩인데 아, 이건 기독교구 저건 아니구나를 느낄 정도로 그 느낌이 이상하게 다르더랍니다.

어느 분이 그러시더군요. 크리스천이 세상을 포기하면 세상은 그만큼 더 빨리 사탄의 손에 넘어간다 라고요. 록을 정죄하고 넌 안돼 하는 순간 하나님은 잃으시는 것이고 사탄은 얻는 것 아닐까요? 다음에 인용하는 누군가의 말은 이시대, 문화를 생각하는 젊은 마음과 열린 사고를 하는 크리스천들이 가져야 할 자세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자! 우리 같이 먹읍시다. 돼지고기도 먹고, 온갖 부정한 것을 먹읍시다. 먹읍시다. 먹자고요. 자, 하나씩 드세요. 이 두더지 바베큐는 중석님이 드시고 도마뱀 뒷다리는 동원님이 드세요. 은목님, 여기 낙타 곱창 있 어요! 정한님은 무얼 드릴까? 음...악어 족발이 좋겠군요. 태식님. 거~ 부엉이 똥집 혼자만 먹지 마시고 옆에서 침흘리고 계신 찬희님하고 같이 좀 드세요. 히히히...난 숨겨 놓은 박쥐 말린 거 구워서 몰래 먹어 야지... 물론 현신님에게만 특별히 쬐금 나눠 드릴께요. 흐흐.(식전이신 분에게는 죄송합니다.) 거룩하고 구별된 것은 나이 드신 장로님, 목사님들이 드시라고 하고 우리 젊은이들은 주님이 깨끗하다고 선언하신 온갖 부정한 것들을 먹읍시다.

자...이젠 보자기가 보입니까?

(이태원/Hitel CCMG동호회 주제토론장에서)

의견 2 - "크리스천 록이 괜찮다구요?"

크리스천 록을 좋아하시는 분께 한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록음악에 사탄이 깊이 관여하고 있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계시리라 생각됩니다. 그런데 그런 록음악을 신실한 크리스천이 연주한다면 문제가 될 게 없다고 하더군요. 하나님이 모든 것을 선하게 창조하셨다는 생각. 전적으로 동감입니다.

그러나 도적질을 신앙 좋은 기독교인이 했다고 해서 도적질이 아닐 수는 없겠죠. 록음악은 비트가 강한 것으로 이러한 음악을 오래 듣게 되면 우리 신체의 모든 근육 활동을 약화시킨다는 실험 결과도 있습니다.

요즘 TV나 라디오 뿐만이 아니라 음식점, 커피숍, 상점, 버스, 전파사 등 전파매체가 있는 곳이면 어디서든 록음악을 들을 수가 있죠. 그런데 이러한 록음악의 생활화(?)는 청소년들의 심성을 변화시켜 인내심이 없어지게 하거나 정서 불안의 행동을 유발시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제 그들은 록 스타일에 익숙해져서 그 외의 음악에는 관심 조차 보이질 않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이제 교회에서는 밤무대나 TV 쇼프로에서나 볼 수 있었던 전자기타, 키보드, 드럼 등이 무슨 유행처럼 사용되고 있습니다. 뭔가 쿵쿵대야 은혜가 있는 걸로 착각한 결과입니다. 크리스천 록음악이 가지는 음악적 특성 중에서 눈에 띄는 것은 과도한 싱코페이션 (당김음,Syncopation)의 사용입니다. 이는 악곡의 변화와 긴장감의 증대를 위해서 주로 사용하는 것인데 이것에 대한 쾌감이 있다고 과도히 사용한다면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일에 효과적이며, 반응이 빨라 말씀보다, 성령의 일하심보다 능동적이어서 은혜의 경험이 감정적이고 인간중심적으로 이루어지며, 일시적이어서 지속성이 없거나 약하게 되는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 크리스천 록음악에서는 불협화음이 과도히 사용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불협화음은 그 자체에 악센트가 있어서 자극제 역할을 하기 때문에 이의 과도한 사용은 자극, 그리고 불안감을 유발시킬 가능성을 충분히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또 빼놓을 수 없는 것은 과도한 전자음과 드럼의 사용이죠. 록음악에서 드럼의 지속적 사용은 말초신경을 자극하는데 최고의 효과가 있는 것입니다. 60db(데시벧. 소리의 강도를 나타내는 단위) 정도면 청각에 손상이 오지 않는다고 하는데 록음악의 강도가 보통 100db인 것으로 볼 때, 록음악이 인간들의 정신건강에 미치는 악영향은 매우 심각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 음악으로써 좋은 음악은 성경적이어야 하고 경건해야 하며 서정적이면서도 종교적이어야 합니다.

크리스천 록음악은 노래를 하거나 듣는 자들에게 느낌과 사상이 급격히 와닿기는 하나 가볍고 일시적이죠. 반면, 크리스천 클래식 음악(Christian Classic Music)은 노래하거나 듣는 자들에게 느낌과 사상이 서서히 와 닿습니다. 그만큼 깊이가 있고 지속적이죠. 우리 그리스도인은 역사가 가는 데로 끌려가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록음악이 유행할 때는 크리스천 록음악을 주장하고, 랩뮤직이 유행 하니까 크리스천 랩을 이야기하는 것은 너무 시대의 흐름에만 맞추는 행위라 생각합니다. 요즘 크리스천 록음악을 음악적 재료로 사용하고 있는 찬양예배들이 많이 있는데 이런 류의 찬양집회는 록음악이 가지는 특징처럼 급속히 확산되어 쉽게 수많은 청소년들을 사로잡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감정을 부추기는 록 음악의 비트로 인해 그 순간에만 뜨거워지는 냄비신앙을 양산하는 것은 아닌지 염려가 됩니다. 만일 찬양집회가 그 음악적 재료를 의식 있는 클래식 음악을 사용해서 경배와 찬양을 시도했다면 얼마나 귀한 일이었을까요.

물론 록음악을 사용했을 때 만큼 급속한 확산이 되지는 않았겠지만 그런 예배라면 그 음악 자체로도 신앙의 자세를 바로해주는 역할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한 Christian Classic 경배와 찬양이 곧 이루어질 것을 기대하며 ... 샬롬!

(장순일/시온교회 음악목사)

<특집 2> CCM의 역사

컨템퍼러리 크리스천 뮤직(Contemporary Christian Music - 이하 CCM)! 이젠 찬양문화에 관심있는 이들에겐 낯설지 않은 용어다. 하지만 체계적으로 소개되지 않아서인지 그 흐름을 한 눈에 파악하기란 어려운 일인 듯 싶다. 그래서 간단하나마 본고장이라 할 수 있는 미국 CCM의 역사를 정리해 본다.

새 노래,새 운동 CCM

전통적인 교회음악이 오늘날의 CCM으로 변화된 첫번째 시도는 1964년 미국 레이 랩이 카톨릭 교회에 포크(Folk)미사를 선보인 것. 파이프 오르간의 장엄하고 웅장한 곡만 연주되던 성당미사에서 가볍게(?) 울려퍼진 포크음악을 상상해 보라. 다시 베트남 반전운동이 극에 달한 1967년, 소위 `기성세대'라 불리는 세대에 모든 세대가 반항했던 그 시기로 가보자. 이 반전운동과 함께 일어난 미국의 반문화운동은 자유와 평화, 마약(LSD), 자유 연애, 그리고 록큰롤을 성스러운 것으로 삼았는데, 이 운동은 1969년 우드스탁 페스티벌에서 그 절정을 이룬다. 그러나 한편, 그러한 히피운동에 반대하는 대항문화가 일어나기 시작한 것. 반문화 히피운동이 내세운 자유와 사랑에의 약속은 결국 이루어지지 않았고, 그 안에서의 진정한 자기실현 역시 불가능함을 깨달은 환멸에 빠진 세대들 가운데 상당수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과 참 평안을 발견한다. 그리하여 참된 존재 가치를 발견한 이 젊은이들은 그들 세대의 언어로 새로운 스타일의 기 독교 문화를 만들기 시작한 것이다.

CCM의 성장기

1969년 래리노먼이 캐피탈 레코드에서 낸 `Upon this Rock'이라는 앨 범. 이 앨범은 정통 록음악에 신앙의 내용을 담은 혁명적인 것이다. 1970년대가 진행되면서 CCM은 기성 교회의 강한 반발과 라디오에서 거의 방송되지 않는 악조건에도 빠지지만 그 속에서도 계속 성장해 1978년 CCM계에는 큰 영향을 준 두 가지 사건이 일어난다. 하나는 CCM을 전문으로 다루는 잡지 `CCM'의 창간이고, 또 하나는 초대형 가수 에미 그란트의 등장이다. 특히, 에미 그란트는 백만 장 이상이 팔린 그의 앨범, `Unguarded'로 플래티넘 앨범을 수상, 전국적인 명성을 얻게 된다. 그녀 외에도 샌디 패티, 마이클 W.스미스, 마이클 카드, 트와일라 파 리스, 존 마이클 탈보트, 스티브 그린, 카 맨, 스티븐 커티스 채프먼, 필 케이기, 웨인 왓슨, 뉴 송 등이 CCM계의 선두주자로 80년대를 이끌었고 페트라, 화이트 하트 등도 크리스천 록을 성장시켜 나간다. 또한 스트라이퍼가 헤비메탈을 들고 크리스천 음악을 시도하고 화이트 크로 스, 샤우트 등 크리스천 메탈도 태동한다.

CCM의 성숙기

1980년대 중반부터 일반 팝의 흐름과 거의 대등한 흐름을 이어가는 CCM. 80년대 중반 스티븐 테일러가 뉴웨이브 스타일의 크리스천 뮤직을 선보인 이래로 CCM은 갖가지 다양한 쟝르의 음악 스타일을 인용한다. 크리스천 랩이 있는가 하면 크리스천 록, 포크, 재즈, 에어로빅 음악, 묵상을 위한 연주 음악 등등 이젠 그 종류가 다양해져 분류 조차 어렵게 된다. 한편 마라나타 뮤직이 성장시켜온 컨템퍼러리한 찬양은 호산나 인테그리티뮤직의 프레이즈 앤 워쉽 시리즈로 더욱 그 영역이 풍성해 졌고, 1986년에는 CCM이 대학의 정식 과목으로도 가르쳐지게 된다. 이제 CCM의 역사가 30년을 넘어서는 1990년대에는 CCM의 새로운 장이 열려 CCM 전문 TV가 생겨난다. 외적인 음악의 수준 또한 이제 일반 팝 음악계의 수준에 거의 도달했으며 그 내용면에 있어서는 악마주의, 쾌락주의로 얼룩져 있는 일반 팝음악의 대안으로 복잡한 현대 문화 속에서 효과적으로 진리를 전달할 수 있는 음악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제 마지막 때에 CCM이 일반 문화 속에 파고 들어가 선보다 악이 더욱 많은 일반음악계를 순화시키고, 궁극적 목표인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파해 수많은 영혼을 구하게 될런지, 아니면 CCM이 일반 팝음악이 추구하는 인기와 상업주의에 물들어 제구실을 다하지 못하고 도태되고 말 것인지 앞으로 본격적으로 전개될 CCM의 사역을 지켜보아야 할 것이다.

(양동복/기독교방송 `가스펠 아워' 담당PD)

'93년도 그래미상에 오른 CCM 가수들

Best Rock/Contemporary Gospel Album

Unseen Power, Petra

Best Pop Gospel Album

The Great Adventure, Steven Curtis Chapman

Best Southern Gospel Album

Sometimes Miracles Hide, Bruce Carroll

Best Traditional Soul Gospel Album

He's Working It Out for You, Shirley Caesar

Best Contemporary Soul Gospel Album

Handel's Messiah - A Soulful Celebration, Various Artists, Producer : Mervyn Warren

* Best Gospel Album By A Choir or Chorus - Edwin Hawkins Music & Arts Seminar Mass Choir - Recorded Live in Los Angeles, Music & Arts Seminar Mass Choir, Choir Director : Edwin Hawkins.

(* 그래미(Grammy)상 : 미국 레코드 업계에서 매년 수여하는 우수레코드 앨범상. 미국 제일의 규모와 권위를 가진 상으로 영화의 아카데미상에 비견된다.)

'93년 도브상 시상결과

SONG OF THE YEAR

"The Great Adventure" Steven Curtis Chapman

SONGWRITER OF THE YEAR

Steven Curtis Chapman

MALE VOCALIST OF THE YEAR

Michael English

FEMALE VOCALIST OF THE YEAR

Twila Paris

GROUP OF THE YEAR

4HIM

ARTIST OF THE YEAR

Steven Curtis Chapman

PRAISE & WORSHIP ALBUM OF THE YEAR

Coram Deo

(* 도브(Dove)상 : 미국 찬양계의 아카데미상이라 불리우는 상. 매년 4월경에 실시)

북악골에 울리는 CCM

"안녕하세요. 북악의 새아침에 유현경입니다." 매주 목요일 아침 맑은 목소리와 함께 CCM을 들려주는 여자가 있다.

맑은 날엔 호산나 프레이즈를, 조용한 날엔 필케익의 기타연주나 하덕규의 광야를, 그리고 또 어떤 날엔 페트라의 강렬한 곡까지 틀어주는 당찬 여자. 바로 국민대방송국의 유현경 아나운서다. "처음 시작할 땐 `설마 될까'하는 조바심뿐이었어요.

조심스레 기획안을 꺼내 봤는데, 의외로 선배님이 쉽게 허락하시더군요. 자료 구하랴, 멘트,선곡 직접하랴 애먹었지만 기독교 음악을 전한다는데 큰 보람을 느끼며 진행하고 있습니다." 사실 `선곡'은 가장 신경 쓰이는 부분. 기독교인들이야 "할렐루야. 아멘"이 나오는 찬양을 들으면 반가움 뿐이겠지만 일반인들은 어찌 그럴 수 있겠는가.

이때, 색깔이 약하면서도 의미 있는 가사에, 음악성까지 겸비한 CCM을 들려 주는 것. "마이클 카드의 `Sleep sound in Jesus'란 곡은 믿지 않는 사람들도 괜찮다고 호평을 하더군요. 사실 외국 CCM이야 어차피 못 알아들으니까(?) 별부담이 없이 틀어요.

그런데 015B 같은 경우는 이름 하나 믿고 내보는 거죠. `015B가 뭐 이런 앨범도 냈습니다'하면서 `두분을 축복해요', `날마다' 같은 복음적인 곡도 부담없이 틀어 봤습니다." 매주 목요일 아침 8시 30분. 이 시각에도 어김없이 무거운 가방을 메고 학교 언덕길을 헐떡이며 오를 학생들. 많은 헌신이 요구되는 학보사 나 종교, 봉사 서클보단 영어회화나 컴퓨터 등 자기에게 도움이 되는 동아리만 선호한다는 요즘 학생들은 과연 이 음악을 듣고 어떤 생각을 할까.

"엘샤다이 같은 메시지 있는 노래가 나갈 때면 제가 오히려 움츠러 들어요. 그래서 두 곡을 믹싱해 놓고 얼른 7층 창밖을 내려다 보죠. 학생들이 바삐 지나가긴 하는데 이 사람들이 듣고 과연 무얼 느끼는 건지... 전화 안 오는 거 보면 무관심한 건지도 모르죠." 찬송가나 복음성가가 교회 안에서 불려지는 노래라면 CCM은 교회 밖으로 찾아갈 수 있는 노래일 것이다.

자기 앞가림에 정신 없는 세대. 웬만한 광고에는 눈도 꿈쩍않는 세대에서 교회 밖의 언어로 일반인에게도 쉽게 다가갈 수 있는 CCM은 그런 점에서 교회가 이 세상에 휘두를 수 있는 사랑의 신종무기일 수 있다. "CCM이 비록 우리 정서에 맞지 않는 부분도 많지만 대중문화 정서에 더 길들여져 있는 요즘 젊은 사람들에겐 더 효과적이라 생각합니다.

이번 학기가 끝나면 프로그램 조정이 있는데, 2학기에도 계속 했으면 좋겠어요. 대를 이어서도 할 수 있도록 후배 양성도 해야 겠죠." 환히 웃는 여자, 유현경. 올 가을에도 북악골에는 CCM의 풍악이 울려질 지어다.

(취재,글/이익환)

<특집 4> 국내 CCM의 현실과 전망

성경의 본질보다 교리적 전통과 개인적 경험을 지나치게 강조한 한국 교회는 `예수'와 `그리스도'를 싸우게 했으며, 세계 교회사에서 찾아 보기 드물 정도의 괄목할 성장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숫자의 교단 분리를 가져왔다.

이와 같은 현상은 기독교 음악에서도 예외는 아니어서, 찬송가를 선호하는 기성세대와 복음성가를 선호하는 신세대간에는 극복하기 어려울 정도로 반목의 골이 깊어 가고 있다. 이러한 때에 CCM이라는 말이 등장함으로써 교회의 기성세대를 더한층 긴장시키는 반면 신세대들에게는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다.

우리는 앞에서 CCM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알아 보았고 찬성과 반대하는 주장도 들었 으므로, 국내 CCM의 현실과 성경적인 관점에서의 CCM의 내일을 전망해 보고자 한다.

가 국내 CCM의 현실

국내 CCM을 가수와 장르별로 나누어 보면 다음과 같다.

* 기성 가스펠 싱어: 이들은 기성세대들이 선호하는 은혜스런 간증 위주의 복음성가를 피아노나 오르간 등의 간단한 악기를 사용하여 노래하는 사람들로서 김민식, 민희라, 방주연, 손영진, 안철호, 윤용섭, 윤은 희, 이광희, 장욱조, 전용대, 최귀라, 최명자, 최미, 허림 등이 있다.

* 신세대 가스펠 싱어: 이들은 젊은이들과 호흡할 수 있는 현대적 음악 기법과 노랫말, 그리고 최신 전자 악기를 사용하여 노래하는 사람들로서 강희경, 김석균, 김지현, 박종호, 송명수, 송정미, 이성균, 이은수와 전혜영, 이정림, 임미정, 최인혁, 노래하는 순례자, 다윗과 요나단, 빛과 소금, 소리엘, 좋은 씨앗, 찬양의 샘, 찬양하는 사람들 등이 있다.

* 노래 선교단: 이들은 주로 신세대 가스펠송을 위주로 노래하는 선교단으로 샬롬, 기쁨, 늘노래, 로고스, 마라나타, 셀라, 카리스, 쉴하쉬림, 에클레시아, 옹기장이, 임마누엘, 주찬양, 찬미, 함께, 컨티넨탈싱어즈, 크로스 로드 등이 있다.

* 경배와 찬양: 이 모임은 연합적이며 초교파적인 성격을 띠고 있으며 매주 정기적으로 찬양집회를 갖는다. 이들은 가스펠 힘(hymn: 수직적인 찬송)을 주로 부르며 대중집회적인 성격을 갖고 있다. 광성, 다드림, 복사골, 두란노, 소망, 예수전도단, 은성 등이 있다.

* 기독 노래운동: 일반적으로 기독교 음악의 주제가 수직적인 것에 집중되어 현실적이고 역사적인 것들이 배제된 반면, 이들은 상황과 역사속에서의 기독교 복음을 선포하고 노래한다. 뜨인돌, 평화의 아침을 여는 이 등이 있다.

* 대중가요 싱어: 이들은 과거에 대중가요를 하다가 거듭난 사람이거나 아니면 처음부터 선교적인 의도를 가지고 대중가요계에 뛰어들어 기독교적이며 선교적인 정신을 가지고 노래를 만들고 부르는 사람들로서 김 선경, 김성수, 김성호, 방익진, 신형원, 윤형주, 이무하, 하덕규, 홍순관 등이 있다.

나. 노래의 관계성

우리가 일반적으로 `노래'라고 말할 때는 가사와 멜로디만을 일컬어 부르는 경우가 많이 있다. 그러나 `노래'는 그렇게 간단하게 구성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노래'는 `가사'와 `멜로디' 그 자체만으로는 사실상의 존재 의미가 없고 `관계'라는 구조 속에서 비로소 그 존재 의미가 나타나기 때문이다. 즉, 그 `관계'라는 것은, 첫째로 가사의 형식과 내용. 둘째로 멜로디. 셋째로 리듬. 넷째로 노래하는 가수의 진실성과 성실성. 다섯째, 노래를 듣는 청중들의 수준이나 받아 들이는 태도. 그리고 그들의 성향. 여섯째, 작사자와 작곡자가 가지고 있는 의식세계. 일곱째, 편곡자나 연주자의 수준과 의식세계. 그리고 연주하는 악기나 전달하는 대중매체의 양과 질. 여덟째, 사회 환경이나 역사(역사) 등의 상호 관계성 속에서 하나의 노래가 만들어져서 대중에게 전달되는 것이다. 이처럼 `노래'라는 것 자체가 어떤 관계성을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의 기독교음악(예배음악)은 `수평적인 관계성'은 도외시 한 채 `수직적인 관계성'에만 치우쳐 왔다.

다. 제 3의 길, 십자가 음악

* 수직적 음악(Vertical music): 수직적 음악이란 `신자'와 `하나님'과의 일대일의 수직적인 관계성 속에서 존재하는 (예배)음악을 말하는데, 이것은 세상과 교회는 완전히 분리되어 있기 때문에 기독교 음악은 세 상에 관심을 가져서는 안되며 거룩한(?) 음악만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영향으로 말미암아 기독교 음악은 우리의 삶과 예배를 분리시키는 좋은 도구가 되어 왔다. 왜냐하면 실제 우리의 삶은 수평적인 차원 에서 이루어지는데 반해서 우리의 신앙은 수직적인 차원에서만 머물러 있었기 때문에, 주일날 예배를 떠난 이후의 엿새 동안의 삶 속에서는 하나님과의 자연스런 분리를 가져온 것이다.

* 수평적 음악(Horizontal music): 수평적인 음악이란 우리가 발을 딛고 사는 이 땅의 `사람들(피조물)'과의 관계성 속에서 만들어지고 불리어지는 음악을 말하는데, 이것은 피조물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을 찬 양하고 신자들의 신앙을 돈독하게 하거나 복음전도를 목적으로 불신자들도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보통 사람들의 언어와 삶을 소재로 만든 음악을 말한다.

* 십자가 음악(Cross Music): `십자가 음악'이란 앞에서 언급한 수직적 음악과 수평적 음악이 성령님 안에서 서로 만나서 하나가 되는 것을 말하는데, 이것은 수직적 음악과 수평적 음악을 둘 다 포기하거나 어느 하나만 선택하는 배타적인 것이 아닌 통합적인 제 3의 길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수직적인 하나님과의 관계성과 수평적인 사람들과의 관계성이 서로 분리되어 존재할 수 없음을 확인할 수 있다(마 22:37-40). 이것이 바로 `십자가 음악'의 근거이다. 즉 지금까지 우리 교회는 수직적인 예배 음악만을 강조해 옴으로써 수많은 `작은 자(마 25:31-46)'를 무시해 왔다. 주님은 이 세상을 사랑하셔서 당신의 목숨을 버리셨는데(요 3:16) 우리는 무조건 이 세상을 멀리하고 미워하기만 했다. 그러나 이 세상은 멀리하고 미워해야 할 것들이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주님이 피흘리기까지 사랑하신 사랑의 대상임을 알아야 하며 주님의 심장으로 사랑해야 한다.

라. 복음의 회색지대를 향하여

지금까지 우리 교회는 밭이야 어떻든 씨를 뿌리는 일에만 집착해 왔다. 그러므로 싹을 내어 자라는 듯 하다가도 고등학교, 대학교, 그리고 직장에 들어가게 되면 상당수가 교회를 떠나거나 형식적인 쭉정이 신앙 에 머물고 마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직접 말씀을 뿌리는 것도 귀한 사역이지만 뿌린 씨가 결실하도록 먼저 밭을 일구고 가꾸는 작업도 대단히 중요함을 알 수 있다. 이 거칠고 삭막해진 밭을 일구고 가꾸는 작업이 바로 복음의 회색지대 사역인 것이다.

이것은 그 시대(Contemporary)의 언어와 문화를 옷입고 성령님의 능력을 의지하면서 대화가 가능한 수평적인 차원에서 사람들(신자와 불신자) 속에 들어가 그들의 마음밭을 부드럽게 가꾸며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고 복음을 전하는 사역이다. 이같은 사역을 CCM이 하고 있는 것이다. 교회 안에서 CCM의 사용은 교회의 덕을 위해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CCM이 교회 안의 신세대들에게는 물론 복음의 회색지대에서 불신자에게 복음을 전하는 효과적인 도구이기 때문에 무조건 반대해서도 안된다.

마. 세상 밖에, 그러나 세상 속으로

지금까지 대중음악이 사탄의 도구로써 사악하고 음란하고 폭력적인 것들을 전파하는데 사용되었기에 대다수의 그리스도인들이 이를 기피하는 것이지, 음악 그 자체는 고소를 당할 아무런 죄가 없다. 우리는 지금까지 사탄이 사용하는 음악을 나쁘다고 정죄는 해왔지만 정작 거기에 따른 나의 책임은 회피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배임죄를 범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CCM이라는 것도 예배 음악적 관점에서는 세속적인 냄새가 풍기는 이질적인 것 같아도, 예배음악적 관점이 아닌, 기독교음악적 관점에서는 훌륭한 십자가 음악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사역이 영적인 전투의 최전선에서 항상 사탄에게 노출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는 CCM사역자들이 세상의 박수소리와 상업주의에 넘어 가거나 사역에 바빠서 영적인 무장을 게을리 하지 않도록,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께서 피흘리신 세상을 동일한 마음으로 사랑하여 이 십자가 사역을 감당하는 이들을 위해서 기도와 격려를 아끼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세상 속에 살고 있다. 그러나 세상 밖에 있어야 한다. 하지만 세상 밖에 그대로 머물러 있어서는 안되며 성령님의 능력 안에 서 최고의 음악으로 세상 속으로 침투해 들어가야 한다.

그리하여 주님의 주님되심을 인정하며 이미 2천년 전에 예수님이 십자가로 승리한 하나님의 나라를 회복해 가야 할 것이다.

(이규대/염산교회 전도사,울타리 문화선교회 협동간사)

[월간 낮은울타리 93년 8월호에서]


노아의 번제 jesus recovers us





대구 중학생 자살사건 가해자 구속기소

사진은 지난달 31일 대구 중학생 자살사건의 가해학생들이 대구지방법원에서 영장실질심사를 받은뒤 경찰의 보호를 받으며 법정을 나서고 있는 모습(자료사진)

(대구=연합뉴스) 이강일 기자 = 대구지검 형사1부(이기석 부장검사)는 지난해 연말 대구에서 발생한 중학생 A(14)군 자살사건과 관련해 피해 중학생이 유서에서 가해자로 지목한 중학생 B(14)군 등 2명을 19일 구속기소했다.

검찰은 또 유서에 이름이 오르지 않았지만 A군을 괴롭힌 것으로 확인돼 불구속 입건된 동급생 D군은 범행횟수 및 괴롭힌 정도가 상대적으로 크지 않고 피해자 유족이 처벌을 원하지 않아 소년보호사건으로 송치했다.

검찰은 "B군 등이 아직 어리고 초범이지만 피해자 A군에게 '물고문'을 하거나 목에 전깃줄을 감아 잡아당기고, 방바닥에 과자를 던지고 주워 먹게 하는 등 피해자를 지속적으로 괴롭혀 자살에 이르게 하는 등 사안이 중해 구속기소했다"고 설명했다.

또 "피해자 유족들이 강력한 처벌을 원하고 있고 가해자들을 엄벌해 달라는 취지의 진정이 많이 접수된 점 등을 고려하면 가해자들에 대한 엄정한 처벌이 불가피하다"고 덧붙였다.

이어 "가해자들에 대한 구속기소가 학교폭력 문제의 심각성에 대한 경종을 울리고 이들이 진지한 반성의 기회를 얻는 것은 물론 비슷한 사건의 재발을 막는 기회가 될 것으로 본다"고 밝혔다.

이와 별도로 검찰은 ㈔대구경북 범죄피해자지원센터를 통해 피해자 유족에 대한 심리상담 등 치료를 지원하는 한편 피해자 부모에게 재판정 진술권 및 정신적 피해에 대한 형사배상명령제도 등을 안내하기로 했다.

또 구속기소된 B군 등은 나이가 어리고 심리적으로 불안한 상태인 것을 고려해 범죄예방협의회를 통해 정신과 전문의의 심리상담을 받을 수 있도록 했다.

대구지검 한 관계자는 "이번 사건을 계기로 전담검사를 지정해 '학교폭력 수사전담팀' 등 경찰의 학교폭력 관련 수사를 신속하고 통일적으로 지휘해 단속의 효율성 및 예방 효과를 높일 방침"이라고 말했다.

leeki@yna.co.kr

<저작권자(c)연합뉴스. 무단전재-재배포금지.>2012/01/19 11:18 송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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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아가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모든 정결한 짐승 중에서와 모든 정결한 새 중에서 취하여 번제로 단에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그 향기를 흠향하시고 그 중심에서 이르시되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인하여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사람의 마음의 계획하는 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내가 전에 행한 것같이 모든 생물을 멸하지 아니하리니"

 

그리고 그 후에 무지개 언약 즉 다시 홍수로는 인류를 멸하시 않겠다는 언약을 주십니다.

 

물론 마귀는 하나님과 인류간의 관계를 단절시키기위해 바로 하나님의 무지개 언약에 대한 인간의 불순종 즉 바벨탑 사건을 일으킵니다.

 

그런데 주목하는 것은 노아시대부터 번제라는 것이 있었다는 것입니다.(정확히 말하면 그 전에 정결한 짐승과 정결한 새를 암수일곱씩 방주에 넣으라고 명령하신 것을 볼때 하나님이 직접적으로 번제를 하라는 명령은 안보이지만 노아의 마음에 감동과 같은 어떤 언질이 있었지 않나 생각됩니다.) 

 

즉 모세의 율법시대 부터 주어진 것이 아니고 (사실상) 인류가 새롭게 출발하는 노아시대부터 주어진 것이라는 겁니다.

 

인간의 죄악으로 저 짐승들이 죽어야 하는 것을 통해 죄의 심각성을 일깨어주고 인간으로 하여금 선을 행할 맘을 갖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으로 보여집니다.

 

물론 그 이후 인류는 철저하게 하나님 말씀을 부정하고 패역하게 행동했습니다.

 

흔히 돼지머리를 올려놓고 하는 고사같은 경우를 보면 이러한 번제의 잔형이 남아 있는데 정작 하나님 말씀과 정 반대로 불결한 짐승을 잡아서 죄에 대한 경각심이 아닌 자기 복을 비는 용도로 전략시켰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기복신앙이나 번영신학은 바로 이런 돼지머리 고사가 반영된 영적 간음의 절정이라고 할 수 밖에요.

 

더구나 예수님의 십자가 피를 가져다 놓고 그것을 가지고 자기 복을 비는 용도로 쓰고 있으니 이것이야 말로 패역의 극치가 아니겠습니까?

 

아무튼 율법에 처음 번제가 등장한 것이 아니었고 노아시대에도 번제가 있었다는 것이 참으로 새롭게 다가옵니다.

 

그리고 그 번제는 노아가 하나님의 직접적인 명령보다는 마음의 감동에 의해 드린 것으로 보이구요.(물론 전지전능한 하나님이 미리 예비하신 것이겠지만요)

 

물론 이 번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의 모형이기도 할 것입니다.

 

우리가 인간중심적인 시각에서 인간을 바라보기 때문에 인간이 선한면도 있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사실 하나님의 인격적인 시각에서 보면(물론 그것이 가장 정확합니다.) 인간은 참으로 패역한 존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사실 인류의 역사가 전쟁의 역사임을 생각해 볼때도 이게 사실이구요. 더구나 마태복음에서 마음에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은 것도 간음이라고 말씀하시는 그 전능자의 시각에서 볼때는 너무 자명하다는 것이죠.

 

그럼에도 그 패역한 존재를 위해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서 죽게 하신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은 참으로 우리의 심금을 울리게 하는 그 무엇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마치 자식이 살인죄를 저질러 사형을 당해야 할 처지에 있게 되었을때 그 자식을 위해 대신 죽고자 하는 어머니의 마음과 같죠.

 

공공의 적에서 보면 재산때문에 자식이 부모를 칼로 난도질하여 죽였음에도 자식이 살인자로 잡힐까봐 범행현장에 떨어진 아들의 손톱(범인이 누구인지 밝힐 수 있는 결정적 증거)을 죽기 직전 삼키며 숨을 거두는 어머니의 심정이랄까 그렇습니다.

 

우리 하나님의 사랑은 바로 이런 것보다 더 극진하며 애절하다는 것입니다.

 

사실상 몇 천년을 홀로 우리들을 짝사랑해오신것이구요. (그런 의미에서 짝사랑하는 사람의 심정을 함부로 폄하해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하나님의 거룩하신 짝사랑을 짚밝은 댓가가 지옥이 아닐런지요.

 

그리고 가끔 문득 문득 드는  생각은 내가 하나님을 믿고 사랑할 수 있는 존재로 만들어졌다는 것이 참으로 신기하면서도 머리카락이 삐쭉삐죽 스는 느낌이 듭니다.

 

감히 지존자이시고 절대자이신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게 되다니 이런 생각에요.

 

결론적으로는 우리 자신이 하나님을 믿고 나서 선한 행실이라는 몸의 번제를 통해 하나님이 흠향하시기 좋은 향기를 올려드려야 할텐 말이에요.

 

물론 이것은 그리스도를 통한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무인가 신학교 난립‥돈만 내면 '목사' jesus recovers us

이러니 자격없는 목사 삯꾼 목사가 마구마구 배출되는거 아닌가 합니다.

그 결과 기독교 전체가 타격을 받고 하나님 영광이 가려지고요.

이들 삯꾼 목사들은 사실상 사탄의 종일 뿐입니다.

그런데 이런 삯꾼 목사들 때문에 하나님에 대한 세상사람들이 편견이 생기게 되구요

저런 삯꾼 목사들 때문에 한국 기독교가 기복신앙화 되고 있는 겁니다.

참으로 성직을 사고파는 사태까지 왔으니 통탄할 노릇입니다.


무인가 신학교 난립‥돈만 내면 '목사'
MBC|
박종욱 기자|
입력 2012.01.19 21:42
|수정 2012.01.19 21:51
|
[뉴스데스크]

◀ANC▶

최근 무인가 신학교가 마구 생기면서 목사직도 남발되고 있다는 비판이 기독교계 내부에서까지 나오고 있습니다.

돈만 주면 목사 시켜주겠다는 신학교도 있습니다.

박종욱 기자가 현장 취재합니다.

◀VCR▶

신학교를 운영한다는 인천의 한 교회.

목사가 되고 싶다고 밝히자, 예배당 옆 작은 사무실로 안내합니다.

목사는 5백만 원만 내면 다른 정규 신학교 학위는 물론 목사 자격까지 만들어 주겠다고 제의합니다.

◀SYN▶ 신학교 목사

"학적부를 세탁하는 거예요. 석사 학위를 받는 것까지 해 가지고. 대학원은 몇 년, 목사 안수는 몇 년, 이렇게 해서 과정을 어느 정도 맞춰 가지고..."

목사 안수를 받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단 일주일.

◀SYN▶ 신학교 목사

"노회에서 5명 정도 나와서 하나님 앞에 떳떳하게 (안수를 받아요) 각서를 하나 받아요, 각서. 민, 형사상 이의를 제기하지 않겠다는..."

서울 영등포의 또 다른 신학교.

다른 유명 신학대학원 학위로 세탁해 주겠다고 제안합니다.

◀SYN▶ 신학교 목사

"어느 학교 출신인가 궁금하거든요. 00대학원, 대학교 나왔다 하면 성도들이 달리 보죠. 백만 원에 제가 해드릴게요."

(거저 하시는 거죠)

일반적으로 목사가 되기 위해서는 신학부 4년과 대학원 3년 등 최소 10년 이상의 수련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제대로된 교육을 하지 않고도 목사 자격을 주는 무인가 신학교가 난립하고 있습니다.

국내 무인가 신학교는 4백여 곳,

매년 만 명 가까운 목사가 배출되는 것으로 추산됩니다.

이 때문에 교계 내부에서도 목사직 남발에 대한 비판이 제기됩니다.

◀INT▶ 이동연 목사/한누리 교회

"목사가 괜찮다는 자리라는 생각 때문에 목사가 우후죽순처럼 난립하고 있거든요. 정선해서 목사를 뽑는 것보다 지원자를 받아 교세를 확장하려는 게 굉장히 강합니다."

모든 교단이 이처럼 마구잡이로 목사직을 부여하는 것은 아니지만, 문제는 교단마다 자격 기준이 제각각이라는 것.

◀INT▶ 임성빈 교수/장로회신학대학교

"인가냐, 무인가냐를 가지고 목회하는 것은 아니죠. 그렇지만 어느 정도 기준이라는 것은 유지해 줘야..."

이에 따라 공통된 목사 기준과 검증 수단이 마련돼야 한다는 지적입니다.

MBC뉴스 박종욱입니다.

(박종욱 기자 parkgija@mbc.co.kr)

[저작권자(c) MBC (www.imnews.com) 무단복제-재배포 금지]

자기 십자가를 지라 (마16:24) jesus recovers us

인터넷 뇌 중독을 보고


예수님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야 한다는 말씀을 하셨을 때(마16:21), 베드로는 인간의 생각으로 하나님의 뜻을 막으려고 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그에게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하고 책망하셨습니다(마16:23). 그리고 자신을 따르는 제자들이 가져야 할 태도(제자의 도)에 대해서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마16:24).

 

1. 자기를 부인하라

예수님은 자신을 따르기 원하는 사람들에게 "자기를 부인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자기’란 성령을 거스리는 육신의 사람을 가리킵니다(롬8:5-7). 사도 바울은 옛 사람의 모습을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엡4:22)이라고 했습니다. 이런 옛 사람은, 마음에 하나님을 두기를 싫어하며 마음의 정욕대로 행하는 자로, 모든 불의, 탐욕, 시기, 비방, 교만, 자랑, 부모 거역 등이라고 했습니다(롬1:28-30).

그리고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은,

첫째, 죄에 대하여 죽는 생활을 말합니다(롬6:2). 타락한 본성 즉, 자기의 이기적인 생각, 욕망, 주장 등을 철두철미하게 굴복시키는 것을 말합니다.

둘째, 영의 생각에 지배를 받는 생활을 말합니다(롬8:6). 영의 생각이란 성령께서 주시는 생각인데 곧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생활입니다. 이런 생활에 대하여 바울은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롬8:13)라고 한 것입니다.

셋째,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라는 말입니다(고전15:22). 이는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고전15:34). 육의 행실이나 생각을 버리지 않으면 그리스도 안에서의 생활은 불가능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른다고 하면서 자기 뜻대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람은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사람들에게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마7:23)고 하셨습니다.

오늘날 교회(성도)들이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지 못하는 것은 자기 생각과 뜻을 부인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 위해서 하늘 보좌를 버리고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들도 자신의 생각과 뜻을 거부하고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해야 합니다.

 

2. 자기 십자가를 지라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속죄, 용서, 은혜, 그리고 사랑의 소중한 상징으로 봅니다. 그리고 ‘자기 십자가’는 자신이 짊어진 고난, 역경 등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말씀하실 당시의 사람에게 있어서 십자가는 인간이 고안해낼 수 있는 가장 고통스럽고 치욕적인 방법에 의한 사형 방법이었으며, 극한 고통의 죽음 외에 어떤 것도 아니었습니다. 집행자들은 범죄자들을 각자의 십자가를 형장까지 지고 가게 했기 때문에 십자가를 지는 것은 죽음으로 가는 길이며, 조롱을 받으며 자기 자신의 처형 도구를 운반하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각 사람에게는 그 사람에게만 주어진 고난의 분량이 있습니다. 성도들은 그 고난을 주님의 뜻으로 생각하고 믿음으로 인내하며 감당하고, 이를 통해서 주님의 뜻을 이루어야 합니다. 이러한 경우에 각자에게 주님께서 주신 고난을 가리켜서 ‘자기 십자가’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자기 십자가 중에는,

첫째, 세상의 유혹을 이기지 못한 자신의 죗값으로 오는 ‘징계의 십자가’가 있습니다.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이로 말미암아 연달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나니"(히12:11)라고 했습니다. 이런 십자가는 그리스도인이 기쁘게 저야 할 십자가입니다.

둘째, 믿음을 다지기 위해 우리로 지게 하시는 ‘연단의 십자가’가 있습니다.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벧전1:7)고 말씀하십니다.

셋째, 그리스도인이기에 겪어야 할 ‘고난의 십자가’가 있습니다.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은즉 부끄러워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벧전4:16). 하나님께서는 언제 어느 때 우리에게 어떤 십자가를 지게 하실는지 모릅니다. 우리는 이 십자가를 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 십자가를 지라’는 말씀은 예수를 따르기 위해 죽기까지 어떤 고난도 감내하라는 절대적 순종을 요구하신 것입니다. 예수께서 ‘자기 십자가’를 질 것을 명령하신 후에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막8:36, 관련 : 마16:25;눅9:24)고 말씀하셨습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은 고통스러우나 순종하면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귀한 ‘구원’을 약속하셨습니다. 구원은 곧 영원히 멸망하지 않는 ‘영생’을 의미합니다(요10:28).

 

3. 예수님을 따르라

24절 처음 부분에 ‘따라 오려거든’이란 말은 온전히 순복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좇을 것이니라‘는 어쩌다 생각나면 따라가는 정도가 아니라 끝까지 전심전력을 다하여 따르라는 명령입니다.

그리스도께의 헌신은 그리스도로 인해 필요하다면 자신의 희망과 꿈과 소유를 버리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모든 종류의 박해를 받을 각오가 돼 있어야 하며, 심지어 자신의 목숨까지도 포기할 때 진정으로 예수님을 따르며 좇는 것입니다(눅14:27;빌1:29).

예수님의 제자들은 박해와 순교를 각오하고 예수님의 뒤를 따랐습니다. 기독교 역사상 스데반이 첫 순교자로 일컬어지며(행7:54-60), 열 두 제자 중에선 야고보가 처음 순교했습니다(행12:2). 베드로는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죽임 당했고, 사도 바울도 로마 군사의 칼에 목이 잘리어 죽었습니다. 또한 수많은 성도들도 감옥에 갇히거나 사나운 짐승의 밥이 되었고, 또 공동체에서 쫓겨나서 가난하고 외롭게 살았습니다.

그들은 세상의 눈으로 보면 어리석은 사람들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러한 사람들이 오히려 복이 있으며(벧전3:14)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될 것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마25:46).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을 따르기 원하는 사람은 자신의 생각과 뜻을 내려놓고 모든 핍박과 환난을 인내와 믿음으로 이겨내고 예수님을 따라가야 합니다. 이러한 사람만이 사단의 유혹을 극복하고 주님 안에서 능력있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자신의 생각과 뜻을 내려놓지 않는 사람은 끝까지 예수님을 따를 수 없습니다. 세상의 영광과 이익을 포기하지 않는 사람은 온전히 예수님을 따를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전적으로 헌신된 사람들을 찾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사람들에게 자신을 나타내시고, 성령님을 통해서 그들이 자신을 따를 수 있도록 힘을 주십니다(롬15:13). 예수님께 헌신된 삶으로 주께 칭찬 받는 제자가 되시기를 소원합니다(고후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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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뉴스>

<앵커>

우리 청소년들, 인터넷서핑 참 좋아하죠? 청소년 열 명 중에 한 명은 그냥 인터넷 서핑을 좋아하는 게 아니라 중독상태인 걸로 조사가 됐습니다. 중독이 시작되는 나이도 열 살 이전이고요. 부모님들 아이들이 너무 인터넷에 빠지면은 '얘 이러다가 공부 못하는거 아니야', '머리 나빠지는 거 아니야' 걱정이 많으시겠죠?

[공부에 몰입할, 집중할 거를 그 에너지를 인터넷에 빠져 버리는 거죠. 공부를 해야 되는데 공부보다 그게 더 재밌는 거죠.]

자, 이런 걱정은 기우가 아니었습니다. 인터넷 중독이 실제로 지능을 떨어뜨린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습니다.

이대욱 기자가 취재했습니다.

<기자>

[중학교 1년생 : (스스로 게임중독이라고 생각해요?) 네 (얼마나 중독인 것 같아요?) 좀 심하게… 중학교 올라와서 좀 많이 했더니 계속 (성적이) 떨어졌어요.]

가톨릭대학교 서울 성모병원 연구진이 인터넷에 중독된 청소년과 그렇지 않은 청소년을 표본 추출해 IQ 검사를 실시했습니다.

인터넷에 중독된 청소년의 경우 어휘력과 수리력, 이해력이 모두 떨어졌고 특히 이해력은 일반 학생보다 15%나 낮은 것으로 조사됐습니다.

[김문숙/학부모 : 얼마나 떨어진데요? 15%가 떨어진데요? 지능 지수가? 우리 아이가 머리 나쁜 게 인터넷에 빠져서 그러네요.]

여중생의 경우엔 그 차이가 더 벌어졌습니다.

이해력 부분에선 인터넷 중독 여학생이 그렇지 않은 여학생 보다 20%나 떨어지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또, 인터넷에 중독되는 나이가 어릴수록 지능은 더 떨어지는 것으로 조사됐습니다.

[김대진/서울성모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 5분만 더 증후군. 5분만 더 한다고 하고 조절 못해서 시간이 쭉 늘어지는. 그 다음에 거짓말을 하게 되요. 그러면 내가 중독에 가깝게 가는구나...]

인터넷을 못하게 할 경우, 아이가 화를 내거나, 불안증세를 보이고 초조해 한다면 인터넷 중독을 의심해 봐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충고합니다.

(영상취재 : 김태훈, 영상편집 : 이승희)
이대욱idwook@sbs.co.kr


히브리서 6장 4~6절에 대한 아더 핑크의 견해 jesus recovers us

아래는 히브리서 6장 4~6절에 대한 아더 핑크의 견해입니다.

 

'성령의 일반적인 사역' 이해하는데 있어서 히브리서 6장 4~6절 만큼 빛을 주는 구절도 없는 것 같습니다.

 

참된 회심을 위한 성령님의 특별 사역에 성경적 빛과 열을 가지는

 

겸손한 시도가 얼마나 필요한지를 깊이 배우고 있습니다.

 

 

아래는 아더핑크의 <히브리서 강해 1>에서 발췌한 글입니다.

 

 

4절과 5절에 묘사된 자들을 ‘형식적인 신앙 고백자들’로 칭하는 것이 정확하지 못한 것 같다.

그들은 큰 특권을 누렸던 사람들이었고,

지금 복음전도를 수반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큰 특권을 누렸던 자들이었다.

여기서 묘사된 자들은 ‘다섯 가지 이점을 누렸던 자’들로 말하고 있다.

그 다섯 가지의 이점은 1절과 2절에서 열거된 여섯 가지 사항들,

이른바 유대교를 믿는 육체 가운데 있는 사람에게 속한 것들과 대조를 이룬다.

다섯은 '은혜'의 수(數)이다. 여기에 언급된 복락들은 기독교 시대에 속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참된 그리스도인이 아니었다.

‘언급되지’ 아니한 것으로부터 이 점은 명백하다.

 

그들을 하나님의 선택한 사람들이라든지,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은 자들이라든지,

성령으로 거듭난 자들이라고 말하지 않음을 주목하라.

그들더러 의롭다 함을 입었다든지, 죄 용서함을 받았다든지,

사랑하는 자에 의해서 열납되었다고 말하지 아니한다.

 

또한 그들의 믿음과 사랑과 순종에 대해서도 전혀 말하고 있지 않다.

‘바로 이런 것들’이 하나님의 참된 자녀를 다른 자들과 구별시키는 요점들이다.

 

 

첫째, 그들은 ‘비췸을 받았다’. 의의 태양이 그의 날개 그날 아래서 치료하는 광선을 비추었다.

그리고 마태복음 4:16절이 말하는 바와 같다.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취었도다”.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계실 때에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했던 이방 사람들과는 달리,

그 음성을 들었던 자들은 기이하고 영광스럽게 비췸을 받은 자들이다.

 

“비췸을 받았다”는 말의 헬라어는 “가르침으로 빛이나 지식을 주다”라는 의미이다.

70인역 성경의 사사기 13:8과 열왕기하 12:2과 17:27은 그 말을 그런 식으로 번역하고 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4:5과 디모데후서 1:10에서

“드러내다”나 “밝히다”는 의미로 그 말을 사용한다.

사단은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어둡게 하여

“복음의 빛이 그들에게 비취지 못하게 한다”(고후 4:4).

곧 복음을 아는 지식을 갖지 못하게 한다.

 

그래서 여기에서 “비췸을 받다”는 말은 복음의 교훈으로 가르침받는다는 의미이며,

복음에 대한 명백한 이해를 가질 정도로 가르침받는다는 의미이다.

10:26에 있는 병행 구절에서 그 동일한 사람들을 향하여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았다”고 말한다(벧후 2:20,21).

그러나 그 지식은 외적인 들음이나 독서를 통하여 얻어지는 것과 같은,

영적인 것들을 ‘자연적인’ 차원에서 아는 지식일 뿐이다.

마치 어느 과학을 특별하게 연구함으로써 사람이 비췸을 받을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것은 ‘변하게’하는 유의 신령한 비췸에는 미치지 못한다.(고후3:18).

여기에서와 같이 중생치 못한 사람이 “비췸”받은 실례가

민수기 24:4에 나오는 발람의 경우에서 발견된다.

 

 

둘째, 그들은 하늘의 은사를 “맛보았다”.

“맛보다”는 것은 단순한 정보를 얻는 것과는 달리 개인적으로 체험하였다는 의미이다.

“맛봄은 반드시 먹는 것을 함축하지 않는다.

그렇게 맛본 것을 씹어 영양이 되게 하는 것과는 더욱 거리가 멀다.

우리가 그 냄새와 향기를 좋아한다 할지라도 그 성질을 분변해 내려면

먹어 소화시켜 영양가를 발휘시켜 본 다음에 다른 생각에서 그 음식을 거부할 수도 있다.

여기에 묘사된 사람들은 어느 정도로 긍휼의 계시를 이해했고 그 냄새도 맡았던 사람들이다.

마치 돌밭과 같은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자들처럼

그들은 말씀을 잠간 동안 기쁨으로 받았다”(J.Owen).

“맛봄”은 요한복음 6:50~56의 먹는 것과 대조된다.

“하늘의 은사”가 주 예수를 가리키는지,

아니면 성령의 인격을 가리키는지에 대하여 의견이 분분하다.

우리는 그 점에 대하여 교의적일 수 없다. 사실 어떠한 것을 취한다 할지라도 차이는 없어진다.

왜냐하면 이 땅에서 성령은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시기 때문이다.

성령께서는 그리스도의 승천 ‘선물’로 그리스도에 의해서 아버지께로부터 오셨기 때문이다.

여기서 주 예수님을 가리킨다면 요한복음 3:15과 4:10등 적절한 참고 구절이 될 것이다.

만일 성령을 가리킨다면, 사도행전 2:38; 8:20; 10:45; 11:17 등이 좋은 참고 구절일 것이다.

개인적으로, 우리는 후자의 경우를 택하고 싶다.

하나님의 은사를 여기서 “하늘에 속한”이라고 말한 것은 하늘로서 왔고,

하늘로 사람들을 이끌기 때문이다. 유대교와는 차이가 있다.(행2:2; 벧전1:11 참조).

 

이 배도자들은 이 “은사”를 “맛보고” 또는 체험했다.

마태복음 27:44을 비교하라. 거기서 “맛봄”이 실제적으로 마시는 것과 반대되어 있다.

여기에서 언급된 사람들은 복음과 친밀하여,

자기들의 죄와 자기들의 운명을 크게 절감시킬 정도로 그 복음의 복락을 얻었던 사람들이다.

마태복음 13:21에 그에 대한 한 실례가 나타난다.

 

 

셋째, 그들은 “성령에 참예한바 된 자들이었다”.

먼저, 여기서 “참예한 자들”이라는 말의 헬라어가 골로새서 1:12과 베드로후서 1:4에서

사용된 어휘와는 다른 헬라어임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거기에는 참된 그리스도인들을 언급한다.

여기서 사용된 어휘는 단순히 ‘동반자들’을 의미한다.

내적이라기보다 외적인 동반자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 어휘는 다른 넷의 활동 원리를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넷은 사실 이 오휘가 말하는 바의 결과들이다.

이 배도자들은 결코 “성령으로 난 자들”은 아니다(요3:6).

또한 그들의 몸이 하나님의 전이 된 적도 없음은 더욱 말할 필요도 없다(고전6:19).

 

또한 우리는 이 구절이,

어느 때에 성령께서 그들 ‘속에서’ 역사한 적이 있음을 가르치지도 않는다고 믿는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빌립보서 1:6은 중대한 모순을 범하는 진술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 말은 그들이 하나님의 성령의 초자연적인 작용과 나타남들의 유익에 참여했음을 의미한다.

“그곳이 진동되었다”(행 4:31)는 말씀은 그것을 예증한다.

우리는 브라운 박사의 주해를 다음과 같이 인용한다.

“영감받은 히브리서 기자는, 기독교의 초기 시대에 나타나 그 시대를 이끌어 갔던

성령의 이적적인 은사와 작용들을 일차적으로 언급할 가능성이 극히 높다.

이 은사들은 결코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은' 사람들에게만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마태복음 7:22,33에 있는 우리 주님의 말씀과, 고린도전서 13:1.2에 나타난 사도 바울의 말은,

새롭게 되지 아니한 사람들도 이러한 것들을 가지는 것이 그 시대에는

그렇게 비상한 일은 아니었음을 암시한다. 어쨌든 그 말씀들은,

그러한 것들을 소유하고도 중생치 않은 상태에 머무는 것이

절대적으로 불가능한 일이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넷째, ‘하나님의 선한 말씀을 맛보고’라는 이 표현이

메시야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그 모든 메시야 약속의 본질과 여지가 무엇인가를 이해했다는 의미로 생각한다.

 

이 약속이 예레미야가 ‘선한 말씀’이라고 칭한

탁월한 방식으로 주어졌음을 주목할 가치가 있다(33:14).

그런데 ‘이 선한 하나님의 말씀을 맛보는 것’은 하나님의 자기의 약속에 대한

신실함을 체험하는 것을 의미하며,

회심하지 않은 사람들이라도 그 약속이 이루어지는 것을 통해서 나타나는

축복과 이점들을 누릴 수 있는 한도 내에서 그것을 즐긴다는 의미이다.

‘하나님의 선한 말씀을 맛보고’라는 말씀은

새 시대의 이점들을 즐기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J. Brown).

 

사도가 여기서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는 것을 배도자들이 목격한 것을

언급하고 있다는 확증은, 예레미야 29:10의 말씀을 비교해 보면 더 확실해진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바벨론에서 칠십 년이 차면 내가 너희를 권고하고

나의 ‘선한 말’을 너희에게 실행하여 너희를 이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

우리로 하여금 여기에서 사도가 묘사하고 있는 사람들이 누구인지를

더 잘 알게 하기 위하여 얼마나 면밀히 “맛보다”는 말을 고수하고 있는지를 주목하라.

그 사람들은 예레미야처럼,

“내가 주의 말씀을 얻어 먹었사오니”라고 말할 수 없었다(15:16).

사도는 마치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다.

“내가 영양분을 공급받은 사람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마땅히 ‘신령한 젖’을 간절히 사모하며 그것을 통해서 마땅히 자라났어야 할 것을

그저 맛보기만 한 자들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J. Owen).

 

단지 하나님의 선한 말씀을 “맛보기만”한 사람들에 대한 엄숙한 실례가

마가복음 6:20에서 발견된다. “헤롯이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두려워하여 보호하며 또 그의 말을 들을 때에 크게 번민을 느끼면서

‘달게’ 들음이러라”.

 

 

다섯 째,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여기서는 구약의 예언을 따라 오신

이스라엘의 메시야를 통해서 도래된 새로운 세대를 가리킨다.

그 말은 히브리서 1:2의 “이 마지막 날”이라는 말과 상응된다.

그리고 “지난 세대” 또는 모세의 경륜과 대조되는 말이다.

그들의 메시야는 다름 아닌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다(사9장).

그리고 그의 이적적인 사역은 놀랍고 영광스럽고 엄청나고 독특하다.

새 시대의 이러한 ‘능력들’이 히브리서 2:4에서 언급된다.

우리는 히브리서 2:4에 대한 그의 주석을 독자들이

다시 한 번 상기하도록 해주겠다. 이 배도자들은 권능의 능력들을 “맛보았다”,

또는 체험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이적들을 스스로 목격하였으며

승천 다음에 일어나는 기사들도 보았다. 성령의 영광스러운 나타남이 주어졌을 때

그러한 것을 목격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핑계댈 수 없게 되었다.

확증적이고 결론적인 증거들이 그들 앞에 제시되었었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 속에는 그에 부응하는 믿음이 없었다.

요한복음 11:47과 48에 그 점에 대한 엄숙한 실례가 나타나 있다.

“그들이 타락할 것이면”(타락한 자들은).

기에 쓰인 헬라어는 매우 강하고 강조적이다.

마태복음 7:27에서는 모래 위에 지은 집에 대해서 말하면서,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고 말하였다. 여기서 말하고 있는 것은 완전한 넘어짐이요,

기독교 전체를 포기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고의적으로 하나님의 계시된 진리에 등을 돌리며

복음을 철저하게 모독하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그것은 “믿음의 파선”이다(딤전1:9).

이 무서운 죄는 그저 단순한 형식적인 신앙고백자에 의해서 저질러지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그는 사실상 텅 빈 이름 외에는 타락할 것이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묘사된 사람들은,

자시들의 마음에 비췸을 받고, 양심이 요동되며, 생각이 상당하게 영향을 받았으나

결단코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지지 아니한 자들이다.

여기서 말하고 있는 것이 실족하여 넘어진 그리스도인들을 말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존 오웬의 성령론에 있어서 체험에 관한 연구 jesus recovers us

존 오웬의 성령론에 있어서 체험에 관한 연구2009/08/12
향상

존 오웬의 성령론에 있어서 체험에 관한 연구


1. 서론

존 오웬(1616-1683)은 영국의 모든 신학자들 가운데 가장 위대한 인물들 중 하나요, 거인들의 시대에 거인들 위에 높이 솟은 인물이었다. 오웬은 방대한 분량의 작품 들 속에서 매우 빈번하게 체험 혹은 경험에 관한 이야기를 언급한다. 이것은 오늘날의 많은 신학서들과는 놀라울 정도로 대조적인 것이며, 오웬의 신학이 패커가 말한 바, 청교도들의 한 특징이었던 ‘하나님 중심의 경험적 경건’의 토대 위에 세위졌다는 것을 암시한다. 오웬의 글들은 오히려 그리스도인으로서의 깊은 체험에서 나온 것이라는 느낌을 독자들에게 전해주기에 충분하다. 가령, 그는 자신의 성령론의 서문에서 저술 방법과 의도를 이렇게 밝히고 있다: “나는 과연 성경이 무엇을 가르치고 있는가를 찾아보고 정리하여, 성령에 대해 알지 못하고 성령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의심없이 공감할 수 있도록 하려고 한다. 그리고....고대 교회가 지지하고 오늘날의 신자들이 경험하는 바를 정리하려고 한다.” 뿐만 아니라 그는 설교에 있어서 자신이 세운 원칙을 이렇게 밝힌다: “설교자는 자신의 영혼에게 스스로 설교하는 진리의 능력을 경험해야 한다. 자신의 영혼에 한 설교만이 타인들에게 잘 전해지는 설교이다.” 또 “나는 성령님을 통해 어떤 진리를 영적인 의미에 있어 맛보고 심령으로부터 시편 기자와 같이 ‘내가 믿음으로 말했나이다’라고 말할 수 없으면 그 진리를 발표하기는커녕, 내가 그 진리에 대한 바른 지식을 얻었다고 상상도 하지 않겠다고 양심과 자존심으로 스스로에게 의무를 지운다.”

본고는 이처럼 그리스도인의 깊은 영적 체험 위에 기초하여 신학을 정립한 오웬이 그리스도인의 체험을 어떻게 신학적으로 정리하고 있는가 하는 문제를 고찰하려고 한다. 오웬이 그리스도인의 체험을 어떻게 이해하였으며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가 하는 것을 연구하는 것은 교회사상 탁월한 영성위에 세워진 청교도 신학 특별히 오웬의 신학의 진수를 여는 열쇠가 될 것이다. 또 이것은 현대의 신학자들과 신학도들 그리고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을 수종드는 우리에게 우리 시대의 신학과 목회가 어느 토대 위에 세워져있으며 어디로 가야하는가에 대한 중요한 통찰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다루게 될 범위는 죄인의 회심과 그리스도인의 성화를 포함하며, 연구의 초점은 하나님의 역사와 인간의 행위 사이의 관계, 특별히 성화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직접적인 사역으로서 은혜의 체험과 그리스도인의 의무의 위치와 관계에 초점을 맞추어보고자 한다. 사실, 이 문제는 교회사상 많은 문제와 이단을 낳았던 주제로서 펠라기우스 이단이나 알미니우스 논쟁 등은 다 이 문제와 관련된 것이었다.


2. 중생(regeneration)

중생은 성령의 능력에 의하여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이것은 비록 신약에서만큼 선명하지는 않으나 구약에서도 언급되었고 약속된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에게 할례는 마음에 해야 한다고 한 말씀에서 찾아볼 수 있다. 하나님의 모든 선민들은 그들 당대에 하나님의 영에 의해 중생했다. 중생의 역사는 외적으로 매우 다양한 방법으로 적용되어 일어난다. 눈에 보이는 면이 있는가 하면 은밀하여 외적으로 나타나지 않아 우리가 알 수 없는 경우도 있다(요3:8). 중생하는 사람들은 바울과 같이 혼자서 기적적으로 회심하는 경우도 있고, 초대 교회 성도들이 신비한 은사를 받아 일시에 수천 명 씩 회개하는 경우도 있다. 사람들 사이에 거룩한 정도의 차이나 성화의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중생의 차이는 없다. 중생은 세례의 외적 표시에 의해서 이루어지거나 외적 생활의 변화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중생은 우리의 본성이 영적으로 혁신되는 것이다. “심령으로 새롭게 되는 것”(엡4:22-24)이며 “마음이 새롭게 변화를 받는 것”(롬12:2)이다. 따라서 중생의 요소는 모든 행동의 원리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중생하여야만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고 하나님의 뜻에 맞게 살게 되는 것이다. 중생의 경험을 그 심령에 사모하지 않는 자는 생명이 없는(lifeless) 자이며, 우리들 가운데 중생의 능력을 맛보지 못한 사역자는 무익한 사역을 하는 자인 것이다. 중생에 관한 이런 일들은 하나님의 영의 사역이 저 사람들의 마음에 어떻게 역사하셨는가 하는 점을 기독교 교수들이 개인별로 연구하여야 한다. 그래서 성령의 사역이 저들로 하여금 방해받지 않도록 하여야 한다.


2.1 예비적 사역(preparatory operations)

일반적으로 중생이 이루어지기 전에 인간의 영혼에 분명히 나타나는 예비적인 사역이 있다. 그러나 중생은 예비적인 사역들로 되는 것이 아니고 또한 예비적인 사역들이 이끌어내는 것도 아니다.

이 예비적인 사역에 있어서도 인간이 수행해야 할 의무가 있다. 이 의무수행은 본래적으로 주어진 인간의 능력과 관련을 가진다. 그러나 죄인의 성향은 게으르고 나태하여 은혜의 외적 방편인 하나님의 말씀을 등한시한다. 반면 근면한 마음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의 마음과 뜻이 계시되고 선포될 때 그것을 깨닫고 받아들이는 은혜의 자리에 참여하게 된다. 그러나 이것도 중생은 아니다. 외적으로 부지런하다고 중생하는 것은 아니고 내적인 성령의 사역이 있어야만 사람의 심령이 중생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사람은 다만 이성을 통해 외적인 하나님의 계시와 교훈을 받는 유익을 얻는 것이다. 이런 의무도 행하지 않는 자들은 복음이 전파되어도 중요한 원인이나 기회가 되지 못하고 많은 사람들이 영원히 파멸되는 것같이 멸망받는다. 반면 말씀에 대하여 열심이 생긴 사람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과 해야만 할 일과 할 수 없는 일이 무엇인지를 안다.

말씀은 사람의 영혼에 내적으로 역사하여 중생의 길로 인도하는데 여기에는 조명(illumination), 자각(conviction), 개혁(reformation)의 단계가 있다.

조명은 이성적인 기능에 의하여 계시의 교리를 알고 이해하고 깨닫는 것에 우리 마음에 임하는 성령의 특별한 영향에 의해 빛이 더해지는 것이다. 즉 조명이란 인간의 단순한 본성에 커다란 것을 더해주는 것이다. 그래서 조명은 본래적인 단순한 이성으로 얻을 수 있는 것 이상의 진리에 대하여 강력하게 찬성하도록 해준다. 여기서 조명을 받은 사람들은 믿음을 가지게 된다고 할 수 있는데 이 믿음은 다만 계시된 진리에 대하여서만 외적인 지지를 하는 정도의 믿음으로, 구원하는 믿음은 아니다. 조명이 어떤 종류의 기쁨도 주고 다양한 은사들도 더하여 주지만 그렇다고 중생은 아니다. 조명 뒤에는 중생을 위한 일들이 계속해서 일어나야 중생을 하게 된다. 따라서 교화되었으나(enlightened) 회개가 일어나지 않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인간 본성에 중생이 일어나야 회심(conversion)이 일어나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조명과 은사를 받은 사람은 자기가 해야 할 의무를 감당해야 한다.

자각의 단계가 조명에 이어서 올 수 있다. 죄의 자각은 말씀에 의한 또 하나의 결과이다. 이 일로 말미암아 참된 회심이 일어난다. 자연인은 죄와 그 비참함 때문에 슬퍼하거나 비탄에 빠지는 일이 없으나 조명을 받은 뒤에 사람은 자신의 죄로 인하여 슬퍼하고 비통해한다. 이 상태에서 그가 낙심만 하는 것이 아니라 죄에서 구원받기를 원한다면 희망이 있는 것이다.

이어서 삶의 개혁이 일어난다. 사람의 마음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변혁된다. 그렇다고 중생의 사역이 이 사람 속에 완전하게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어떤 이들은 여기까지 왔다가 육체의 정욕에 압도당하여 죄짓고 그들의 심령은 초창기보다 열 배이상 더 악한 상태로 떨어진다(마12:43-45 참조). 그러나 하나님의 사역이 그들에게 현저하게 나타나 삶에 개혁이 일어나고 예배에 참석도 하는 이들이 있다.

그렇다면 참된 회심과 불완전한 회심의 차이는 무엇인가? 이것은 한마디로 성령의 사역이 말씀 안에서, 그리고 말씀에 의해서 나타나는 회심과 성령이 없이 행하는 예비적 사역의 차이이다. 중생의 도구는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영이다. 중생한 사람은 세상과 교회에서 구별이 되고 대단히 중요한 사람이 되며 복음을 위해서 위대한 전도자가 되는 것이다. 이 사람은 부지런하게 되는데 다른 사람들이 경험하는 영적 체험을 할 수도 있고 체험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2.2 중생의 성격, 원인, 방법

중생은 성화의 근원과 시작이며 성도를 성화시키는 한 과정이다. 중생의 일을 담당하시는 직접적인 원인이 되는 분은 성령 하나님이시다. 중생에 있어서 성령의 사역은 도덕적인 권고, 즉 효력을 발생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설득을 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다. 물론 중생이나 회심에 있어서 성령께서는 전파된 말씀이나 그 말씀으로부터 이끌어내어진 빛과 진리의 적용을 통해 그와 같은 도덕적인 권고를 사용하신다. 그러나 이것은 성령의 전체사역이 아니고, 중생된 모든 자들의 영혼속에는 은혜로운 영적 생명의 원리를 주입하여 주는 성령의 실제적인 작업이 있다. 중생과 관련하여 인간들의 마음에 역사하시는 성령의 이러한 내적인 효력은 인간들을 중생시키는 일과 관련하여 절대로 실수나 실패함이 없으며 항상 유효하게 작용한다. 이 주장은 인간의 자유의지와 관련하여 많은 반대를 받는다. 그러나 중생에 있어서 하나님의 권능의 작용은 우리의 본성, 곧 우리의 마음과 의지와 성정에 적합한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몸과 마음을 단순히 수동적인 도구로 만들지 않으시며, 우리의 의지도 강제를 받을 수 없다. 성령의 권능은 내적으로 비밀스럽게 작용하여 우리의 마음 속에서 하나님을 향해 돌아서려는 의지를 창조해내신다. 하나님은 절대로 틀림이 없는 효과적인 능력을 통해 그 일을 이루시며 이것은 인간의 의지에 의해 결코 거부될 수 없다. 하나님은 회심케 하시는 일을 유효하게 하시기 위해서 모든 장애물들과 방해물들을 제거해 주신다고 약속하신다(신30:6; 골2:11; 신29:4; 겔36:26, 27; 렘24:7; 사44:3,4; 렘31:33). 우리가 마음에 할례를 받음으로써 하나님께로의 회심을 방해하는 여러 가지 편견들과 함께, 죄 가운데 포함되어 있는 무지와 완고함과 강퍅함의 모든 요소들이 전부 제거된다. 하나님은 그것들을 제거하기 위해 노력하겠다거나 제거하도록 설득하거나 돕겠다고 하시지 않는다. 절대적이고도 적극적으로 그 일을 손수 하시겠다고 하는 것이다. 제거와 함께 새로운 마음과 새로운 영이 부여된다. 이러한 새로운 마음 속에 하나님께 대한 거룩한 복종의 원리가 들어있고 이 거룩한 복종의 원리가 우리 속에서 생성되는 것은 우리의 회심을 통해서이다. 그래서 율법을 마음 속에 기록하시는데 이 일은 하나님께서는 우리 속에 실제로 생성된 복종의 원리를 통해서 그렇게 하신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마음의 할례를 받아 새롭게 하라고 명령하시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러한 명령을 통해 하나님께서 선포하시는 것은 우리의 능력이 아니라 우리의 의무인 것이다. 왜냐하면 그분은 스스로 그분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을 우리 속에서 이루시겠다고 약속하시기 때무이다 중생은 물론 이어지는 성화의 작업에 있어서도 우리가 가지고 행사하는 모든 능력은 중생때 성령께서 주입하신 새로운 영적 생활의 원리로부터 생겨나오는 것이다.


3. 성화(sanctification)

성화는 하나님의 영에 의해 우리 속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성령께서는 모든 믿는 자들을 직접, 그리고 독특한 방법으로 거룩하게 하신다. 성령님은 모든 사람들을 성화시키는 분이시고 성화의 창시자이시다. 성화에는 중생에서와는 달리, 정도(degrees)의 차이가 있다. 즉 이 사람이 저 사람보다 더 거룩하게 될 수 있고 저 사람이 이 사람보다 성화된 성품이 뒤떨어질 수 있는 것이다. 성화는 이처럼 차등이 있는 것이다.


3.1 은혜(체험)와 의무의 관계

성화에 대한 우리의 의무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명령을 하셨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는 약속을 주셨다. 명령이란 약속을 위한 어떤 여지가 없는 것이고, 약속이란 명령의 권위가 없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만일 거룩하게 되는 일이 우리의 의무라면 여기에 은혜라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만일 거룩하게 되는 일이 은혜의 결과라면 거기에는 의무라는 것이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은 논쟁은 ‘육체적 지혜’의 산물이다. ‘위로부터 온 지혜’는 우리에게 다른 것을 가르친다. 실로 성화에 있어서 은헤와 행함은 상반되는 것이다. 즉, 모순이란 말이다. “만일 성화가 행함으로 된 것이라면 은혜는 없는 것이고, 만일 성화가 은혜로 되었다면 행함이 없는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의 의무와 하나님의 은혜는 성화의 문제에 있어서 상반되거나 모순되는 점이 없다. 성화를 위해서 우리의 의무와 하나님의 은혜는 상호 필요한 조건이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우리의 의무를 행할 수 없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셨다 할지라도 우리가 우리의 의무를 이행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이 주신 은혜의 목적이 이루어지지 못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와 우리의 필수적인 의무는 일치할 뿐만 아니라 우리가 한 손을 가지고는 온전히 일을 할 수 없는 것과 같이 성령의 은혜로운신 역사에 우리의 의무가 종속되어야만 더 큰 효과를 거둘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단지 몇 사람을 제외하고는 탁월한 은혜를 받은 사람이 드물고 우리들 자신도 그렇다. 하나님은 부지런하라고 우리에게 명령하셨다. 순종이 그토록 중요한데 사람들은 태만하고 나태에 잠겨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들을 도와주려고 하시다가도 저들의 행동을 보고 오히려 미워하시게 된다.

만일 우리 안에 모든 은혜들, 즉 모든 은혜의 정도들과 결과들이 성령과 그의 뜻에 기인한다면 우리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이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우리 자신의 노력과 성실한 것은 소용없다. 더 거룩해져야 함과 순종의 의무들을 수행하기 위해 수고할 필요가 없다. 그러면 우리 자신이 노력할 것을 명백히 의도한 성경의 모든 명령과 경고와 약속과 권고들은 어떤 목적으로 주어진 것인가? 오웬은 이렇게 스스로 예상하는 반론을 제기하고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하나님의 영에 의해 주어지지 않은 영적인 선함이 우리들 안에 어느 정도라도 있다고 하는 것은 복음의 은혜를 무너뜨리는 행동이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의무를 나태하고 소홀하게 해도 된다는 것을 성령의 유효한 사역으로 입증하려는 것은 야만적인 무지이다. 하나님께서는 은혜의 한 방편으로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겠다고 약속하셨다. 이와 동시에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의무의 한 방편으로서 요구하시는 것이 있다. 성령께서는 우리 안에서(in) 역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성령께서는 우리를 통하여(by) 역사하시기 때문이다. 우리들의 의무는 하나님의 명령들을 열심히 순종하는 것이다.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명령들을 순종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또한 성령의 사역인 것이다. 그러므로 은혜와 거룩함의 향상은 대부분 신자의 의무수행에 달려있다.

그러면 여기서 우리는 이런 질문을 던질 수 있다. 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의무수행을 위해 힘쓰는 모습을 보여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삶이 변화되지 아니하고, 그들의 거룩함이 향상되지 아니한다면 그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이것은 위의 질문에 대한 역이다. 이것은 또한 성화의 과정이 우리 인간의 노력 여하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은혜의 체험에 결정적으로 관련됨을 보여준다. 오웬의 대답은 분명하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가졌다고 말하는 자들 중에도 그분의 영광을 이해하고 그분의 형상으로 변화하는 자는 소수 뿐이다. 단지 그리스도의 행동을 본받음으로써는 아무도 그분과 같이 되지 못할 것이다. 오직 그리스도의 영광을 체험하는 것만이 믿는 자를 그리스도와 같이 만들 힘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성경의 단순한 지식으로는 삶이 변화되거나 거룩함의 향상이 따르지 않는다: 만약 우리가 그리스도의 영광에 대해 성경에서 얻는 단편적인 지식과 같은 단순한 개념으로 만족한다면 그런 개념에는 삶을 변화시키는 능력이 전혀 없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제 우리는 성화에 있어서 은혜의 체험과 우리의 의무의 부분들을 나누어 자세히 살필 것이다.


3.2 은혜의 체험

성도의 성화에 있어서 체험이 차지하는 비중은 결코 적다고 할 수 없다. 체험의 의의에 대해서 오웬은 이렇게 설명한다: 성령께서는 신자들에게 믿음의 진리와 실제, 그리고 탁월함을 경험하게 하여 그들을 거룩하게 하신다. 경험이란 것은 은혜로운 양식(food)이다. 그러므로 경험은 성도를 성장시키고 강화시킨다. 믿음으로 얻어진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는 믿음의 맛(taste)이고 이러한 믿음의 맛은 성도를 무게있게 하고 키를 크게 한다. 이렇게 하여 하나님께서는 믿음의 약한 교회를 기르신다. 그리고 하나님은 교회가 그의 능력과 신실하심을 경험하도록 하신다. 믿음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도 그가 믿는 것들의 실제적이고 능력있는 특별한 경험들에 의해서 그의 믿음이 성장하고 강화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성령께서는 성도들에게 영적이며 지각할 수 있는 실제적이며 능력있는 경험을 주신다.

이 체험은 분명하게 그리스도께서 성령을 보내주시는 사역과 더불어 교회에 주신 성령의 역사와 관련이 있다.

성령은 메마르고 열매를 맺지 못하고 타서 갈라진 땅과 같은 인간의 심령에 부어지심으로 사람의 심령이 샘이 되게 하시며 거룩하고 의로운 열매들을 맺게 하신다는 것이다(히6:7). 이와같이 성령에 의해서 그리스도께서도 “벤풀에 내리는 비같이 땅을 적시는 소낙비같이 임하신다”(시72:6). 선하신 주님은 우리들에게 이러한 물들과 새롭게 하시는 소낙비를 항상 주신다.

물론 초대교회의 기초를 놓는 데 필요했던 성령의 특별한 권능의 발휘가 그쳤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분의 전체적인 은혜의 역사는 오늘도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들 가운데서 오순절 때와 조금도 다름없이 수행되고 있으며 교회를 가르치는데 필요한 성령의 은사 역시 계속해서 부여되고 있는 것이다(엡4:10이하). 그러므로 성령의 역사를 인정하는 것이야말로 오늘날의 모든 신자들이 해야 할 중요한 일 중 하나인 것이다.

계속해서 오웬은 이생에서 신자들에게 주어지는 영적 경험에 대하여 그 문을 한껏 열어주고 있다.

때때로 참된 신자들은 이생에서도 그리스도를 아는 데서 발견되는 기쁨을 조금은 경험한다. 성경과 성령이 그리스도 안에서 빛나는, 창조되지 아니한 하나님의 영광을 느끼게하여 그것은 그들의 영혼을 형언할 수 없는 기쁨과 평안으로 가득 채울 정도이다. 이런 경험은 흔치 않은데 그것은 우리의 나태와 신령한 빛의 결핍 때문이다. 또한 우리는 하나님의 지혜, 선하심, 사랑, 은혜, 자비와 능력은 그분 안에 존재하는 것이므로 무한히 영광스러운 것들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하나님의 속성들이 교회의 구속을 위해 작용하는 것을 보는 만족스럽고 가슴 훈훈한 체험을 할 때에라야 그것들을 실제로 이해하게 된다. 그때 그 영광은 형언할 수 없는 신선함과 기쁨으로 우리에게 빛을 비춘다.

아가서에는 그리스도께서 자기 교회와 더불어 사랑과 은혜 가운데서 내적으로 교통하는 것이 기록되어 있다. 이 책은 대단히 무시받고 있으며 오해되고 있다. 단 며칠, 단 몇 시간만이라도 아가서에 묘사된 것과 같은 그런 사랑의 교제를 그리스도와 더불어 만끽하며 보낸다면, 땅의 모든 보화를 얻는 것보다 훨씬 더 값진 축복이 될 것이다. 우리가 신약성경의 완성된 계시의 혜택을 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의 영광을 구약의 신자들보다 더 많이 이해하고 있지 못하다면, 우리는 신약성경을 받을 만한 자격이 없는 무가치한 자로 판단받게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서도 신령한 참 축복에 관심도 없이 지극히 분별없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들은 주 그리스도께서 보혜사 성령으로 하여금 우리에게 가져다 주게 하신 거룩한 영적 상쾌함을 알지 못한다. 그런 축복에는 영적 평화, 신선한 위로, 말로 다 할 수 없는 기쁨과 복된 확신이 포함된다. 이런 체험이 없다면 우리 기독교는 무정하고 생명이 없고 아무 쓸모가 없는 것이다. 지금 이땅에서 이 영적 축복을 누린다는 약속을 믿지 못한다면 어떻게 하늘의 영원한 영광에 관한 약속을 믿는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이런 영적 신선함을 주는 수단들이 있음으로해서 그분과 함께 즐기게 된다(계3:20 참조). 그런 축복을 어떻게 받을 수 있으냐고 묻는다면 그 대답은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영광을 바라봄으로써이다.(벧전1:9,10 참조)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는 광경은 항상 동일함과 동시에 항상 새로울 것이다. 가장 온전한 목표인 그리스도의 영광을 중심으로 하는 복된 생활을 가장 온전히 누리는 기쁨 속에서 그 마음이 전혀 방해받지 않고 말이다. 이 체험은 우리의 인간 본성이 누릴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축복이다.

그러나 이 은혜의 체험에도 정도가 있어서 보다 작은 체험에서 보다 큰 체험으로 나아갈 수가 있다는 것을 오웬은 지적한다: 본성적인 상태에서 영광으로 나아가는 진전과정이 있다. 은혜는 본성을 새롭게 하고, 영광은 은혜를 완전케하여 마침내 전 영혼이 하나님 안에서 안식하게 된다. 소경은 구세주께서 처음에 그 눈을 만지셨을 때 사람들을 걸어가는 나무라고 생각했다. 구세주께서 두 번째 만지시자, 그는 모든 것을 명확히 보았다(막8:22-25 참조). 이것은 은혜를 보는 것과 영광을 보는 것 사이의 차이와 같다.

이렇게 해서 현세에 성도가 누리는 은혜의 체험은 장차 올 영광의 체험을 맛보게 하는 점에서 그리고 장차 올 영광을 대망하고 기대하게 한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는 것이다: 현생에서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의 믿음은 비록 완전하게는 아니더라도 우리 안에서 점차로 변화를 일으킨다.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완전하고도 영원히 회복될 것을 확신하고자 한다면 여기에서 그런 변화들을 어느 정도 체험해야 한다(고후3:18; 4:16-18; 빌3:10-14). 여기 이 땅에서 믿음에 의해 보는 그리스도의 영광이 아무리 미약하고 불완전하다 해도 그것은 현재 이땅에서 누리는 어떠한 기쁨이나 만족에도 비할 수가 없다. 믿음으로 보는 그 광경이 아무리 보잘 것 없어도 그것은 그리스도를 누리는 장차의 축복을 맛보게 해주어 우리는 그분을 보며 영원토록 그분과 함께 있으며 그분이 우리를 아신 것같이 그분을 알게 될 날을 탄식하면서 고대하도록 자극을 받게 된다.

성도의 영적 체험에는 늘 은혜로우신 성령께서 찾아오시는 체험만 있는 것이 아니다. 어떤 때에는 성도들이 하나님이 떠나가시는 체험을 하게 된다. 오웬은 이 체험도 놓치지 않고 설명한다: 우리의 마음이 영적 본분을 다함에 있어 점점 냉냉해지고 생기가 없게 되면, 주 그리스도께서 잠시 우리를 떠나신 것이 틀림없다.

성령의 떠나심은 전체적이거나 부분적이다. 어떤 사람들은 성령의 은사를 많이 받았고 그 은사들이 계발되어졌으며 또한 확신 가운데 복음을 소유해왔고 많은 직무들을 행해왔다. 그러나 그가 시험에 빠져들게 되고 자신의 정욕에 정복당하게 되고 자신이 시작했던 선한 일들을 포기하고 어리석음으로 다시 돌아간다면, 그와 같은 사람들로부터 성령은 완전히 떠나신다. 성령은 그들을 포기하시며 그들 자신의 마음의 정욕대로 내버려두신다. 그래서 그들의 모든 은사들은 고갈되며 시들게 된다. 그들의 빛은 사라지며 그들은 미래에 대한 비전 대신에 어두움을 가지게 된다. 이와같은 경우는 참으로 비참할 때 일어난다. 만일 그들이 은혜의 성령에게 분노를 더하여 성령의 전체적인 일에 경멸을 더한다면 그들의 경우는 일반적으로 회복할 수 없는 것이다(히6:4,6; 10:26). 사람들은 그들의 마음 가운데 성령의 사역을 받을 수 있으나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게 되거지거나 회심이 일어나지 않을 수 있다. 왜냐하면 성령의 사역들의 본질과 종류는 성령 자신의 뜻과 목적에 의해서 통제되기 때문이다. 만일 성령이 단지 내적 조명과 확신 만을 의도하였다면, 그 이상의 역사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말하자면 이것은 중생의 예비적인 사역에 들어와 맛을 보고는 다시 타락한 불신자의 체험이다.

성도로부터도 성령은 떠나실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부분적이며, 일시적이다. 왜냐하면 은혜의 언약 안에서 성령이 성도들에게 주어졌기 때문에 성령께서 성도들로부터 완전히 그리고 전적으로 결코 떠나시지 않으실 것이라고 그 약속들은 성경에 표시되어 있기 때문이다(사59:21; 렘31:33; 32:39,40; 겔11:19). 성도는 영적 고갈과 심한 연약함에 내버려질 수 있다. 이때부터 성도들은 자신들이 철저히 내버려지고 기억되지 않음을 깨닫게 된다(사40:27; 54:7). 그런 이와같은 성도로부터 성령은 절대적으로나 완전히 결단코 떠나지 않으신다. 그러나 우리가 정말 믿음으로써 복음 안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영광을 바라보고 계속 거룩한 생각과 묵상에 잠겨있으면,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그분의 생명과 은혜를 분명히 느낄 것이다.


3.3 성도의 의무

비록 우리가 성령의 사역으로 성장하여 거룩하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성화의 효과적인 부분에는 우리 자신의 사역(our own work)과 우리의 의무(duty)가 있어야 한다. 또한 성도가 받아 누리는 은혜는 경건의 연습을 통해서 강화되고 증가된다. 성도들을 자라게 하는 실천 훈련들도 성령께서 성도들을 고무하시고 자극하심으로 가능하게 된다. 성도들은 이 믿음의 훈련을 통하여 살아있는 신앙을 유지하고 삶을 유지하는 것이다. 나아가서 성도들 속에 계시는 성령께서는 훈련을 성도들에게 유효적으로 은혜를 충만히 주시는 수단으로 사용하신다. 한 가지 은혜에 다른 은혜를 더하시는 것은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우리들의 일들과 조건들 위에 필요한 은혜와 은혜스러운 활동들을 더하신다.

오웬은 인생이 알게되는 쓴 경험들이 가지는 훈련의 효과를 간과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삶의 고통, 유혹, 또는 여러 가지의 경우를 경험하는데, 이것은 새로운 사역을 실천하기 위한 것으로 은혜를 새로운 훈련으로 바꾸어주신 것이다. 이러한 훈련에서 사람들은 사람의 활력이나 영적인 기쁨과 의무를 발견하지 못하고 은혜가 소멸되고 마는 것이 아닌가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훈련을 통하여 성화의 사역이 실제로 강화되고 유효하게 되는 것이고, 거룩한 심령이 건강하게 자라는 것이다.

정리를 하자면, 성경은 우리들에게 은혜의 방편으로서 우리들에게 임하시는 하나님의 사역과 우리의 의무가 조화를 이루므로 우리가 깨끗하게 될 수 있다고 가르친다. 결코 우리들에 의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즉, 성령의 사역과 우리의 의지가 작용하여 이 사역이 온전하게 이루어지는 것이다.

오웬이 제시하는 성도의 의무들은 크게 적극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으로 나눌 수 있다. 전자는 중생에 의해 우리 안에 심기워진 새로운 능력들과 기호들을 소생시키는 것이고, 후자는 그야말로 죄를 죽이는 것이다. 우리는 적극적인 성도의 의무에서 기도와 묵상을, 부정적인 성도의 의무에서는 죄를 죽임(mortification)과 성화의 대적으로서의 게으름의 요소들을 고찰할 것이다.


3.3.1 기도

기도의 의무는 성령의 사역과 분리될 수 없다. 성령은 우리들 안에 있는 모든 은혜의 조성자이시고 근원이시고 유일의 원인이시다. 하나님은 간구의 영이신 성령을 우리에게 부어주신다. 그래서 성령께서는 우리들 안에 기도의 의무를 감당할 수 있는 은혜스러운 성향을 주셔서 영적으로 그리고 기쁨으로 기도하게 하시며, 기도의 능력도 주신다. 우리는 이 약속의 성취를 이미 받았다. “너희가 아들인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갈4:6; 참조, 요1:12; 딤후1:7; 롬8:15). 이렇게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기도가 무엇인지 알게하시고 기도할 마음을 주신다. 기도가 필요없다고 하는 사람이 없도록 기도하고 싶은 마음을 주셔서 기도하게 하신다. 기도는 우리의 타락한 본성의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요, 기도할 때 우리는 마음 속에 내재하는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과 그리스도와 은혜와 성화와 영적인 특권들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된다. 기도할 때 우리는 일시적인 것에 대해, 현세에 대해 가지던 관심이 바꾸어진다. 성령께서 신자들의 마음 속에 기도를 통하여 “비애와 경건한 슬픔”을 가지게 하시어 간절히 간구하게 하신다. 이것으로 말미암아 말로 형언할 수 없는 뜨거움과 기쁨을 가지게 되는 경우가 있다. 이 마음이 커져서 때로는 특별한 경험을 하게 되는 것이고 이웃에게는 좋은 영향을 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성령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도우실 뿐 아니라 친히 우리를 위해 간구하신다(롬8:23,27). 그러므로 성도는 마음을 다하고 영혼을 다하여 항상 기도의 의무를 감당해야 한다. 오웬은 성도들이 기도할 것을 간절히 촉구한다: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주셨다. 그런데도 어리석게 기도에 게으른 사람은 누구인가? 회개하기를 더디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이렇게 하는 사람은 성령을 얼마나 슬프시게 하는 것인가! 그리고 우리의 심령은 얼마나 손상을 당하는 것인가! 우리가 날마다 기도해야 할 의무에 게으를 수 있단 말인가? 성령의 은혜스로운 호의를 어떻게 무시할 수 있단 말인가? 기도하지 않고 습관적으로 육적으로만 살아갈 수 있을까? 아,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사람들은 기도할 수 있는 성령의 은사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기도할 줄 모른다. 심령으로 속 사람이 기쁨으로 은사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기도할 줄 모른다. 이것이 얼마나 큰 죄인가! 오늘날은 특별히 유혹이 많고 위험이 도처에 많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더욱 기도의 의무를 다해야 한다. 만일 우리가 세상적인 말은 적게하고 기도를 더 많이 한다면 모든 일이 더욱 잘 되어질 것이다.

기도야말로 하나님이 성도의 성화를 위해 주신 방편이다. 마치 匠人이 그의 직업의 기술을 연마해야 하듯이, 우리는 믿는 자들을 단련시킬 목적으로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방도들을 사용해야 한다. 이 방도 중 첫째가는 것은 열심있는 기도이다. 모세처럼 하나님 영광을 보여달라고 기도하라(출33 참조). 바울처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엡1:17)라고 기도해야한다.

성화의 방법은 학습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마음 가운데 기도를 통해서 된다고 할수 있다. 성화는 은혜의 성령과 간구에 의해서 되어지는 것이다. 기도할 수 있는 신자는 기도를 함으로, 그리고 성화의 성령이 성도들 가운데 역사함으로 성도가 거룩하게 되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지혜롭게 기도를 통하여 우리들의 마음 속에서 역사하시는 성령의 사역을 생각한다면 우리는 우리들 마음 속에 역사하시는 성령의 은혜스러운 사역에 대해서 대단히 많이 이해하는 것이다.


3.3.2 묵상

오웬은 성도가 그리스도의 영광을 묵상함으로써 얻는 유익을 그의 최후의 저술인 『주님 영광에 대한 묵상이 신자에게 주는 유익/위로』(1684)에서 밝혀주고 있다. 그는 “만약 우리의 장래 행복이 그리스도께서 계시는 곳에 있으면서 그분의 영광을 보는 것을 의미한다면, 그것에 대한 준비로서 그 영광에 대한 생각으로 우리 마음을 가득 채우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이 없을 것이다”라고 서문에서 제안한다. 따라서 성경 각권을 보면서 그리스도의 영광에 관해 기쁨을 가지고 묵상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은 천상에서 그 영광을 보고자 하는 참된 소망을 갖지 못할 것이다.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영광을 끊임없이 묵상함으로 비롯되는 유익들은 1)우리가 하늘 나라에 적합한 자로 지어질 것이고, 2)그리스도의 영광에 대한 참된 견해는 우리가 그리스도처험 되기까지 우리를 변화시킬 수 있으며(고후3:18), 3)그리스도의 영광에 관한 규칙적인 묵상은 우리 영혼에 안식과 만족을 줄 것이며, 4)그리스도의 영광을 아는 지식은 우리의 영원한 축복의 근원이 되는 것이다. 평강과 위로와 기쁨과 확신을 가지고 그리스도와 더불어 즐기는 그런 축복을 어떻게 받을 수 있으냐고 묻는다면 그 대답은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영광을 바라봄으로써이다.(벧전1:9,10 참조)

심지어 한 그리스도인이 ‘얼마나 심도있는 영적 생활의 체험을 갖느냐’하는 것도 그의 안에 거하시는 그리스도에 대해 얼마나 생각하고 얼마나 기뻐하느냐에 비례하는 것이다(갈2:20 참조).

오웬은 묵상의 유익과 성화생활의 비결로서의 묵상을 소개하면서 묵상의 의무를 수행할 것을 권면한다: 우리는 성경에서 얻는, 그리스도의 영광을 아는 지식에 관해 자주 묵상해야 한다.


3.3.3 죄를 죽임(mortification)

성령께서 우리를 살피시고 온전하게 만들어 주시고 우리의 성장을 방해할 요소를 제거시켜 주셨다고 하더라고, 만일 우리가 어떠한 죄든지 허락하고 거기에 빠져버린다고 하면 우리가 아무리 잘 성장했고 많은 사람들이 이 사실을 안다고 하더라고 우리는 결국에는 전면적으로 부패하게 될 것이다.

성화의 본질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죄를 보는 견해에 개선이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무엇보다도 성도는 타고난 죄의 본질과 결과에 대해 알도록 힘써야 한다. 비록 우리가 성령의 도움이 없이는 이 일을 제대로 이행할 수 없긴 하지만, 그래도 우리에게는 다음과 같은 의무들이 요구된다: 1)우리들 스스로의 모습을 비추어주는 거울인 성경을 자세히 살피라. 성경을 통해서도 스스로의 일그러진 모습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타락한 채로 살다가 저주받은 채로 죽을 수 밖에 없다. 2)자신의 타락된 상황과 관련된 성경의 증거를 이미 받은 사람은 그 증거를 통해 자신을 살핌으로써 자신의 더러운 모습을 한층 더 확실하게 깨닫게 된다. 실로 그들은 거울 속에 비친 불결한 사람을 향하여 “부정하다! 부정하다! 부정하다!”고 외쳐댈 것이다. 3)하나님의 빛과 인도함을 받기 위하여 기도하는 것은 우리 모두의 의무이다.

모세가 그 신을 벗으라는 명을 받은 것처럼(출3:2), 우리도 타락한 본성으로부터 좇아나는 모든 공상과 욕망을 벗어야 한다. 그래야 믿음의 활동에 의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볼 수 있다.

여기에 죄를 죽임의 당위가 있다(롬8:13; 골3:5 참조). 죄를 죽인다는 것은 부패한 본성의 모든 힘과 정력을 끊어버리고, 세상적이고 육체적인 것으로 기울어지는 성향을 근절시킨다는 것이다. 죄의 행동을 유발시키는 세력을 죽이고, 행동을 못하게 하여 그 목적이 달성될 때까지 그것을 없애버리는 것이다. 이것은 계속해서 항상 행하여야만 한다. 그래서 죄에 대한 우리의 가장 큰 의무는 죄를 억제하고 죽이고 처형시키는 것이다. 아픔없이는 죄를 죽이지 못한다. 오른 손을 자르고 오른 눈을 뽑는 아픔이 있어야 한다. 감정적 격렬함이 없이는 죄를 죽이지 못한다.

우리가 죄를 죽이는 일을 하지 않으면 죄가 마음을 어둡게 하고 육신의 정욕이 잡초처럼 자라게 된다. 신자는 날마다 자기 안에 있는 죄의 세력을 죽이는 것을 자신의 의무로 삼아야 한다. 죄를 죽이지 않으면 죄가 신자를 죽인다. 우리는 성령의 도우심과 능력으로만 죄를 죽일 수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를 죽이는 일의 주체는 참 신자이다. 성령께서 우리의 자유의지를 보존하시므로 죄를 죽이는 일은 성령에 대한 우리 신자의 순종의 일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죄를 죽이는 의무를 소홀히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원수를 대적하기 위해 주시는 도움을 거부하는 것이다. 죄를 죽이기를 원하는 자가 기도하고 탄식하고 근심하며 구원을 갈망하지만 경건한 독서, 기도 생활, 하나님과의 묵상을 게을리하면서 자기 생활 속에서 죄가 세력을 보유하고 있는 이유를 알고자 한다면 이는 어리석은 일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것이 사람들의 일반적인 상태이다.


3.3.4 성화의 대적: 게으름

위에서 고찰한 성도의 의무들을 행하는데 가장 큰 대적은 게으름과 나태함이다. 오웬은 대단히 많은 곳에서 이 성화의 대적을 지적하고 있다.

만일 우리가 이러한 영적인 일에 게으르거나, 의무를 이행하지 않거나, 은혜받기 위한 훈련에 참여하지 않는다면, 의심할 것없이 우리는 우리 자신이 부패한 것이고 ‘다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는 것이다. 참된 신자들이 이 세상에서 경험할 수 있는 형언할 수 없는 기쁨과 평안이 흔치 않은 것도 나태와 신령한 빛의 결핍 때문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영광을 묵상하는 본분에 열심을 내면 영광의 서광은 우리 영혼에 보다 자주 비춰올 것이다.

사실 우리들 대부분은 [그리스도의 영광을 체험하는데] 관하여 심각하게 생각하느라 시간을 허비하고 싶어하지는 않는다. 그리스도의 영광을 생각한다는 것은 우리에게 너무나 높고 너무나 어려운 것이다. 우리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즐거워하다가도 오래지 않아 싫증을 내고 곧 그런 생각으로부터 돌아서 버린다. 그래서 나태한 영혼은 결코 [모세가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던 것과 같은(출애굽기 33장 참조)] 이런 영광의 체험을 얻지 못한다. 우리는 지독한 게으름으로 인해 하늘의 것들에 관해 묵상하는 것을 소홀히 하는 경우가 너무도 잦은 것이다.


4. 결론: 평가


우리는 지금까지 그리스도의 체험에 관한 존 오웬의 입장을 살펴보았다. 이제 그의 입장을 평가하고 그의 견해가 오늘날의 교회와 신학에 던져주는 도전을 분석함으로써 결론을 맺고자 한다.


4.1. 오웬의 체험신학에 대한

역사적 평가

오웬은 그리스도인의 체험을 신학화한 첫 번째 개혁신학자였다. 개혁자 칼빈은 그리스도인의 체험을 신학화한다는 점에서는 이렇다할 저서를 남기지 않았다. 그러나 청교도들에게 있어서는 체험에 대한 남다른 관심과 신학화의 작업이 이루어졌다. 이런 의미에서 싱클레어 퍼거슨이 특별히 오웬의 신학에 이르기까지의 언약신학의 발전에 관하여 지적한 것은 의미심장하다: 언약신학이 16세기에는 성경을 해석하는 열쇠였는데, 17세기에는 그것이 기독교 체험을 해석하는 열쇠가 되었다. 오웬은 체험을 신학화하는 탁월함에 있어서도 다른 청교도 신학자들과는 구별된다. 이 17세기의 체험 신학자 존 오웬이 『성령론』(1674)을 발표한지 약 70여년 후인 1747년에는 조나단 에드워즈가 Religious Affections를, 그 후로 또 약 70여년 후인 1810년대 초에는 구 프링스톤의 아키발드 알렉산더가 Thoughts of Religious Experience를 저술, 출간하였다. 이 두 저서는 개혁주의 입장에서 그리스도인의 체험을 본격적으로 다룬 몇 안되는 걸작들이다. 비록 오웬의 저서가 체험의 문제만을 중점적으로 다룬 것은 아니지만 서론에서 언급하였다싶이 그의 관심의 초점만큼은 분명하였고 또 우리는 그것을 살펴본 바 있다. 이런 점에서 오웬은 개혁신학에 있어서 체험에 관한 신학적 연구를 본격화하는데 문을 열어준 장본인이라고 할 수 있다.



4.2. 하나님의 역사와 인간의 행위 사이의 균형의 신학

조나단 에드워즈 연구에 생애를 바친 존 거스트너(John Gerstner)박사는 신학의 역사에 두 가지 큰 물줄기를 합리주의(rationalism)와 신앙주의(fideism)로 나눈다. 바람직한 것은 양자의 종합이다. 이것이 조나단 에드워즈에게서 완전한 균형을 이루었다는 것이 거스트너의 주장이다. 거스트너의 이 분석이 옳다고 할 때 필자는 이제까지의 논의를 통해서 오웬에게서도 역시 이 균형의 신학이 나타났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고 본다. 가령, 회심에 대한 오웬의 견해에서 회심은 조명, 자각, 개혁으로 단계적으로 구분되어서 근면한 마음과 이성으로 살피는 자세는 중생하는 자에게 있어 충분조건은 아닐지라도 필요조건을 형성하게 된다. 여기서 오웬은 유신논증의 유효성과 한계를 동시에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비록 이와 똑같은 일치를 이루는 구분은 아닐지라도, 성화에 있어서도 유사한 균형을 찾아볼 수 있다. 체험에 대한 강렬한 갈망이 있는가 하면 인간 편에서의 노력이 또한 철저하게 강조된다. 오웬에 따르면, 인간의 노력이 성화를 가져오지 않지만, 인간의 노력이 없는 성화는 불가능하다. 성령의 은혜로우신 역사에 인간의 의무가 종속되어질 때에 영적 시너지(synergy)효과를 거둘 수 있는 것이다. 오웬은 어느 한편으로 치우칠 위험에 대하여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경계한다. 그리하여 그의 신학은 인간의 이성과 하나님의 찾아오시는 은혜로우신 역사 사이에서, 그리고 하나님의 역사와 인간의 행위 사이에 온전한 균형을 이룬다.


4.3. 오웬의 체험 신학과 영성이 가지는 현대적 의의

오늘날 20세기말의 교회에 17세기 오웬의 신학은 적시성을 지니는가? 청교도에 대한 연구, 특별히 본고에서 살펴보기를 원했던 존 오웬 연구는 결코 헛되지 않았다는 데 우리는 동의할 수 있을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하나님의 말씀은 변하지 않았고 또 그 말씀을 대하는 인간들의 본질도 변하지 않았다. 오웬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간의 마음을 분석하여 체험을 설명해준 것은 오늘날의 모든 사람들에게도 역시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다.

먼저, 은혜체험과 인간의무 사이의 관계문제이다. 교회의 역사나 신학의 역사는 언제나 본고의 초점이 된 하나님의 역사와 인간의 행위에 관한 문제에서 체험 위주의 신비주의적인 사람들과 행위와 의무 위주의 율법적인 사람들로 양분되어 왔다. 오늘날도 예외가 아니어서 오순절운동과 같은 은혜체험 위주의 신앙양태가 있는가하면 엄격한 신앙의 의무들을 부과하는 율법주의적 신앙양태가 보편화되어있다. 오웬은 여기에 결정적인 종지부를 찍어주었다. 인간의 노력이 회심이나 성화를 가져올 수는 없다. 그렇다고 인간 편의 노력이나 열심이 없는 사람이 회심이나 성화의 은혜에 참여할 수 없다.

둘째, 회심에 대한 깊은 이해와 강조이다. 오웬은 오늘날의 많은 교회들에서 통용되는 천박한 회심의 견해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하였다. 교회에 처음 찾아온 사람이면 새신자로 간주되고 소정의 과정을 거쳐서 세례에 이르게 되는 것이 오늘날의 관행이다. 중생의 예비적 체험들을 가지는 사람들은 이미 교회에서 중직자의 자리에까지 이르게 되기도 한다. 이것은 청교도들, 특별히 오웬에게 있어서는 죄악된 것이다. 교회를 깨는 요소가 되는 것이다. 오웬의 면밀한 회심의 교리는 우리들로 하여금 우리 자신의 회심 뿐만 아니라 교회에 들어오는 새로운 사람들의 회심을 주도면밀하게 살펴볼 것을 요구한다. 심지어 생활의 변화와 도덕적 개선조차도 완전한 회심으로 받아들이기를 주저했던 오웬의 주의깊은 태도는 교회를 참교회되게 하는데 필수적인 요소임에 틀림없다.

셋째, 성화에 있어서의 은혜체험과 의무의 동일한 강조이다. 일면 이 체험에 관한 부분들을 보면, 가령, 아가서 이해같은 부분인데 이것은 상당히 신비주의적인 영성의 일부분을 느끼게 해주고 있고 반면, 의무를 강조하는 정도를 보면 이것은 율법주의 이상의 강조를 기도와 묵상, 그리고 죄를 죽임과 나태함을 이김에서 보여주고 있다. 원종천박사는 그의 저서에서 청교도 영성의 변화를, 엘리자베스 여왕이 죽는 1603년까지의 율법주의적 실천적 영성에서 시민전쟁으로 얼룩진 17세기 전반부의 신비주의적 영성에로 옮겨가는 것으로 파악한다. 물론 이를 너무 예리하게 대조시켜서는 안된다고 하지만, 17세기 말하자면 신비주의적 영성의 시기에 신학을 한 오웬에게서 우리는 이 양자의 균형있는 종합을 보게 되는 것이다. 결국, 오웬의 신학과 영성은 은혜체험과 의무 양자를 모두 강조함으로써 난세에도 살아남을 뿐 아니라 난세를 이길 기독교의 모습을 제공해주는 것이다.

넷째, 성화의 소극적 차원에 대한 말할 수 없는 강조이다. 오늘날 성화는 제로 상태에서 무엇인가를 쌓아가는 것처럼 인식되고 또 가르쳐지고 있다. 성경공부와 기도와 교회봉사를 통하여 성화의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한다. 그러나 칼빈도 말했고, 오웬이 보다 발전시켰고 체험적으로 강조하였던 바, 죄를 죽임의 요소는 이 시대의 교회가 회복해야만 할 사활적으로 중요한 요소이다. 이런 성화에 대한 실존적 靈戰으로서의 인식은 이 시대의 기독교의 실패에 대한 바른 대안이 될 수 있다.

다섯째, 회심에서 임종까지 그리스도인의 삶을 보다 작은 은혜의 체험에서 보다 큰 은혜의 체험에로 나아가는 과정으로 이해하였다. 오늘날의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 가장 큰 위기라고 한다면 그것은 냉철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지적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오웬은 모든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기대를 가지고 살 수 있을 만한 은혜 체험의 광대함을 말하고 있다. 이것은 임종의 순간, 완전한 영광의 체험에로 이어질 것이다. 오웬이 그의 마지막 책인 『묵상』을 다 완성하고 임종을 기다리고 있을 때, 그 책의 교정과 인쇄를 담당한 사람의 방문을 받고 그에게 한 말은 오웬의 체험신학 연구를 마무리하기에 가장 영광스러운 선언이다. “오 페인형제여, 오랫동안 기다리던 날이 마침내 왔네. 내가 이 세상에 살 때와는 다른 방법으로 나는 영광을 보게 될 것이라네.”

오웬은 그의 시대에만 아니라 오늘날의 교회에도 적절하다. 신학은 공허한 이론이 아니다. 신학은 체험을 포함한 그리스도인의 삶의 모든 국면을 분석하고 대답을 주어야 한다. 이 신학은 근본적으로 변할 수 없는 인간의 본성처럼 세월을 두고 유효하다. 교회의 신학자 존 오웬의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체험과 신학자로서의 탁월함과 진실함이 만들어낸 신학이 오늘의 신학과 교회의 삶에 던지는 도전은 우리 모두에게 의미심장하다.

참고문헌


Owen, John. The Works of John Owen. Ed. William H. Goold. Edinburgh:
The Banner of Truth Trust, 1966.
---------. 『개혁주의 성령론』이근수 역. 서울: 여수룬,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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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cker, James. 『청교도 사상』박영호 역. 서울:기독교문서선교회,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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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urguson, Sinclair B. John Owen on the Christian Life. Edinburgh: The Banner of Truth Trust, 1987.


귀신과 관련된 몇가지 이야기 소개 jesus recovers us

아래 자위행위 강요·동영상 유포… 性的폭력 급증이라는 기사를 보고





장경동 목사라고 일반인들도 어느정도는 아실겁니다.

 

그 분이 cts tv에 나와서 한 이야기인데 간략히 소개해 드리고자 합니다.

 

어떤 권사님에 관한 이야기 인데요.

 

그 분은 외양적으로는 매우 암전하고 고상하신 분이었답니다.

 

하지만 30년 가까이 원인을 알 수 없는 두통을 앓고 있었습니다.

 

처음 두통이 생긴 이후 1알씩 먹기 시작한 진통제를 30년이 지나면서 어느넛 한번에 30알(구체적인 숫자는 기억이 가물가물해서 틀릴 수 있습니다.)가까이 먹어야 두통이 자그러지고 잠을 잘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자기 안에 누가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장경동 목사에게 안수를 해 달라고 했다고 해요.

 

그래서 장경동 목사가 안수를 했는데 그렇게 고상하던 권사님이 갑자기 듣기 거북한 웃음소리를 내면서 비실비실 웃기만 하더래여.

 

일단  그 날은 집으로 보냈는데 다시 또 그 권사님이 안수를 해달라고 왔더랩니다.

 

그래서 좀 이상하다고 생각해서 다시 안수를 했더니 거무뛰뛰한 것이 그 권사님 몸에서 쑥 나오면서 그렇게 분한 듯이 통곡을 하더랍니다.(그 권사님 안에 있던 귀신이죠.)

 

그리고 그 귀신 왈 저것을 지옥으로 끌고 갈려고 30년간을 버티면서 안들키고 있었는데 원통하다고 하더랍니다.

 

나중에 그 권사님 왈

 

자기 집안이 원래 부자였는데 갑자기 집안이 망해서 밤 먹는 사람 수를 줄이려고 집에서 급하게 그 권사님을 시집을 보냈답니다.

 

그런데 막상 시집을 와서 보니까 그 남편이 너무나 맘에 안들고 그래서 달 밤에 나와서 집 기둥을 부여잡고 그렇게 울었답니다.

 

일종의 원망의 마음이었고 의지할 곳을 찾는 마음이었다고 한네여.

 

그렇게 서럽게 울때 귀신이 들어왔던 것이었습니다.(하나님 외에 다른 의지할 어떤 존재를 달밤에 눈물까지 흘리면서 찾자 귀신이 쑥 들어간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두통이 시작되었다고 하구요. 그러다가 30년을 거치면서 매년 한알씩 늘려서 30알의 진통제를 먹어야 겨우 잠을 잘 수 있었다고 하구요.

 

암튼 그렇게 해서 30년 간을 그 권사님을 괴롭히던 그 귀신은 ?i겨났습니다.

 

우리의 주위에 영적 존재는 분명 존재합니다.

 

저도 개인적으로 비슷한 체험을 했지요.

 

저 같은 경우 하나님을 떠나 살다가 극적으로 하나님을 뜨겁게 체험했는데 제가 하나님을 온전히 영접한 이후 새벽에 깨어났을때 갑자기 귀신이 제 몸에서 툭 튀어나오는 것을 봤습니다.(그리고 이때 쫒겨겨난 귀신이 얼마후에 저에게 다시 찾아와서 짐쩍거렸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쫒아내서 귀신의 음성이 들리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저에게 새벽기도를 시키실려고 음성으로 새벽 4시 30분에 깨어나라고 부르시기도 했습니다.(이것은 딱 한 번 있었습니다.)

 

저 권사님 같은 경우 외양작으로는 하나님을 믿는다 했지만 그 남편에 대한 원망하는 마음을 계속 가지고 있었으므로 예수님을 자신의 심령 가운데 모시지 못하고 심령 밖에 세워두기만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그러다가 하나님이 외부적인 도움을 통해 몰아내 주셨던 것 같습니다.

 

또 한가지 제가 기도원에 갔을때 어느 장로님의 이야기인데 그 분도 비슷한 이야기를 했던 기억이 나네요. 귀신이 몸안에 있다고 ?i겨 나가는 것을 보았다는그런 간증이었습니다.

 

두서없게이 귀신과 관련된 이야기를 적었는데,

 

성경적으로 보면 귀신은 마귀사단의 졸개에 해당됩니다. 우리들의 죄악에 달라붙어 지옥으로 끌고 가는 존재에요.

 

예수님을 온전히 영접할때 귀신은 ?i겨나게 됩니다. 물론 목사와 같은 성직자가 외부에서 귀신을 ?i아내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경우는 본인이 예수님를 영접해야 다시 귀신이 못들어옵니다.

 

이 귀신의 존재를 보통 죽은 영혼을 알고 있는 사람이 많을턴데 성경에서는 그걸 철저히 부정합니다. 귀신은 죽은 영혼이 아니고 타락한 천사들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루시엘이 타락해서 루시퍼이 되었을때 하늘에 있는 천사 1/3을 꾀어 영적 쿠데타를 감행했고 그때 같이 타락한 1/3이 귀신이 된 것입니다.

 

참고로 천사라는 존재는 하나님의 나라의  공무원 집단과 같은 존재여서 철저한 명령복종이 우선시되므로 한번의 불복종으로 마귀사단이 되어 버립니다.(가브리엘은 외교부, 미가엘은 병부와 유사합니다. 인간은 우주에서 하나님과 사랑의 인격적 관계를 맺을 수 있도록 창조된  유일한 존재입니다.)

 

따라서 그들은 구원의 가능성이 열려있는 인간을 가장 싫어합니다. 그래서 인간으로 하여금 죄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해서 같이 지옥에 끌고 가는 것이 그들의 가장 큰 낙입니다.

 

예수님을 온전히 영접하여 중생하게 되면 우리는 죄에서 자유롭게 됩니다. 십자가 보혈의 공로때문입니다. 물론 중생 이후 우리가죄를 짓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가 회개를 할때 예수님이 씻어주십니다.(물론 성화하는 부분도 있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는 장면에서 이 부분에 대해 잘 설명해 두셨습니다.

 

 

추가

 

 

이런 귀신들의 실체에 대해서는 과거 무당이었던 박에녹 집사님의 간증이 많이 도움이 됩니다.(인터넷에서 박에녹 간증 동영상은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박에녹 집사님의 간증을 보면 그의 삶에 귀신이 어떻게 개입해서 어떤 속임수로 미혹했으며 10년간을 어떻게 괴롭혀 왔는지

알 수 있다. 

 

박 집사님의 삶 가운데 특별히 귀신이 들어갈 발 판을 얻고 점차 장악할 기회를 확보하게 된 것은 어머니의 중병을 낫게 하고자

그가 여러 Occult -하나님이 아닌 다른 대상으로부터 초자연적인 힘과 능력을 구하는 행위- 적인 능력을 가진 자들에게 도움을 요청했으며 또 그것에 참여함으로 시작이 돼었다.

 

그러나 결국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어머니에 대한 사랑이 지극하고 남달랐던 박 집사님은 큰 충격과 상실감을 겪고 술로 세월을

보내고 삶이 무기력 해진다.

 

이런 과정을 통해 미혹되고 무당을 찾게 되고 무당이 하는 말을 쉽게 받아들여 당시 엘리트였던 그가 쉽게 비상식적인 행동으로 빈번한 굿과 산을 다니며 신을 받기 위해 기도하러 다닌것을 볼 수 있다.

 

누구든지 큰 충격과 상실한 마음을 갖게 되면 무기력하고 우울한 상태를 떨치기 쉽진 않겠지만 그 상실감과 충격을 방치하고

내버려둔다면 그것은 악한 영을 불러들이기 딱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는 것이며 그럴때 귀신은 그 삶에 들어오고자 상한 마음에

부정적인 생각과 죽고자 하는 마음을 쉽게 넣어줄 수 있다.

 

 건강하고 즐거운 삶 가운데 느닷없이 죽음을 생각하거나 부정적인 생각을 하는 경우는 없다.

 하지만 환경과 삶이 절망적일때 귀신이 주는 생각은 너무도 그럴듯하고 자연스럽다.

 

 상황이 절망적이어서 너무도 마음이 괴로운 어떤 사람이 있다고 하자 그 사람에게 느닷없이 이런 생각들이 불쑥들 때가 있다.

 

"에이 이렇게 힘든데 살아서 뭐하나!  죽자! 죽어!"

 이런 생각은 자기가 하는 것이 아니다.

 

대체로 많은 사람들이 자기 의식안에서 흐르는 여러 생각들이 자기 사고 과정의 산물로만 여기는데 성경은 분명 사단이 가롯 유다에게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집어넣었다는 것을 전하고 있다.

 

가롯 유다가 이것이 사단에게서 온 것을 알았을까?

 

그는 돈 그 자체에 미혹되어 3년이나 생명의 말씀과 기적과 이사 표적을 보고 또 본인이 그 능력에 참여하여 병도 고치고 귀신도 쫓아냈던 사도 중에 하나였음에도 불구하고 미혹돼어 예수를 팔려는 그 생각을 그냥 받아 들인 것이다.

 

귀신이 이렇게 속인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귀신은 바보가 아니다.

 

 귀신은 그럴듯한 상황 그래서 귀신이 가지고 있는 속성을 쉽게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부정적이고 부정한 마음에 찾아온다.

 자신이 들어가도 전혀 불편하지 않고 드러나지 않는 마음과 감정의 상태에 자연스럽게 찾아오고 편안해 한다.

 

 물론 그런 상황이 발생되록 조성하는 것에도 큰 역활을 하고 말이다.

 

 귀신의 성품은 본래가 우울하고 슬프고 어둡고 짜증내고 분노하고 화를 풀지않고 적개심을 갖고 있으며 이기적이고 파괴적이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에게 영적으로 분별하고 자각할 수 있도록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 아닌것을 세상적이요 정욕적이요 마귀적

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하나님에서난 지혜를 설명하기를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벽과 거짓이 없다고 했다.

 

영분별은 바로 이러한 말씀을 가지고 하는 것이다. 

우리의 생각 가운데 성품 가운데서 이런것을 구분하고 구별해 내야 한다.


귀신의 성품이 잘 드러난 것이 무당(귀신의 하수인)의 역활과 행동이다.

박 집사님의 간증에도 보면 무당들은 돈을 좋아한다.

무당들은 치유받는 자의 완치와 자유보다 그가 가진 돈을 요구한다.

그들은 오로지 돈이 목적이다.

(그런 의미에서 목사라는 외양을 가지고 진정으로 양들을 사랑하지 않고 돈 만을 밝히는 목사가 있다면 그 목사는 진정한 목사가 아니고 단지 삯꾼일 뿐입니다. 즉 귀신들린 무당과 하등 다를바 없는 것이져.)

 

박 집사분의 회사 봉급이 불과 20만원이 못되던 예전 시절 70만원의 거금과 그 이상을 상회하는 막대한 돈을 굿을 위해서라는

명목으로 요구하는 것을 보라!

 

이것이 귀신의 성품이고 또한 하는 짓이다.


그리고 무당이 손님들을 자신의 고객화 하기 위해 남자들과 문란한 성관계를 맺는 것은 이미 많이 알려진 바지만 그의 간증을

통해서도 대개의 무당이 성적으로 문란하고 음란한 관계를 맺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성경은 영적인 우상숭배를 영적인 음란이라고 가증하게 여기고 있으며 그것은 반드시 육적 음란으로 자연스럽게 나타났던 것을 IS의 역사 가운데 분명히 전하고 있다.

 

과거 무당으로서 귀신의 존재와 역활에 대해 잘 알고 있던 박 집사분은 실제로 귀신이 하는 짓으로 그 이름을 갖고 있음을 그의

간증 가운데서 알 수 있으며 - 그가 귀신을 좇아낼때 그런 역활을 하는 영들을 불러내서 다 좇아냄 - 예수 믿고난 이후에 그에게

나타났던 악한 영들이 세례 받고 구원 받았다고 완전히 해결된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찾아 왔었음을 전한다.

 

그래서 다른 것이 아닌 이제 달라진 하나님의 자녀된 권세 안에서 예수 이름으로 악한 영을 좇아내고 그 유혹과 공격으로부터

계속해서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아가고 있음을 전하고 있다.

 

우리는 위의 간증을 통해서 귀신이 사람을 어떻게 속였고 유린했으며 또 어떤 일을 감행하려 했는지 귀신의 처음시도와 끝을 향한 목적을 가늠해 볼 수 있다.

 

 귀신이 하는 일이란 오직 도적질 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것 뿐이다.

 이것이 그들의 유일한 존재이유이다.

 

그러나 그의 삶 가운데 새일을 행하사 악을 선으로 바꾸시며 악의 모든 권세를 깨트리시고 복음 전도자로 거듭나게 하신 위대하신 하나님의 전능한 계획과 능력을 찬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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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위행위 강요·동영상 유포… 性的폭력 급증

피해학생 정신장애 고통… 가해자는 솜방망이 처벌

문화일보 | 박준우기자 | 입력 2012.01.13 14:01




지난해 6월 학교 수련회를 갔던 고등학생 A군은 당시 같은 숙소에 있던 학우들의 강요와 협박에 못 이겨 이들 앞에서 자위행위를 해야 했다. 당시 이를 영상으로 찍고 "신고하면 영상을 공개한다"는 가해 학생들의 말에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던 A군은 수련회 후에도 교내에서도 똑같은 행위를 수차례 해야 했다.

그러나 약속과 달리 A군의 자위행위 동영상은 학교 안팎으로 퍼져 나갔다. A군은 학교 내에서 남·여학생을 불문하고 자신에게 보내는 모멸의 시선을 견뎌야 했다. 오랜 기간 이 같은 폭력 속에 노출된 A군은 결국 성적 수치심과 이에 대한 무기력함에 심각한 정신장애를 갖게 됐다. A군을 괴롭혔던 학생들에게 학교는 출석정지 10일이라는 솜방망이 처벌만 내렸을 뿐이다.

13일 청소년폭력예방재단(청예단), 학교폭력피해자가족협의회 등에 따르면 최근 벌어지고 있는 학교폭력의 다양한 양상 가운데는 A군의 사례처럼 성적 수치심을 주는 경향이 강해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학교폭력피해자가족협의회는 A군의 사례처럼 자위행위를 시키거나 심지어 남학생들끼리의 성행위 강요 사례도 학교 내에서 종종 발생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 같은 경향은 고등학교뿐이 아닌 중학교로도 이어져 지난해 서울의 한 중학교에선 가해자들이 한 학생에게 성기를 자극하는 성적 행위를 수차례 강요했던 사실도 밝혀졌다. 당시 학생을 상담했던 전문상담교사는 "매년 이 같은 충격적인 일이 한 학교에서만 1∼2회 정도 벌어지고 있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전문가들은 성적 수치심을 자극하는 폭력행위가 일반적인 물리적 폭력보다 더 큰 충격과 심한 후유증을 남길 수 있다고 우려했다.

김붕년(소아정신과) 서울대 의대 교수는 "성적인 학대는 신체적 폭행보다 더 지속적인 자존감의 저하를 가져올 수 있다"며 "이 같은 학대가 타인에 대한 성폭력을 행사할 수 있는 위험요인이 되기도 하고 장기적인 우울문제도 더 많이 일으킬 수 있다"고 지적했다.

박준우기자 jwrepublic@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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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법과 말씀 (마태복음 5장 17절~48절) jesus recovers us


아래 학교폭력현상을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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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법은 죄를 깨닫기 위한 몽학선생, 말씀은 진리

예수님은 율법과 선지자를 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그것을 완전하게 하려 오셨다.(마태복음 5장 17절~20절)


율법의 대표적인 예(마태복음 5장 21절~48절)


1. 살인하지 말라

2. 간음하지 말라

3. 헛 맹세하지 말라

4. 눈에는 눈 이에는 이

5.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말씀의 대표적인 예(마태복음 5장 21절~48절)


1. 형제에 노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노하지 말라.

2. 마음에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간음하는 자이며 아내를 음행한 연고 없이 버리는 자도 그로 간음하게 하는 자이다.

3. 맹세로 너희가 하나도 바꿀 수 없으니 옳은 것은 옳다하고 아닌 것은 아니라 하라. 이에 지나는 것은 악이다.

4. 너에게 해꼬지 하려는 자들에 대해 즉 악한 자에게 대적하지 말라. 오히려 오른편 빰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며, 억지로 오리
   가려는 가게 하거든 십 리를 동행하라.

5.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결국 살인하게 되는 근본이유는 그 마음의 분노에 있으므로 살인하지 말라는 율법을 지키기 위해서는 마음의 분노를 다스릴 수 있어야 한다.

살인하지 말라는 율법의 관점에서 보면 모든 인간중에 죄인이 아닌 사람도 있겠지만 마음의 분노가 살인죄의 씨앗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에게는 모든 인간은 죄인일 수 밖에 없다. 나아가 예수님을 믿고 중생해서 새사람으로 변화받았지만 옛사람이 나를 죄 아래로 잡아끌려내리려 하는 것을 보게 된다. 성화가 필요한 이유이다. 사도 바울도 로마서 7장 16절~24절에서 비슷한 고백을 하고 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라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라"며 탄식하는 바울은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고 하고 있다. 예수님을 믿어 새사람이 된 이후부터 우리는 성화를 위한 본격적인 영적 싸움의 과정을 겪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를 믿어 의인이 된다는 것은 결국 회개하는 죄인, 예수님이 우리를 성화롭게 되도록 이끌어 주실 것은 믿는 죄인, 우리가 어떤 처지에 있는지 깨닫고 변화려고 노력하는 죄인이라는 의미이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은 결코 자신의 노력으로 자신의 고행으로 자신의 의를 통해 구원받을 수 없다. 구원의 시작(중생)도 하나님에게서 시작되었고 구원의 도정(성화=이것은 구원의 조건은 아니지만 그 열매로 그 나무를 안다는 비유에서 보듯 내가 구원받은 사람인지에 대해 추측할 수 있는 외적 표징은 된다. 내 자신의 의로부터 시작한 구원은 하나님이 시작한 것이 아니므로 성화=열매를 맺을 수 없다. 즉 열매가 없다면 내 구원의 시작이 참된 중생이 아닌 내 자신의 의로부터 시작된 것임을 의미한다.)도 하나님이 이끄시고 구원의 완성(영화)도 하나님이 이루신다.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이 주도권을 가지시고 우리는 단지 그분의 역사에 순응하면 족하다. 믿어야 구원받는다는 것도 구원의 이끌어가시는 분이 하나님임을 인정하는 표현이다. 결국 구원의 시작은 내 자신이 철저한 죄인임을 인정하고 나 자신은 결코 이 죄인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그 죄인을 변화시킬 수 있는 분은 오로지 하나님임을 인정하고 그 분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일 것이다. 불교의 자력구원은 그런 의미에서 기독교적 진리와 거리가 있다.

우리가 간음하게 되는 근본이유도 마찬가지이다. 실제 간음이라는 행동을 하지 않더라도 음욕에 사로잡힌 것 조차도 간음이므로 마음을 청결히 하는 것을 게을리 할 수 없다. 여호수아서에서 聖戰을 나가기 전에는 동침을 금한 이유도 거기에 있다. 그렇다고 하나님의 주신 성(나아가 육체, 나아가 세계)이 악한 것은 아니다. 악한 것은 인간이 하나님이 주신 것을 악하게 쓰기 때문일 뿐이다. 그런의미에서 그노시스 즉 영지주의는 기독교적 진리아 거리가 있다.

맹세도 마찬가지이다. 율법은 맹세는 하되 헛 맹세는 하지 말라고 하지만 맹세를 한다고 우리가 맹세한데로 지킬거나 이룰 수 있는 힘은 근본적으로 없다.즉 우리가 한 터럭이라도 희고 검게 할 수 없다. 도대체 근본적으로 죄인인 우리가 무엇을 지킨단 말인가. 또 우리가 마음으로 계획하더라도 그 발을 이끌어가시는 것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이 닫으시면 열자가 없고 여시면 닫을 자가 없는 것이다. 우리는 단지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이 무엇인지 분별해서 옳은 것은 옳다고 하고 아닌 것은 아니라고 하면 족하다. 그리고 하나님에게 의지해서 그대로 살려고 그대로 실천하려고 노력하면 족하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가 구약의 율법이었다. 이는 하나님의 공의가 무엇인지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다. 너희가 살인하면 너희도 살인이라는 심판을 당하게 된다는 의미이다.(지옥은 그래서 필요하고 실존한다.) 심판은 오로지 죄 없는 하나님만이 가능하다. 죄인인 인간은 심판의 주체가 될 수 없다. 악한 자를 사랑으로 품어주는 게 우리가 심판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길이다. 또 그래야만 악한 자도 변화될 수 있다.

내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를 미워하라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우선 원수를 미워하면 자기 자신을 망치게 된다. 원수를 미워하기 위해서는 우선 내 마음에 미움을 키워야 하기 때문이다. 내 마음의 미움을 키운다는 것은 불행의 씨앗이고 마음을 병들게 하며 또 육신을 병들게 한다. 원수를 갚기 전에 내가 먼저 죽게된다. 원수를 미워함으로 인해 근본적으로 죄인인 나 자신도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심판은 주님에게 맡겨라. 또 남의 잘못을 지적하기 위해서는 내 자신이 먼저 올바르고 또 그 지적하는 말에 사랑이 있어야 한다. 부모는 자식의 잘못을 지적하더라도 그게 심판이나 비판이 되지 않는 이유가 자식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원수를 미워하기 전에 먼저 원수를 사랑하라. 그리고 나서 그 원수의 잘못에 대해 지적하라. 그 원수가 말을 듣지 않을 때 심판하시는 하나님이 있음을 기억하자. 원수의 머리에 숯불을 피워두면 그것으로 족한 것이다.

율법은 하나님이 최소한의 규정으로 주신 것임에도 유대의 바리새인은 그것을 최대규정으로 해석하는 잘못을 저질렀다. 율법은 하나님이 복을 주시기 위한 시발점이었지 그것만으로 족한 것은 아니었다. 즉 안식일을 지키면 하나님의 복을 주시지만 옆에 사마리아인이 죽어감에도 안식일 타령으로 그들을 돕지 않는 않는 것은 잘못된 것이었다. 즉 안식일 자체가 인간을 위해 주신 것인데 오히려 그 안식일이 우상이 되어 인간의 고통을 외면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율법과 율법의 정신은 구분된다. 마치 실정법과 자연법이 구분되는 것과 같다.

율법은 하나님의 진리인 말씀(그리스도=율법의 정신)에 도달하기 위한 최소한의 규정이었던 것이다.

 

나아가 율법은 행하는 것이고 말씀은 믿는 것이다. 율법은 개개의 규정이 있어 행하는 것과 연결되지만 말씀은 개개의 규정이 아니라 진리 자체이므로 믿는 것과 연결이 된다.(믿는 것과 인식하는 것은 구별이 된다.) 간단히 "살인하지 말라"라는 율법은 평생 행하는 사람이 있지만 "형제에게 노하지 말라(즉 형제를 미워하지 말라")라는 말씀은  행할 수 있는 차원이 아니라 그 말씀을 믿어 내 삶의 지표로 삼고 그 자체가 진리임을 믿고 사랑할 수 있는 차원의 문제다. 따라서 율법을 행하는 것에 만족한 바리새인들은 말씀을 믿고 사랑하지는 못했다. 그들은 이웃을 미워하면서 단지 살인을 하지 않았을 뿐이다.

 

물론 구약에는 언약적 율법이 있었다. 하지만 그 언약적 율법은 구원이 아닌 제사장 나라가 되는 언약적 율법이었다.(출애굽기 19장 5절) 나아가 율법은 언약적 율법안에 있는 자에게 복과 저주의 기준이 되기도 했다.(신명기 28장 이하) 물론 이 율법은 로마서 2장14절과 15절에서 보듯 이방인도 양심이 증거가 되어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낸다고 하고 있다. 즉 이들에게는 그 마음에 새긴 율법에 따라 복과 저주가 나뉘어진다. 하지만 이것은 구원과는 관계가 없다. 구원은 말씀을 믿는 것과 관계되어 있다. 말씀 즉 로고스는 그리스도시다. 즉 그리스도이신 예수를 믿는 것은 구원과 관련되어 있다.  

 

우리는 본성적으로 말씀데로 행할 수 없다. 성령님은 그리스철학적인 로고스라는 개념을 요한복음에 등장시키심으로서  아버지 되신 여호와 하나님의 관념의 정수가 곧 그의 아들이심을 증거하고 있다.(초대 교부들도 이러한 개념을 받아 들였다.) 그리고 말씀 곧 그리스도에 의해 만물이 창조되었다. 그러한 진리이신 말씀데로 우리가 살 수 있겠는가? 애시당초 우리는 그것이 불가능하다. 아니 아담이 선악과를 선택하면서부터 우리에게는 불가능의 사건으로 다가온다. 왜냐하면 인간의 본성안에 자기 기준에 의해 선악을 판단하려는 마음이 생겨났기 때문이다. 아담의 형상데로 만들어진 셋 역시 그와 다르지 않았고 모든 인류가 그래서 죄 아래 갖히게 되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선악판단의 기준인데 인간의 자신만의 선악판단의 기준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즉 아담 이래 우리는 말씀데로 행할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율법은 행할 수는 있다.) 따라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말씀을 믿어야 한다. 믿는다는 것은 내가 죽는 것을 의미한다. 나의 선악판단의 기준이 죽는 것을 의미한다. 십자가에 예수님이 달리셨듯 나 자신을 십자가에 박아야 한다. 하지만 박아도 잘 죽지 않고 그 십자가를 뽑고 다시 나오려고 한다. 그래서 성령님의 도우심이 필요하다.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우리는 십자가에서 편안함을 느낀다. 그리고 진짜 십자가에서 육신의 정욕을 못 박을 수 있게 된다. 나아가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은 화목제물과 속죄제물이 되어 우리의 믿음을 가능케 하는 근본이 된다. 우리는 십자가 보혈을 통해 하나님과 막힌 담이 헐어짐을 보면서 동시에 우리의 선악판단이 무의미함을 보게 된다.

 

율법은 말씀과 대조되고 행함은 믿음과 대조된다. 복(이세상의 복)은 복음(구원의 복)과 대조된다. 율법, 행함, 복은 한쌍이고 말씀, 믿음, 복음은 한쌍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거기다 제사장나라가 되는 언약적 율법까지 받았다. 하지만 그들은 행함의 율법조차 지키지 못함으로써 이스라엘 민족을 제사장 나라로 삼아주시겠다는 언약은 파기되고 예수가 제사장이 되신다는 새로운 언약이 등장하게 되었다.

 

율법을 행하는데 만족하지 말고 말씀을 믿고 (사랑하는데) 까지 이르러 십자가 구원의 은혜안에 거하자.

 

예수님은 율법을 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셨다. 오히려 율법을 완전하게 하기 위해 오셨다고 말씀하신다. 율법을 완전케 되는 길은 율법의 정신을 믿는 것 즉 말씀을 믿는 것이다. 그리고 믿음에서 나오는 행함이 참된 행함이다. 남을 돕는 것은 행함인데 이 행함이 (율법의) 행함에서 나오는 것인지 아니면 (말씀의) 믿음에서 나오는 것인지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진다.

 

구원은 돌아섬이다. 돌아섬은 모든 선한 것은 본체이신 하나님의 말씀의 씨앗이 마음에 새겨져야 한다. 율법의 씨앗이 아닌 말씀의 씨앗이어야 한다. 이 세상에는 많은 종류의 율법이 있다. 언약적 율법, 본성적 율법 등등.... 하지만 마음에 율법의 씨앗만 심겨 있으면 그것은 이 세상에서의 효력으로 그친다. 하나님은 아담과 이브의 타락이후로 즉 그들이 에덴에서 ?i겨난 이래로 끊임없는 말씀의 씨앗을 뿌려오셨다. 하지만 인간은 거기서 율법의 씨앗만을 취하려 한다. 그리고 자신의 의를 드러내려 한다. 십자가 사건에서 예수님의 죽음은 우리 인간이 말씀을 얼마나 짓밟아오고 죽였는가를 잘 보여준다. 제사장 백성으로 택함받는 이스라엘 민족조차도 말씀이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면 다른 민족은 어떠하겠는가?

 

그리스도이신 말씀이 각 영혼의 심령에 심겨져 그로 인해 자신의 죄인됨에 절규하며 그 결과 십자가의 은혜를 사모하는 자에게 진정한 복이 있을진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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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폭력 연루 70%가 고소득 전문직 부모 둔 아이"
퇴근 후 대부분 컴퓨터 앞에… 아이와 대화하는 시간 적어

은행 지점장인 아버지와 교사 어머니를 둔 경북의 한 중학교 2학년 A군은 최근 같은 반 학생을 마구 때렸다. 상담 교사가 "왜 친구를 괴롭혔느냐"고 묻자 A군은 "(저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너무 바빠서 얼굴 보는 시간은 얼마 안 되는데 조금이라도 잘못하면 (나를)크게 혼을 낸다"며 "그런 데서 오는 스트레스를 친구들을 괴롭히면서 풀었다"고 말했다.

과거에는 학교 폭력 피해 학생과 가해 학생 가운데 저소득층이나 결손 가정 자녀가 많았지만 최근에는 오히려 고소득·전문직 부모를 둔 학생이 집단 괴롭힘을 당하거나 남을 괴롭히는 경우가 늘고 있다.

학교폭력예방센터 김건찬 사무총장은 "학교 폭력 상담 신청의 절반 이상은 교사나 공무원, 연구자, 의사 등 전문직 부모를 둔 자녀들 사례"라고 밝혔다. 우지향 서울문화고 상담 전문 교사도 "학교에서 가해·피해 학생 10명 중 7명은 전문직 부모를 두고 있다"고 했다.

전문직 자녀들이 학교 폭력 사건에 연루되는 가장 큰 이유는 부모가 일 때문에 바빠 자녀들과 시간을 함께 보낼 시간이 부족하기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자녀의 공부 성적이 크게 떨어지지만 않는다면 학교에서 자녀에게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부모가 살피는 경우가 드물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평소 자녀에게 학업 스트레스를 많이 주는 것이 전문직 부모의 특징으로 지적된다.

우지향 교사는 "전문직 부모는 퇴근 후에도 컴퓨터 앞에 앉아 있거나 책을 펴들기 일쑤고, 아이는 부모와 대화하지 못한 채 혼자 시간을 보내게 된다"며 "이런 가정에서 자란 아이는 남과 공감하고 소통하는 법을 배우지 못해 학교생활에 적응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오순절 신학과 개혁주의 신학과의 비교 jesus recovers us

Ⅰ. 들어가는 말


하나의 학문적 영역을 확실하게 이해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 중에 하나는 그 영역과 유사한 것과 다른 것을 서로 비교하며 검토해 보는 것이다. 검은색 바탕위에 흰점은 흰 바탕위에 하얀 점보다 그 본래의 흰점이 더 돋보이게 보인다. 이와 같이 오순절 신학에 대한 이해를 좀 더 명확하게 하기 위해서 배경적 차원으로 개혁주의 신학을 같이 비교 검토해 보고자 한다. 개혁주의 신학은 한국 보수주의 신학을 대표하는 신학사상이고 오순절 신학과 많은 유사점도 있지만 또한 확연하게 드러나는 신학적 차이점도 있기 때문에 서로 비교하여 보면 많은 유익이 있을 것이다.


여기서는 단순히 오순절 신학과 개혁주의 신학을 단편적으로 비교 나열하는 것으로 끝이지 않고 현 합동신학원 명예총장이자 한국 개혁주의에 대표적인 조직신학자 중에 한 사람인 신복윤 교수의 글1)을 하나 선택하여 오순절 신학의 입장과 비교 정리해보고자 한다.「복음주의, 근본주의, 개혁주의 비교」라는 그의 글 중에서 그는 개혁주의의 특징들을 네 가지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이 글은 개혁주의의 신학적 특성과 성격을 전반적으로 알 수 있는 좋은 글이라 생각되어진다. 이에 그에 글에서 언급했던 개혁주의 신학의 네 가지 특징들을 간략하게 소개하고 그것을 중심으로 하여 오순절 신학의 입장에서 그 주제에 상응된 신학적 답변을 제시하고자 한다. 더불어 오순절 신학과 개혁주의 신학 사이에서 크게 의견 차이를 보이고 있는 중생과 성령세례에 대해 알아보고 서로의 신학적 견해를 정리하면서 비교논의해 보고자 한다.


Ⅱ. 오순절 신학과 개혁주의 신학의 정의


A. 오순절 신학(Pentecostal Theology)

현대 오순절 신학은 20세기의 여명이 밝아 오면서 일어난 오순절 성령운동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이 오순절 성령운동은 초대교회 제자들이 오순절 날에 마가 다락방에서 모여 기도할 때에 하늘에서 급하고 강한 바람처럼 성령이 임한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행2:1-4)에 그 역사적 뿌리를 두고 있다.2) 이러한 초대교회의 오순절적인 성령의 능력을 소유한 오순절파 교회들은 현대에서 목회적 사역에서 더욱 더 빛을 발휘하고 있다. 1990년을 기준으로 하여 세계에서 제일 큰 다섯 교회들은 모두 오순절파 교회들이다.3) 이처럼 오순절 성령 운동은 현대 교회에 일대 변화를 일으켰다. 최근에 와서는 이 오순절 성령운동을 단지 하나의 교회적 신앙 부흥운동으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신학적 특성을 가진 체계적 학문으로도 정립해 보고자 하는 신학적 시도들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4) 이러한 과정 속에서 오순절 성령운동이 내재하고 있었던 신학적 요소들이 하나 둘씩 발견되고 있다. 또한 한편으로 새롭게 확장된 의미로써 신학적 개념들이 개발되고 있으며 조직화, 체계화 되고 있다. 현재까지 밝혀진 오순절 신학의 다섯 가지 강조점은 다음과 같다. ① 체험 중심의 신학 ② 성령의 능력을 덧입히는 성령세례를 강조 ③ 전인 구원신학에 나타난 신유를 강조 ④ 하나님의 대한 기존 신관의 변화로 좋으신 하나님을 강조 ⑤ 성령님에 대한 인격성 강조


요약해서 오순절 신학을 정의해 보면 성령의 인격성과 현재성, 그리고 성령의 선교적 능력을 강조하며, 중생과 성령 세례를 구별된 체험으로 인식하고, 성령세례의 첫 번째 증거를 방언으로 보는 신학적 경향이라고 할 수 있다. 아직까지 오순절 신학은 신학적 체계를 완전하게 갖추고 있지 못하다. 아마 그러한 이유가 오순절 신학이 이론적 체계 보다는 실재적이고 현실적인 성령의 역동적인 역사를 더 강조하는 신학적 특성을 가지고 있는 데서 기인하지 않았다 본다. 사실 오순절 신학의 태동 역시 어떤 한 사람의 탁월한 이론가에 의해서 형성된 것이 아니라 말씀에 예언된 성령의 역사적 현현으로부터 출발하였다. 앞으로 계속하여 오순절 신학이 성령의 역동적인 사역을 강조하는 살아있는 신학으로, 또한 이론적인 면과 실천적인 면이 고루 갖춘 교회와 세상을 살리는 참된 신학으로 발전해 나아가야 할 것이다.

 

B. 개혁주의 신학 (Reformed Theology)

개혁주의는 요한 칼빈(John Calvin, 1509-1564)으로부터 전해진 사상체계이다. 창시한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이 사상 체계의 중요한 해설가이다. 칼빈의 신학사상은 개혁운동에 이바지한 다른 위대한 지도자들의 사상과 함께 어거스틴 사상의 부흥이요, 어거스틴의 사상은 그 보다 몇 세기 전의 바울사상의 부흥이라고 말할 수 있다.5) 이 사상들은 조직적으로 조명하고, 특수하게 적용하여 현대를 위하여 제시한 사람이 바로 칼빈이다. 이때로부터 이 사상체계를 칼빈주의 혹은 개혁주의라 부른다.6) 그러므로 개혁주의 신학은 일명 칼빈주의(Calvinism)라고 말할 수 있으며, 역사적으로는 펠라기우스주의와 반(半)펠라기우스주의에 반대되는 기독교 사상체계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개혁주의 신학은 개혁파 교회들에 의해서 채택된 공적 신앙고백들7)과 칼빈을 따르는 대표적 신학자들8)의 고전적 저서들을 통해서 발달되었다. 특별히 교회사적으로 기억해야 할 사건은 화란에서 일어난 인간의 자유의지를 강조한 알미니안주의자들과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강조한 칼빈주의자들간의 신학적 논쟁이다. 이 논쟁은 결과적으로 1619년 도르트 대회에서 칼빈주의자들은 알미니안주의자들이 제안한 5대 조항에 반대하여 작성한 “칼빈주의 5대 교리”를 형성함으로써 어느 정도 일단락되었다. ① 인간의 전적부패 ② 하나님의 무조건적 선택 ③ 제한된 구속 ④ 불가항력적 은혜 ⑤ 성도의 견인(궁극적 구원)이 바로 그것이다.9) 개혁주의는 신학에만 국한되지 않고 모든 것을 다 포함하는 사상체계이다. 여기에는 신학과 함께 정치, 사회, 과학, 예술 등에 대한 사상도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이 사상체계는 인생관, 우주관, 세계관을 제공한다.10)


Ⅲ. 개혁주의 사상의 네 가지 특성에 대한 오순절 신학의 입장


A-1. 개혁주의의 성경관11)

개혁주의에 기본적인 가장 특징은 성경관이다. 미국 칼빈신학교의 클로스터 교수는 그의 논문에서 개혁주의의 독특성을 성경관(sola and tota scriptura)에서 찾았다.12)

개혁주의의 성경에 대한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고백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과 동등하게 취급되었던 교회 전통의 권위를 거절한다. 개혁파 전통에서는 영감의 방법이나, 성경의 여러 가지 특성의 의미에 관한 기술적인 정의보다는 오히려 성경의 권위에 대하여 더 많이 강조한다. 개혁주의는 로마 가톨릭처럼 성경의 권위를 교회 밑에 두고, 교회가 없이는 성경이 존재할 수 없으나 성경은 없어도 교회는 존재할 수 있다는 식으로 말하지 않는다. 성경은 신적 권위가 있으며 궁극적이며 절대적인 권위를 가진 책이다. 칼빈은 주장하기를 “성경을 믿는 것은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아는 것은 성령께서 증거해 주시기 때문이라고 한다. 성경권위의 확고한 근거는 성령의 증거인 것이다.

개혁주의는 성경을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된 無誤한 冊임을 믿는다.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되었기 때문에 성경은 정확무오한 객관적 권위를 지닌 하나님의 말씀일 수밖에 없고, 그러므로 신앙과 행위의 규범이 된다(딤후3:16,17). 개혁주의는 성경을 종교적 신물(神物)로 보지 않고, 하나님의 선하신 기쁨에 따라 교회의 씨앗(종자)으로 삼기위해 주신 영감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것이다. 개혁주의는 또한 신정통주의자들처럼, 계시의 객관성을 부정하지 않는다.13)

한편 개혁주의는 신복음주의자들처럼 성경의 영감과 무오를 분리 하지 않는다. 그들은 영감은 믿으면서도 무오를 믿지 않는다. 그러나 성경이 성령의 영감으로 기록되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요,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절대적으로 무오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성경을 통하여 구원에 필요한 지식을 교회나 신부에 의존할 필요 없이 충분히 섭취할 수 있다.

개혁주의는 성경의 명백성과 충족성(완전성)을 주장한다. 성경은 일반 신자들이 이해할 수 있게 기록되었으며 구원과 하나님을 온전히 믿고 순종하도록 하는데 필요한 모든 말씀이 성경에 있다는 것이다.


A-2. 오순절 신학의 입장

오순절주의의 성경에 대한 믿음은 하나님의 완전한 영감을 받은 기록으로,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특별한 계시임을 믿는다. 신, 구약 성경은 하나님의 축자적 영감으로 기록된 것으로 사람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계시이며, 정확 무오하여 신앙과 행위에 절대적 권위가 있는 법칙으로 믿는다.14) 대표적인 한국 오순절주의자인 조용기 목사(이하 영산) 역시 성경은 하나님의 뜻이 계시된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고백한다. 그리고 영산의 성서 영감설은 기계적 영감설(=축자영감설)이 아닌 유기적 영감설을 받아들인다.15)

또한 오순절주의는 성경의 완전 영감(plenary inspiration)을 지지한다. 이것은 성령의 인도하심과 역사하심을 의미하는데, 성경기록자들의 사용언어와 자료, 사상과 개년까지도 성령께서 주장하시고 간섭하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20여 년간 미국 하나님의 성회 총회장을 역임했던 윌리엄스(Ernest Swing Williams)는 완전한 영감이란 충만하게(full), 온전하게(entire), 완전하게(complete), 그리고 절대적으로(absolute) 영감된 것을 말한다고 한다.16) 또한 오순절주의는 성령으로 영감된 성경은 무오하다고 주장한다. 성경의 무오성이란 성경의 원본에 아무런 잘못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성경이 기록된 원어상에는 전혀 틀림이 없다.17) 오순절주의와 개혁주의의 성경관은 거의 다르지 않다고 본다. 왜냐하면 오순절주의나 개혁주의는 대부분 성경관에 대한 전통적 교리를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오순절 신학은 체험된 그룹의 공통된 정서를 담고 있는데 그것은 첫째로, 하나님 말씀인 성경을 굳건히 믿고 둘째로, 성경을 최고의 권위로 두며 셋째로, 그 말씀이 오늘날 우리 삶과 역사 가운데 실제적으로 역사한다는 믿음이다. 다시 말하면 오순절 신학이 성서에서 이탈한 신학이 아니라 어느 신학보다도 성서에 전적으로 기초를 두고 있는 것이다.18) 오순절 신학의 준거는 성경이다. 그리고 오순절 신학은 성경을 기록된 문자로만 내버려 두지 않는다. 성경의 말씀들은 살아 움직이는 능력의 말씀이자 우리 현실의 삶에서 성령님을 통해 실제적으로 체험되고 경험할 수 있는 실재하는 하나님의 현존이다. 말씀은 영원한 현재이다(히13:8). 오순절 신학은 성경에 대한 개혁주의 신학의 전통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성경이 성경되게 했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역사를 위축되고 생동감 없는 영적 공동체 속으로 전달해주는 귀한 도구로 쓰임 받고 있다.

오순절 신학을 비난하는 자들 중에는 오순절 신학이 인간의 체험을 근거로 한다고 잘못 오해하여 공정한 평가를 내리지 못하고 있다. 여기에서 체험은 신앙의 근거로써의 체험이 아니라 말씀을 온전하게 믿고 신뢰하는 믿음의 표현으로 인한 체험이다. 오순절 신학은 성경 구절구절 하나를 죽어있는 문자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살아있는 영적 실재로서 이해하는 것이다. 이러한 성경 이해는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하게 사랑해야만 가능한 일이다. 성경을 해석하는 학문인 성경 주석학과 성경 해석학은 이런 의미에서 오순절 신학으로부터 통찰(insight)을 얻을 수 있다. 기존 이성 일변도의 성경 해석학에서 이제는 성령론적 시각에서 성경을 이해하는 새로운 해석학 시도가 필요하다고 본다.


요하네스 블라워(Johannes Blauw)는 “모든 참된 신학은 신학적으로 사변화하며 추상화하며 이론화하는 것과 싸우며 철학적인 변형에 의해 참된 성서적 동기를 대신하려고 하는 시도와 싸운다고 했다”19) 오순절 신학은 이성만 추구하는 관념적 신학이 아니라 영적 실재와 함께 삶의 현장에서 인격적 만남을 갖는 관계지향적인 신학이다. 다시 말하지만 오순절 체험은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중심에 서있다.20)

 

B-1. 하나님의 주권 사상21)

개혁주의의 특징은 하나님의 주권사상(主權思想)이다. 개혁주의는 항상 하나님 사상을 그 중심으로 하고 있다. 감리교가 죄인의 구원, 침례교가 중생의 신비, 루터교가 이신득구(以信得救), 모라비안이 그리스도의 상처, 희랍정교가 성령의 신비, 로마 교회가 교회의 보편성을 각각 강조한다고 하면, 개혁주의는 하나님 사상을 강조한다.

개혁주의는 인간의 회심이나 칭의와 같은 인간에 대한 관심으로부터 출발하지 않고, 하나님이 차지하셔야 할 당연한 권리를 차지하시도록 하는 사상에서 출발한 것이다. 개혁주의자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롬11:36)이라는 말씀을 생활원리로 하고 실현하려 애쓴다.

개혁주의의 중심사상이 바로 하나님 사상이라는 점에 있어서는 많은 연구가들이 서로 일치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을 중심으로 하는 사상체계를 이루고자 할 때 만물에 대한 하나님의 절대적 지배, 즉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이라는 술어를 필연적으로 사용하게 된다. 그것은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이라는 말이 하나님과 우주와의 관계를 가장 잘 지적해 주는 술어이기 때문이다. 이 하나님의 주권이라는 말은, 자연계와 도덕적 세계를 지배하시는 하나님의 절대적 대권(絶對的 大權)이란 뜻으로 해석된다. 하나님은 자연계에서와 마찬가지로 진리, 도덕, 과학, 사랑, 등의 여러 면에서도 법칙과 질서에 따라 다스리신다고 개혁주의자는 믿고 있다. 하나님은 우주의 최고 절대적인 통치자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작정(作定), 창조, 심리, 구속(救贖)에서 주권적으로 역사하신다.


B-2. 오순절 신학의 입장

하나님의 주권은 조직신학 분야에서 신론에 해당된다. 그러므로 여기에서는 편히 상 성부, 성자, 그리고 성령을 함께 언급하고자 한다.22) 오늘날의 신론에 대한 논의는 삼위일체적이다.23) 오순절 신학의 하나님 이해는 삼위일체이다.24) 우리가 믿고 섬기는 하나님은 오직 한 분이신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영원히 스스로 존재하시는 자존자로서 이 세상을 창조하셨고 그의 계획 가운데 섭리하고 계신다. 하나님에 대한 인식은 먼저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서의 구분성과 관계성, 독립성과 협력성은 통해 알 수 있으며, 특별히 그리스도와 성경의 계시를 통한 특별계시와 자연을 통한 일반계시를 통해서도 하나님에 대해 인식할 수 있다.25)


기독교의 핵심은 기독론에 있다. 기독교가 유대교와 다른 유사 종교와 다른 점은 기독론에서 갈린다. 기독론은 다분히 구원관과 연관되며 기독교가 기독교 되게 하는 것이다. 오순절 신학의 기독론은 전통적 교리26)와 길을 같이 간다고 볼 수 있다. 다만 오순절 신학의 기독론 이해는 성령론적 기독론으로 접근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지금까지는 성령을 기독론적으로 이해하였다면 오순절 신학에서는 성령론적 입장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해하는 새로운 인식의 변화가 있다. 기독론적 성령론은 성령을 이해할 때 그리스도를 증거하며 그의 사역을 돕는 다는 차원에서 성령을 이해하기 쉽다. 그러나 성령론적 기독론에 있어서 성령의 이해는 구원 사역의 주체로 역사하시는 성령의 모습이 강조된다. 또한 창조의 주체로서의 성령의 역할도 확장 되어진다. 그리고 기독론에 대한 인식도 좀 더 폭넓어질 수 있다. 그러 의미에서 성령론적 기독론은 예수 그리스도의 두 본성에 대한 이해를 체험적 습득의 차원으로 인도할 수 있다고 본다.27) 이러한 기독론적 성령론이나 성령론적 기독론은 분리적 관계가 아니라 상호 보완적 관계로 이해되어야 한다.28)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개혁주의와 오순절주의의 신론(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 이해는 별다른 차이점을 발견하기가 어렵다. 다만 한 가지, 강조점의 차이인 데 개혁주의는 하나님의 주권 사상이 신학적으로 강하게 부각된 반면 오순절 신학은 성령님의 능력과 사역에 대하여 신학적으로 많은 강조점을 두고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 주권 사상에 관해 두 사상을 비교해 보면 개혁주의의 하나님 주권사상은 만물을 움직이는 주체 즉 주인에 대해서는 말하고 있지만 그 만물을 실제적으로 다스리고 하나님의 주권이 하나님의 주권이 될 수 있게 하는 주체에 대해서는 말하고 있지 못하다. 하나님의 주권은 성령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즉 하나님이 자연계뿐만 아니라 진리, 도덕, 과학, 사랑, 등의 여러 면에서 법칙과 질서에 따라 다스리시지만 그 법칙과 질서를 유지하게 하고 하나님의 다스림을 실제적으로 주관하며 이 땅 가운데에서 현실화 시켜주시는 분은 성령님에 의해서다. 그러므로 올바른 신 이해는 삼위일체를 강조하는 신 인식이어야 한다.


특별히 한 가지 첨가하여 언급한다면 영산에 대한 신 인식이다. 영산의 하나님 이해는 “좋으신 하나님”으로 표현될 수 있다. 그의 좋으신 하나님의 이해는 기존의 심판적인 하나님의 이미지에 일대 변화를 주었다. 이 변화는 기독교인의 삶의 영역까지 파급되었다. 좋으신 하나님과의 만남은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바로 이해할 수 있게 해주었으며 삶을 긍정적으로 보게 되었으며 신앙생활에 있어 참된 기쁨을 소유하게 되었다. 이것은 조직신학적 차원에서도 대단한 변화이다. 신 인식에 대한 변화는 광범위하다. 그 중에서 구원관과 교회관이 많은 영향을 받는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회개하여 하나님께 바로 서 있는 자에게 복 주시기를 원하시며 구원 베푸시기를 원하시는 좋으신 분이시다. 그리고 순복은 신학의 5대 신앙 중에 하나인 축복의 개념이 샤머니즘적이고 기복적인 물질로의 전향이 아닌 성서적이고 회개를 강조한 전인 구원적인 개념으로 확대된 것은 희망적 신학의 전개를 위한 귀한 자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C-1. 불가항력적 은혜29)

개혁주의의 구원은 하나님의 불가항력적 은혜임을 믿는다. 즉 구원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되며 사람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님을 주장한다. 하나님께서 죄인 안에서 구원의 역사를 시작하실 때 아무도 그 역사에 저항 할 수 없다는 것이 개혁주의자들의 신념이다. 하나님이 주권사상을 가지다보면, 구원의 문제도 자연히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서만 해결된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칼빈주의 5대 강령도 구원은 사람의 공로나 사람의 노력에 의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임을 강조한다.

개혁주의는 인간은 전적으로 부패한 존재이며(창6:5, 렘17:9, 시51:5, 롬3:10),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말한 영적 선을 행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다른 말로 하면, 인간은 영적으로 죽은 존재이므로, 자신의 힘으로는 예수를 믿을 능력이 전혀 없다는 말이다. 이렇게 전적으로 부패한 인간이어서 스스로 구원할 수 없는 존재이기에 하나님은 그들을 구원하시고자 창세 전에 선택하셨다(엡1:4). 이 선택은 선행을 조건으로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쁘신 뜻에 의한 은혜의 선택이다. 그리고 성자(聖子)는 성부의 택함을 받은 죄인들을 위하여 인간이 되시고, 그들을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구속을 완성하신다. 이것은 피택자(彼擇者)에 국한된 구속이다(마1:21, 요10:14, 행20:28). 제한속죄가 아니면 하나님의 선택은 무의미하다. 구원은 하나님의 선택이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만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타락한 죄인들을 회복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에는 피택자에게 그리스도의 순종과 죽음을 적용시키는 성령의 중생시키시는 역사가 들어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구원의 국면을 우리는 하나님의 불가항력적 은혜라는 말로 표현한다. 이 말이 내포하고 있는 뜻은, 성령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는데 결코 실패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삼위일체 하나님, 즉 성부, 성자, 성령은 죄인을 구원하시는데 다같이 참여하신다. 성부 하나님은 만세 전에 구원할 자를 미리 선택하셔서, 그의 백성을 성자 하나님에게 주시고, 성자 하나님은 때가 되어 이 세상에 오셔서 죄인들의 구속을 완성하신다. 그리고 성령께서는, 위에서 말한 대로, 선택된 죄인들에게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을 적용하여 저들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얻게 하시는 것이다.


C-2. 오순절 신학의 입장

오순절 신학은 개혁주의와 같이 인간의 전적 타락과 인간의 삼분설을 주장한다.30) 개혁주의 인간론에 대한 이해를 오순절 신학은 대부분 받아들이고 있다고 볼 수 있다.31) 한국 오순절자인 영산은 인간 이해를 인간의 영, 혼, 육의 전인적 타락으로 보고 있다. 그리고 그는 인간의 본성을 영, 혼, 육으로 구조적으로 분할하지 않고 영, 혼, 육이 기능과 역할을 달리하는 가운데 서로 통합된다고 한다.32) 즉 기능적 삼분설33)을 주장한다. 이러한 영산의 인간이해는 그의 전인적 구원관에 영향을 주었다.


개혁주의 신학은 구원의 문제를 하나님의 은혜로만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알미니안주의에 의하면, 구원은 하나님의 부르심과 인간의 응답을 통하여 성취된다고 본다. 즉 칼빈주의는 구원을 하나님의 사역에 의존하고 알미니안주의는 하나님의 부르심과 인간의 응답에 의존한다. 칼빈주의는 믿음을 하나님의 구원은사의 일부로 간주하나 알미니안주의는 구원을 위한 필수적인 것으로 간주한다.34) 오순절 신학은 인간 구원의 조건에 대해서는 대체적으로 칼빈주의를 따른다고 볼 수 있다.35)


오순절 신학의 구원관은 정통 교리에서 좀 더 확장된 모습을 보여준다. 즉 다시 말해 인간의 구원의 문제가 영적 차원일 뿐만 아니라 전인적으로 구원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신유(Divine Healing)가 강조되는 신학이다. 서양신학의 영향을 받은 한국 교회는 인간구원을 영적 구원만으로 좁게 해 버렸다. 그러나 인간은 영, 혼, 육을 가진 존재임으로 전인구원 혹은 넓은 구원이 필요하다. 오순절주의를 탄생시킨 오순절 운동의 초기에서부터 신적 치유에 관한 교리는 순복음의 중요한 요소를 구성했으며 순복음의 기본적 진리 중의 하나로 그 위치를 굳혀 왔다.36) 오순절주의자들은 육체적 질병으로부터 해방이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 가운데 일부분으로 포함되어 있으며, 이러한 구속 사역을 총체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믿는 자들의 특권이라는 인식하에서 신유를 선포하고 행해왔다. 예수님의 사역에서도 인간의 영적 필요를 보시고 하나님나라를 전파하시고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하셨고(막 1:14-15), 정신적인 필요를 보시고 귀신들린 자를 고쳐 주셨고(23-25절), 그리고 육체적 필요를 보시고 병든 자를 치료하셨다(26절).


오순절 신학의 전인적 구원은 생태계 회복도 포함시킬 수 있다. 생태계 역시 인간 타락 이전의 본래의 모습으로 회복되어져야 한다. 이것은 인간의 죄로 인해 생태계가 같이 저주 받았던 것에서 회복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의 사역에 의해 인간의 저주의 문제가 해결되었으므로 생태계도 성령님을 통한 진정한 회복이 이루어져야 한다. 그런 차원에서 오순절 신학은 성령론적 사역을 통한 인간의 영, 혼, 육 뿐만 아니라 지구의 회복에도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 오순절 신학은 자신과 사회, 그리고 자연세계를 다루는 전인신학이다.


D-1. 하나님 나라와 세상에 대한 견해37)

개혁주의는 하나님 나라와 세상과의 관계를 적극적이며 긍정적인 견해를 가지는 것이다. 오늘날까지 하나님나라와 세상과의 관계에 대한 견해는 늘 동일한 것은 아니었다. 개혁파 신학자들이라고 해서 모두가 다 똑같은 ‘문화적 명령’에 대한 인식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개혁파의 신학적 전통은 최선을 다하여 세계의 형태와 문화에 대하여 큰 관심을 표시해 왔다. 물론 세상과 일치한다는 뜻에서가 아니라, 세상을 변혁시킨다는 의미에서 그렇게 하였다. 우리는 이 사실이 칼빈에게서 아주 강하게 나타났음을 보게 된다. 제나바에 있어서의 칼빈의 관심은 복음 선포에 그치지 않고 그 이상으로 훨씬 더 넓은 것이었다. 확실히 복음의 선포는 가장 중요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사회와 국가의 생활 전반에 관련을 갖고 있는 것이었다.

개혁주의는 사회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며, ‘문화적 명령’에 대한 높은 인식을 갖고 있다. 문화적 명령에 대하여 논할 때, 기본적으로 지적되는 성결 귀절은 창세기 1장 28절이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이 귀절은 생활의 모든 방면과 경험의 모든 국면을 하나님의 주권에 종속시키고, 하나님을 섬기기 위하여 그것을 요구할 책임이 있음을 말하고 있다.

개혁주의자는 다음 말씀과 같이 매우 강한 신앙을 고백한다. “땅과 거기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중에 거하는 자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시24:1). 그리고 하나님은 한 순간이라도 세계를 자신 밖의 어떤 세력에도 내어주지 않으신다는 것을 개혁주의자는 믿는다. 이것이 바로 일반사회에서 사회악과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위범(違犯)에 대하여 무관심할 수 없다는 이유가 된다.

개혁주의자는 임신중절의 그 무서운 악, 도처에서 볼 수 있는 도덕적 부패, 권력에 짓밟힌 가난하고 불행한 사람들, 약하고 무력한 사람들에 대한 핍박에 대하여 반대하는 것이다. 분명히 사회변혁은 어떠한 의미에 있어서도 복음의 선포와 개인의 중생에서 분리되어서는 안 된다.


D-2. 오순절 신학의 입장

교회관에 문제는 교회의 본질과 연관되어 있으며 교회의 사회 참여의 방법과 수위에 관계되어 있다. 세상의 문화 속에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려고 했던 개혁주의의 실천적 노력은 성령의 현실적 임재를 강조하는 오순절 신학과 몇 가지 유사점과 차이점을 갖는다. 유사점은 교회의 현재성을 강조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 말씀에 의하여 세상을 변혁하고자 하는 개혁주의의 신학적 경향은 신자의 문화적, 사회적 사명을 강조하는 특징을 갖는다. 이것은 하나님 나라의 현재화를 강조하는 것을 의미한다. 성경에 있는 하나님의 왕국을 현실의 세상에서도 이루고자 했던 개혁주의의 신학적 사고는 오순절 신학이 강조하는 말씀의 현실화, 하나님의 나라를 실제적 삶에서 체험하고자 하는 신학적 사고와 유사점이 있다고 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약간의 신학적 차이점이 존재하는 데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현실에 이루고자 하는 방법적 차이이다. 개혁주의는 하나님의 임재가 세상의 모든 요소에 구석구석 임하기를 바란다. 그러나 개혁주의에 있어서 한 가지 아쉬운 점은 하나님 나라의 현실화를 위해 개인적 부분보다는 사회적 부분을 강조한다는 것이다. 성서에서 말하는 진정한 사회적 참여는 세상과의 영적인 분리가 전제되고 있다. 교회의 어원적인 뜻에서도 알 수 있다.38) 참다운 사회 개혁을 이루기 위해서는 개혁자로서 먼저 세상과 분리되고(죄와 사망에서 구원받은 개인적 신앙체험을 하고)나서 사회적 참여를 강조해야 된다고 본다. 그런 의미에서 오순절 신학은 개인구원을 강조한다. 그리고 한편으로 오순절 교회들은 성령의 은혜를 간구하면서 묵묵히 사회적 구원을 이루고 있다.39) 역사적으로 오순절 운동은 많은 소외 받은 사람들에게 사회적, 경제적 굴레에서 자유하게 하는 능력을 부여하였다. 오순절 교회는 처음부터 사회적 약자와 함께 성장하였다.40)

이에 관하여 외부로부터 비판받는 정치적 사회적 참여의 신학적 부재는 약간의 오해에서 기인한다고 본다. 부족한 점은 차차 보안하면 될 것이다. 확실한 것은 오순절 신학은 진정한 사회적 참여를 할 수 있는 신학적 기본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다른 점은 개혁주의는 변화의 힘을 말씀으로만 국한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오순절 신학은 말씀과 성령의 능력을 강조한다. 사회 변혁의 힘은 성령께 있다. 초대교회에 성령이 임함으로(행2:1-4) 진정한 신약 교회가 형성된 것처럼 성령의 능력이 사회변혁의 원동력인 것이다(행1:8). 오순절 신학은 그 원천과 함께 늘 대화하며 동행하는 것을 강조하는 신학이다.


Ⅳ. 성령의 역사와 성령세례

여기에서는 개혁주의와 확연히 틀리는 신학적 견해를 다루고자 한다. 즉 성령의 사역 중에 중생과 성령세례의 신학적 차이가 그것이다.41) 오순절 신학에 있어서 가장 뚜렷한 특성중의 하나는 중생과 성령세례의 구별성을 강조한다는 점이다. 이 개인적이고도 획기적인 영적 체험을 통해 개인들은 파격적인 내적 변화를 경험한다. 성결 주의에 뿌리를 둔 오순절주의자들은 이것을 성령님의 성화의 역사(sanctification)로 본다. 반면에 성결운동에 뿌리를 두고 있지 않은 오순절 교회들은 이를 봉사를 위한 능력부여로 본다.42) 이러한 신학적 입장은 두 주류 기독교 그룹인 복음주의와 에큐메니칼 운동을 중심으로 한 그룹들과는 다른 독특한 것이다. 언뜻 보기에는 복음주의와의 신학적인 입장 차이가 커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성령세례를 회심과 구별되고 뒤따라 나타나는 현상으로 보는 오순절적 입장은 성령세례를 개종 또는 거듭남의 일부로 보는 복음주의의 이해와는 중대하게 다르다. 43)이러한 복음주의와의 신학적 차이는 최근에 제임스 던(James Dunn)의 저술로 집약되었다.44) 반면에 세계교회를 하나로 모으고자 하는 에큐메니칼 그룹과의 신학적 차이는 훨씬 더 분명한 듯하다. 성령의 역사를 지나치게 넓혀 일반화한 경우인데, 이러한 주장에 의하면 성령의 역사는 압제받는 자들과 불공평하게 취급받는 사람들을 위해서 교회가 이루고 있는, 또 성취해야하는 모든 일들과 동일한 것으로 간주한다.45) 이들의 성령이해는 신학적 무지의 소산이며 성령에 대한 성서의 증언을 왜곡하는 견해일 뿐이다. 그들이 말하는 성령은 비성서적이며 기독론 부재의 성령이해일 뿐이다. 기독교의 성령은 일반종교의 잡신들과는 다른 것이다. 성경이 말하는 성령의 역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으로서 일한다. 또한 성령의 사역은 사람들을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하여 중생하도록 하며 한편 성령세례를 베푸시는 분이시다. 성경에 기초한 성령은 기독론과 함께 간다.

오순절 신학에 대한 바른 이해는 중생과 성령세례의 의미를 분명히 이해할 때 가능하다. 중생이 새 생명을 얻어 변화된 신분의 단계라고 한다면 성령세례는 중생한 자들이 하나님의 사역을 위해 하나님의 권능을 받는 체험이다. 즉, 중생의 역사에 첨가되어 일어나는 하나님 은혜의 두 번째 역사이다. 중생(born again)과 성령세례(the baptism of Holy Spirit)에 대한 개혁주의와 오순절 입장을 비교하면 아래의 표와 같이 이해할 수 있다.46)

생략

오늘날 신학적 논의의 중심은 성령님이다. 이것은 오순절 신학이 세계 신학계에 끼친 커다란 공헌이기도 하다. 20세기 여명이 떠오르기 까지 세계 기독교계의 신학적 논의는 거의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것이었다. 그러나 20세기 초에 등장하기 시작한 오순절 운동은 전 세계적으로 성령님에 대한 이해를 새롭게 불러 일으켰다. 오순절주의자에 있어서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은 추상적인 신학적 개념이 아니라 믿음에 의해 구체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진리인 것이다. 즉 하나님은 하나의 사고 개념이 아니라 곧 임재와 권능으로 나타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순절 주의의 사고방식은 초자연적 세계관에서 비롯된다. 이는 신자의 현재적 삶 가운데 표적과 기사를 일으키는 하나님의 능력을 풀어놓는 성경적 세계관이자 믿음이다. 오순절의 성령론적 신학은, 첫째 섬김을 위한 능력 부여로서 성령세례의 필요성과, 둘째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그리스도를 높임(마 3:11; 막 1:8; 눅 3:16; 요 1:33; 행 1:83)과 같은 두 가지 주요 성서적 강조점을 지니고 있다. 그 까닭은 오순절의 가장 큰 특징인 성령 세례에서 강조된 ‘권능’이 그리스도를 위한 증거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령세례의 목적은 사역에 있으며 성령세례의 가장 큰 표적은 예수 그리스도를 높이는 것이다. 오순절 신학의 핵심은 바로 성령의 능력과 인격에 대한 체험에서 비롯된다. 바울이 에베소 교인들에게 질문한 것은 ‘너희가 성령을 믿느냐’가 아니라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행 19:2)로 바울은 믿음의 위치가 아닌 성령 안에서의 삶과 체험을 말한 것이다. 이는 성령의 은사들을 통해 성도를 새롭게 하고 소생케 하며 풍부하고 다양한 신앙 체험을 주시는 성령하나님의 역사이기도 하다.


오순절 신학은 삼위일체 교리에 근거하여 성령의 인격을 말하고 있다. 많은 자유주의자들은 성령의 인격성에 대한 성경적 입장을 떠나 하나님의 초월성(transcendence)과 인격성(personality)을 부인하고 하나님의 내재성(immanence)만을 강조한다.47) 특별히 영산의 신학에 있어서 성령은 인격체임을 매우 강조한다. 그는 그의 목회를 성령의 인격성을 강조하는 오순절적 성령의 사역의 장임을 누누이 강조한다. 오순절이 오순절 될 수 있는 것은 성령에 대한 신학적 이해의 확장이라고 볼 수 있다. 성령의 세례를 강조하는 오순절 신학은 교회뿐만 아니라 성도 개인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영향을 끼쳤다. 성령의 능력을 통한 선교 사역의 확장, 다양한 성령의 은사와 열매로 인한 목회적 사역의 풍성함, 성도개인의 윤택한 삶, 그리고 성령을 통한 인간 회복 등이 그것이다. 오순절 신학의 과제는 성령 세례에 대한 좀더 폭 넓은 연구가 있어야 한다.


오순절주의는 방언을 말하는 것이 성령세례를 받은 외적 증거라고 본다.48) 니콜(John Thomas Nichol)도 “오순절단체의 유일무이한 것은 성령을 받은 견해는 방언으로 말하는 현상에 의해 표시함을 의미한다. 이것이 오순절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소위 역사적 기독교 교인들로부터 그들을 구별하는 원리이다”라고 하였으며, 도날드 기(Donald Gee)도 오순절교회의 특징적 교리는 성령세례의 첫 증거는 방언으로 말하는 것이라고 하였다.49) 일부에서는 아직도 꼭 방언이 성령 세례 받은 증거라고 해야 하는가에 대한 반발도 거세다. 성령세례 후에 나타난 현상들에 대한 정확한 개념을 세우는 것이 시급히 요청되어진다.50) 앞으로 오순절 신학의 성령에 대한 논의는 성령이 누구인가에 대한 질문보다는 성령이 왜 오셨는가에 대한 실천적 답변에 힘을 기우려야 할 것으로 본다.


Ⅴ. 나가는 말


우리는 지금까지 개혁주의 신학과 오순절 신학의 네 가지 유사한 신학적 특징들과 한 가지 서로 다른 신학적 견해를 간략하게 살펴보았다. 어떤 부분에서는 오순절 신학이 충분히 수용할 수 있는 것도 있고 또한 한 걸음 더 나아가 새롭게 발전시킬 수 있는 조직신학적 제반영역도 발견하게 된다. 그러나 어느 부분에서는 서로의 견해차이가 있었다는 것을 주지하였던 바이다. 오순절 신학과 개혁주의 신학을 비교하여 평가한다면 신학적으로 큰 뿌리와 줄기는 같이 공유 할 수 있겠으나 가지와 꽃 봉우리에 해당되는 부분에서는 서로의 모습을 지켜야 할 것으로 본다. 바울신학과 누가신학의 한계를 극복하고 종합할 수 있는 거시적 신학이 나오기 전까지는 신학적 논의가 끊이지 않을 것이다.


사실 성경은 한 가지 이론으로 모든 성경의 내용을 다루기에는 적합하지 않다고 본다. 성경은 하나의 통일적인 이성적 체계에 의해서 기록된 것이 아니라 다양한 저자들의 신학적 의도와 여러 복합적인 역사적 정황들을 포함하고 있는 성령의 의해서 쓰여진 책이기 때문이다. 성경은 독특하게 우리에게 다가온다. 하나님은 그의 뜻을 성경을 통해 나타나시기도 하시면서 또한 동시에 그 자신을 숨기시기도 하신다. 성경은 역사적인 책이면서 동시에 영적인 책이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적인 면만 강조할 수 없고 그렇다고 영적 신비적인 면만도 강조할 수 없다. 그러므로 성경을 이해할 때 역사적 사실 뿐만 아니라 영적 의미도 같이 살펴보아야 한다. 인간도 마찬가지다. 인간은 천사와 다르게 육체를 가지고 있고 동물과 다르게 영혼을 가지고 있는 아주 독특한 영적 피조물이다. 따라서 인간은 그의 한계를 인식하고 인정하여야 한다. 하나님의 뜻을 우리 인간이 알 수도 있겠지만 완전하지는 못하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만약 성경이 이성으로 이해되어져서 한 가지 체계로 묽어 질 수 있다고 한다면 성경은 그 순간부터 더 이상 성경이 아니다. 인간 이성에 초월하여 계신 하나님은 사라지고 인간에 의해 밝혀진 이성적 하나님만 드러나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경을 이해할 때 중요한 것은 균형 잡힌 시각이다.

성경 자체가 누가의 복음서와 바울의 서신들을 다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특별히 성서의 통일성 문제도 사상적 혹은 신학적 관점에서 접근하기 보다는 먼저 성경 문헌들의 참된 저자인 성령께 의존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성령께서 성경 기록의 영감을 각 저자들에게 불어넣으셨기 때문이다.


오순절 신학과 개혁주의 신학의 비교 연구에서 필자가 깨달은 바는 신학적으로 어느 한쪽을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신학적 관점과 특징을 이해하고 서로의 신학적 약점을 보완하는 차원으로 신학이 발전했으면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신학적 통합의 시도를 게을리 하거나 자신의 견해를 신학적 연합을 위해 포기하라는 의미는 아니다. 다만 각자의 신학적 입장을 가지고 서로를 견제하며 하나님이 밝혀주시는 부분까지 서로 겸손하게 신학적 논의를 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신학을 하는 것이 나의 개인적 사고를 들어내기 위해 하는 것이 아니므로 겸허한 자세를 늘 견지해야겠다. 신학은 겸손한 도(道)가 필요한 것이다. 오순절 조직신학도 겸손한 자세로 우리의 신학을 더욱 개발하고 발전시켜 성령의 임재가 있는 학문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진리인 성령을 모신자만이 진리에 대해서 말할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하자.

 

각주

1) 이 글은 신 복윤 교수가 몇 년 전에 두란노 서원에서 출판한「목회와 신학」에 “복음주의, 근본주의, 개혁주의 비교”라는 제목으로 쓰여진 글이다. 그 글에서 신복윤 교수는 개혁주의의 사상적 특징을 4가지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그 잡지가 출간한 해를 필자는 정확하게 알 수는 없어서 인터넷 검색(http://www.naver.com)을 통해 다음과 같은 싸이트

(http://www.heedae2.pe.kr/data/26.hwp)에서 원문과 같은 글이 4, 5항에 기록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2) 오순절 성령 운동의 역사적 개관에 대해서 좀더 자세한 내용을 알고자 한다면 다음과 같은 책을 참고하기 바람: 국제신학연구원 저,『여의도순복음교회의 신앙과 신학Ⅰ』(서울: 서울서적, 1993). pp. 142-164; 현대 오순절주의에 역사적 배경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책을 참조바람: 빈슨 아이난 저, 『세계오순절 성결운동의 역사』 이영훈․박명수 역 (서울: 서울서적, 2000).

3) 빈슨 사이난, 『20세기 성령 운동의 현주소』국제신학연구원 역 (서울: 예인, 1995). pp. 39-40.

4) 특히 한국에선 여의도순복음교회 담임목사인 조용기 목사의 신학(영산신학)을 정립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5) 신복윤, p. 75.

6) H. Henry Meeter, The basic Ideas of Calvinism (Grand Rapids: Baker Book House, 1975), p. 29.

7) 개혁주의 신앙고백서들은 그 수가 30을 넘지만 신조적 권위를 가지고 널리 채용된 것을 보면 ① 제2 스위스 신앙고백(The Second Helvetic Confession)은 1564년 볼링거(Bullinger)가 기안하여 스위스, 폴란드, 헝가리, 스코틀랜드, 그리고 프랑스의 개혁파 교회들이 신조로 채용 ② 하이델베르그 교리문답서(Heidelberg Catechism)는 1562년 울씨누스(Ursinus)와 울레비아누스(Olevianus)가 작성하여 도르트 대회(The Synod of Dordt, 1618-1619)에서 동의를 얻고 독일, 화란, 미국의 개혁파 교회들이 교리 표준서로 채용 ③ 그 외에 영국교회의 39개조 신조, 개혁파 교회 세계대회인 도르트 대회에서 채택한 도르트 신경(The Canons of Dordt)이 있고, 웨스트민스터 회의(1644-1647)에서 작성한 "웨스트민스터신 앙고백과 그 대소요리 문답" 등이 있다. 도르트 신경(信經)은 알미니안 논쟁으로 인하여 작성되어 개혁파 교회들이 이미 가지고 있었던 신앙고백의 보충적인 것이므로 그 자체가 하나의 완전한 신앙고백서는 못된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알미니안 논쟁이후 널리 채용된 유일한 개혁주의 신조이다. 이것은 개혁파 교회들의 일치를 과시하기 위해서 세계교회적 목적과 범위를 가진 것으로 "개혁주의 교리 체계의 가장 완숙한 신조적 진술이다.

8) 다음과 같은 학자들이 있다. 칼빈 이후로 볼링거(Bullinger), 울씨누스(Ursinus), 쟌키우스(Zanchius), 플라누스(Polanus) 등이며 그 후 아메시우스(Amesius), 보에티우스(Voetius), 오웬(John Owen), 호우(John Howe), 에드워즈(Jonathan Edwards) 등을 들 수 있고, 근대에 이르러서는 핫지(Charles Hodge), 카이퍼(A. Kuyper), 바빙크(H. Bavinck), 워필드(B.B. Warfield), 헾(Heinrich Heppe), 반틸(C. Van Til), 벌카우어(G.C. Berkouwer), 벌코프(Louis Berkhof) 등을 말할 수 있다.

9) D. 스틸/C. 토머스 공저,『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 김남식 역 (서울: 엠마오, 1986). pp. 15-23.

10) H. Henry Meeter, p. 30.

11) 신복윤, pp. 75-77.

12) Fred H. Klooster, The Uniqueness of Reformed Theology: A Preliminary Attempt at Description, (Grand Rapids: The Reformed Ecumenical Synod, 1979).

13) 신전통주의자들에 따르면 계시는 성경과 동일시될 수 없고, 성경은 계시의 증거요 표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성경의 진술들은 계시 자체가 아니다.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과 동일시한다는 것은, 계시를 객관화 하는 것이요 형체화하는 것이라고 한다. 계시는 하나님이 사람을 만나는 사건이요, 하나님과 사람이 상봉하지 않는 한 계시가 일어나지 않는다고 그들은 말한다(칼 바르트의 성경관 비판에 대하여는 Colin Brown, Karl Barth and the Christian Message, pp. 54-62; Klaas Runia, Karl Barth's Doctrine of Holy Scripture를 참조).

14) 기하성총회출판국 편, 『오순절 교의학』(서울: 엘림, 2003). pp. 27-46.

15) 영산의 성경론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서울 신대 신약학 교수인 김희성 박사가 2004년 한세대 오순절 학술 세미나에서 행한 발제물에 자세히 언급하고 있으므로 참고하기 바람.

16) Ernest Swing Williams, Systematic Theology Vol. 1 (Michigan: Gospel Publishing House, 1953), p. 76.

17) 기하성총회출판국 편, p. 41.

18) 한국의 대표적인 오순절 교단인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 총회출판국에서 편찬한『오순절 교의학』에 보면 오순절 신학의 성경관을 잘 알 수 있다: 기하성 총회출판국 편, p. 27.

19) 이재범, 『성령과 선교』 (서울: 보이스사, 1985), p. 88.

20) Ibid., p. 98.

21) 신복윤, pp. 77-78.

22) 성령님에 대한 구체적인 견해는 중생과 성령세례 장에서 좀 더 구체적으로 다루고자 한다.

23) 신문철 교수의 강의안「삼위일체적 성령론」중에서

24) 한국 오순절 최대 교단인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의 헌법 제7조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신학적인 정의를 하고 있다. 이 정의는 기본적으로 서방교회의 전통적인 교리에 근거하고 있다. 1) 용어의 정의: 우리는 ‘삼위일체’라는 용어가 구체적으로 성경에 표현되어 있지는 않으나 성경 전반에 걸쳐서 본체이신 한 분 하나님 안에 삼위(三位)일체(一體)로서 존재하심을 밝히고 있음을 믿고 이것이 절대적으로 성경적인 것을 믿는다(창1:1, 26; 마28:19; 고후13:13; 요14:16,17). 2) 삼위일체 안에서 구분과 관계성: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 안에 있는 품격의 구분을 성부, 성자, 성령이라는 특수한 용어를 가지고 가르치셨다. 그러나 이 삼위일체의 구분과 관계성은 성경에 충분히 설명되어 있으나 인간의 이성을 초월해 있는 것이 사실이다(눅1:35; 고전1:24; 마11:15-17, 28:19; 요일1:3,4).

25) 기하성총회출판국 편, p. 82.

26) 전통교리에 대해서는 신문철 교수의 제 2강의록을 참고하기 바람.

27) 성령의 충만함을 입은 인간의 모습 속에 그리스도의 두 본성의 연합적 사역을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28) 신문철, 『신교수의 신학이야기』 (서울: 엠-애드, 2003), p. 261.

29) 신복윤, pp. 78-79.

30) 기하성총회출판국 편, pp. 155-161.

31) Ibid., pp. 161-178.

32) 국제신학연구원 저, 『여의도순복음교회의 신앙과 신학Ⅰ』(서울: 서울서적, 1993). p. 182.

33) 기능적 삼분설은 인간성을 구조적으로 분할하는 영, 혼, 육의 분리체로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통일체로로서 영, 혼, 육이 각각 그 기능과 역할을 달리하는 것을 말한다.

34) 기하성총회출판국 편, pp. 190-191.

35) 이 문제는 많이 논의되어야 한다고 본다. 기하성총회출판국에서 펴낸 『오순절 교의학』(pp. 190-198)을 보면 인간 구원의 조건들에 대해서 정확하게 오순절 입장을 밝히고 있지 않다. 구원을 이루는 조건들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와 부르심을 말하며 중생과 회개에 있어서의 성령의 역할을 강조하지만 믿음에 대한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해서는 분명한 입장을 하고 있지 않다; 신문철 교수님의 제9강의록(p. 5)을 참조해 보면 구원은 인간의 선행에 달려있지 않고 삼위일체 하나님의 은총과 사역에 달려있다고 하며 삼중축복의 구속 사역은 하나님의 절대적 은혜로서 가능하다고 했다. 또한 미국 하나님의 성회의 공식적인 16개의 신조에 대한 해설이 담긴 넬슨(P.C. Nelson)의『성경의 교리』라는 책을 보면 구원은 전적 하나님의 사역이라고 한다. 인간의 역할은 단지 구원을 하나님으로부터 온 선물로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한다. 다분히 칼빈주의적이다(국제신학연구원 저, 『여의도순복음교회의 신앙과 신학Ⅱ』, p. 62) 그러나 필자가 이해하기는 오순절주의자들마다 약간의 견해 차이가 있다고 본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성령이 역사하지만 그것을 인간이 거부하는 모습이 성경에 나온다(마22:1-14). 그리고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어찌하든 간에 인간이 믿음으로 예수그리스도를 받아들여야 함으로 구원의 조건이 인간의 믿음의 선택에 달려있다고도 볼 수 있다.

36) 신유의 복음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두 책을 참조하기 바람: 영산연구원 저, 『오중복음과 삼중구원의 축복』(서울: 서울서적, 1991), pp. 75-90; 기하성총회출판국 편, pp. 359-377.

37) 신복윤, pp. 79-80.

38) 교회라는 단어는 그리스어 ekklesia의 일반적인 번역이다. 이것은 그리스어의 동사 kaleo(부르다), 그것의 복합어인 ekkaleo (소집하다;call out)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그러므로 ekklesia란 (세상으로부터 분리되어)정당하게 소환된 혹은 소집된 사람들의 모임이란 것을 의미한다: E.G. 제이, 『교회론의 변천사』주재용 역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02), p. 18.

39) 오순절 교단처럼 사회적 봉사를 많이 하는 교회들도 드물다. 원래부터 가난자들로부터 교회가 시작되었기 때문에 사회에 대한 목회적 돌봄이 많이 있어왔다. 한 예로, 여의도순복음교회는 한국 오순절 교회의 대표적인 교회이다. 이 교회의 사회적 돌봄과 활동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글을 참조하기 바람: 배현성, “영산의 신학지평과 희망이해,”『2004 영산국제신학 심포지움』영산신학연구소 편 (서울: 한세대학교출판부, 2004), p. 230.

40) 마원석, “사회적 차원에서의 성령의 역사,”『성령의 사역에 있어서 그리스도인의 성화』국제신학연구원 편 (서울: 국제신학연구원, 1998), p. 187.

41) 배현성, 『젓가락과 신학의 만남』(서울: 한세대학교출판부, 2002), p. 120.

42) 마원석, p. 181.

43) 크게 성령세례와 중생을 다른 별다른 체험으로 보는 오순절 견해와 중생과 성령세례를 나누지 않고 같이 보는 복음주의적 견해가 그것이다. 오순절 입자의 학자들은 R. A. Torrey, J. E. Cumming, Stanley M. Horton등이 있다.

이들의 주장을 간략하게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제자들이 중생은 하였으나 성령의 세례를 받지 못했는데(행1:5, 8:12, 19:1-2) 오순절 성령강림을 통하여 성령세례를 받았다는 것이다. 즉 중생과 성령세례를 확연히 구분하고 있다. 둘째 성령세례의 일차적인 육체적 증거로서 방언을 들고 있다. 즉,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행2:4)과 고넬료의 집(10:45-46), 그리고 에베소에서의 성령의역사(행19:6)를 통한 증거는 확실히 방언이었다. 셋째 오순절의 성령강림은 단회적인 사건이지만 신자들에게 주어지는 성령세례는 반복되며 오늘도 교회 안에서 체험적으로 계속되고 있다. 넷째 성령세례는 거듭난 신자가 주의 복음을 증거하고 헌신하기 위하여 필수적으로 요청되는 권능의 사건이다(행1:8).

이에 반대되는 견해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비오순절 학자들 혹은 복음주의자들이다. Richard Gaffin, John R. Stott, James Dunn등이다. 이들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 Gaffin: 첫째, 사도행전에서 나타난 성령을 부어주신 사건은 단회적인 사건이다. 둘째,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에 연합되면 누구나 성령을 선물로 누린다. 셋째 오순절 사건은 구원의 서정이 아니라 구원의 역사로 이해해야 한다. 즉 오늘날도 계속 적용되는 사건의 일부가 아니라 단회적으로 완성된 구원역사의 한 사건이라는 것이다. 반복적이지 않다. Stott : 중생과 성령세례는 같이 받았다고 주장함. Dunn은 오순절 성령사건을 구약시대의 구원과 신약시대의 구원의 분수령을 삼고 오순절 성령강림일 날로부터 신약적 의미에서의 그리스도인 되었다고 본다(예수께서 요단강에서 성령으로 세례 받으심으로 새 시대와 새 언약에 들어간 것처럼). 그러나 던은 사도행전에서 계속되는 성령세례의 사건에 대해서는 더 이상 설명하지 못한다.

44) 이 분야에서 그의 대표적인 저작은 James D. G. Dunn, Baptism in the Holy Spirit (Philadelphia: Westminster; London: SCM, 1970)이다. 그의 주장은 오순절 신학자들의 끊임없는 반발을 받는다. 예를 들면, Robert P. Menzies, Empowered for Wintness: The Spirit in Luke-Acts, Journal of Pentecostal Theology Supplement Series 6 (Sheffield: Sheffield Academic Press, 1991).

45) 마원석, p. 182.

46) 박정렬 저,『오순절 신학』(서울: 순신대학교출판부, 1996), pp. 159-161.

47) 신정통주의자들에게서 성령의 인격성에 대한 교리를 찾아볼 수는 없다. 그들은 성령의 구별된 인격을 부인하며 다만 유니테리안적인 의미로 성령은 ‘신의 현현’이라는 뜻으로만 신성을 긍정할 뿐이다. 바르트와 부룬너를 제외하고는 신전통주의자들의 저서들은 대부분 성령의 인격성에 대해 무관심하다. 그들의 기본적 관심은 성령께서 어떻게 인간에게 역사하시느냐는 것이다: 기하성총회출판국 편, pp. 134-136.

48) Ibid., p. 259.

49) 이재범, p. 123.

50) Ibid.,, p. 101.


마음의 할례 jesus recovers us

(아래 돈봉투 사건을 보면서)

우리 인간은 누구나 다 믿는 대상이 있습니다.

 

십계명의 그 우상은 바로 우리의 심령 중심에서 믿고 섬기는 것들이지요.

 

잘 생각해보십시오.

 

사람들은 사실 돈(재물), 방탕한즐거움, 자기주먹(권력), 자기육체, 허명. 종교적 도덕적 행위들이 자신들을 구원해줄가라 믿고 나아가 섬기며 살아갑니다.

 

하지만 이들은 결국 죽음이라는 육신의 장막이 무너지는 일이 일어날때 아무런 역활을 하지 못합니다.

 

즉 그들은 영원히 우리가 믿을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 잠시 잠깐 있다 사라질 것들입니다.

 

유투부브에 사후세계의 체험을 치고 검색해보면 모두들 죽음 이후 세계가 있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물론 가장 확실한 성경이 증거하고 있지요.

 

이 불신의 유물론적 시대에(공산주의만 유물론이 아닙니다. 작금의 자본주의도 사실은 유물론이져.) 성경을 말을 믿지 않다가 육신의 장막이 무너진 이후 후회해도 이미 늦습니다.

 

성경은 아브라함에게 육신의 할례(포경수술)를 하도록 명령합니다. 심지어 전쟁이 임박할 그때 할례를 하도록 명령하기도 합니다. 

 

육신의 할례를 한 상태에서 싸울 수 없는 상태에서 하나님만을 의지하도록 하기 위해서 입니다.

 

육신의 할례는 사실 마음의 할례를 예표합니다.

 

육신의 할례를 시행할때 엄청난 고통과 아픔이 따르듯이 우리 심령안의 우상을 없애는 마음의 할례를 할때도 마찬가지거든요.

 

즉 우리 마음에 덕지덕지 붙어있는 그 우상들 현대인들에게는 돈이나 권력 자신의 육신과 같은 그런 것들에 의지하지 않고 오직 여호와 하나님과 그 아들 예수만을 의지하기 위해서는 고통과 아픔이 따르는 마음의 할례를 해야 하는 것이져.

 

믿음과 구원은 그래서 값싼 믿음과 구원이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엄청난 대가를 치루었듯이 우리 인간편에서도 믿음을 인정받기 위해(아브라함이 자기 마음의 우상이었던 이삭을 죽이는 마음의 할례를 했을때 그의 믿음이 하나님께 인정을 받게 되었음) 마음의 할례라는 대가를 지불해야 하는 것이죠.

 

하지만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 가능합니다. 인간적인 노력과 공로로는 절대 이루어질 수 없는 것입니다. 마귀사단의 권세는 성령님의 개입없이는 깨어지지 않기 때문이지요.

 

애굽의 바로는 여호와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을 놓어주라고 명령했을때 바로 보내주지 않았습니다. 재앙에 재앙이 따르고 자기 아들이 죽었을때야 겨우 풀어주었죠. 그리고 그 가운데서 성령님의 전적인 역사가 있었습니다.

 

우리 마음에 덕지덕지 붙어 떨어지는 않는 이 우상을 제거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믿음은 단지 지식적인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삶 속에서 철저하게 하나남만을 바라보고 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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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봉투' 수사 확대…박희태 의장 조사 불가피

SBS|
정혜진|
입력 2012.01.09 22:20
|
<8뉴스>

<앵커>

검찰 수사는 지금 문제가 된 2008년 전당대회뿐만 아니라 다른 행사까지 전방위로 확대될 조짐을 보이고 있습니다. 박희태 국회의장에 대한 조사도 불가피해 보입니다.

보도에 정혜진 기자입니다.

<기자>

검찰은 오늘(9일) 2008년 전당대회를 전후해 300만 원이 든 돈 봉투를 받은 당시 고승덕 의원실 여직원과 이를 돌려준 보좌관을 불러 조사했습니다.

보좌관은 고 의원의 지시로 전당대회 다음 날 돈 봉투를 들고 여의도 당사 대표실로 찾아가 박 대표 비서에게 돌려줬다고 진술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검찰 관계자는 이렇게까지 진술이 구체적으로 나온 이상 박희태 국회의장에 대한 조사는 불가피하다고 밝혔습니다.

오는 18일 귀국하는 박 의장의 일정을 감안하면 조사시점은 설 연휴 전인 20일 쯤이 유력합니다.

다만, 박 의장이 전면 부인하고 있어 소환 조사를 할지 제 3의 장소에서 조사 할지는 결정되지 않았습니다.

검찰은 또, 한나라당 2010년 전당대회와 2008년 총선 비례대표 공천과 관련해 제기된 의혹에 대해서도 수사를 확대할 방침입니다.

검찰은 한나라당 비대위가 "검찰이 모든 부분을 성역없이 수사해 달라"고 촉구한 것을 사실상 수사의뢰로 해석했습니다.

서울중앙지검은 사건이 배당된 공안 1부 검사 이외에 특수부와 금융조세조사부에서 수사 인력을 보강해 검사 6~7명 규모의 수사팀을 구성했습니다.

(영상취재 : 김현상, 영상편집 : 박선수)

정혜진hjin@sbs.co.kr

정말 많이 울었습니다...(이제는 내가 가장이다 기문이의 도전) 정치

눈물이 매마른 줄로만 알았는데... 마음이 아파 잠도 자지 못한 채 정말 많이 울었습니다...

 

 

 

 

 

 

 

 

 

기문이와 같은 소년소녀가장은 생각보다 정말 많습니다.

 

일시적 생계비가 전액 삭감되고 저소득층 긴급 복지비 예산이 대촉 삭감 되었으며,

 

결식아동 급식 지원금도 전액 삭감 됐습니다.

 

그 어느 어른 가장 보다도 가족을 지키기 위해 땀흘리며 열심히 살아가는 기문이와 같은 소년이

 

이제는 생존의 기회조차도 박탈 당할 위험에 처했습니다.

 

기문이와 기문이의 어린 동생들은 집에서는 물론 학교에서도 돈이 없으면 밥을 먹을 수 없으며,

 

긴급생계지원비 같은 것을 신청해도 거의 받을 수가 없는 상황이 될 것입니다.

 

아이들은 절망과 고통 속에서 절규하며 몸부림치다가 결국 추운 겨울에 굶주림에 허덕이다가

 

세상에서 소외된 채 쓸쓸히 죽어갈 지도 모릅니다.

 

그런 세상이 지금 우리 눈 앞에 펼쳐지려 하고 있습니다.

 

기문이와 같이 힘겹게 살아가는 아이들이 생존 할 수 있도록... 미래를 꿈꿀 수 있도록...

 

최소한의 기회만은 줄 수 있도록 잘못 된 국회예산 배정을 막아야만 합니다.

 

촛불은 바로 이런 때 불타올라야 합니다.

 

 

 

 

하박국서....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jesus recovers us

애굽에서의 기적과 홍해의 기적을 체험한 이스라엘은 하박국서에서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밥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를 나의 높은 곳으로 다니게 하시리로다"

 

하나님을 처음 만남은 기적과 같은 일이지만 그분과 동행하는 삶은 단지 기적과 같은 것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마음의 연합이 이루어져야 가능하지요.

 

이 세상의 가난은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마음이 가난하도록 만드시는 하나님의 지혜의 연단이지요.

 

물질의 가난을 마음의 가난(곧 겸손)으로 바꿀 수 있는 자는 참 복이 있는 자 입니다.


구약의 하나님은 아버지의 마음 신약의 하나님은 어머니의 마음 jesus recovers us

자식이 잘못 되어 갈때 속으로 피눈물을 흘리면서 자식을 바로 잡기 위해 매를 드는 아버지의 마음이 구약에는 절절히 나타납니다.

 

그리고 자식이 다른 사람한테 잘못함으로 죽게 됐을때 그 자식을 대신해서 죽고자 하는 어머니의 마음이 신약에는 절절히 나타납니다.

 

부디 하나님이 어디 있냐고 말하지 마십시오

 

우리 아버지와 어머지가 우리에게 대하는 그 마음의 원천이 바로 하나님의 마음이고

 

하나님은 이런 만물 가운데 하나님이 계심을 분명히 나타내셨습니다.

 

나중에 죽어서 하나님을 몰랐다는 소리는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누구나 아버지 어머니 없이 이 세상에 태어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고아와 과부를 그렇게 자주 언급하는 이유는 고아의 경우 그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해 잘못 될까봐 걱정하시는 하나님의 절절한 마음을 나타내시기 위한 것입니다.(고아에게는 하나님이 직접 부모가 되어 주십니다.)

 

고로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그 사랑인 하나님은 부모님들을 통해 자신을 감추어 놓으셨습니다.


[선데이저널 10대 특종보도] 1위, MB 상대 친자확인소송 정치

[송년호 특집]선데이저널 10대 특종보도 
 
선데이저널 탐사보도 레이다망에 잡힌 10대 사건들

-MB 친자확인소송, BBK 파문, 에리카 김-김경준 추적
-이수만 저택구입, 가수 최성수 콘도구입 등 추적
-신세계 이명희 회장, 한화그룹 김승연 회장의 수상한 행보

 

http://bit.ly/tlJlD8

 

(1) MB 상대 친자확인소송 조성민 씨 파문

-서울가정법원‘사건번호 2010-드단-110537’
-2010년 12월 소송제기됐다가 지난 5월 소취하

 

 

(2) BBK 의혹의 중심 (주)다스의 민사소송 취하

-지난 4월 캘리포니아주 법원 민사소송 케이스 취하
-지난 11월 연방법원 민사소송 케이스 소취하 승인

 

 

(3) BBK 의혹의 당사자 김경준-에리카 김의 수상한 움직임

-140억원 빅딜 통한 사전조율설…김경준 재송환 작전?
-의문의 한국행 통해 면죄부 획득 에리카 김의 노림수

 

 

(4) SM 엔터테인먼트 이수만 회장의 스튜디오 시티 저택구입 보도

-지난 5월 LA북쪽 스튜디오 시티 280만 달러 저택매입
-3만 스퀘어피트 초호화저택 전액 현찰매입 재력과시

 

 

(5) 삼성가 신세계그룹 이명희 회장 초호화별장 추적

-여고동창 현창애 씨 차명명의로 90년대 중반 매입
-라퀸타 지역 명문 골프장 PGA 웨스트에 초호화별장

 

 

(6) 가수 최성수-박영미 부부의 베버리힐스 이중생활

-지난 5월 비밀리에 베버리힐스 새거점 마련
-본지 상대 소송제기 등 어불성설 무리수 남발

 

 

(7) 한화그룹 김승연 회장의 차명은닉 재산

-실베스터 스탤론 별장 아직 소유하고 있는가?
-해외 계열사 통해 비자금 조성설…의문의 흔적들

 


(8) 무기중개상 김영완 "의문의 한국행"

-<선데이저널> 관측적중, 김영완 모종의 빅딜설
-김영완, 향후 정치권에 핵폭탄급 뇌관으로 부상

 

 

(9) 김영완 공모 대북송금 의혹 이익치 추적기사

-본인명의 베버리힐스 저택 매각‘돈세탁 완료(?)’
-박지원에게 건네진 150억원 비자금, 배달사고인가?

 

 

(10) 여의도 순복음교회 조용기 목사 일가 파문

-베데스다 대학교 이전계획 이면에 숨겨진 비밀은?
-조용기 목사 부인 김성혜 한세대 총장의 수상한 행보


 

 


<속보>“청와대 지시로 디도스 금전거래 덮었다 정치

손바닥으로 해를 가려봐야 손크기만큼의 그림자만 남을뿐.......... 

한겨레21 
입력 2011.12.17 18:10


 

    10·26 서울시장 보궐선거 당일 중앙선거관리위원회 누리집 디도스 공격에 대한 경찰의 수사 과정에서 청와대가 외압을 행사해 사건의 중요 사실을 은폐한 것으로 드러났다. 청와대는 특히 청와대 행정관 박아무개(38)씨가 선거 전날 저녁 디도스 공격 관련자들과 술자리를 함께 한 사실, 그리고 한나라당 관계자들과 해커들 사이에 대가성 돈거래가 있었던 사실을 공개하지 않도록 압력을 행사한 정황이 드러났다. 선관위 누리집 공격 사건을 경찰이 수사하는 과정에서 청와대가 나서 조직적으로 개입한 정황이 드러나 앞으로 파장이 예상된다.

 

  사정 당국의 고위 관계자는 “12월 초 최구식 한나라당 의원의 비서인 공아무개(27·구속)씨 검거 직후부터 경찰 최고 수뇌부와 청와대가 교감을 한 뒤 경찰 발표 문안을 확정했다”며 “그 과정에서 청와대 행정관이 범행이 비롯된 술자리에 참석했다는 사실, 그리고 디도스 공격을 둘러싼 돈거래 내역 두 가지를 공개하지 않기로 미리 협의했다”고 말했다.


 

  경찰은 이런 합의 내용에 따라 지난 12월9일 수사 결과를 발표하려고 했으나, 하루 앞선 8일 한 언론에서 청와대 행정관이 디도스 공격 관련자들과 술자리에 함께 한 내용을 폭로해 발표 내용을 일부 수정했다. 이에 따라 9일 경찰의 발표에서는 청와대 행정관의 술자리 참석 내용을 시인했지만, 한나라당 관계자들과 해커들 사이의 돈거래 사실은 공개하지 않았다. 디도스 공격 관련자들 사이의 돈거래 사실은 <한겨레21>이 지난 14일 아침 인터넷을 통해 단독 보도해 세상에 알려졌고, 경찰은 그날 오전 기자회견을 열어 이런 사실을 인정했다. 청와대와 경찰이 감추려고 했던 두 가지 주요 사실이 결국은 언론을 통해 모두 누설된 셈이다.

 

  사정 당국 관계자는 경찰과 청와대 쪽의 사전 교감 사실과 관련해 “지난 12월1일 경찰 최고위급 간부에게 ‘손발이 맞지 않아 못 해먹겠다’라는 전화가 청와대 정무수석실의 치안비서관으로부터 걸려오면서부터 본격적인 조율이 시작됐다”며 “청와대와 논의되지 않은 상황에서 공씨의 신원이 한나라당 의원 비서로 언론에 공개돼 당시 청와대는 패닉에 빠졌으며 이어질 경찰의 돌발행동을 우려해 비서관급에서 수석급으로 핫라인을 격상했다”고 말했다. 이런 발언은 민주당 쪽의 주장과도 정황이 맞아떨어진다. 민주당 정책위의장인 박영선 의원은 “(12월9일에 발표된) 디도스 수사 발표문이 조현오 경찰청장실에서 고쳐졌다”고 주장했다. 민주당의 또 다른 의원은 “조현오 경찰청장이 계좌 관련 정보의 공개를 반대했다”라고 말했다.


 

  청와대 쪽이 경찰의 수사에 본격적으로 개입하기 시작한 시점은, 청와대 행정관 박씨가 박희태 국회의장 비서이던 김씨와 식사를 함께했다는 내용을 경찰이 포착하고 이를 수사선상에 올린 뒤로 알려졌다. 또 12월4일 이후 경찰이 계좌 추적을 시작해 한나라당 관계자들의 돈거래와 관련한 단서를 잡은 것도 청와대가 직접 개입한 이유로 보인다. 경찰의 수사망이 청와대와 한나라당까지 좁혀온 데 대한 청와대의 반응으로 풀이된다.


 

  물론 경찰 내부에서도 돈거래를 비롯한 모든 사실을 공개하자는 수사 실무진의 의견도 만만치 않았던 것으로 전해졌다. 그러나 실무진도 상부의 의지를 거스를 수 없었다. 사정 당국의 한 관계자는 “청와대와 조율을 거친 결정을 번복할 수 있는 경찰 간부는 아무도 없었다”고 말했다.

<한겨레 21> 특별취재팀 han21@hani.co.kr



알기쉬운 BBK 사건 --- 듣기만했지 모르는 분들도 많더라구요 정치

1. K모씨는 BBK라는 투자금융회사를 설립한다. L씨는 이 회사의 동업자로 보인다. 

 

 

 

2. BBK는 두 방향에서 투자를 유치한다. 우선 (주)다스 라는 회사로부터 190억의 투자를 유치한다. 그런데 이 다스라는 회사는 L씨의 형제와 인척들이 운영하는 회사다. L씨가 재산을 기부했다는 C재단도 현재 이 회사의 소유주 중 하나다. 직접적으로 L씨는 이 회사와 관계없다. 그런데 이 190억은 도곡동의 땅을 매각한 대금이다. 이 땅의 소유주는 검찰 말에 따르면 “누군지 알 수 없는 제3자”다. 어쨌든 이 190억(회사 연간 순이익의 세배)을 다스는 단 30분 만에 BBK에 투자한다.

 

 

 

 

3. BBK는 일반 투자자들의 자금을 끌어 모은다. 이 돈이 300억에 달한다. 그럼 이제 이 돈을 굴려서 투자자들에게 이익을 분배해야 할텐데, K모씨는 이 돈을 싹 싸들고 미국으로 날라 버린다. 문제는 이렇게 사기를 치면 이 회사의 공동대표라고 알려진 L씨 역시 K씨와 함께 8년형을 받아야 한다는 것. 하지만 L씨가 이 회사 대표라는 증거는 본인 스스로 그렇게 외쳐대는 동영상 밖에 없으니 증거불충분으로 무죄다. 이 L씨의 위치가 아주 애매한데, (주)다스 관련자 입장에선 190억을 뜯긴 피해자고, BBK동업자 입장이라면 사기를 친 범죄자다. 그런데 L씨는 이도 저도 아니라 하니 이 190억은 대체 누구 돈인지 알길이 없다. 어쨌든 미국으로 튀었던 K씨는 여차 저차 한국에 송환되어 감옥으로 간다. 그런데 K씨는 미국으로 튀기 전에 (주)다스에게 50억을 곱게 반납 한다. 물론 챙긴 돈은 모든 검은돈의 종결지인 스위스 은행금고에 잘 담아 둔다.

 

 

 

<이제 재판이 시작된다. 돈을 뜯긴 두 주체, 즉 (주)다스와 일반 투자자들이다.>

 

 

 

4. (주) 다스는 먼저 받은 50억 외에 나머지 140억을 내놓으라는 소송을 걸었고, 당연히 일반 투자자들도 300억에 달하는 그들의 투자금을 내놓으라는 소송을 걸었다. 이 재판은 미국에서 이루어졌다. 그런데 재판결과 (주)다스는 패소하고, 개미는 승소했다. 즉 K씨는 다스에게는 140억을 토하지 않아도 되지만 일반 투자자들에게는 300억을 토해야 한다. 문제는 스위스 은행에는 300억 밖에 들어있지 않으니 알거지가 되는거다. 미국 법원은 당연히 스위스 은행에 있는 K씨 자산을 동결한다(즉 300억의 처분권을 박탈하고 미 정부가 압류했다가 투자자들에게 나누어 줄 조치를 취한다). 그런데 이런 조치가 이루어지기 위한 행정절차를 밟는 며칠의 틈을 타서 이 스위스 금고에 있던 300억중 140억이 (주) 다스에게 이체된다. 그러자 미국 법원이 완전 화가 난다. 이리하여 법원은 검찰에게 K씨와 (주)다스의 관계, 이면합의 여부 등등을 상세히 밝힐것을 요청한다. 그리고 마침내 7월 8일에 결과가 나왔는데, 느닷없이 한미정상회담 핑계를 대며 발표를 연기한다. 


한나라당 변천사 정치

 
 

진화론적 설명은 마땅치 않지만 전체적으론 진실이 담긴 듯

2011년 연말 랭킹 떴습니다. 정치

비겁하게 먹칠한건 머냐규?  잽혀갈까봐 무서워서리... ㅋㅋㅋ 

원시복음이라고 아십니까? jesus recovers us

바로 창세기 3장 15절의 말씀입니다.

 

우리의 조상 아담과 하와가 사단의 꿰임에 빠져 자신이 주인이 되는 즉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마음을 품고 선악과를 먹었을때(선악과는 이 세상의 선과 악의 판단의 주체가 자기 자신이 되겠다는 의미입니다. 즉 자신이 자기의 주인이 되어 자기만을 위해 살려는 마음이죠.) 그는 저주를 받아 하나님과 관계가 단절되게 됩니다.

 

그 결과 이 세상도 함께 저주를 받아 아담의 후손들은 모두 아담과 같은 마음 자기 자신이 자기의 주인이 되려는 마음으로 한 세상을 살아갑니다.

 

이것은 인간의 마음에 하나님의 마음인 사랑이 아닌 세상 욕심이 그들 마음을 지배하게 됨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바로 원죄입니다.

 

쉽게 말해 이 이후로 인류는 사단의 노예가 된 것입니다.

 

출애굽기에서 야곱의 후손들이 이집트의 노예생활을 한 것은 바로 이런 인간의 상태를 의미하구요.

 

하지만 하나님은 이런 인간을 위해 한가지 복음을 예비해 두셨습니다.

 

소위 원시복음이라고 하죠. 즉 용서와 화해와 회복의 복음입니다.

 

동시에 이것은 인간에 주신 하나님의 약속 즉 언약인 것이죠.

 

그런데 아담과 하와의 후손은 그 언약을 잃어버리고 모두 타락해버립니다.

 

그 결과 무시무시한 홍수심판이 있었죠.

 

그리고 다시 노아를 통해 인류의 역사가 다시 시작되었지만 니므롯은 다시는 홍수로는 심판하지 않으시겠다고 말하신 하나님의 약속(무지개를 보여주면서 다시는 홍수심판은 없을 것이라는)을 잃어버리고 바벨탑을 쌓게 됩니다.

 

이때 하나님이 언어를 혼란하게 해서 각 민족이 생기고 세상 각처에 사람들이 흩어지게 됩니다.

 

결국 하나님의 언약인 원시복음 즉 창세기 3장 15절의 말씀을 붙잡는 자는 죽음에서 다시 살아날 수 있게 됩니다.

 

"내가(하나님)이 너로(사단) 여자(인류)와 원수가 되고 네 후손도(적그리스도) 여자의 후손(예수 그리스도)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예수 그리스도)은 네 머리(사단의 권세)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사단)는 여자의 후손(예수 그리스도)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즉 하나님이 인류의 조상 아담과 하와를 에덴동산에서 나가게 하셨을때 그냥 나가게 하신것이 아니고 한가지 희망의 말씀 즉 복음을 주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우리 조상들은 그 복음을 잃어버렸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통해서 그리고 다윗을 통해서 그 약속의 복음을 이루어가기 위해 예비하시다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 말씀을 성취하셨습니다.

 

우리 조상이 자기 자식을 진정 사랑했다면 그 원시복음을 전했어야 하는데 우리는 그 원시복음을 수천녀간 잃어버렸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수많은 선교사들의 피의 희생으로 우리는 지금 다시 복음을 접할 수 있게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역사는 우리가 함부로 판단하기 어렵고 과거 원나라 명나라때에도 복음이 전해지기도 했던 것으로 볼때 현재의 우리들에게 복음이 전파되기 전에 복음을 듣지 못하고 죽은 많은 사람들에 대해 하나님은 합당하게 판단하실 것으로 믿습니다.)

 

그리고 복음이 우리나라 땅에 펴지면서 우리나라는 (영적 나아가 물적) 축복의 땅으로 변하게 된 것이 역사적 사실입니다.

 

하지만 현재 우리나라는 복음이 점점 힘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과거에는 가난했음에도서 오히려 사람들이 순수해서 쉽게 복음을 받아들였지면 이제 먹고 살만하자 서서히 사람들이 다시 과거 원죄의 본성이 극에 달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하나님의 주신 복음을 우리 후손들에게 제대로 전하는 것은 우리들의 책무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소흘히 하면 우리 후손들의 영적인 상태에 문제가 생기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드는 자에게는 반드시 구원이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born again 하셨습니까? jesus recovers us

have you been born again?

 

성경의 출애굽기와 여호수아기에 나오는 그 유명한 사건 애굽탈출을 위한 홍해기적사건, 광야사건, 요단강을 건너간 가나안 정복사건(최초의 여리고성 정복사건)은 죄된 인생이 구원에 이르는 과정의 연대기와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애굽의 노예생활은 우리 인류가 죄의 노예가 된 상태를 의미합니다.

 

애굽의 바로는 사단의 권세를 의미하구요.

 

그 사단의 권세로 부터 즉 부자유한 인류의 운명으로 부터 하나님이 건지시는 과정이 바로 출애굽기의 중요한 모티브입니다.

 

그리고 홍해사건은 하나님이 그 사단의 권세로부터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싸우신다는 것을 예표합니다.

 

우리 인류가 사단의 권세로부터 벗어날 길은 우리 인간의 힘으로 안됩니다. 바로가 열번의 재앙을 당하고 나서 이스라엘 민족을 풀어주었는데 그리고 나서도 다시 그들을 죽이기 위해 쫒아와서 이스라엘 민족이 사면초과에 빠졌을 때 그들을 구원해 줄 수 있는 분은 하나님 뿐이라는 이야기 입니다.

 

 즉 하나님의 은혜에서 비롯한 기적이 필요한 것이죠.

 

이것은 한 인생의 과정에서도 바로 이러한 과정 즉 중생의 시작과정이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애굽노예생활에 만족하고 그 당시 애굽에서 떠나지 않겠다고 했던 일부 사람들 처럼 사단의 권세에 있기를 원한다면 여러분은 중생하지 못하고 그렇게 살다 지옥에 가게 되어 있습니다.

 

사단의 억압이 극에 달해 하나님에 울부짓었을때(여러분의 인생에도 이런 때가 있을 겁니다. 여러분이 죽을 병에 결렸을때나 사랑하던 여자에게 배신을 당했을때 또는 주식하다 돈 다 읽고 한강가게 생겼을때를 생각해 보세여) 하나님은 그때 개입하십니다.

 
바로 그때가 여러분이 중생을 할 수 있는 절효의 기회인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홍해를 갈라서 여러분이 애굽땅에서 탈출하게 한 뒤에 하나님이 데려가는 곳은 바로 광야였습니다.

 

광야 이곳은 여러분이 애굽생활의 그 타성에서 진짜 중생을 위해 갖은 고난을 겪어야 할 시기입니다. 이것은 주로 마음의 영적 싸움과 관련 됩니다.

 

이 광야에서 무수한 사람들이 오히려 하나님을 원망하다가 죽어갔습니다.

 

중생은 그렇게 엄마가 아이를 잉태하는 것과 같은 산고를 수반하는 과정입니다.

 

광야 40년 훈련을 거치고 나서 여러분이 하나님과 관계에서 중생한 이후에 여러분은 드디어 가나안 땅에 들어가 사단의 권세를 무찌르는 하나님의 나라의 군대의 일원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인생에서 진정 born again 하셨습니까? 아니면 애굽노예생활의 타성에 그대로 있기를 여전히 원하십니까?

 

한번 주어진 인생에는 반드시 심판이 있습니다.

 

중생하지 않으면 여러분은 소망이 없습니다.

 

부디 하나님을 만나시길 기도해 봅니다


상계동 거지들의 왕초 문원순 목사 jesus recovers us

 

상계동 거지들의 왕초 문원순 목사


총탄 피하게 하신 하나님

경북 안동 농사꾼의 아들로 태어난 문원순 목사는 (예장통합 승리교회)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단돈 3만원을 들고 무작정 서울로 상경했다. 원래는 안동 땅부잣집 아들이었지만 큰형님이 다 날려버리고 아무것도 남지 않은 가난한 집으로 주저앉은 것이다.


문 목사는 종로2가에 있던 파고다 독서실을 한달 끊고 옛날 할리우드 극장 건물에 있던 대일학원에 아르바이트 학생으로 들어갔다. 아르바이트 학생은 수업료가 면제였던 터라 돈을 들이지 않고도 공부할 수 있었다. 잠은 독서실 바닥에 신문지 깔고 자기도 하고 의자에 앉아 책상에 엎드려 자기도 했다. 밥은 파고다 공원 밖에서 팔던 50원짜리 밥을 먹었는데 퍼석한 정부미 쌀에 콩나물 몇 가닥 들어가 있는 멀건 국, 잘게 썬 깍두기가 전부였다.  고되고 힘겨운 하루 하루를 살다가 돈이 들지 않는 육군사관학교 시험에 응시해 합격하게 됐다. 하지만 신입생 신원조사에서 8촌이 사상불순 죄가 있다하여 불합격처리 됐다.

 

그러다 재미 삼아 서울시 공무원 시험에 응시했는데 또 합격했다. 결국 공무원을 하면서 야간으로 명지대학교 법학과에 들어갔다. 문 목사는 법대에 가서 사법고시를 합격하고 판, 검사가 되어 나이가 들면 안동으로 내려가 변호사로 활동할 계획을 세웠다. 무료로 변호를 해주면서 민심을 얻어 국회의원이 되는 것이 1차 목표였고 2차 목표는 장관이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공무원 근무로 인해 고시공부를 하기 힘들었고 그러다 군대 갈 나이가 되자 ROTC 헌병장교로 입대해 3년을 더 복무했다. 당시에는 헌병장교 중에 3년 연장자는 중위에서 대위로 승진한 경우가 없었다. 하지만 문 목사가 한국최초로 대위로 승진하여 육군참모총장의 경호 중대장으로 갈 수 있었다. 하지만 '강원도 홍천 헌병 중대장으로 가라'는 하나님의 지시를 꿈으로 받고 나서 강원도로 근무지를 옮겼다. 두 달 후 또 꿈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죽고 다음 대통령으로 최규하씨가 당선될 것이다' 라고 하나님께서 가르쳐주셨다. 강원도에서 같이 근무하던 선임하사에게 꿈에서 들은 그대로 말했더니 믿지 않았다.

 

그 후 10.26사태와 12.12사태가 벌어지고 문 목사 대신 발령 받았던 육군참모총장 경호 중대장이 총탄 다섯 발을 맞았다. 그때 문 목사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살리시기 위해 넉 달 전에 강원도 홍천으로 보내심을 깨닫게 되었다.

주의 길로

문 목사는 81년도에 장로회신학대학원에 들어갔다. 이번에도 하나님께서 '목사 하라'고 인도하셨기 때문이다. 신대원를 졸업한 뒤 강원도 원주시 소초면 장양 4리에 교회를 개척했다. 처음 한가족으로 시작한 교회는 차츰 부흥되더니 2층짜리 교회를 지어야할 만큼 부흥되었다. 7년 뒤 '서울 상계동으로 가서 개척하라'는 하나님의 지시를 받았다. 여태까지 하나님께서는 요셉과 다니엘에게 하셨던 것처럼 문 목사에게 전부 꿈으로 보여주셔서 역사 하셨다.

그래서 문 목사는 조금도 고민하지 않고 상계동으로 가서 교회를 개척했다. 상가 16평 짜리 사글세로 교회를 얻고 노모까지 합쳐 모두 6명의 식구가 24평 짜리 아파트를 얻어 살았다. 그때 하나님께서 '이 땅을 사라'고 하셔서 10억원 빗을 내 지금의 땅을 구입했다. 문 목사는 11년 동안 빗을 갚으면서 얼마나 힘들었던지 하나님께 다 갚을 수 있도록 도와주시면 교회에서 한 달에 1천만원 이상 씩 선교구제를 하겠다고 본 교인들과 함께 서원 했다. 그래서 2001년 7월부터 지금까지 한번도 빼먹지 않고 한 달에 1천만원 이상 씩 선교구제를 하고 있다.


거지들의 왕초

올 6월엔 승리교회가 설립 21주년을 맞이했다. 처음 교회 부지를 주셨을 때 하나님께서는 두 가지의 사명을 주셨다. 첫째는 가난한 자를 기억하라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승리교회 성도들 중 삼분의 일은 영세민 임대주택에 살고 있다. 나머지 성도들도 넉넉지 않은 형편이지만 마음만은 풍족하고 늘 감사가 넘친다.


또 승리교회는 사랑이 넘치는 교회다. 부유한 자나 학식 있는 자가 없으니 빈부귀천의 갈등과 유, 무식의 차별이 없다. 오히려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무릎꿇을 줄 알며 목사 귀한 줄 안다. 그래서 문 목사는 "목회할 맛이 납니다" 라고 고백한다. 목사에게 순종하며 목사 말이라면 아멘으로 화답하고 협조하니 신바람이 절로 나는 것이다.


또 두 번째 사명은 장애인들을 따뜻하게 대해주라는 것이다. 그래서 문 목사는 발달장애(저능) 교우들을 모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그림성경 공부책으로 교육하고 있다. 또 1대 1 교육으로 더 쉽게 이해를 돕고 있다.


승리교회는 1200명의 극빈자들에게 주일 예배 후 식사를 대접하고 있으며 2001년 9월부터 지금까지 9년째 하고 있다. 남들은 그 돈 모아서 성전 건축이나 하라고 말하지만 하나님께 서원한 것이니 무슨 일이 있어도 지킬 것이라는 문 목사의 굳은 신념 때문에 번듯한 성전은 갖추어져 있지 않지만 조립식 성전에서도 성령의 역사와 성도들간의 사랑이 뜨겁게 일어난다. 가끔 성도들도 몇 천명 모이고 규모도 큰 교회에서 청빙이 들어오기도 한다. 그럴 때마다 기도하는데 '여기서 가난한 자들과 함께 하는 것이 더 좋다' 고 응답해 주신다.


가끔은 너무 가난한 사람, 병든 사람, 불구의 몸을 가진 사람들이 하나님께 더 많이 드리려고 노력할 때 감격스럽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안타까움도 느낀다. 이 땅에 소망을 두지 않고 천국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그들의 삶에 문 목사도 덩달아 새 힘이 생긴다.


그래서 일까 2004년 12월 8일 국민일보에서 '자랑스러운 목회자 대상'을 수상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인지도 모른다.


'하나님을 만난 체험' 간증집 출간

문 목사는 하나님이 얼마나 위대한가를 알리기 위해 간증집 '하나님을 만난 체험'을 출간했다. 그동안 살아온 과정과 결과 속에서 하나님께서 얼마나 세세하게 보살피고 계획된 삶으로 이끄셨는지 고백한 간증집이다.


문 목사는 대대로 불교를 믿으며 온갖 잡신을 섬기는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러다 문 목사가 4살이 되던 해 석달 이상이나 많이 아팠다고 한다. 도저히 살 가망이 없었다. 그러다 이웃집 할머니가 10리 밖 장터에 있는 교회에 가면 나을 수도 있다고 말하자 지푸라기라도 잡겠다는 심정으로 교회에 갔다. 어린 문 목사는 그곳 장터 교회 성도들에게 기도를 받고 난 뒤 기적같이 완치되었고 부모님은 그때부터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다

문 목사는 사실 23살 때까지는 습관적으로 교회 다니다가 믿음 좋은 장로님의 딸과 연애하면서 사랑하는 사람이 매일 성경 읽자고 권유하니 읽지 않을 수 없어서 매일 성경을 읽기 시작했다. 만날 때마다 성경을 안 읽고 가면 차일까봐 억지로 읽었던 것이다. 하지만 억지로 읽었던 말씀을 통해 문 목사는 점점 변화되고 성령을 체험했다. 그 날로부터 지금까지 언제나 보호하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간증집 '하나님을 만난 체험'에 고스란히 녹아있다.


목양관 곳곳에 붙어있는 문 목사의 자작시를 읽다가 언제 또 책을 출판할지 묻자 문 목사는 '하나님을 만난 체험' 이 한 권의 책으로 끝낼 것이라고 밝힌다. 오직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드러내며 영광 돌린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지 다른 꼬리표로 이미지를 분산하고 싶지 않다는 것이 문 목사의 깊은 뜻이다.


복음 들고 갈 때 젊은 시절 꿈 이뤄져

다른 부흥사의 집회보다 문 목사의 부흥회는 결신의 역사가 많이 일어난다. 예수를 믿지 않았던 사람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오고 성도들은 새로워지는 역사가 충만하다. 이 때문에 문 목사는 부흥회 다니는 것을 참 즐거워한다.


또 하나 문 목사가 즐거워하는 것은 예전에 법학을 공부했던 경험을 살려 예장통합 총회에서 법과 관련된 업무를 담당하는 것이다. 몇 해전에는 헌법위원장을 지냈고 지금은 헌법개정위원회 서기와 헌법위원회 전문위원직을 감당해오고 있다. 또 기독교계 연합사업의 역할을 위해 한국기독교총연합회의 감사로 충성하고 있다. 인간의 눈으로 돌이켜보면 법대에 들어간 것이 시간낭비고 인생의 시행착오로 보이지만 하나님은 법학 공부를 통해 사용해 주시니 감사할 따름이라고 문 목사는 고백한다.


하나님께서는 문 목사가 예전 청년시절에 품었던 세상 정치는 못하게 하셨지만 더 좋은 복음 들고 청와대와 정당, 육군사관학교에서 설교할 수 있도록 인도하시니 가고 싶었던 곳은 다 다녀온 것이나 마찬가지다. 세상에서 문 목사 자신의 꿈은 실현되지 않아도 하나님 안에서는 실현되는 것을 볼 때 새삼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느낀다.


목숨 다하는 날까지 쉬지 않고 달려갈 것

문 목사는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양무리를 어떻게 잘 돌볼 것인가와 부흥집회를 통해 복음 증거하는 일, 또 기독교계의 올바른 정치를 위해 쓰임 받는 일에 기도하며 더욱 정진하고 있다. 문원순 목사는 두 눈을 지긋이 감고 "목회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무조건 감사합니다. 나 같은 죄인에게 귀한 직분 주신 것이 어찌나 감사한지…. 눈 뜰 때부터 잠자리에 들 때까지 감사만 합니다" 라고 뜨겁게 고백한다. 또 오직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야지 굳게 다짐한다.


경제발전 민주주의는 박정희 김대중 아니어도 가능했다 박정희

다만 그 기여도는 평가할 수 있다

 

그런데 아래 내가 링크했던 글을 봐라

 

경제발전에서 박정희 점수는 다른 대통령에 비해 떨어진다. 그리고 독재를 처 했잖아

 

민주주의에서 그나마 김대중이 상대적으로 제일 앞서지. 경제에서도 그나마 밀리지 않고

 

도대체 김대중이 나라재산 팔아먹었다는 소릴 어떻게 할 수 있지

 

외인이 한국주식에 투자한게 나라 팔아먹은거냐? 정작 주식시장을 개방한 건 김영삼인데.

 

그리고 도대체 한국 공기업중에 외국인 손에 드렁간게 머가 있는데?

 

정말 말도 안되는 가짢은 소릴 하고 있고 거기에 추천 누지르는 개쌍도 문딩이 수꼴 종자 새끼들 참으로 가관이다(여기서 경상도분들과 개쌍도 수꼴종자는 구분해 주세요...그냥 멘트상 난리는 표현이니)

 

아이엠에프때 코스닥 붐만 해도 그래.

 

아이티 발전의 시초가 사실 그거잖아. 원래 주식판은 어느나라든 나 그런 버블이 있다. 사실 아이엠에프 당시 한국의 코스닥 버블도 미국의 나스닥 버블에 기초해 있는 거고

 

정말 이새끼들 모든게 김대중 ??문이라는 밥상머리 교육에서 못 벗어 났구나

 

씨댕이들이 말야

 

인간 백정 박정희 남로당 출신 빨갱이를 숭상하지 않나? 엄연히 대한민국은 자유민주국가다. 김일성 김정일 공산국가 아니고

 

그런데 빨갱이 출신에 혈서까지 쓰면 일본군육사를 해처먹은 개정희를 민족과 국가의 영웅이라고?

 

이런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 어디있냐?

 

해도 어지간히 해야 어느정도 이해를 하지

 

누누히 말했다 박정희가 유일하게 내놓을 수 있는 경제성적이라는 것도 그 당시 같이 경쟁하던 대만 싱가폴 홍콩등과 비교하면 형편없고 국내 대통령 순위에서도 밀린다는 거

 

그런데 민주주의 순위에서 볼까? 물론 상대평가다. 김영삼하고 김대중하고 민주주의 경쟁하다고 독쟁정권과 3당합당했던 김영삼은 솔직히 내세울게 없지. 그나마 그런 김영삼 버리고 김대중 따라갔던 노무현이라면 모를까

 

경제발전 민주주의를 가지고 냉정히 평가해 보란 말이다.

 

박정희가 민족과 국가의 영웅인지

 

오히려 난 낮에는 막걸리 처 먹으면서 생쇼하고 저녁에는 여자 대학생끼고 시바스 리걸을 빨았던 박정희를 권총으로 처 죽인 김재규야 말로 민족의 진정한 영웅이라고 본다

 

왜냐고

 

만약 그때 독재자 박정희가 디지지 않았으면 한국은 북한꼴과 비슷한 꼬라지가 될 가능성이 높거든.

 

1970년까지 북한이 우리보다 더 잘살거 아냐? 바로 박정희 집권시절이다. 그 당시 박정희는 경제성적에서 김일성에게도 지고 있었다. 알간?

 

그러네 정작 박정희가 되지고 나서 한국의 경제는 욱일승천했고 북한의 경제는 김일성이 안디지고 계속 독재하자 나날이 추락했단다.

 

하여튼 민족을 구한 진정한 영웅은 누누히 말하지만 김재규 열사랑께

(펌)


추가 1


유엔이 발표한 통계를 보면 1970년대 중반 까지 일인당 국민소득이 북한이 남한 보다 더 높았다 북한이 사회주의 체제임을 감안 하면 소수 재벌을 제외한 일반국민들의 소득수준을 비교하면 거의 서너배 차이는 났다고 본다
박정희가 총맞은 1979년 당시에도 일인당 국민소득은 일천불 정도 였고 외채는 300억불 정도 되어 경제상황은 위기 일보직전 이었다 그당시 필리핀이나 태국도 한국 보다 잘살았다
박정희가 경제를 살렸다는건 친일 찌라신인 조중동이 날조 한거고 오늘날 박정희 광신도가 많은것은 조중동이 날조한 박정희 신화를 고령에다 저학력이 대부분인 못배운 노인네들이 무비판적으로 받아 들인 결과다
한국사회에 그나마 두꺼운 중간층이 형성이 된건 1987년 노동자 대투쟁이후 노조가 결성되고 실질임금이 올라 일반국민들이 그나마 먹고 살만한 세상이 되었고 6.10으로 대통령직선제를 쟁취후 민주의식이 고취되어 시민사회가 형성된 것이다
그렇게 보면 박정희가 총맞은 것은 한국으로 보면 굉장한 행운이다
박정희의 철권통치가 계속 되었다면 성장은 한계에 다다르고 쿠데타는 쿠데타를 부르고 지금의 태국이나 필리핀 정도 되지 않았나 예상해 본다
김재규의사는 안중근의사보다도 한국사회에 크나큰 영향을 끼쳤다
역사의 흐름을 바꾸어 놓은 위대한 혁명가다 박정희 광신도인 저학력 노친들이나 부모잘만나거나 부동산 한탕으로 부자된 졸부들이 다 저세상으로 가고난후에는 역사는 다시 쓰여 질것이다
김재규는 혁명가다 언젠가는 다시 평가 받으리라 확신 한다 


추가 2


http://tesada.egloos.com/3174475
박정희 경제 평가 2 - 불로소득편, 물가상승률, 무역적자


김대중 전두환 박정희 김영삼 경제분야 통계비교 박정희

김대중 전두환 박정희 김영삼 경제분야 통계비교



박정희 정권 (18년집권)



포항제철
중화학 공업 육성
18년간 국민소득..................(82달러에서 1.636달러 만듬)
.
세계 4위 외채국 만듬..............역대최고..............(김대중 정부 1200억 달러 세계4위 외환 보유국)
물가는 평균 년16.5%상승........역대최고...........(노무현 정부 평균 3~4% 상승)
연평균 실질 성장률 8.5%.........역대2위...........(전두환 정권 9.3%)
연평균 땅값 상승률 33.1%........역대최고.......(김대중 정부 -0.2%)
.
땅값 상승에 따른 불로소득 326 조원........................(김대중 정부 -18 조원)
국내 총생산 대비 땅값 총액 12 배..........역대최고......(김대중 정부 2.5 배)

.
인플레이션률 14.2%...............역대최고...............(노무현 정부 3.6%)
기업의 설비투자율 11.7%........역대4위..............(노태우 정부 14.5%)
노동 소득 분배률 43.7%........역대최하위..........(김영삼 정부 60.4%)
.
1979년말 실업률 17.9%...........역대최고......(김대중 정부 3.1%)
18년간 -233억달러 무역적자....................(김대중 정부 846억달러흑자)

.
1979년 GNP 마이너스로 돌아섬.....외환위기.국가부도.....(김영삼 정부. 박정희 정권이 유일함)
.

성남폭동사건 그리고 임기말 국가 경제 몰락과 부산마산 항쟁
큰딸 박근혜에게 1조 200억(시민단체추정)에 달하는 정수장학회를 물려줌.






전두환 정권 (7년집권)



삼성반도체
중산층육성
7년동안 최초의 흑자 대통령(+8억달러 무역흑자)
세계 4위이던 외채를 30억 달러까지 줄임
.
연평균 실질 성장률 9.3%.....역대최고
연평균 땅값 상승률 14.9%......역대3위
땅값상승 불로소득 368조원.................(참고로 노태우 정부 926조원...역대최고)
국내 총생산 대비 땅값 총액 7.2 배
.
정치자금 2000억 이상을 은닉함






김영삼 정부 (5년집권)



한보제철
삼성자동차
국민소득 최초 1만달러 달성..........(국가부도후 7.355달러 까지 하락함)
.
중산층 육성 그리고 중산층의 몰락
.
임기말 금융거래 불량자(신불자) 200만
연평균 땅값 상승률 -1.2%
땅값 상승 불로소득 -108조원
국내 총생산 대비 땅값 총액 4.1 배
기업의 설비투자율 13.5%..........역대3위......(노태우 정부 14.5%)

노동 소득 분배률 60.4%..........역대최고.....(박정희 정권 43.7%)
.
1997년 GNP가 마이너스로 돌아섬......역대두번째......(박정희 정권 1979년 최초)
.
민국 금고에 38억 달러를 남기고 물러남.
국가신용도 평균 7단계 하락 최대 10단계 하락
.
1997.12.3 IMF와 불공정한(우리기업 헐값매각) "이면계약서"를 작성함.
외국인 주식 매입한도 단체 27% ㅡㅡ>55% 개인 5% ㅡㅡ>50% 확대 열어줌.
파견 근로제 도입 그리고 정리해고 제한 완화
.
IMF와의 잘못된 "이면계약서"는 결국 양극화의 씨앗이며 뿌리가 됨.
.
아들이 비리 연루되 구속됨






김대중 정부 (5년집권)



외환위기 극복...................................(그러나 양극화까지는 극복 못함)
한류 문화산업 육성..............................(2004년 춘사영화제 공로상 수상)
디지탈 IT 지식정보화강국 육성................(각종지표 세계1~3강)
BK21- NT.BT 미래과학기술 육성...............(빛과 그림자..황우석 파동의 후유증을 남김)
한국 경제의 선진화......최초.최고.................(세계 100대 기업에 최초로 삼성.현대.엘지 입성시킴)
.
국가부도후 추락한 국민소득을 7,355 달러에서 12,646 달러로 상승시킴
.
순채권국 만듬.............건국이후최초.............(1999년 9월부로 순채권국)
세계 국가 경쟁력...........역대최고................(41위 에서 28위까지 급상승)
세계 과학기술 경쟁력.......역대최고............(28위 에서 12위까지 급상승)
임기 5년 연속 무역 흑자.....최초.최고.......846억 달러.
.
세계 4위 1200억 달러 외환 보유국..........역대최고...........(국가부도 걱정없는 나라 만듬)
추락한 신용도 평균 7단계 최대 10단계 상승....역대최고.......(남북정상회담 이후..급상승)
.
연평균 실질 성장률 6.8%..................(전두환 정권 9.3%)
연평균 땅값 상승률 -0.2%...............(박정희 정권 33.1%)
땅값상승 불로소득 -18조원............(노태우 정부 926조원)
.
국내총생산 대비 땅값 총액 2.5 배......역대최하위......(박정희 정권 12배)
기업의 설비투자율 10.6%...............역대5위..........(노태우 정부 14.5%)
노동 소득 분배률 59.5%...............역대2위..........(박정희 정권 43.7%)
.
5년간 846억달러 무역흑자.........역대최고.......(박정희 18년간 -233억달러 적자)
2002년 말 실업률 3.1%.............................(박정희 정권 말 17.9%)

.
5년동안 신불자 65만 증가......................(김영삼정부 97년말 200만 보다 65만 증가함)

아들들이 비리에 연루 구속되고 임기말 레임덕에 시달림

.

.
"" 박정희식 빚더미 3류 경제를 주장하던 3류재벌 대우 김우중은 망했고..""

.
"" 김대중의 뼈를 깍는 구조조정을 받아들인 3류재벌 삼성. 현대. 엘지는..""

.
"" 전문 대기업으로 변신 세계100대 기업으로 거듭 태어났다.""

.

.
(역대 대통령 경제 성적표)

이승만 ''''12년집권 -15억$적자 67 -> 82
박정희 ''''18년집권 - 233억$적자 82 -> 1,636

.

전두환 ''''''7년집권 + 8억$최초흑자 1,749 -> 4,268
노태우 ''''''5년집권 -132억$적자 4,268 -> 7,811

.

김영삼 ''''''5년집권 -366억$적자 7,811 -> 7,355
김대중 ''''''5년집권 +846억$흑자 7,355 ->12,646

(대한민국 통계청 공식기록)

.
"" 통계청 기록과 경제학과 교수들이 발표한 논문 통계보고 저도 놀랬습니다. ""
"" 경제학과 교수들이 매기는 점수보면 김대중>전두환>노태우>박정희.김영삼 순입니다.""



.(펌)



1960년대에서부터 2006년까지 한국의 gdp순위 변화 박정희

1960년 세계 GDP 순위중에서 동북아시아 주요국.

4위 중국 GDP 6백 1십억달러.
5위 일본 GDP 4백 4십억달러.
19위 필리핀 GDP 6십 9억달러.
29위 한국 GDP 3십 9억달러.
42위 홍콩 GDP 1십 3억달러.
57위 싱가포르 GDP 6억 4천만달러.


1965년 세계 GDP 순위중에서 동북아시아 주요국.

4위 일본 GDP 9백억달러.
5위 중국 GDP 6백 9십억달러.
27위 필리핀 GDP 6십억달러.
39위 한국 GDP 3십억달러.
44위 홍콩 GDP 2십 4억달러.
60위 싱가포르 GDP 9억 6천만달러.


1970년 세계 GDP 순위중에서 동북아시아 주요국.

2위 일본 GDP 2천억달러.
6위 중국 GDP 9백 1십억달러.
32위 한국 GDP 8십 9억달러.
38위 필리핀 GDP 6십 6억달러.
50위 홍콩 GDP 3십 8억달러.
59위 싱가포르 GDP 1십 8억달러.


1975년 세계 GDP 순위중에서 동북아시아 주요국.

2위 일본 GDP 5천억달러.
8위 중국 GDP 1천 6백억달러.
31위 한국 GDP 2백 1십억달러.
37위 필리핀 GDP 1백 5십억달러.
48위 홍콩 GDP 1백억달러.
56위 싱가포르 GDP 5십 6억달러.


1980년 세계 GDP 순위중에서 동북아시아 주요국.

2위 일본 GDP 1조달러.
11위 중국 GDP 1천 9백억달러.
28위 한국 GDP 6백 3십억달러.
36위 필리핀 GDP 3백 2십억달러.
40위 홍콩 GDP 2백 8십억달러.
58위 싱가포르 GDP 1백 2십억달러.


1987년 세계 GDP 순위중에서 동북아시아 주요국.

2위 일본 GDP 2조 4천억달러.
11위 중국 GDP 2천 7백억달러.
18위 한국 GDP 1천 4백억달러.
34위 홍콩 GDP 5백억달러.
45위 필리핀 GDP 3백 3십억달러.
59위 싱가포르 GDP 2백억달러.


1992년 세계 GDP 순위중에서 동북아시아 주요국.

2위 일본 GDP 3조 7천 6백억달러.
10위 중국 GDP 4천 2백억달러.
14위 한국 GDP 3천 3백억달러.
30위 홍콩 GDP 1천 4십억달러.
39위 필리핀 GDP 5백 2십억달러.
40위 싱가포르 GDP 5백억달러.


1998년 세계 GDP 순위중에서 동북아시아 주요국..

2위 일본 GDP 3조 8천억달러.
7위 중국 GDP 1조달러.
15위 한국 GDP 3천 4백억달러.
25위 홍콩 GDP 1천 6백 6십억달러.
40위 싱가포르 GDP 8백 2십억달러.
43위 필리핀 GDP 6백 5십억달러.


2002년 세계 GDP 순위 중에서 동북아시아 주요국..

2위 일본 GDP 3조 9천억달러.
6위 중국 GDP 1조 4천 5백억달러.
11위 한국 GDP 5천 4백억달러.
28위 홍콩 GDP 1천 6백억달러.
40위 싱가포르 8백 8십억달러.
43위 필리핀 GDP 7백 6십억달러.


2006년 세계 GDP 순위 중에서 동북아시아 주요국..

2위 일본 GDP 4조 3천억달러.
4위 중국 GDP 2조 9천억달러.
13위 한국 GDP 8천 9백억달러.
34위 홍콩 GDP 1천 9백억달러.
40위 싱가포르 1천 3백억달러.
43위 필리핀 GDP 1천 2백억달러.

자료출처
http://www.nationmaster.com/time.php?stat=eco_gdp-economy-gdp&country=ks-korea-south
이 주소의 사이트로 가서 1960년도를 클릭하면 그해의 세계 GDP순위가 쭉 나옴..



위 표를 보면 아시겠지만 박정희 시기부터 전두환시기까지 한국의 세계 gdp순위는 30위권이었습니다.

 

이게 극적으로 변화된 게 87년 민주화운동이후이구여

 

그때 처음 18위가 됩니다.

 

그리고 김대중집권말기 11위 노무현 집권말기 13위를 기록합니다.

 

이거 보면 누가 진짜 경제대통령인지 답이 나올것입니다




박정희와 작전주(꾸준하고 지속적인 경제성장을 위해서는 민주화가 필수적이다.) 박정희

박정희 당시 지금으로 치면 아이엠에프와 같은 게 8번인가 있었다는데

 

지금으로 치면 김영삼이 8번집권한건데

 

박정희가 경제를 잘했다는 것은 진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습니다

 

다분히 누군가의 작전세력에 의해 조작된 것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입니다

 

주식으로 치면 일명 작전주 냄새가 좀 난다는 할 수 있습니다.

 

소위 개잡주인데 이런저런 뉴스를 띄어서(자원개발 줄기세포 등등) 개미들 털어먹는 그런 것 말입니다.

 

저같은 투자자는 절대로  개잡주는 취급하지 않거든요.

 

한국의 경제발전이 진정 가능했던 것은 우선 물가가 안정된 상태에서 수출이 잘되는 그런 구조에서 가능했습니다.

 

국민이 그런 상태에서 더 열심히 일하고 희망을 가지기 때문입니다.

 

80년대 한국은 처음으로 민주화운동과 노동운동이 싹을 텃고 그 뿌리는 5.18에 있다는 거죠

 

그런 측면에서 한국의 경제발전의 일등공신은 어쩌면 5.18과 같은 민주화운동일지 모릅니다. 5.18의 영향때문에 87년 직선제 개헌을 위한 시민혁명도 가능했구요

 

제가 알기론 영국의 산업혁명도 사실은 그 전에 정치혁명 즉 청교도혁명이나 명예혁명이 먼저 있었거든요.

 

정치적 혁명이 일어나서 국민들이 먼가 주인의식이 있을때 그때 경제는 급성장하는 거죠. 경제가 성장한 만큼 그게 자기것이 되니깐요.

 

물론 80년대 3저호황이라는 아주 좋은 경제상황이 있었습니다. 즉 약간의 운도 따랐다는 것이져

 

다 아시다시피 3저호황이라는 것은 미국과 일본의 파워게임에서 일본이 환율을 절상해주는 프라자합의에 기원합니다.

 

그 결과 한국의 공산품이 미국시장에서 엄청난 가격경쟁력을 가지게 된 것이죠

 

그때 엑셀이라는 차가 무지 팔렸더랬습니다.

 

그 결과 한국의 주가 역시 gdp대비 3배의 폭등을 기록했구요.

 

물론 그 뒤 한국도 극심한 부동산 투기에 잠재성장력일 갈가먹었습니다.

 

그러면서 90년대 김영삼집권시절 준비되지 않은 개방정책 즉 세계화정책으로 나라가 환란에 휩쓸린것이구요.(그 당시 너무 빨리 OECD에 가입할려고 했던 것이 화근이었습니다.)

 

혹자는 경제성장이 있어야 민주화가 가능하다고 하는데

 

오히려 전 반대라고 봅니다

 

싱가폴가 같은 소국이 아닌 인구 몇 천만 단위의 나라에서 "꾸준하고 지속적인" 경제성장을 하기 위해서는 어쩌면 민주화가 필수적일 주 모릅니다. 민주화의 의미는 국민이 큰 소리를 칠 수 있고 자기 몫에 대해 말을 할 수 있다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꾸준하고 지속적인 경제성장이죠. 일시적인 경제성장은 북한의 김일성도 했던 거잖아요.

 

문제는 북한의 독재체제는 3대에 걸쳐 유지되면서 그 경제성장의 열매가 모든 국민에게 돌아가지 못하면서 망쪼가 들고 결국 경제도 개판이 되었다고 보거든요.

 

다시 말하지만

 

꾸준하고 지속적인 경제성장을 위해서는 민주화가 필수적이어야 한다고 봅니다.

 

(한가지 더 추가하자면 탈종교화도 매우 중요하다고 봅니다. 자본주의가 성장한 나라를 보면 보두 종교개혁을 통해 자본주의 자체를 긍정적으로 여기게 하는 의식화작업이 필수적이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카톨릭은 극빈사상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한 반면 프로테스탄트는 오히려 청빈사상을 통해 부자가 되는 것에 대한 거부감을 없앴습니다. 나중에는 기독교 자차에 대한 반대까지 나아가는 그런 양태를 보였습니다. 그 결과 유럽의 자본주의가 사실은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사진)경험 많은여자와 없는여자의 차이

욱기네요 ㅋ


진정한 역세권


그리스가 망한 이유 경제

 

그리스의 회계사와 기자조차 인지하는 문제임에도,

미국을 비롯한 유럽 깡패 3인방은 조세형평성이 문제가 아니라,

엉뚱하게도 과다복지에 원인이 있다고 뻘소리를 헌다.

 

갸들이나 우리나 항상 있는 놈은 없는 놈 탓이라고 하는게 주된 논리고,

그게 힘이 있는 놈이 주장하니께 목소리가 큰게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여.

돈많은 놈은 세금 포탈에, 없는 놈만 꼬박꼬박 낸다.

그런데 보수언론들은 과도한 복지가 우리의 미래를 좀먹는다고 허지.

미래를 좀 먹는 색기가 누구인지 실상을 까야한다.

 

비정상이 정상을 비웃는게 당연한 세상은 결국 두 가지로 종결된다.

 

혁명, 아니면 전쟁.

 

1950년 6.25 이래 모든게 다 망가지고 부숴져야

60~80년대에 발흥한 정주영같은 신흥갑부가 나오는 토양이 형성된다.

 

이미 결정된 것이 세습되는 지금 세상이 영원할 것 같지만,

글쎄...

그 답은 우리 지난 역사를 돌아보면 된다.

100년 부자 있던가.

100년 평화 있던가.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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